종교적 체험과 생태적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철학자 — 포덤 대학교 크리스티나 그슈반트너 교수
[399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크리스티나 그슈반트너(Christina Gschwandtner)는 독일 태생으로, 현재 미국 뉴욕 포덤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존하는 유럽 대륙종교철학 연구자들 가운데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끊임없이 결과물을 내는 철학자다. 미국 드폴 대학교에서 장-뤽 마리옹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영국 더럼 대학교 신학부에서 또 하나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Degrees of Givenness: On Saturation in Jean-Luc Marion》(주어짐의 정도: 장-뤽 마리옹에게서 포화에 관하여), 《Postmodern Apologetics?》(포스트모던 변증학?), 《Marion and Theology》(마리옹과 신학), 《Reading Religious Ritual with Ricoeur》(리쾨르와 더불어 종교적 의례를 읽어내기), 《Welcoming Finitude: Toward a Phenomenology of Orthodox Liturgy》(유한성을 맞이하기: 정교회 전례의 현상학을 향하여) 등이 있고, 장-뤽 마리옹, 미셸 앙리 등 프랑스 현상학 대가들의 책 다수를 영어로 번역했다. 금번에 인터뷰한 철학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정교회 신앙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현상학과 해석학을 경유하여 전례와 종교적 경험의 의미를 탐구하면서도, 생태신학적 주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인터뷰는 2023년 5월 5일 포덤 대학교 콜린스 홀 철학과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다문화교회 사역을 하는 박예일 목사가 안내와 통역 등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슈반트너 교수는 현대 기술과 다소간 거리를 두는 삶을 사는 탓에 줌(Zoom) 등을 통한 실시간 회의 등도 별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온라인에 본인의 사진이 등재되는 것도 원하지 않아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아쉽지만, 본인의 뜻을 존중하여 사진 촬영은 하지 않았으며, 어렵게 약속을 잡아 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또한 사적 경험보다 학문적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는 그슈반트너 교수의 뜻을 존중하여 주로 학술적인 쟁점을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비록, 그녀의 개인적 경험에 대해 많은 것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슈반트너 교수는 다른 누구보다도 질문에 성심성의껏 열정적으로 답해주었다. 독자들은 현상학과 해석학을 통해 종교적 체험을 다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한 정교회 신앙의 매력이 무엇이며, 전례의 경험이 어떻게 생태적 삶과 연결될 수 있는지 등 흥미롭고 참신한 주제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우선, 선생님의 철학적 훈련과 관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현재 최고의 종교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장-뤽 마리옹의 현상학을 비교적 일찍 연구하고 영어권에 소개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프랑스 현상학과 마리옹에 관심을 두게 되셨는지요?
제가 드폴 대학교 철학 박사과정에 진학했을 무렵은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이었고,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종교를 다룰 때는 주로 분석철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때였지요. 이는 기본적으로 분석철학이 대륙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1) 드폴 대학교 철학과는 미국 내에서 가장 유럽 대륙철학에 친화적이었는데, 그럼에도 종교가 하던 일은 학술적으로 미학이나 정신분석에서 할 수 있다는 정서가 있었고, 종교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팽배했지요. 그렇지만 저는 언제나 종교에 관심을 두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던 것 같아요. 레비나스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었는데, 당시 선생님들은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다뤄보라고 추천했습니다. 마리옹을 공부한 것도 순전히 제 선택은 아니었지요. 제 지도교수님인 마이클 나스(Michael Naas)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데리다 전문가입니다. 그분의 훌륭한 조언을 따라 주제를 정했지요. 마리옹에 대해 쓰기로 했을 때, 당시 마리옹은 시카고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어서 몇몇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마리옹은 주로 현상학에 관한 수업을 했고,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고, 설명도 매우 잘하셨죠. 여러 외국어도 할 줄 아셨고요. 이후 저는 마리옹에 대한 수업을 열기도 했고, 그에 대해 글을 썼는데요. 철학 관련해서는 제가 최초로 마리옹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썼을 겁니다. 그에 대해 글을 쓰는 일 자체가 학계에서는 새로운 시도였죠. 졸업 후 취업 시장에 나갔을 때, 마리옹이 가톨릭 철학자처럼 보였기에 가톨릭계 학교에서 제가 다룬 주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물론, 마리옹은 자신을 가톨릭 철학자로 생각하지 않겠지만요. 아무튼 가톨릭 관련 철학과에는 종교적 경험과 관련한 주제를 다루는 마리옹에게 관심을 가진 분이 많아서, 마리옹에 관련해 글을 쓴 것은 실제로 제게 큰 혜택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마리옹과 현상학을 공부했는데, 돌이켜보면 원래 의도했던 방향은 아니었고, 그 점이 제게도 흥미롭지요.
- 선생님의 책 가운데 《Postmodern Apologetics?: Arguments for God in Contemporary Philosophy》(포스트모던 변증학?: 현대철학에서 신에 대한 논증)가 있습니다. 그 책에서 우리 시대 철학자들, 특히 유럽 대륙철학 대가들의 신-담론(God-talk)을 소개하시면서 변증이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혹자들에게는 이것이 일종의 도전이나 혼동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흔히 변증은 서양철학에서 형이상학적 사유에 입각해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하는 것으로 많이 이루어지니까요. 이와 다르게 포스트모던 변증에서 선생님이 의도하신 바는 무엇입니까?
실은 그 제목이 저를 좀 곤경에 빠뜨렸어요. 아시다시피 정말 중요한 점은 제목 끝에 물음표가 달려있다는 사실인데 말이지요. 출판사가 어느 정도 책이 주목받게끔 하려고 생각해낸 도발적인 제목이기도 합니다. 제가 염두한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변증법적 기획을 담으려 했는데, 출판사에서는 데리다가 한 꼭지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원래 생각과는 다르게 기획된 면이 있습니다. 물론 데리다를 넣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요. 그 책에서 카니를 다루었더니 출판사에서는 웨스트폴과 카푸토를 포함시키자고 했어요. 저는 데리다나 카푸토는 딱히 변증적 기획을 하지 않았고, 하이데거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해서 넣을 계획이 없었어요. 이 모두를 포함시키니 지금과 같은 책 구성이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레비나스도 변증적 작업을 한 것은 아니죠. 잘 아시다시피 마리옹조차도 변증을 전적으로 거부했지요.
지적하신 것처럼, 변증은 주로 신 존재 증명이나 신의 속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데 주력하지요. 다만 저는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 사유에 일종의 변증적 내용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일종의 현상학적 변증이고 해석학적 변증인데, 종교적 체험의 가시성이나 정당성과 관련됩니다. 이를테면 마리옹에게는 극한의 ‘포화된 현상’(phénomène saturé)2)에 대한 탐구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현상이 우리가 만들 수 없으며 예견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당혹스러운 것이라면, 그때 신의 현상은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신의 현상3)을 탐구하는 것이 제게 변증학적 논변으로 보였고, 증명을 위한 최소한의 시도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연역적인 방법도 아니고, 데카르트적4)인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전통적 의미의 변증은 아니지요. 다만 이런 시도는 우리가 체험하는 계시의 현상과 관련되며, 이런 현상을 탐구하는 일 역시 일종의 방법이며 변증으로 불릴 수 있지요. 그래서 이런 식의 논증에서도 변증이라는 호칭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안셀무스를 다소간 계승하는 데카르트적인 기초주의적 방식의 증명5)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를 보여주고자 책에서 분석철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6)을 읽어내는 법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 선생님의 책 중 마리옹을 비판적으로 다룬 《Degrees of Givenness》(주어짐의 정도)는 선생님만의 고유한 비판적 시각이 반영되어 좋았습니다. 거기서 선생님은 현상학과 해석학의 긴장 관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앤서니 스타인박(Anthony Steinbock)은 해석학적 언어가 종교적 경험을 기술할 때 일종의 왜곡을 일으킬까 봐 염려하기도 합니다.7) 선생님의 관점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계는 무엇이며, 이런 긴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카푸토나 카니, 웨스트폴 역시 매우 해석학적인 사상가지요. 특히 미국에서 현상학이 해석학과의 밀접한 연관성 아래 다뤄진다는 게 흥미로운 요점이기도 합니다. 스타인박에 대해서는 지적해주신 바 그대로입니다. 그는 매우 후설적인8) 사상가이고 막스 셸러(Max Scheler)의 영향도 많이 받았지요. 반면에 웨스트폴은 가다머의 영향을, 카푸토는 데리다를 해석학적으로 읽어내면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요. 카니에게는 리쾨르의 영향이 크고요. 이들은 현상학과 해석학의 다양한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들과 달리 스타인박에게는 현상학이 더 엄밀하게 작동합니다.
저는 마리옹을 다루면서 그가 해석학을 무시하는 대목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는 다양한 수준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저는 마리옹이 말한 것처럼 현상이 정말로 우리의 시선을 어지럽히고 압도적이며 우리 경험의 연속성도 없는 것이라면, 해석학적 지평 자체를 무화해버려서 그런 압도적 현상 자체를 오히려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어떤 경험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어떤 지평, 맥락이 필요하니까요. 물론 어떤 현상이 나를 파괴하는 수준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트라우마나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요. 어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맥락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책에 썼듯이, 제게 중요했던 점은 두 가지인데요. 마리옹에게 주어짐의 정도와 수준들이 나뉜다는 것입니다.9) 즉 그에게는 ‘빈궁한 현상’(phénomène pauvre)10)과 ‘기술적인 현상’(공통-법칙의 현상, phénomène de droit commun)11)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선을 어지럽히는, 극한의 포화된 현상이 있습니다. 우리를 압도하는 현상이지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록 언어적 한계나 장벽이 있더라도 말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마리옹에게는 이 두 극단만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현상은 다른 종류의 수준에서도, 다양한 정도상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죠. 그래서 현상과 관련해 다양한 유형의 포화된 현상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또 저는 마리옹이 역사와 역사적 사건 또는 문화적 사건을 혼융한다고 봅니다. 그가 살, 예술, 인간 타자, 사랑이나 성체성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이를 섬세하게 구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리옹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습니다. 미학적 현상과 종교적 현상 사이의 차이가 흐릿합니다. 물론 양자는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적 경험은 종종 매우 미학적이니까요. 예배가 콘서트는 아니겠습니다만, 많은 전통에서 보여주듯이 예배에는 음악이나 이미지가 중요한 위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구별을 해보겠습니다. 주말에 라흐마니노프의 〈저녁기도〉라는 작품을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것과 정교회 전례의 일부로 연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같은 음악이라도 다른 종류의 경험이고, 우리가 참으로 주어진 경험에 대해 기술한다면, 현상학은 이런 구별을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미적 체험과 역사적 체험, 스포츠 체험, 종교적 체험도 구별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겹치는 부분도 있겠지요. 스포츠에서의 어떤 미적 관행이 특정한 종교적 경험과 유사할 수도 있겠고요. 분명 이런 현상들에는 서로 유사한 것과 구별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상이 나타나는 맥락과 지평 역시 다 다르며, 그런 점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전례 경험을 생태론과 연결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전례가 우리의 생태적, 생태 친화적 의식을 일깨울 수 있을까요?
이 탐구는 제가 신학박사 공부를 통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특히 정교회 문헌과 관련되어 있지요. 정교회 문헌에는 인간 아닌 존재들, 동식물, 우주의 역할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담겨있습니다. 저는 환경윤리를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그런 생태신학 문헌에 주목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거룩한 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생태 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윤리적 가르침을 성서 해석으로 밝혀낼 수도 있고요. 즉, 성서에는 바로 그런 생태 친화적인 창조의 영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에 교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을 구하러 오셨나요? 아니면 인간만을 구하러 오셨을까요? 생태계 파괴를 죄로 부를 수 있을까요? 이렇게 교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지만, 생태신학을 전례를 통해 다시 바라보는 일도 특히 중요하지요. 미국에는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많은 이들이 이 위기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대다수 젊은이는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있지요. 따로 생태적 자각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여기에는 어떤 절망이 있습니다. ‘온실효과가 폭주하는데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와 같은 절망 말이지요.
저는 정교회 전례에 우주적 전례를 향한 비전이 있다고 봅니다. 정교회 전례가 현대적 개념으로 바뀌면서 그런 비전을 잃어버린 측면이 있지만 그 일부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애도하기 위해서는 의례적 실천이 필요하지요. 킬리만자로의 눈, 빙하, 사라지고 있는 산호초 등 우리가 잃어버린 종에 대해 어떻게 애도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고, 그 슬픔을 다루기 위해 의례가 필요합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이와 관련해 잘못했던 것을 어떻게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는 압도적 절망감과 죄책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서를 다루기 위해 전통적 의미의 의례가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의례는 슬픔, 절망, 죄책감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생산적인 여러 일들이 함께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의례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또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지금의 삶이 충분치 않다고 느끼거나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지요.
강을 깨끗하게 하거나 그와 같은 어떤 일을 하는 데 우리는 어떻게 헌신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의례가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종교적) 축일(feast)이나 절기 같은 게 분명 필요합니다. 다만 이는 소비주의에서 말하듯 무한정 잔치(feast)를 벌이는 게 아니며, 환경적 차원에서나 인간적 차원에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통상 축일이란 특별하면서도 드물고, 어떤 면에서는 무언가를 소진하는 피곤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교회에서나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에서 행하는 절기에는 금식과 축제가 번갈아 일어납니다. 모든 종류의 문화가 그렇듯 우리는 이렇게 금욕하고 잔치를 벌이는 일 사이를 오갈 필요가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의례가 기후위기를 맞이하는 데 특히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12)
- 한국에서 정교회 신자는 굉장히 적습니다. 근래 들어 정교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소수입니다.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정교회만이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요?
정교회에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계몽주의를 거치지 않은 측면이 존재합니다. 근대 서구의 특성을 흡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더 넓은 우주적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교회 신앙은 단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몸 전체가 관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을 향해 내가 몸으로 경배한다는 감각을 가지며, 저는 이것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례 의식 가운데 향을 맡고 음악 소리를 맛보는 것, 이런 게 사람들을 움직입니다. 음악은 사람들이 리듬에 몸을 맡길 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정교회 신앙에는 성주간과 같은 절기가 항상 돌아가고, 이 주간을 지키기 위해 매우 정교한 전례를 행합니다. 저도 성주간 동안 교회에서 40시간을 보냈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했습니다. 성주간 중 예배 의식의 절반 정도를 보낸 셈인데요. 사람들이 모든 의식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최대한 참여하며 아름다우면서도 때로 침울해지는 경험을 했고, 이전 축일을 기억했습니다. 특별한 찬송을 기다리며 음악에 익숙해지고, 전례에 참여하는 사람들 얼굴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슬픔이나 기쁨을 그 속에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요. 물론 이런 것들에 여러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변화하는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어려움도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이 수백 년간 해온 이런 의식에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정교회 의례에서는 나보다 더 큰 존재가 나 자신을 끌어 올려주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는 우리를 공동체의 일부로 만들지요. 성직자는 혼자서 의례를 거행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전례를 의미하는 라틴어 리투르기아(liturgia)가 사람들과 관련된 일이라는 의미를 가지듯이, 정교회 의례에서는 작은 공동체라도, 어쨌든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콘은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도 시각적 측면에서 훨씬 더 쉽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수년간 위탁 아동들을 정교회 전례에 데려갔습니다. 그 아이들에게는 그 의식이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은 항상 즐겁게 전례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저는 그것이 순수하게 의식적인(conscious) 차원에서 기능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정신이나 감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몸, 움직임, 자세를 통해 기능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 유럽이나 미국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는 아직도 가부장적 문화나 남성 중심적 문화가 있습니다. 학계에서 특히 더 심할지도 모르고요. 민감한 질문이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철학 분야에서 여성으로 활동하며 겪은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일단 상황만 살펴보자면, 한 예로 철학과는 물리학과보다도 여성 비율이 낮습니다. 철학 분야에 여성이 거의 없는 이유는 미국이나 영국,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서는 주로 분석철학이 성행하는데, 이 철학이 매우 전투적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으로도 미국에서는 여성이 전투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팽배합니다. 외모도 중요하고,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중요하게 평가받지요. 매우 강하면서도 논쟁적인 분석철학에서는 성별에 대한 이해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철학과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었어요. 지금은 조금 늘었지만,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지요. 종교철학도 비슷합니다. 제가 철학 전공 수업을 처음으로 맡아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여학생은 단 한 명, 남학생은 30명 정도였어요. 저도 꽤 많은 학회에 참여했지만, 미국 종교학회에 가서 전례와 현상학 분과에 들어갔을 때 그 방에 모인 사람들 중 제가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모임에는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말이지요. 종교철학에 관심을 두는 이들도 실제 남성이 많은 편입니다. 몇몇 여성 학자들이 있지만, 학자들도 그렇고 학생들 중에도 이 분야에 관심을 둔 여성은 매우 적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철학을 하는 여성들은 페미니즘이나 때로 인종 문제와 같은 것을 실존적으로 더 중요한 주제로 삼는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겠지요. 그에 비해 종교는 매우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것처럼 보여서 여성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독자들을 위해 해주실 말이 있을까요? 특히 종교에 관한 현상학적 탐구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서요.
저는 현상학자로서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써보거나 하는 일 말이지요. 자신의 경험을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유교 문화권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소속되어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러한 종교적 경험의 구조는 무엇인지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해보세요. 그 과정에서 현상학적 사상가들이 도움을 줄 도구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화를 나타내는 종류의 경험에 대해 말해보십시오. 그 경험은 동질적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문화 내에서도 여러 차이 나는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분들만의 작업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제가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이 언제나 부분에 대해 말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작업과 관련해서 지난여름 한 권의 책을 완성했고, 조만간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3) 그 책은 다양한 유형의 종교적 경험을 다루고 있지요. 미적인 종교 경험, 전례 경험, 신비적 경험, 수도원 경험, 헌신의 경험 등을 다룹니다. 또한 제가 공감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실천의 경험까지 다룹니다. 여기에는 장 바니에의 라르쉬 운동, 도로시 데이의 가톨릭 일꾼, 또 소외된 아동을 위해 고아원을 건립한 경건주의 운동의 경험 등이 포함됩니다. 또 마지막 장은 근본주의적 경험을 다룹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들이 서로 다른 종교의 종교적 경험이며, 모든 종교적 경험은 다 똑같다고 이야기하면서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 경험에는 어떤 연속성이 존재함도 함께 말하고자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미적 경험이나 스포츠에 대한 경험에는 겹치는 요소도 있으면서 서로 구별되는 요소가 있지요.
저는 종교현상학 연구 초기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와 다른 이들이 한 것처럼, 종교현상학이 종교 연구에서 종교적 경험의 독특함을 입증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인간 경험에는 극단적 차이보다는 어떤 연속성과 (동일하다기보다는) 겹치는 어떤 면모가 있다고 보고, 이 부분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작업이 더 필요하고, 어디에 더 관심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철학자로서 다른 사람의 작업을 논평하기보다 종교적 경험과 의례를 직접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 유럽 대륙철학은 신 존재 증명이나 신정론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간주한다. 중요한 것은 신의 현상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고, 체험은 증명이 아니라 기술(description)의 대상이라고 본다. (이하 인터뷰이 주)
2) 우리의 직관을 초과함으로써 개념화 작용에 포섭되지 않는 압도적인 현상을 뜻한다. 마리옹은 사건, 우상, 살, 타인이 이런 현상에 해당하며, 가장 탁월한 포화된 현상이 다름 아닌 계시라고 주장한다.
3) 현상은 우리에게 나타나고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신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나타내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계시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4) 이성적-존재론적 차원에서 신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5) 모든 인식의 토대가 무엇인지 밝히고, 그 토대에 입각해서 신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데카르트에게는 나는 생각한다, 즉 코기토가 우리 인식의 토대이고, 신의 존재는 이 토대 위에서만 정당화된다.
6) 안셀무스에게는 신 존재 증명만이 아니라 신의 신비에 대한 찬양이 있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아무리 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성적인 방식으로 신을 납득시키는 것인데, 안셀무스에 의하면 신은 빛이고 무한한 이로서 그런 증명 없이도 믿을 수 있는 존재이다.
7) 현상학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대로 기술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해석학은 선이해라고 부르는 일종의 우리의 선입견 가운데 현상이 주어지며, 이러한 선이해와 해석의 구조를 따라 현상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현상학자들은 해석학적 구조와 지평에 계시를 흡수함으로써 본래 주어진 계시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경향이 있다.
8) 쉽게 말하자면,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과 거리가 있는, 철저히 현상학적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에드문트 후설에게는 경험의 본질적 구조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주요 과제다.
9)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은 여러 등급으로 나눠질 수 있다는 의미다. 앞서 언급한 빈궁한 현상, 기술적 현상, 포화된 현상의 구별이 그 예다. 즉, 상품이나 기술적 대상처럼 정해진 그대로 개념화될 수 있는 현상이 있고, 개념화를 거부하는 예술 작품이나 계시와 같은 현상도 있다. 단, 그슈반트너는 자연현상이나 스포츠의 현상, 또는 종교적 체험 안에서의 신비적 현상이나 일상적 현상의 구별처럼 현상의 차원이 (마리옹이 제안한 것보다) 더 세심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하 내용에서 바로 그러한 대목을 설명하고 있다.
10) 직관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빈궁하다는 의미다. 수학이나 논리학의 대상처럼 개념적 본질로만 나타나는 추상적 현상들이 이에 해당한다.
11) 물리법칙이나 기술 체계의 대상들(전자 제품으로 고정된 의미만을 가지는 TV, 라디오 등)로 환원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특정한 법칙이나 체계에 입각한 지향적 프레임 안에서만 이해된다. 현상들에 대한 이러한 구별법은 전부 마리옹이 제안한 것으로, 그의 현상학의 핵심 개념들이자 분류이기도 하다. 그슈반트너는 이런 구별이 더 섬세해질 수 있고, 여러 등급을 교차해서 주어지는 현상들의 다양한 수준을 더 세심하게 파헤쳐야 한다고 본다.
12) 성금요일에는 금식이 있지만, 부활절은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다. 이런 식으로 정교회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절기를 중시하는 전통적 영성은 금욕과 축제를 교차적으로 경험하면서 양자의 균형 감각을 배울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생태 친화적 의식도 무조건적 금욕이나 축제와 쾌락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이 아닌 양자의 균형 감각 속에 전개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3)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올해 4월 출간 예정이다. 다양한 종교적 경험의 의미를 다루는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이 종교적 경험의 구조와 의미를 성찰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Christina M. Gschwandtner, 《Ways of Living: Religio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into Religious Experience》(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4).
진행 김동규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