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얼굴
[399호 내 인생의 한 구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한복음 5:1-7).
못 근처는 이미 무수한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다. 동시에 북적북적한 연못 너머로 살벌한 분위기가 감돈다. 언젠가부터 이 연못에 관한 신비로운 소문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천사가 물을 움직인 후 제일 처음 들어간 사람의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 말이었다. 물이 정말 움직이는지 매섭게 지켜보는 사람들과 재빠르게 병자를 옮겨줄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연못 근처가 소란스럽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사람들 사이 행색이 초라한 한 사람이 있다. 이 모든 일이 익숙하고 또 지루한 듯한 병자다. 홀로 남아 아무도 듣지 않는 푸념을 하고 있다. 그는 못에 자리를 잡은 몇 해 동안 몇 번이나 물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모두가 지쳐 잠이 든 새벽에도 깨어있던 그는 저 멀리 솟구치는 물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깨워 사정해도 그를 옮겨주는 사람은 없었고, 되레 그 소리를 듣고 깬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을 껴안고 물에 들어가기 바빴다. 몇 번의 소동이 지나고 난 후 그는 기력 없이 그저 망연히 연못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정말 ‘주님’뿐이었다
내가 다섯 살이 될 무렵, 당시 타워크레인 설비기사였던 아빠가 높은 크레인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바람이 흔들리는 기상 상황에 무리하게 일을 하다 사고가 나서 같이 일하던 동료 여러 명이 죽고 아빠는 살아남았다. 〈9시 뉴스〉에 나온 큰 산재 사고였기에 아빠는 그 후 중환자실에서 100일, 일반 병동으로 옮겨져서도 1년간 병원 생활을 했다. 그러고도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못해 재활병원을 전전하다 2-3년 흐른 후에야 하반신마비 척수장애인이 되었음을 인정했다. 엄마가 아빠의 간병을 도맡았고 오빠와 나는 홍천의 외가와 부산의 친가를 옮겨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퇴원한 아빠는 여러 합병증과 함께 알코올성 장애, 우울증, 불면증 등을 얻은 뒤였다. 평생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던 부모님이 나와 오빠를 데리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게 그맘때였다. 기도할 줄 모르는 아빠는 당시 주일성수는 물론 새벽예배까지 빠짐없이 드렸다. 20년 전, 엘리베이터도 없는 작은 교회 2층 예배당에 올라가기 위해 늘 지나가는 장정 4명을 붙잡아 부탁해 휠체어를 들어 올리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가파른 돌계단을 아슬아슬하게 오를 만큼, 어린 내 눈에도 아빠는 무엇인가 간절해 보였다.
아빠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누나는 병으로 죽고 어린 동생만 셋 딸린 장남이었다. 결혼하자마자 입대해 특무상사까지 올랐던 아버지(나의 친할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총상을 입은 데다 전쟁 트라우마까지 더해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눈이 돌아 자식을 개 패듯 패는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개집에서 잤던 기억과 혼자 남은 집에 놓인 밥 한 공기에 개미 떼가 몰려든 장면을 아빠는 자주 떠올렸다. 집이랄 게 없이 부산 영도다리 밑에 천막을 짓고 살았는데, 학교는 진작에 그만두고 돈을 벌려고 데구리 배를 탔다. 경제력 없는 가장 밑에 딸린 자식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기에 몸을 사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다. 마침내 일궈낸 단란한 가정, 그리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터를 큰 자랑으로 여겼던 사람이다. 그러다 30대 중반, 사고를 당했다. 이제야 가늠해본다 한들 그 시기 아빠의 좌절과 고통을 나는 차마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천성이 다정하고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고 이후 집 안에서 거친 포식자가 되었다. 옆에서 돕는 엄마를 그렇게 괴롭혔다. 장애인이 되어버려 네가 나를 무시한다며 폭언과 협박을 일삼았고 심지어는 폭행으로도 이어졌다. 휠체어를 끌고 다니며 주먹질하는 아빠를 엄마는 피하지 않고 견디고 있었다. 아빠의 괴롭힘이 심해질수록 엄마는 말씀 묵상과 기도에 더욱 전념했다. 지금은 교회 권사가 된 엄마가 고백하듯 그때 우리 집은 정말 ‘주님’뿐이었다.
어느 해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를 개발했다는 뉴스로 떠들썩해지자 아빠는 또다시 밤낮으로 새로 뜬 기사를 찾아보며, 서명과 후원은 물론이고 실험에 참여하겠다는 지원 신청서까지 써서 팩스로 보냈다. 모두 조작이었다는 뉴스가 파다할 때도 믿지 않다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 아빠는 배신감에 휩싸여 밤마다 소주를 홀짝이며 분노를 삭였다. 몇 년이 더 흘러, 다니던 교회의 몸집이 커져 번듯한 고층 건물을 지었는데, 신도가 늘어난 탓인지 엘리베이터엔 늘 아빠가 탈 자리가 없었다. 때마침 담임목사 성 비위 문제가 불거지고 바라던 소원도 끝끝내 이뤄지지 않자, 교회는 다 엉터리라며 아빠는 교회를 끊었다.
‘나’를 찾아 나선 자리에서 만난 슬픔들
나는 아빠를 무서워했고 미워했지만 동시에 사랑했고 그런 만큼 인정받고 싶었다. 학비가 무척 비싼 자사고에 사배자(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입학했는데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 열등생이었다. 학구열 높은 목동에서도 으리으리한 학교라 주위에서 늘 수군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닫힌 문을 멍하니 들여다보는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왜 나일 수밖에 없는지를 선명하게 밝히고 싶었다. 사실은 잘 살아보고 싶었는데 실패하고 만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글펐다.
20대 초반 그렇게 나를 찾아 나선 자리에서 어쩌다 보니 저마다의 슬픔을 맞닥뜨리는 경험을 했다. 성주 소성리 싸움터에서 평생 살아온 터전을 지키는 할머니들과 열사의 영정을 끌어안고 유언을 중얼거리는 거리의 노동자들, 찬 바닥 위에서 노래하고 소리치는 유가족들을 대학에 다니며 만났다. 나를 괴롭혔던 무언가는 맨 처음 윽박지르는 아빠의 얼굴이었지만, 어느 날엔 비바람이 쳐도 작업을 마치라는 현장 책임자의 얼굴이었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상이군인이다가 또 전쟁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내가 되었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로 어느덧 사고가 난 지 23년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빠는 변화한 몸에 점점 적응했지만, 바깥 생활과는 점차 멀어졌다. 아빠가 토씨 하나 빼지 않고 반복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아는 사람 중에 장애인탁구 국가대표가 있는데, 그 사람은 군 생활을 하다가 장애를 입었다고. 그 후에도 열심히 살고, 힘들게 운동하다가 국가대표가 되어 국제 대회도 나가 상도 받은 그런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은 그래도 복무 중 입은 장애가 훈장 같은 사람이고 나름대로 우리 사이엔 영웅이라고. 어느 날 그 사람이 식당에 갔는데 글쎄 식당 주인이 2천 원을 손에 쥐어주면서 나가라고 했다는 일화. 당신은 안 겪어본 일도 아니면서 영웅도,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다시 한번 모두가 모욕을 입었다는 그 이야기. 언젠가 간밤에 눈이 내린 날, 삼촌이 앞에 왔다고 해서 잠깐 나갔던 아빠가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들어온 적이 있다. 길이 얼어 경사로에서 미끄러져 휠체어가 뒤집혔는데 핸드폰은 멀리 있고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그래서 바닥에 처박혀 몇 시간이고 사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요즘 아빠의 가장 큰 고민은 올봄 예정된 오빠 결혼식에 어떻게 참석할지다. 얼마 전 아파트 관리실에서 오래된 승강기 설비를 교체한다고 고지해왔는데 그 몇 주의 기간이 딱 결혼식이랑 겹친 거다. 밖에는 얼마든 안 나가면 될 일이지만, 결혼식 당일엔 혼주석을 지켜야 하니 구급차를 불러 사정이라도 하겠다고 한다. 불이 나도 승강기로 대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몸을 내던질 수 있도록 아파트 저층을 고집한 일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38년 된 병자와 아빠의 시간
말씀을 다시 읽다가 아빠를 비롯한 우리 가족에게도 베데스다 연못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오랫동안 그 언저리를 뱅뱅 맴돈 것만 같다. 처음 몇 년은 물이 솟아나는지 하염없이 못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여러 일들을 겪고 마음을 접은 후에도 떠나지 않고 익숙한 그 근처에 눌러앉았다. 딱히 기적을 바라지 않게 된 지 벌써 꽤 되었는데도 말이다. 말씀 후반부는 대부분 잘 알고 있듯이 38년 된 병자가 마침내 베데스다 연못에서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는 장면이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의 말을 듣자 병자는 곧 성큼 걷게 된다.
2년 전, 나는 대출을 받아 월세방을 구해 서울 본가로부터 아예 나왔다. 가족으로 묶여 감당해야 하는 이런저런 일들을 견디기가 싫었다. 심적으로 거리를 둘 수 없으니 물리적으로만이라도 멀어지고 싶었다. 병자가 예수를 맞닥뜨렸듯이 만일 예수가 찾아와 ‘네가 (여전히) 낫고자 하느냐’ 아빠에게 질문한다면 당신은 무어라 답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병자가 보냈을 38년의 시간을 자연히 떠올려보게 된다. 그는 과연 한평생 낫기만을 바라며 살았을까. 오히려 예수의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지난 세월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태 그래왔듯이 아빠는 앞으로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옮겨지거나 들려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적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아빠가 살아가는 삶이 충분히 그다운 삶이길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유상희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오픈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오후 2시 퇴근 후엔 하고 싶은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