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주체가 되는 경험을 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지난밤 자기가 ‘새로’ 알게 된 정치 이슈 관련 지식을 늘어놓는 남자 직원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성 직장인의 토로를 들었다. 나만 당하는(!) 특수 사례인 줄 알았는데 너도 그래? (야, 너두?) 놀라워하며 어설픈 맨스플레인 시전하는 남직원 퇴치법을 간략히 전수해주었다. 일단 그 남직원이 평소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지 물었다. 기계? 자동차? 게임? 스포츠? 기계란다. 혹시 그 남직원이 정치 시사 분야 ○○○ 유튜브 채널도 보고 그러는 건 아니지? 가끔 ○○○ 언급한단다. 휴. 최악이다. 그럼 일단 그가 또 아침 인사로 정치 이슈 설명을 시작하면 뚫어지게 쳐다봐. 절대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호응하면 안 돼. 그런 말은 근거 없는 음모론 아니냐며 의심해서도 안 돼. 그냥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마디만 해. “혹시 온라인 커뮤니티 하세요?  ○○○ 같은 거” 하고 그냥 가던 길 가. 당신이 아는 척하는 지식의 출처가 대개 그렇게 뻔하고 빈곤하다는 걸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줘. 그렇게만 해도 도망가.

경험상 그래도 완전히 퇴치되지는 않고 종종 또 대화 걸기를 가장해 시비를 걸어오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오랜 기간 맨스플레인 ―특히 정치 관련 아는 척― 을 가만히 들어본 결과 주장의 논리가 대부분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무실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R 커뮤니티 창을 띄워놓고 일하는 맨스플레인 시전자를 보고 내 의심이 어느 정도 근거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정의당이 페미니즘 논조 때문에 망했다는 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보던 그. 일단 질문 자체가 틀렸음을 먼저 따지고 진보 정당 역사를 읊어주며 참교육해주고 싶었지만 참고, ‘하하’ 썩소를 날리며 자리를 떴다. (어젯밤에 온라인 커뮤에서 그 주제로 무슨 글 읽으셨나 봐요.)

마치 나(혹은 여성)는 온라인에서 활동하지 않거나 그런 지식을 잘 모르겠거니 여기는 걸까. 온라인상에서 혐오 논쟁이 한창이던 2015년에 나온 《여성혐오가 어쨌다구?》(현실문화)에서 여성학자 윤보라는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여성들의 패러디를 처음 본 남성들 반응을 이렇게 분석한 바 있다. “불현듯 나타난 ‘메르스 갤러리(메갤)’를 보고 당황한 남성 유저들의 언설을 보자. ‘메갤’에서 시도된 여성들의 패러디를 처음 본 그들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여성들이 저런 (고난이도) 드립력을 갖고 있을 리 없으며 따라서 남성들이 여성인 척 가장해 논란을 이끌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었다. 일단 사건을 조기 진화해 웃음의 권력이 여성에게 배당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44-45쪽) 여성이 이 정도 유머 생산 능력을 지니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다니!

윤보라의 논의를 이어받아 연구한 언론학자 김수아는 더 나아가 “남성 이용자들의 당혹과 불쾌는 ‘자신들만의 온라인 공간에 여성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졌을 때, 즉 온라인 세계에 여성이라는 타자가 존재함을 환기하게 되었을 때 온 것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 여성 역시 온라인 공간에서 살아가며 남성들이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되받아쓰기의 전략이 지워진 식민지 타자의 목소리를 들리게 함으로 해서 제국의 유일성에 도전하게 된 것과 비견할 수 있다”¹⁾고 분석했다. 웃음의 권력 투쟁(?) 과정 중, 남성 이용자들이 여성들은 온라인에 없는 것처럼 상정한다는 분석에 눈이 번쩍 띄었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남성들이 여성이라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왜 상상하지 못했을까? 여성이 있는 자리에서도 여성을 대상화하며 성적 농담을 하는 남성들을 그렇게 많이 보아놓고서는. 온라인으로 스포츠 중계를 볼 때 마치 여성 시청자는 없다는 것처럼 여혐 드립을 쏟아내는 채팅창을 늘 보아놓고서는. 어느 순간부터는 스포츠 중계를 보며 틈틈이 응원 창의 혐오 발언을 신고하는 게 일이 되어놓고서는. ‘여기 여자 있다!’ 외치기라도 해야 하나. 그러니까 난 저렇게 상대방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말하고 싶은 순간 뜬금없이 정치 시사 이슈로 맨스플레인을 쏟아내는 남성들로부터도 그런 태도를 느껴왔다. 내가 아는 세계를 넌(여성은) 모르지? 그런데 웬걸. 나도 너만큼 정보를 접하고 활용하는 온라인 세계의 1인이라고. 그 세계 나도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네가 아는 척하는 지식의 출처가 얼마나 얄팍한지 꿰뚫고 있다고. 너랑 10분만 대화하면 네가 어느 온라인 커뮤를 끼고 사는지 알아맞힐 수도 있어. (Just One 10 MINUTES, 내가 네 소속을 아는 시간.)

그렇게 일상에서 ‘없는 존재’로 여겨지거나 여성 혐오적 온라인 댓글을 보는 일이 얼마나 힘 빠지는 고통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며 상대를 이해시키기란 참 어렵고 귀찮은 일이다. 가끔은 이런 회의도 든다. 왜 내가 이걸 설명해야 하지? 왜 내 역량과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이런 데 써야 하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럴 때 가장 많이 하는 생각.

남자가 단 몇 분이라도 여성으로 사는 일은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일이므로, 여성들은 남성들이 쓰는 언어와 문화를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이른바 ‘미러링’²⁾이다. 미러링이란 길게 말하지 않고 상대를 이해시키는(!) 전략이다. 한국에서 2015년 (지금은 사라진) 메갈리아 사이트에서 유효하게 활용된 미러링은 이토록 복잡한 정치·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탄생했다. 혐오 대상이 세상에 없는 존재인 양 공기처럼 퍼져있던 여성 혐오 언어는 그걸 사용하는 주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고 나서야 사회 의제가 되었다. 남성이 주어가 된 ‘혐오 언어’가 발화되고 나서야 ‘혐오’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의제화되었다는 점이 웃기고 슬픈데, 그마저도 미러링으로 같은 말을 되돌려준 여성들에게 젠더 갈등을 조장한다는 혐의를 씌우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전까지 여성이 그 많은 혐오를 당할 때는(참고 있을 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김치녀’라는 표현을 ‘김치남’으로 되돌려주자 문제가 된 거다.

‘혐오’가 주요 이슈가 된 것만으로도 미러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2015년 이후 일련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지나 이제는 거센 백래시의 시간을 맞이하며 많은 순간 내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올랐던 순정만화가 이미라 작가의 《남성해방대작전》이었던 것은 이 만화가 1990년대에 이미 ‘미러링 전략’의 두 가지 핵심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유머를 기반으로 성 역할을 전복하다

《남성해방대작전》 1권 앞표지에는 ‘어드벤처 코믹 로망’이라는 정체불명의 장르명이 적혀있다. 순정만화 잡지 〈윙크〉에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연재되다가 1999년부터는 출판사를 옮겨 단행본으로 나온 이 작품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처음 연재될 당시 교과서 밑에 잡지를 깔아놓고 수업 시간에 몰래 보면서, 그저 꽃미남들이 득실득실한 파라제국에 우연히 가게 된 16살 소녀 정수하가 부럽기만 했다. 나도 어디 다른 세계로 잠깐 ‘어드벤처 코믹 로망’ 좀 경험하고 오면 좋겠다 꿈꾸던 10대 시절이었다. 당시 고입 연합고사(당시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시험을 봐야 했다)에 떨어져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중3 정수하는, 다른 세계로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말하며 거리에서 괴로워하다가 우연히 그 말을 들은 아사드(초능력) 소유자 가네샤로부터 같이 파라제국에 가자는 제안을 받는다. 씩씩한 남자로 보이니 남성해방군 동지가 되어달라나. (수하가 선택된 진짜 이유는 차후 스토리에 나온다.)

남성 해방이라니? 조신한 태도로 예쁘게 말하는 미소년 가네샤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성해방군’이란 말을 듣자 수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파라제국은 남자들에게 성(姓)도 부여되지 않는 ‘여성의 천국’이란다. 평소 여자답지 못한(!) 외모와 성격으로 집과 학교에서 온갖 구박을 받던 수하는 남성 해방 따위 관심도 없지만, 그곳이 자기가 항상 꿈꾸던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고교 입시에 실패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바람을 더해 가네샤를 따라 파라제국으로 간다.

큰 고민 없이 따라간 파라제국에서 수하는 놀라운 장면들을 목격한다. 일단 긴 머리에 치마를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들이 거리에 즐비하다. 무거운 짐을 제대로 나르지 못하는 남편을 채찍질하며 “남자와 북어는 하루에 세 번은 패야 정신을 차린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니까”라고 말하는 아내가 있질 않나, 한껏 꾸민 남자가 “여보 다녀오세요~♥ 저는 집 잘 지키고 애 잘 키우며 기다릴래요”라며 “남자의 애교는 필수. 아부는 선택” 이러고 있질 않나 혼란스러운 장면들이 펼쳐진다. 남성을 노예로 매매하고 “남자의 인생이란 한철의 꽃과 같이 젊을 때뿐이니 잘 이용할 필요도 있겠지요”라는 말을 던지는 이곳은 모든 권력을 여성이 잡고 있는 파라제국이다. 여성 혐오적 발화의 주체를 바꾸고 현실 권력의 위계를 바꾼 이 방식은, 지금 봐도 놀랍고 흥미로운, 1990년대 한국 사회에 이미 도착한 미러링이었다.

이미라 작가는 남녀 성 역할을 전복한 미러링을 구사하며 “우리 조선 시대의 여성의 수난사를 다소 우회적으로, 그러면서도 조금은 희화시켜 그린 부분도 군데군데 나타날 것이니까 그냥 우습게만 보지 말아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1권 작가의 말에서 당부했다. 그런데 이게 조선 시대 여성들만의 수난사를 반사한 것일까. 수하가 길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시신을 발견하고는 큰 충격에 빠지는 장면은 미러링의 정점이다. “아직도 고통이 계속되는 듯 일그러진 그 얼굴 위로 피눈물 자국이 선명한, 온몸을 난자당한 남성의 주검. … 이 나라엔 법률도 없나, 어떻게 저렇게 방치될 수가.”

이 장면에서, 조선 시대 여성뿐 아니라 우리 시대 여성들도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은 아닐 거다. 강남역에서, 신당역 여자 화장실에서,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낯모르는 남성에게, 스토커에게,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이 떠오른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거나 ‘한녀’여서 칼부림 대상자로 지목되거나 쇼트커트 여성이어서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여성 혐오 범죄 뉴스가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생각난다. 대학에 들어가서 알게 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황금가지, 1996), 더 거슬러 올라가 샬럿 퍼킨스 길먼의 《허랜드》(아르테, 2020)보다 먼저 《남성해방대작전》에서, 나는 미러링을 만났다.

이미라가 창조한 세계에는 미러링의 또 다른 핵심인 ‘유머’가 전반에 흐르고 있다. 히피 펌 스타일에 화려한 머리 장식을 단 남자가 콧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아기를 안고, 일하러 가는 아내를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뭐, 뭐냐. 저 불협화음은…”이라며 기겁하는 수하와 “호호호. 제 모습이 좀 특이하죠. 하지만 부인이 아름답다고 칭찬해주시니 이대로 영영 깎고 싶지 않네요”라며 품에 안은 아기에게 ‘까꿍’ 하는 남성의 장면은 이상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다른 세계의 사람이 보면 ‘불협화음’ 같은 외모지만 집안의 가장인 아내가 세운 미의 기준에 따라 꽉 짜인 코르셋에 갇혀 사는 남성의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암묵적으로 여성에게 코르셋을 가하는 현실을 풍자하는 신랄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 전반의 구조는 분명 전복적이고 그 주제 의식 또한 묵직한데도 디테일에서는 이미라 작가 특유의 유머가 곳곳에 깃들어있어 당시 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전혀 심각해지지 않았다. ‘유머’에 기반해 성차별과 그에 맞선 남성해방군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화법을 따라가며, 여성이 황제와 장군인 세계에서 나도 모르게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하는 동시에 조직적으로 해방운동을 펼치는 남성해방군에 감정이입해 함께 운동론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유머와 드립력을 배웠던 것도 같고. 지금처럼 유머와 드립력이 “주체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권력을 분배하는 최종 심급”³⁾이 된 온라인 세상이 도래하기 전에 순정만화가 유머 선생님이 되어주었던 거다.

온라인 플랫폼으로 다시 돌아온 남성해방대작전

2018년 10월 《남성해방대작전》은 웹으로 플랫폼을 옮겨 다시 연재를 시작했다. “이런 세상, 한 번쯤 상상해 보셨나요? REBOOT 2018.10.05. 〈남성해방대작전〉”이라는 문구를 품에 안은 채. 거의 20년 만에 재개된 작품인지라 시대에 맞춰 몇몇 상황을 개정해 올컬러 웹 만화 형태로 돌아온 〈남성해방대작전〉을 소개하는 문구에 ‘REBOOT’라는 단어가 쓰인 건 우연이 아닐 테다. 2015년 즈음 여성 혐오에 맞서 “공포에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⁴⁾인 유머로 부단히 공동체 구성원으로 서고자 한 여성들을 보며 이미라 작가의 이 작품을 떠올린 이들이라면 정말 반가운 소식일 듯. 이번엔 작품의 완결을 볼 수 있겠지?

20년 만에 돌아온 시즌1 첫 화에 달린 베댓은 이 작품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시대를 앞서나간 페미니즘 만화네. 남녀 설정을 바꾸니까 여자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받고 살았는지 신랄하게 드러남.” 여기서 자세히 말하지 못한 남성해방군 ‘라하르시타’의 운동은 결국 어떤 길로 가게 될까. 불멸의 순정만화 남주 흑발 냉미남 ‘검은 달’ 시바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까 궁금하다. 2020년에 시즌2까지 연재하고 시즌3가 감감무소식인데 ‘너부리’님이 2023년 6월에 단 댓글에 내 마음도 담아 간절한 바람을 보태본다.

“작가님, 저 이제 중딩 아니고 어른이라 돈 막 쓸 수 있어요. 빨리 시즌3 내주세요. 기다리고 있습니다!ㅎㅎ”

박혜은
문화기획자. 뉴스레터 〈에밀앤폴〉 발행인. 책을 직접 만지는 일에서 책 문화를 다루는 일로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