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이어진 공간

[400호 공간 & 공감]

2024-02-29     박진영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어디에 있을 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다는 것은 또렷하다. 그야말로 삼복더위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조치원(현 세종시), 살던 집에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산골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하여 ‘안골’로 불리는 동네에서 사셨던 할아버지를 뵈려면 서울역에서 무궁화 열차를 타고 조치원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탄 뒤 종점에서 내려 또 한 번 버스를 갈아타고 내려서 걸어 올라가거나, 마중 나오시는 큰아버지 트럭을 타고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택시를 불러 타고 들어가야 했다. 농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부로 사시면서 아들 다섯을 낳고 기르신 할아버지의 원래 집은 방 세 칸 흙집 본채에 아궁이 딸린 부엌과 소 한 마리 사는 외양간에 붙어있는 방 한 칸짜리 별채, 재래식 화장실로 구성된 1950년대 촌집이었다. 할아버지는 옛집을 헐고 현대식 집으로 건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운명하셨다.

장례는 집에서 진행되었다. 서울에 사는 우리 가족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시골집에 도착해보니 일종의 처리를 마친 할아버지 시신이 병풍 뒤에 뉘어있었다. 어린이였던 나와 언니들은 병풍 이쪽에서 절을 했고, 아버지는 절을 한 뒤 곧장 병풍 뒤로 가 당신의 아버지 얼굴을 부여잡고 “아버지”를 여러 번 부르시면서 엉엉 우셨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과 물리적 거리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에서 온 죄스러운 감정이었을까. 그렇게 큰 울음을 우는 어른, 아버지는 처음 보았기에 잠시 놀랐으나, 이내 나도 모르게 아빠를 따라 울었다.

시골집 마당에 검은 비닐 차양이 처지고 가마솥 단지가 고철로 만든 간이 이동식 아궁이 위에 올라앉았다. 집 건물과 기역자로 맞대어 지은 광(창고처럼 여러 물건을 두는 곳) 옆으로 음식 마련에 필요한 살림들이 주르륵 정렬하고 우리 엄마를 포함해 며느리들은 이것저것 준비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친척 오빠들은 큰아버지 지휘에 따라 집안 곳곳을 오가면서 마당 평상에 상을 펴고 문상객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안방에 할아버지가 모셔져있고, 거실 한쪽에서는 상주들이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으며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면서 문상객을 맞이했다. 마당 평상으로는 자리가 모자라 방 이쪽저쪽 빼곡하고 어지럽게 조문객들이 자리를 채웠다. 가까운 곳에 사는 먼 친척들과 큰 도시에 살고 계신 아빠 형제들의 지인들, 또 서울에서 오신 우리 부모님 지인들까지 장례 기간에 수많은 사람이 여기저기서 오고 갔다.

할 일도 없고, 할아버지와 대화 몇 마디 나눠보지 못한 나는 정리할 관계도 되짚어볼 추억도 빈약해 사촌 동생들과 뒷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엄마 아빠를 기다렸던 것 같다. 이 장례는 내가 경험한 최초의 장례였고, 현재까지 유일무이 집에서 치른 장례였다.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면서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아졌다. 친구의 부모님, 교회와 동네 어르신들, 학교 및 직장에서 맺은 인연으로 여러 번 조문을 다녔다. 그러나 여전히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입술이 바짝 마르고 손발이 꽁꽁 언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입구부터 진한 꽃냄새와 향냄새가 뒤섞여 있고, 낮고 작은 목소리 사이로 울음과 웃음이 튀어 오르고, 분주한 발걸음과 몸에 진이 빠져 ‘털썩’ 하고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장례식장에 가면 나는 있는 힘껏 내 몸을 접고 접어서 조르륵 굴러갔다가 소리 없이 돌아오고 싶은 마음뿐이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해줄 것도, 해줄 말도 없는 나의 ‘있음’이 어쩐지 송구한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또 곧 내게 닥칠 슬픔, 그것이 나의 죽음이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든 내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보게 한다.

죽음이 왜 두려울까.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세계, 후기와 리뷰가 없는 차원이기 때문일까? 상상할 수는 있지만 예측할 수는 없는 세계, 그려볼 수는 있지만 가늠할 수 없는 그곳이 무섭다. 물론 모두 죽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영원불멸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쩐지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와 상관 짓고 싶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죽으면 끝.

정말 끝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는 부담 때문일까. 사는 동안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기도 하고, 놓친 기회는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실수와 실패는 반복되지만, 그 시간을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하면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죽음은 ‘다음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더 잘 죽어야지가 안 되는 세계다. 예측할 수도, 가늠할 수도, 피할 수도, 번복할 수도 없는 죽음이 두렵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내가 스스로 의아스럽고 한심스러울 때도 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음을 무서워하기보다 기쁘고 즐겁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죽으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 그토록 바라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면 묻고 싶고, 듣고 싶은 것도 한둘이 아니며 닦아주실 눈물도 이미 하루 이틀로는 부족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난센스라며 나를 설득해보기도 한다. 누구는 장례식장에 ‘축 천국 입성’ 리본 단 화환을 세웠다고 하는데, 죽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더라도 의연해지기라도 하면 좋을 것을, 죽음과 엮이고 싶지 않고 도망만 가고 싶은 내 믿음의 수준을 보며 스스로 꾸짖기도 한다.

이처럼 죽음을 생각할 때면 설득과 비판, 회유와 나무람으로 어지러운 내가 의외의 곳에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물리학 관점에서 볼 때, 우주에는 온통 죽어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살아있음보다는 죽어있음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 김학진의 《뇌는 어떻게 자존감을 설계하는가》, 299쪽.

‘살아있음보다 죽어있음이 더 자연스러운 상태’라니… 우주적 관점으로 내 시선을 줌아웃해보면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극히 드문’ 기적 같은 존재이다. 삶은 기적이라는 ‘좋은’ 말들을 수없이 들었어도 별로 와닿지 않더니, 뇌과학책을 읽다가 죽음으로 가득 찬 우주를 마주하니 오히려 삶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인간이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을 설명하면서, 경외감은 인간이 ‘나’라는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더 큰 세계에 속한 존재로 나의 경계가 흐물흐물해질 때 나는 타인, 세계, 자연, 우주같이 더 넓은 세계의 특성 즉 죽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뉴스로 유명인의 부음을 접하거나, 사랑하는 이들이 소중한 생명을 잃거나, 슬픔을 당할 때, 그리고 나의 죽음까지도, 죽음이 익숙해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더 큰 세계에 접속되어 ‘경외감’을 느끼며 기적인 삶 그 자체를 산다면 우주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소멸의 과정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 삶을 제대로 산다면, 삶의 소멸을 잘 맞이할 힘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그리고 이제야 지난해 타계하신 김현진 작가님의 죽음을 겨우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을 삶으로부터 격리시키지 말자고 하신 작가님의 말씀처럼, 우주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가신 그분께서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서 정한 방식으로 삶과 다르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셨기를. ‘공간’의 의미를 한 편의 시처럼 들려주셨던 선생님의 삶과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