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반도, 어떻게 평화로 갈 것인가
[로잔 1974-2924]
※ 2024년 1월 30일 서울영동교회에서 열린 로잔너머 이슈 포럼 ‘평화’ ‘위기의 한반도, 평화 전환은 가능한가?’의 발표문을 수정한 글이다.
평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국제 연대
지난 70년을 통틀어 평화에 가장 절박하게 목마른 시기, 세계 그리스도인 ‘인플루언서’들이 적지 않은 비용을 치르면서 한반도에 모인다는 사실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강한 책임감을 불어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의 도전과 권면에 따라 저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로잔 정신을 환영하면서도, 자칫 박제화 경향을 보이는 그 대회에 냉담한 입장입니다. 첫 로잔대회에 한국 참석자들이 있었음에도 16년 후에야 로잔언약 내용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0년 케이프타운 대회 때는 로잔 정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회자들이 한국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후 뉴라이트와 같은 퇴행적 정치 운동에 로잔 정신을 아전인수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기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전해진 직후부터 이미 이 나라의 신분제, 노예제, 불공정한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시민운동을 벌여왔으므로 로잔언약은 이를 지지하는 고마운 메시지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평화가 보편적 인간 존재의 절대조건임은 물론 선교의 본질이라고 믿기에, 저를 냉담하게 했던 모든 것을 잊거나 유보할 것입니다.
통상 선교 필드에서 ‘평화’를 선교 주제로 삼는 일이 다수 교인에게 낯설다는 현실을 저도 체감하지만,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집단 간 ‘평화’ 없이 선교적 목적에 도달할 수 없고, 평화에 도달하지 못하는 선교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개역개정) /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the two one and has destroyed the barrier,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NIV) / 그리스도를 통해 평안을 누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마치 둘 사이에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심으로써 그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쉬운성경) (엡 2:14)
이러한 성경 읽기로 저는 2024년 로잔 서울대회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 국제 연대의 전망을 밝히는 계기가 되길 소망합니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민권, 평화 사상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철학자와 세계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쓴 《영구 평화론: 하나의 철학적 기획》1)에는 평화적 국제 연대의 비전이 드러납니다. 국제연맹을 거쳐 오늘날 UN과 같은 국제기구들도 그 열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6·25 전쟁 원인인 한반도 분할통치와 뼈아픈 결과인 긴 분단은 철저하게 국제적인 사건이었으며, 국제정치에서 ‘동아시아 국가’로도 불리는 미국을 필두로 책임과 미래에 대한 영향력을 나눠 갖고 있습니다. 공화주의, 즉 민주적 체제에서 민(民)이 전쟁을 선택할 리 없다는 생각은 229년 전 《영구 평화론》에서 칸트가 처음 언급했는지, 그전부터 존재하던 상식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공화제를 표방하는 가장 직접적인 행위자들 한국·미국·일본을 필두로, 세계 시민들에게 자기 체제가 전쟁을 기획하거나 방조하지 않도록 당부하는 일은 우리의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안을 고려할 때 가장 큰 난점은, 많은 경우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누적 과정으로서 평화, 적대 집단과의 협상과 협력을 당대의 우선 과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중에서도 한국인들은 대결적 분단의 일방으로서 자기 체제가 요구하는 대결과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사자인 우리가 그럴진대, 세계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어렵지만, 우리의 최선은 세계인들에게 한반도 문제의 대강과 우리의 소망을 들을 기회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로잔 서울대회를 바라보는 저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평화 연대를 격려하는 사건과 체험
남한에서 남북문제를 말하기가 두려웠던 1980년대에도 우리 선배들은 세계 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해외에서 북한 교인들을 만났고, 1989년 문익환 목사님(1918-1994)은 고난을 무릅쓰고 길을 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2년 ‘로잔운동 창립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1918-2018)도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에게 자신의 책과 성경을 선물했고, ‘제1차 북핵 위기’(영변 폭격설)가 있었던 1994년에는 클린턴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후 ‘북미 제네바 회담’이 성사되어 북핵 위기는 일단락되었습니다.2) 그 후로도 새로운 위기를 거듭하는 북한과의 관계는 누구보다도 밀접한 당사자인 우리에게 상당한 피로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만,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적어도 당대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앞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언급했습니다만, 영구한 평화는 추구할 비전이자 목표이지 평화의 과정을 승인할 선행조건일 수 없습니다. 흔히, “안 될 만남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협상을 끌어나갈 실력 부족을 고백하는 말이자, 자기실현적 예측이 엿보이는 공허한 언사에 불과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사례 이후에도 남·북·미에서 기독교적 동기나 혹은 평화적 동기로 대화와 위기 완화를 위해 노력한 분들이 나타났고, 성과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불안한 평화나마 누려온 것은 그러한 노력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한 결과라고 믿습니다.
저와 동료들에게도 유사한 체험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2세인 크리스 라이스는 2014년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동북아시아 화해를 위한 크리스천 포럼’(Christian Forum for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을 제안했습니다. 듀크대 화해 센터와 MCC 공동 주최로 미국, 중국, 대만, 홍콩, 일본, 한국, 그리고 탈북민 그리스도인들이 1년에 한 번 모여 화해와 평화를 위해 예배하고 서로 배우자고 했습니다. 저는 원하던 ‘그리스도인 평화 연대’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흔쾌히 함께했습니다. 첫 모임에서 연로하신 故 세키타 히로오(関田寬雄, 1928-2022) 목사님은 저 한 사람을 앞에 두고 한반도에 대한 ‘일본 교회의 죄악’을 회개하노라 하셨습니다. 제 생애 최초로 일본인의 사과를 받은 사건이었고, ‘일본 교회의 죄악’이라는 점을 확연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군국주의 일본이 조선과 아시아를 괴롭힐 때, 일본 기독교는 찬동했으며, 재일 조선인들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데도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한국, 일본, 홍콩에서 번갈아 개최하던 그 모임에서 이처럼 좋은 사귐과 예배하는 기쁨이 있었지만, 제가 생각하는 큰 결핍은 각 국가가 서로 얽혀있는 근세사와 군사·정치적 대결 구도에 대한 얕은 이해, 특히 미국 그리스도인들이 동아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인지조차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같은 결핍을 느껴온 참석자들의 제안이 있었고, 이인엽 교수(미국 테네시 텍)가 헌신하여 10회째부터는 그 주제 세션이 만들어졌으며, 최초 제안자이자 주최 측인 크리스 라이스가 2023년 7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Why US Christians Must Wrestle with a Korea Divided in Two’(왜 미국 기독교인들은 분단된 한국을 외면하면 안 되는가?)3)라는 기사를 기고하여 한반도에 대한 미국인들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2023년 집회에 처음 참석한 일본 청년 야마사키 치히로는 이인엽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그와 밤이 깊도록 토론했으며, 파주 실향민 묘지와 북한군 묘지를 함께 다녀온 다음 날 오전에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몇몇 참석자들이 그를 안아주려고 줄을 섰으며, 그는 이 집회 테마 중 하나인 희망(HOPE)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4) 제게는 돌아가신 세키타 히로오 목사님의 후대 열매로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평화를 이루려는 시민들의 국제 연대는 충돌을 예방하는 화해, 친밀로부터 핵 위기를 가라앉히는 상상 이상의 성과까지 기대하게 합니다.
2024년 한반도 위기, 그릇된 판단과 ‘억제력의 최면’
2024년 1월 11일, 오랫동안 한반도 문제에 관여했던 미국 전문가 3인이 일제히 전쟁 위험을 경고하기 시작했습니다. 핵 과학자로 2004년부터 매년 북의 핵 시설을 방문하고, 그 결과를 백악관과 의회에 보고해왔던 시그프리드 헤커(Siegfried S. Hecker)와 CIA 분석관으로 북한과의 협상 경험만 수백 시간에 달하는 로버트 칼린(Robert L. Carlin), 그리고 1994년 북미 제네바 회담 주역이었던 전 미국 국무부 북핵 특사 로버트 갈루치(Robert Gallucci, 현 조지타운대 명예교수)입니다. 헤커 박사와 로버트 칼린은 공동 기고, 갈루치는 단독 기고였습니다.
세 분의 공통점은 안보에 관한 국제적 형편과 북한 타임라인을 면밀하게 독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선도하는 ‘억지’(deterrence)와 제재 중심의 대북 정책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 특사는 “2024년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최소한 염두에는 둬야 한다”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비핵화는 장기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5)
헤커·칼린의 공동 기고(2건)는 전쟁 위험(혹은 임박)의 근거로 ①1990년 김일성으로부터 삼대, 33년에 걸쳐 추진한 대미 관계 정상화의 절망(북한의 사고 구조 변화) ②국제 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미국의 쇠퇴, 북·러 군사 협력), ③남북 관계에서 민족을 폐기하고 ‘교전국 관계’(전쟁 중)로 규정(2023.12.30.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서) ④“동맹의 힘을 맹신하며 “억제력”(보복 응징)을 강조하는 미국과 한국의 대북 태세”6)등을 꼽았습니다. 이 중 ④에 대해서는 북한을 자극하여 그릇된 판단을 부추기면서도, 북한이 전면 도발하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품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한 태도를 ‘억제력 최면’(Hypnotized by “Deterrence”)이라고 표현합니다.
2023년 4월 남북 간 군 통신선 불통 상태가 보도됐고, 이후 재개 사실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불통 상태에서 군사훈련이 계속된다면, 상호 오인에 의한 우발적 비상사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커 박사는 평소 ‘비핵화’가 시작 시점으로부터 최소 15년 이상 걸리는 지난한 과정이며, 직접 제조한 핵 과학자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해왔습니다. 북핵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정책 지향이자 대외적 구호와 같은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ing)는 협상의 조건 혹은 단기적 목표일 수 없는데도 마치 그런 것처럼 제시됩니다. 존 볼턴이 2018년 하노이 노딜을 끌어낸 전략은 국무부의 ‘스몰딜’ 전략을 폐기하도록 하고 ‘빅딜’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를 관철한 것이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그해 4월 워싱턴을 방문한 故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있었습니다.7) 신기하게도 이 개념은 더 실현 가능한 수정 제안(dismantling → abandonment)이 나와도 제자리로 돌아가곤 합니다.8) 최종 목표이자 ‘꿈’ 수준의 비전을 전제 조건 혹은 중간 단계처럼 내세우는 것은 과정의 선후를 뒤바꾸어 결국 설득 과정을 부정하고, 협상을 망가뜨리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대 관계인 상대방을 모욕하여 협력 의지를 버리도록 유도하고, 전문 지식이 없는 대중들로 하여금 지루한 협상 과정에 피로감을 느끼게 하려는 목적으로 추정됩니다.
대화에서 대결로
북한의 태도 변화는 2018년 하노이 회담 결렬에서 촉발되었습니다. 2024년 11월 미국 대선 결과가 큰 변수지만, 만일 다시 북미 회담이 열린다면 2018년의 몸값이 아닐 것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집권 초기만 해도 김정은과 대화할 것이냐는 기자들 질문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지만, 북한의 미사일 사거리가 1만 2천 킬로미터를 넘기자 미국은 2023년에만 일곱 차례 북한에 대화를 촉구했습니다.9) 북은 변칙적 기동성을 가지며 마하 10 이상 극초음속 미사일을 고체 연료로 발사할 능력을 갖췄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는 THAAD, 킬 체인 등으로 불리는 기존 미사일 방어 체제로는 요격 시도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반론도 있습니다만,10) 미사일 방어 체계를 발명하고 배치한 미 국방부가 2015년까지도 신뢰성이 불완전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11) 물론 최신 군사정보는 공개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변곡점에 미국이 내리는 기민한 판단과 대응을 관찰하여 정세 판단을 해야 합니다. 바이든 행정부도 기대가 크지 않겠지만, 북이 임기 말 재선 가능성이 낮은 정상과 대화를 시작할 것 같지 않고, 지상과 해상에서의 한·미 혹은 한·미·일 군사 연습이라는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주어지고 있기에 2024년은 연중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신냉전’으로 보이는 북·중·러 관계
북이 군사적 모험이라는 선택지를 꺼내 들거나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국제 정세 인식(앞 절의 ②)은 202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미국의 쇠퇴’로, 미국의 대중국 견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제 환경으로 파악한 데서 기인합니다.
미군이 그들의 협력자들과 최소 72억 달러(약 9조 5천억 원)에 이르는 군사 장비를 버리고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은 곧 탈레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미국이 20년간 아프간군에 지원한 무기는 186억 달러(약 24조 5천억 원)였으며,12) 전쟁 비용은 2조 달러(약 2천 338조 원) 이상, 희생자 약 17만 명 중 대부분은 아프간 민간인과 탈레반, 정부군이지만 미군 및 미 직원 6,294명, 나토(NATO) 동맹군 1,144명의 희생을 치렀고 전쟁 비용과 그 이자는 다음 세대까지 갚아야 합니다.13)
대중국 견제(rivalry)는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해야 했던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으로 시작됐으나, 바이든 재선 전략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안보 문제와 결합된 상태로 일본과 한국에도 강요되었습니다. 정작 미국 대표 상품인 애플과 테슬라는 중국이 세계 1위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윤석열 정부가 ‘탈중국’ 기조를 충실히 따른 나머지, 가장 비중이 큰 수출 상품인 반도체의 중화권 수출이 급감했습니다. 서방과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고, 북핵도 환영하지 않는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2022년 6월,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따른 UN 안보리 대북 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14)
나토 동진과 젤렌스키의 언어 도발로 촉발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더해져 북·중·러를 마치 냉전 시기와 같은 유사 삼각동맹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15) 포탄이 모자랐던 미국과 러시아는 각각 대한민국과 북한에 포탄 공급을 요구했고, 우리가 보낸 155밀리미터 포탄의 양은 유럽 전체 공급량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크라이나 전장에서는 남한제 포탄과 북한제 포탄이 서로 불을 뿜고 있습니다.16) 러시아는 2023년 4월부터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공급에 ‘보복’을 경고했었고,17) 9월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김정은과 만난 푸틴은 북한의 ‘위성 개발을 돕겠다’ 말했으며, 11월에 북은 5월과 8월 두 차례 실패했던 정찰위성 ‘만리경 1호’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북은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때 핵과 투발 수단을 개발하고 협상 중에는 멈추는, 누구라도 예측 가능한 군사적 생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투발 수단의 기술적 난점들을 러시아 지원으로 해결해나갈 수 있는 환경입니다. 아직 그 수준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당국이 대화를 촉구하는 것에는 북한이 2023년 2월에 이미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의 대기권 재진입 기술까지 갖췄다고 진단했기에,18) 협상을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북한을 돌려세울 협상력은 고갈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 말 것, 반드시 할 것
먼저, 북은 판단을 재고하길 바랍니다. 미국은 과거에도 돈을 쏟아붓는 스타일로 전쟁을 수행하고, 실패한 경우가 많았지만, 다시 돈을 찍어내서 그다음 전쟁을 수행하곤 합니다. 그로 인한 인플레나 공황에 가까운 피해를 지구 다른 곳으로 전가하는 기술도 뛰어납니다. 남한을 교전 상대국으로 규정하는 일도 북한 스스로를 포함해 모두에게 해롭습니다. 너무나 잘 알다시피 핵전쟁은 공멸을 뜻하고, 재래식 군사력은 대한민국이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19)입니다. 한반도에서 어떤 형태로 전쟁이 일어나든 모두 패배하며, 명목상 승자가 살아남아도 전리품은 핵겨울 같은 폐허뿐입니다. 같은 민족인지 아닌지는 한반도 거민들의 집단적 의식에 있는 것이지 수령이나 지도부의 전략적 판단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김정은 총비서는 그 어머니 쪽 뿌리가 왜 제주도인지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한국민들은 ‘선제 타격’이라는 외마디를 선출해놓고 노심초사하게 된 처지입니다. 미국은 어떤 낭비가 벌어져도 실패하지 않는 신비한 체제이지만, 작전에는 어처구니없이 실패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처참한 희생은 미국을 믿고 따르던 체제의 거민들이 치르게 됩니다. 한국 정치꾼들이 강대국의 힘을 과신하고 선거 때 자극적 언사를 남발하는 것은 인간 안보 개념뿐 아니라 최소한의 안보 합리성도 갖추지 못했다고 자백하는 꼴입니다. 앞으로 정치권력을 꿈꾸는 누구라도,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도 숙고와 절제, 냉철한 판단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로잔 서울대회, 평화 시민의 국제 연대 되길
선교와 평화, 상호 연관되기도 하고 구분되기도 하는 두 열정이 1918년생 동갑내기 문익환 목사님과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평양으로 이끌었습니다. 2024년 로잔 서울대회의 한국 리더십들은 흔히 ‘진보’나 ‘친북’으로 낙인찍혔던 문 목사님보다 ‘로잔운동 창립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더 친근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20) 그래도 좋습니다. 선교적 열정도 평화의 도구로 자신을 내어주는 데 이를 수 있다는 역사적 증거에 공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처럼 사람이 당대에 큰 위기 한 건을 막을 수 있다면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로잔 서울대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각각 보내심을 받은 곳에서 자기 체제가 평화에 기여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이길 원합니다. 국내·국제 정치와 전쟁, 그리고 역사와 평화에 관한 지식을 나누고 자신들 앞 세대와 당대를 대표하여 사죄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자리가 된다면 기쁨과 영광의 큰일이 될 것입니다.
저도 참여하고 있습니다만,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본 대회에 앞서 2024년 9월 20-21일, 로잔대회 참석자들과 원하는 분들을 초청하여 DMZ 투어와 예배, 한반도 문제에 대한 컨설테이션을 준비 중입니다.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북한이 고향인 그리스도인, 분단 이전 한반도에 선교사로 왔던 가족들, 최근까지 평양에서 활동했던 분들의 증언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나누며 아픔의 현장을 밟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전쟁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진단을 내리면서, 금년에 결혼 30주년 여행을 계획하고, 9월에 수백 명을 초청할 로잔 NK컨설테이션을 위해 강사와 스태프들의 헌신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행동은 일견 모순 같지만 종말론적 신앙의 결과이며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봅니다.
전쟁은 예측할 것이 아니라 막아내는 것이며, 사는 날 동안 그 위험을 끊임없이 낮추는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로잔대회에 모이게 될 수천 명의 ‘인플루언서’들이 각 소속 국가에서 가진 정치적 권리를 활용하여 ‘인간 안보’에 부합하는 합리성을 갖추고 지구 전체에 대한 평화의 책임을 다하는 정치권력을 유지하도록 노력한다면, 우리 당대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평화의 성령께서(엡 4:3) 2024년 로잔 서울대회를 그렇게 사용하시길 기도합니다.
1)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영구 평화론: 하나의 철학적 기획》(서광사, 2008).
2) 이후 제네바 합의로 추진된 경수로가 완성되지 못했고 북핵 위기는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이는 또 다른 장애물을 발견한 계기로 본다. (이창기, ‘소천한 빌리 그레이엄과 김일성 주석’, 〈자주시보〉, 2018.2.3.)
3) Chris Rice, ‘Why US Christians Must Wrestle with a Korea Divided in Two’, 〈Christianity Today〉(2023.7.26.) ; 같은 매체 한국판 동시 기고.
4) 본지 2023년 7월호(393호) ‘사람과상황’(‘자국 중심의 기억’을 넘어서 ― 제10회 ‘동북아시아 화해를 위한 크리스천 포럼’ 참가자 인터뷰) 참조.
5) 조기원, ‘미국 전 북핵특사 “2024년 동북아 핵전쟁 날 수 있다”’, 〈한겨레〉(2024.1.20.) ; 인용 원문은 다음을 참조하라. Robert Gallucci, ‘Is Diplomacy Between the U.S. and North Korea Possible in 2024?’, 〈The National Interest〉(2024.1.11.)
6) 김진호, “북한, 전쟁 결정했다. 한미는 ‘억제력 최면’ 걸려있다”, 〈민들레뉴스〉(2024.1.16.)
7) 존 볼턴, 박산호·김동규·황선영 옮김, 《그 일이 일어난 방: 존 볼턴의 백악관 회고록》(시사저널, 2020), 469·491-499쪽.
8) 2021년과 2023년 G7 문건들에 북핵 ‘CVID’이 아닌 ‘CVIA’라는 표현이 등장한다(CVIA: 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Abandonment). ‘포기’는 당사자의 주도적·능동적 역할을 부각하여 굴욕적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표현으로 보인다. (Minah Kang, ‘NK Update for May 2023’, 〈Global NK〉, 2023.6.16.)
9) 박원곤·이중구, ‘[미중 핵 대타협 스페셜리포트] ⑥ 한반도 비핵화안보구상과 미중협력’, EAI 동아시아연구원(2023.8.22.) 외 전문가들 견해 종합.
10) 권혁철, ‘‘평양→서울 1분컷’ 북한 극초음속 미사일…정말 무적일까’, 〈한겨레〉(2024.1.19.)
11) 손제민, ‘美국방부 “사드 신뢰성 아직 불완전”’, 〈경향신문〉(2015.3.30.)
12) 선명수, ‘미군, 아프간 철수 때 두고 온 군사장비 최소 9.5조원 규모’, 〈경향신문〉(2023.2.28.)
13) 김지연, ‘사망 17만명·2천조원 투입…숫자로 본 미국의 아프간 참전’, 〈연합뉴스〉(2021.8.15.)
14) ‘한미-북중러, 유엔서 ‘대북제재’ 놓고 팽팽한 신경전’, BBC NEWS 코리아(2022.6.9.)
15) 나토 동진은 반드시 러시아와의 충돌을 유발할 것이라는 시각은 시카고대 미어샤이머 교수의 오랜 진단이다. (최준영, “우크라 실질적 나토국 역할…서방 잘못이 러의 침공 불렀다”, 〈서울신문〉, 2022.3.30.)
16) 김홍범, ‘WP “우크라 보내진 한국 155mm 포탄, 유럽 전체보다 많다”’, 〈중앙일보〉(2023.12.5.)
17) 신기섭, ‘러 “한국의 우크라 무기공급은 전쟁 개입”…사실상 보복 경고’, 〈한겨레〉(2023.4.20.)
18) ‘[미사일 전문가 인터뷰] 마커스 실러 “북한 ICBM 재진입기술 갖춰…외부 지원으로 초고속 개발”’, VOA(2023.2.23.)
19) 오수진, “한국 군사력 세계 5위…북한은 34위→36위로 하락”, 〈연합뉴스〉(2024.1.19.)
20) 문익환 목사 방북은 당시 진보 진영에서도 비판이 나올 정도로 파격적이었지만, 이후 남북 정상회담과 6·15 선언으로 계승되었고,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올바른 남북협력의 방향을 제시”(이남주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늦봄 방북 20년, 통일운동의 성찰과 전망’, 2009)했고, “그 실제 내용에서는 김일성을 설득한 것이 대부분”(이승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 ‘민주는 통일이고 통일은 민주다’, 2009)이었다. (최성진,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지 않았다면’, 〈한겨레21〉, 826호, 2010.9.3.)
윤환철
기독 시민 활동가이며, 〈복음과상황〉, 사단법인 남북나눔운동, 한반도평화연구원(KPI)에서 일했다. 북한과 경제협력, 인도적 지원, 개발 협력을 진행하는 실무자로서 평양, 신의주, 개성 등지를 왕래했다. 성공회대에서 NGO를, 연세대에서 통일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으로 탈북민 대학생의 학업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