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대답

[401호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

2024-03-31     정다운

우리는 우리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큰 답(이 답은 실은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를 무가치해 보이게 만드는 답이다)에 다다르기를 열망해야 하며, 그럴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 답은 우리 자신의 갈망, 분투, 내적 노력으로는 거둘 수 없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 칼 바르트,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대답이다.
이는 그가 우리의 영원한 질문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어떻게 그를 없애야 뒤탈이 없을까?’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고민하고 있다. 예수를 제거하는 것이 공동체에 유익하다는 판단은 내려진 터다. ‘그는 여러 번 선을 넘었다. 무언가를 물을 때마다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중요한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해 초점을 흐렸다. 우리의 기도를 ‘남에게 보이려는 일’이라고 모욕했다. 성전에서 일으킨 소란은 또 어떻고. 그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가? 그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울리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지. 그처럼 거짓된 가르침을 설파하는 사기꾼이 어쩌면 세속적인 로마인들보다 더 위험하다. 문제는 군중이다. 그에게 현혹된 사람이 많다. 군중의 방향을 돌려야 뒤탈이 없을 텐데.’

고민하던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날아든다. 예수의 최측근인 유다가 자신들과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해온 것이다. ‘좋은 신호다. 그러면 일이 한결 수월해지리라. 예수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고, 예수가 군중과 함께 있지 않을 때를 노릴 수 있을 테니.’

유다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다. 고심 끝에 그들을 돕기로 했다. ‘그들이 하는 일들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아마 나를 이용하는 것일 테지. 그렇지만 예수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이룰 나라를 고대했었는데. 이제 그 기대를 접을 때가 온 것 같다. 한심한 일이다. 예수가 말하는 식으로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고작 아픈 사람들 몇 명 고쳐주고는 하나님 나라가 왔다니. 그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독 아닌가. 하나님의 통치는 그보다 더 강하고 위대한 것이란 말이다.’

 

이렇게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들이 고조되는 동안, 예수는 평화로이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물론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스승이 보통 사람이던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쳤는지, 어떻게 적은 음식으로 무리를 먹이는지 보지 않았나. 이번 유월절 음식도 그가 이야기한 대로 하니 별 탈 없이 준비되었고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스승이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것이 내 마지막 유월절 식사가 될 것이다.” 그러고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비슷한 말을 또 한다. “이것을 받아 함께 나누어 마셔라.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 이 식탁에 나를 넘겨줄 이의 손이 함께 있다. 이 일은 일어나야 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지만,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웅성댄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거지?”1) 그러나 말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그들은 잠시 웅성대다 원래의 관심 주제로 돌아간다.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은 제자일까, 누가 스승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을까, 후에 일이 잘 풀리면 누구의 공을 가장 높게 칠까. 급기야는 그 문제로 말다툼을 벌인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고 제자들에게도 일러주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을 것이라는 폭로에도 잠시 우왕좌왕하다 본래 그들의 관심사로 돌아갈 뿐이다. 예수를 향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이글대는 적대감, 그의 죽음을 위한 차가운 모의, 그리고 화룡점정인 유다의 배신…. 이 밤, 태양 없는 어둠보다 더욱 깊은 암흑이 예수를 에워싸고 있다. 그는 이 모든 어두운 모략과 배신과 무지의 한복판에서 홀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흔히 우리는 대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 유다 같은 이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당들로, 제자들은 당시에는 좀 어리석었던 인물로 (그러나 성령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되는 미래를 참작해보면, 극악한 악당은 아닌 이들로) 여긴다. 은연중에 스스로를 대제사장이나 율법학자 무리, 감히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 같은 이보다는 제자들에 가깝다고 느끼면서. 그럴 수 있다. 어쩌면 복음서 저자들이 이를 의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복음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들 모두, 예수를 제외한 모두와 아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제자이지만, 대제사장이고 율법학자이며 무엇보다 유다다.

우리는 제자들이다. 우리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내 일신상의 문제에 몰두한다. 우리는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누군가의 손에 박힌 못보다 아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동료 인간이 중대한 운명의 기로에 서있는 순간에도 금세 관심이 ‘나’에게로 옮겨간다. ‘저 사람이 메시아로 우뚝 서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 ‘공정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을 마땅하게 여긴다.

우리는 대제사장이고 율법학자다. 그들의 시선에서 예수는 ‘선을 넘은’ 자였다. 같은 경전을 보고 같은 하나님을 고백한다고 했으나, 예수는 오래도록 지켜온 유대 전통에서 포용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었다. 우리는 그처럼 우리와 다른 신념을 표현하는 이들을 얼마나 쉽게 악마화하는가. 게다가 그가 우리를 공개적으로 저격하기까지 한다면?

무엇보다, 우리는 유다다. 우리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전개되는 삶에 낙담하고 휘청인다. 온 마음을 다해 바랐던 일이 무산되어 슬퍼한다. 간절한 소원이 좌절되어 무너진다. 그렇게 큰 기대는 종종 큰 실망을 낳는다. 그리고 우울로, 혹은 분노로 이어진다. (심리학이 공언하는바 우울은 분노의 다른 이름이다.) 분노는 본질상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아 헤맨다.

우리는 우리의 시기와 증오를 그럴듯한 이유로 포장하는 대제사장, 율법학자고, 일신의 안위에 골몰하는 제자들이며, 기대를 배반한 삶에 낙담하고 분노하는 유다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이야기에서 진정 이해되지 않는 이, 이해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불가해함의 근원, 그는 예수다.

 

예수는 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적의와 증오를 안다. 제자들의 사사로운 욕심과 무지를 안다. 유다의 실망, 그 실망에서 자라나는 배신의 씨앗을 안다.

또한 예수는 깊은 사랑으로, 유다에게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구원자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메시아가 예수 자신과 다름을 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유다의 실망을 알았다.

예수와 유다 사이에는 3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유다에게 예수를 알 기회였지만, 예수도 유다에게 자신을 보일 기회, 그가 바라는 정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의를, 참된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를 보일 기회였다.

상대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사랑을 준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미지의 가능성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다. 상대는 언제나 주는 사랑을 받을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가르침을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주어지는 기회를 잡을 수도, 그것을 기회라 여기지 않고 버릴 수도 있다. ‘자아’라는 좁은 감옥에 갇힐 수도, 세상과 하나님을 향해 자아를 열고 새로이 거듭날 수도 있다.

예수는 그런 면에서 유다라는 ‘미지의 가능성’에 자신을 던졌으며, 그렇게 ‘모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아시며 또한 모르신다. 그는 전능하시며 또한 무력하시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우리의, 인류의 영원한 대답이라 고백한다. 이 고백은, 실은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질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알고 있는 것보다 못한 무엇이 아니라 더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는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모르겠는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우리가 이해하는 만큼의 세계보다 더한 것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질문한다.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질문인 것은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가, 그의 사랑이 우리의 이해를 무한히 넘어서기 때문에. 그 완전한 사랑이 오늘 여기, 우리의 누추한 삶으로 들어오신다. 가장 깊은 사랑은 언제나 깊은 질문을 부른다. 그렇게 그의 영원한 사랑은 우리의 모든 갈망, 모든 기쁨과 슬픔, 모든 희망과 절망에 답이 되어 우리의 가장 깊은 질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우리의 영원한 대답이 된다.

■ 주

1)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누가복음 22장에 기반하여 재구성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예수께서 배신이 있을 것을 예고하실 때 ‘나는 아니지요?’ 묻고(마 26:22, 막 14:19), 요한복음에는 그런 질문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