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기독교 국가 건설의 이상과 현실, 그 간극
[401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한국기독교를 만든 증인들]
〈건국전쟁〉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3월 12일 현재, 전국 주요 극장에는 이승만(李承晚, 1875-1965) 대통령을 재평가하자는 의도로 김덕영이 감독한 역사 다큐멘터리 〈건국전쟁: 대한민국의 탄생, 그 비밀의 문이 열립니다〉가 상영되고 있다. 2월 1일에 개봉한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필름으로는 이례적이게도, 개봉 한 달 정도 지난 3월 11일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가 114만 명(1,144,477명)을 넘었다. 이 기록은 현재 2017년 5월 25일에 상영을 시작하여 약 7개월이 지난 12월 15일에 최종 관객 수 185만 명(1,855,149명)을 달성하고 종영한 이창재 감독의 〈노무현입니다〉에 이어, 정치 다큐멘터리로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흥행 성적이다.
다큐멘터리의 한국어 제목과 소제목, 그리고 영어 제목 ‘The Birth of Korea’에서도 알 수 있듯,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한 목적은 분명하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즉 ‘건국’한 국부(國父)라는 주장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제목에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이처럼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 정계와 학계, 일반 국민이 정치 성향에 따라 첨예하게 나뉘어, 거의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과열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주제다.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일본 식민지 상태와 북한 공산 정권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키고 지켜낸 독립 영웅이자 국부라는 한쪽의 평가, 권력욕에 눈먼 지독한 독재자이자 남북 분단의 원흉이라는 다른 한쪽의 평가 중, 첫 번째 평가에 힘을 실어주려 한다. 이는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지난 수십 년간 부정적인 방향으로 과도하게 치우쳐 있었다고 감독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그가 권력에 눈먼 독재자라는 인상은 상당 기간 대중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1980년대에 한국사 학계 전반에 유행한 수정주의적 해석, 1990년대 말부터 세 차례의 진보 정권(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장도 반공 우익 정치인이었던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더 부정적으로 만든 또 다른 요인이었다.
정치인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를 건국 대통령이자 국부, 한국근대사 제일의 영웅으로 찬양하는 진영이나, 친일파 미청산과 분단의 원흉, 권력욕의 화신으로 비난하는 진영 모두 역사 자료와 문헌을 충분히 활용하며, 나름의 논리와 근거를 통해서 그런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어떤 인물, 사건, 조직, 행동 등을 평가하기 위해 활용하는 사료는 수집자, 해석자, 기록자에 의해서 언제든 의도에 맞게 편집되며, 심지어 악의적으로 조작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현대사를 대표하는 유명한 인물의 정치인으로서 면모를 평가하는 글이 〈복음과상황〉 지면에 하나 더 등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기독교인으로서 이승만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독립운동가와 정치인 정체성으로 대변되는 인물인 만큼, 그의 기독교 입교와 신앙적 확신이 독립운동, 정치사상 및 활동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데 집중하려 한다.1)
개화파 청년의 기독교 입교
이승만의 기독교 입교는 구한말 개항 이후 조선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던 와중에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1875년에 황해도 평산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6대 독자로 태어났다. 가문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에 속한 왕족이었지만 7대조 이래 벼슬을 얻지 못해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세 살 때 집안이 서울로 이사한 이후, 청소년기 이승만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서당에 다니며 동양 고전과 역사서를 공부했다. 그러나 열두 살 이후 매년 치른 과거에 번번이 낙방했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는 전통적인 입신양명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 근대 전환기를 살았던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개항과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조선은 1894년에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을 겪으면서 마침내 과거제도를 폐지했다. 20세가 된 1895년 4월에 이승만은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영어를 비롯한 서양 학문을 접했다. 여기서 그는 평생의 동지가 될 서재필(1864-1951)을 스승으로 만났다. 당시 서재필은 1884년에 일어났다 3일 만에 실패한 갑신정변 연루자로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의사 자격과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1895년 12월에 귀국했다. 서재필이 이승만에게 알려준 미국 민주주의는 이후 이승만이 꿈꾼 현실 정치의 이상이 되었다.
배재학당에서 발군의 영어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난 이승만은 2년 뒤 종업식에서 600여 명의 내빈 앞에서 ‘조선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당시 참여한 내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아마도 이 장면이 앞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가이자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될 이승만의 첫 출정식이었다. 배재학당 교육을 마친 이승만은 이듬해 4월에 〈매일신문〉, 8월에 〈제국신문〉을 차례로 창간하여 사장, 편집자, 기자로 활동했다.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서서 자유, 평등, 민권, 국권 등 민주주의 가치를 외치고 수구적 정부를 비판했다. 러시아의 절영도(부산 영도) 조차(租借) 요구를 비판했고, 공화제를 주장하다 체포된 독립협회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런 활약이 정부 인사들 눈에 띄어, 23세이던 1898년 11월 28일에 그는 고종 황제가 설립한 중추원에 의관으로 임명되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국회의원이 된 셈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대한제국과 고종의 기준에서 보면, 이승만은 급진개혁파였다. 고종은 결국 12월 25일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고, 이승만도 의관직에서 파직했다. 파직된 그는 고종을 퇴위시킨 후 의화군 이강을 새 군주로 옹위하여 입헌군주제를 시행하고자 했던 박영효 일파의 혁명 공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 공모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그는 체포되어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체포, 고문, 재판, 수감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겪은 그는 한성감옥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 배재학당에 다니며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배웠기에, 그가 감옥에서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배재학당 시절의 그는 선교사들과 교류하고, 성경을 배우고 교회에도 나갔지만,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벙커뿐 아니라, 장로교의 언더우드, 게일, 헐버트 같은 선교사들도 이승만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또한 정기적으로 감옥 심방을 하고, 기독교책과 교양서적을 넣어주었는데, 이렇게 한성감옥에 도서실과 학교가 마련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기독교 신앙에 지적으로 동의했고, 영적으로도 깊은 체험을 했다. 투옥 기간에 그는 열렬한 감옥 전도자가 되었다. 1902-1903년 어간에 이승만을 비롯해, 이원긍·이상재·신흥우·김정식·유성준 등 당시 개화 지식인들이 대거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내내 YMCA와 언론을 중심으로 자강운동, 계몽운동, 농촌운동, 학생운동 등을 이끄는 민족 지도자들이 된다.
독립운동가의 탄생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이승만은 고종이 내린 특사로, 투옥된 지 5년 7개월이 지난 1904년 8월에 석방되었다. 그가 풀려난 시기에는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고종의 측근이자 친미파 정치인 민영환과 한규설은, 영어를 잘하는 데다 정치와 외교를 잘 이해하고 있던 이승만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과 만나,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근거하여, 러일전쟁 종결 후 대한제국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대통령과 친한파 하원의원 등을 대상으로 로비에 들어갔으나 그의 외교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은 1905년 8월 4일에 대통령을 만나,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유지를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7월 27일에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가 미국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에 대한 합의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었다. 그러나 이 실패 경험은 일제강점기 내내 미국 정계를 상대로 집요하게 한국의 독립 문제를 상정하고 협조를 구하는 외교 전문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만드는 계기였다.
이승만은 바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서 정규 학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조지 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에서 차례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며 서양사, 국제법, 정치학, 외교학을 공부한 그는, 이 모두를 5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 지었다. 프린스턴에서 받은 박사학위 제목은 ‘미국 영향으로서의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었는데, 1910년 여름 졸업식에서 그는 우드로 윌슨 총장에게서 학위증을 수여받았다. 정치학자 윌슨은 이듬해에 정치가로 변신하여 뉴저지 주지사가 되었고, 이어서 2년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된다. 35세의 국제정치학 박사 이승만은 이렇게 미국 학계와 정계에 영향력 있는 관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05인 사건과 《한국교회핍박》
‘이 박사’는 그해 가을에 귀국했다. 그러나 조국은 더 이상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8월 29일부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당시 한국에는 미 동북부 아이비리그 출신의 정치학 박사 이승만이 활동할 학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적 의미의 첫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이 1924년에야 설립되고, 사립 전문학교도 1905년부터 대학부를 운영하던 평양 숭실전문뿐이었다. 이승만은 숭실전문 대신 모교 배재학당이 뿌리인 황성YMCA(황성기독교청년회)를 선택했다. 1844년에 영국에서 기독 청년들의 전도 및 사회운동 단체로 설립된 YMCA는 한국에서는 1901년 배재학당에 처음 설립된 후 1903년에 황성YMCA로 확장되었다. 이승만이 귀국한 1910년은 YMCA가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조직 확대를 꾀하려던 시기였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부터 황성YMCA 청년학관 학감으로 임명되어, 뉴욕의 YMCA 국제위원회에서 주는 봉급을 받으며 YMCA 전국 조직 구축을 주도했다. 이후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과 조직 구성 활동을 벌였는데, 이 시기 YMCA는 일제에 저항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핵심 활동 무대였다. 교육자 윤치호, 한성감옥에서 이승만과 함께 기독교에 입교한 이상재·신흥우 등이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YMCA를 이끈 대표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병합한 직후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던 총독부는 YMCA, 신민회를 포함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선교사들의 활동을 일종의 독립운동 모의로 판단했다. 그 결과 총독부가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 헌병경찰은 1911년 10월부터 서울·평양·선천의 기독교 지도자 700여 명을 총독 암살 모의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였다. 1심 판결에서 실제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한 이가 105명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흔히 ‘105인 사건’으로 불린다. 이승만도 일제의 체포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울 YMCA 총무 필립 질레트, 서울에 온 YMCA 국제 지도자 존 모트가 개입하여 체포를 면했다. 위기를 모면한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니애폴리스 감리교 총회에 참석한 후 당시 뉴저지 주지사였던 스승 윌슨을 찾아가 105인 사건을 설명했다. 윌슨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있었기에 이승만은 윌슨에게 선거 유세 중에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윌슨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1년 정도 지난 1913년 3월에 이승만은 당시 선교사들이 쓴 여러 글, 미국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기사, 미국 교단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이 사건에 대한 책을 한 권 발간한다. 바로 《한국교회핍박》이다. 즉,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단순히 독립운동을 벌인 한국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소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비약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 선교사들에 대한 핍박으로 이해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 기독교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원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몇 가지 제시한다. 첫째, 일제 통치하에서 교회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몇 안 되는 공간이므로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할 수 있다. 둘째, 교인들의 왕성한 활동력이 나라를 잃고 무기력해진 백성을 일깨운다. 셋째, 교인은 교회에서 신앙으로 합심하므로, 분열된 백성도 신앙으로 하나 되게 할 수 있다. 넷째, 교회는 청년교육으로 지식이 곧 힘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 미래 세대를 일깨운다. 다섯째, 덕성과 정의를 가진 뛰어난 선교사들의 영향이 한국민에게 전달된다. 여섯째, 기독교를 통해 독재와 압제에 굴하지 않는 독립과 혁명 정신이 함양된다.2) 이 책은 기독교가 민족중흥과 국가 번영의 기초임을 38세인 이승만이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망할 때까지 이런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해방 정국과 대통령 임기 중에 보여준 기독교 국가 건설 비전은 젊은 시절에 확립되어 있었다.
망명 독립운동가: 하와이, 상하이, 워싱턴
한일강제병합 직후에 105인 사건이 벌어진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하와이에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승만은 1945년 해방이 올 때까지 주로 세 영역 사이를 쉼 없이 오가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해외 한인 디아스포라 (기독교인) 공동체, 한인 독립운동 조직, 미국 및 서구 정치 외교 무대가 바로 그 세 영역이었다.
윌슨에게 실망한 이승만은 네브래스카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개설하여 무장투쟁 노선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박용만을 찾아갔다. 그는 한성감옥에서 이승만과 의형제 결의를 하기도 했다. 박용만과 상의한 후, 이승만은 하와이로 이동했다. 당시 하와이에는 1902년부터 1905년 사이에 이주해서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일하던 한인 약 4,500명이 있었다. 이들의 하와이 이주를 주도한 인물이 감리회 선교사 히버 존스였으므로, 하와이 한인 디아스포라의 구심점도 감리교회였다. 이승만은 도착 직후 북감리교 선교회가 운영하던 한인 소년 기숙학교 교장을 맡아 남녀공학으로 개편했고, 〈태평양잡지〉라는 국문 잡지도 창간했다.
하와이는 이승만이 처음으로 망명 독립운동 지도자로 자리를 잡으며 명성을 떨치게 만든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이후에도 계속 갈등하는 정적 집단을 만든 첫 공간이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산하의 하와이국민회는 당시 해외 최대의 한인 단체로, 하와이 한인들이 내는 의무금과 기부금으로 한인 교육, 출판, 복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와이국민회 지도부가 재정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쇄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김종학을 비롯한 지도부 및 김종학이 지지하던 박용만과 마찰을 겪게 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이 갈등은 이듬해에 ‘1915년의 풍파’라는 사건으로 확장되지만,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하와이국민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서 북감리회와의 관계도 단절하고, 독자적으로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여 기본 교과과정에 한국사와 한글을 추가해서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학교교육을 실시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선교회와는 관계없는 신립교회(한인기독교회)를 새로 세웠다. 하와이 한인 사회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기존의 북감리회 소속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 신자 다수가 이승만의 새 교회로 이동했다. 결국 일련의 사태로 하와이 한인 사회가 둘로 분열되었고, 이승만은 기존 지도자인 김종학·박용만과 원수가 되었다. 이승만에 대한 후대의 부정적인 평가, 즉 교활하고 잔인무도하고 권력욕에 찌든 독재자라는 비판이 구체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 하와이였다.
1918년 11월에 독일이 항복하면서 1차 대전이 종결되었다. 그러자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회장 안창호는 이승만과 정한경을 1919년 1월에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하면서, 이들의 파리행은 좌절되었다.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2월에 당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던 은사 서재필을 찾아갔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4월 중순에 3일 동안 대한인총대표회의를 열었는데, 150여 명이 참여한 이 대회는 3·1 운동 직후 해외에서 열린 한국인들의 집회 중 가장 규모가 컸다. 같은 시기에 상하이에서 개최된 임시정부 1차 임시의정원 회의와 함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서재필이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건국)종지(宗旨)’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한국인의 목적과 열망〉이라는 결의문이 발표되었다. 이 결의문에 “미국의 정치체제를 본뜬 정부를 갖기 원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대통령제 공화국을 의미한다. 1948년에 한국에서 세워지는 정부 청사진의 씨앗이었다. 대회 마지막 날에 참여자들은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까지 행진한 후, 이승만이 선창하며 “대한공화국 만세”와 “미국 만세”를 외쳤다.
하와이와 필라델피아에 이은 이승만의 다음 무대는 상하이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 한국에서 상하이로 망명한 인사들은 4월 1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했다. 이때 상하이임시정부는 미국에 있던 44세의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4월 23일에 서울에서 만들어진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선출했다. 6월에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이때부터 서구 국가들에 대한공화국(대한민국)의 탄생을 알리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내면서, 자신을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 8월에는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직권으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립했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이 기관을 중심으로 영문 잡지 〈대한평론〉(The Korea Review)을 발행하고, 한국의 정치 상황을 알리는 여러 책자도 냈다. 서재필에게 도움을 받아 미국 도시들과 런던·파리 등에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서구 정계와 학계, 교계, 언론계 사람들을 친한(親韓) 인사로 끌어들였다. 1921년 당시 한국친우회에 가입된 회원 수는 2만 5천 명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이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상하이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우선, 그가 ‘President’라는 직함을 허락도 없이 함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가 부여한 집정관총재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이 ‘President’이므로 사용이 정당한 데다, 이미 국제 외교문서에 사용한 표현을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이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중재로, 임시정부 정치체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는 개헌을 단행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이제 상하이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다른 비판 하나는, 이승만이 워싱턴에 세운 구미위원부가 상하이 인사들에게 승인받지 않은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나중에 이승만이 계속해서 상하이임시정부와 갈등하는 요인이 된다.
1920년 3월에는 상하이임시정부가 이승만에게 실제 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부임하라고 요구하면서, 거부할 시 불신임한다고 통보했다. 이승만은 12월에 밀항으로 상하이에 들어간 후 이듬해 1월부터 내각에 해당하는 국무원 회의를 세 차례 열었다. 그러나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 등, 임시정부 내부의 노선 갈등이 이미 극심했으므로, 이들을 통합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승만이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노선을 취한 데 반해, 이동휘는 소련과 연대하는 친공산주의 무장투쟁파였고, 김규식과 안창호도 박용만·여운형 등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는 이들과 연대했다. 이승만은 기호 지방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협성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5월 말에 외교와 재정 문제를 핑계로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 외교 문제란 그해 11월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를 상정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모든 재정과 수단을 끌어모아 영문 책자, 청원서, 회의서 등을 만들어 워싱턴회의 각국 대표단과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회의 참석권과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 정부 인사들을 접촉했지만, 실패했다. 배포한 문서들도 거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참혹한 실패 소식을 들은 상하이에서는 친이승만 내각이 붕괴되었다. 여운형이 주도한 고려공산당 그룹과 안창호가 이끈 친흥사단 그룹 등 이승만 반대 인사들은 이승만을 탄핵했다. 구미위원부도 폐쇄되었다. 이로써 이승만과 상하이임시정부의 관계는 파탄으로 끝났다.
일련의 실패 후유증을 치료할 시간이 필요했던 이승만은 1924년 11월까지 휴식을 취했다. 이후 하와이로 돌아간 그는 하와이한인대표회를 연 후 1925년 12월에 합자회사인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했다. 한인들의 생활환경 개선과 독립운동 재정 지원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경영 능력 부족으로 회사는 1930년 10월에 거의 파산했다. 회사를 경영하고 파산을 막기 위해 교민총단과 한인기독교회 재산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다시 갈등이 발생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의 독재와 권력욕을 규탄하는 이들이 한 편, 이승만을 추종하는 이들이 한 편으로 결집했다. 법정 소송으로 비화하여 판사가 이승만 반대파의 손을 들어주자, 1915년 이래 굳건히 자리를 잡은 이승만의 하와이 기반은 크게 붕괴되었다.
1930년대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는 1945년까지 전시체제를 유지한 시기다. 만주사변은 상하이와 하와이에서 치명상을 입은 이승만이 재기하는 기회였다. 반일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 사이에서 통일된 기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33년 2월 국제연맹 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직함을 들고 간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국제연맹 가입을 허락해달라고 각국 대표단과 언론인들에게 읍소했다. 문서 배포, 유력 인사 만남, 신문 인터뷰, 방송 연설 등 이번에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임시정부 승인이나 국제연맹 가입을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회의의 반일 분위기를 강화함으로써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 이승만은 1939년까지는 한인기독학원 경영에 집중했다.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반일 외교 활동을 재개했다.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가 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겸 주워싱턴전권대표를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에 이어 1945년 4월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라며 이승만이 펼친 수많은 전방위 요청을 미국 정부는 계속 무시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1919년부터 1945년 초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독립국가로 유지시켜달라, 일본의 만행을 두고만 보지 말라,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라, 임시정부를 국제연맹에 가입시켜 달라는 이승만의 외교 중심 독립운동은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같은 대의를 따르지만 방식을 달리한 이들과의 마찰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 오랜 기간 미국 전역과 유럽, 중국 등을 수없이 넘나들고, 상당한 수의 각국 정치인과 외교관, 언론인, 종교인을 만나 설득하고, 많은 책자와 기사를 쓰고, 한국을 지지하는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투자한 수고와 열심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가 형성한 정치계, 종교계, 언론계의 인적 네트워크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기에 한국의 국가 건설 및 전후 복구에 크게 활용되기 때문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해방 후 두 달이 지난 10월 16일에 미군 군용기로 귀국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70세였다. 이미 해방된 조국에서는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여 군정이 시행되고 있었다. 38선 이남에서 좌익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후 남로당)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중간파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부터 몇 단계에 걸쳐 자신만의 국가 재건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1945년 10-11월에 모든 정치 세력의 통합 기구였던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좌, 우, 중간 등으로 분열된 정치 세력을 통합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어서 12월에 모스크바협정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펼쳤다.
1946년 6월부터는 더 이상 남북이 통합된 한반도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 어렵겠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 과도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미군정과 미국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노력이 성공하여, 1948년 5월에 남한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5월 31일에 열린 초대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7월 17일에는 헌법이 공표되었고, 3일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기독교 국가의 비전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초대 제헌국회 개회 시에 임시 국회의장으로 회의를 이끌면서 감리교 목사였던 국회의원 이윤영에게 회순에 없는 기도를 부탁했다. 기도를 부탁하며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민주국회 1차 회의를 여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데, 각자의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취지를 밝혔다. 이후의 여러 행보와 발언을 보면,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통령이 된 일을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건설하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신적 소명을 실현하는 기회로 여겼던 것 같다. 물론 그가 유럽식의 국교 개념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1948년 헌법은 국교를 두지 않고 각 개인의 신앙 양심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는 정교분리 헌법 체제하에서 각자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회 전반을 기독교적 정신이 주도하도록 구상했던 미국식 기독교 국가를 상상했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었다. 그가 배재학당 시절에 처음 고민했고, 한성감옥에서 개종하며 확신했으며, 미국에서 유학하며 이론화했으며, 미국에서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외교적 독립운동을 하면서 구체화한 이상이었다. 기독교적 가치가 자유롭고 자발적인 봉사 정신과 희생정신을 북돋고, 차별과 압제를 무너뜨리는 사회변혁의 힘을 제공하며,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며 공존하는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준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기독교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세속 사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인식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대도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꿈꾼 이승만은 자연스럽게 교회를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동반자로 인식했다. 형목 제도, 군종 제도, 기독교 축일의 공휴일 제정, 국기배례의 주목례 변경, 선교 활동 지원 등은 동반자에게 주는 혜택이었다. 큰 혜택을 입은 한국 기독교인은 투표로 그에게 보답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의 비전이 오래도록 논의되지도 못했고,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은 후 세밀한 이론적 체계로 발전한 경험이 없었던 해방 정국 한국 사회에서 교회와 정권의 동반자 관계는 권력 유착 이상이 될 수 없었다.
4·19 혁명에 이은 하야와 함께, 과도하게 이상적이고 순진했던 이승만의 종교 정치 실험은 막을 내렸다.
1) 독립운동가 및 정치인으로서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는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일조각, 2013), 기독교인 정치가로서 면모에 대해서는 김흥수, ‘기독교인 정치가로서의 이승만’, 유영익 편,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407-436쪽의 연구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필자가 유영익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한다고 해서, 이승만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그의 입장과 평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한국 학자 중 이승만을 가장 오래도록 심도 있게 연구한 전문가이자 권위자였으므로, 이승만의 일생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그의 연구를 피할 수는 없다.
2) 이승만, 《한국교회핍박》(청미디어, 2008), 137-181쪽.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