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배우고 지켜야 할 공동체적 실천, 산상수훈

[401호 말씀과 따름] 마태복음 5-7장 깊이 읽기 ① 

2024-03-31     노종문

※ 2024년 1월 20일 열린 ‘2024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 기조 강의로 발표한 내용을 수정했다. 다음 호까지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산상수훈(산 위에서 주신 가르침)은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모음을 일컫는 별칭이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산상수훈이 예수님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자 하면 이 말씀들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산상수훈은 혼자서 읽기가 쉽지 않다. 본문 의 성격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여느 글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 말씀들은 단순히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것이다. 산상수훈은 몇 가지 명제로 요약 정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정보나 지식을 담은 글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체험하도록 이끄는 말씀들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유익을 누리려는 독자에게는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와 함께, 미지의 경험에 대한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둘째로, 산상수훈이 의도한 일차적 독자는 고독한 구도자가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이다. 산상수훈을 홀로 읽고 공부하고 정성껏 추구하여 복음을 깨달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사건이며 이 말씀이 본래 의도한 이상적인 용도는 아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함께 그 말씀 안에 살면서, 각자 다양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그것을 나누며 서로를 통해 배우도록 주어진 것이다.

셋째로, 이 말씀의 이상적인 독자는 객관적 관찰자라기보다는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품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없다면 누가 이 말씀들을 본래 용도대로 사용해보는 번거로움을 감당하려 할까. 예수님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막 시작된 사람이라도 충분하다. 복음에 반응하기 시작한 사람, 성령님이 그 안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한 사람, 본인은 아직 깨닫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 빛을 어렴풋이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된다. 그다음부터는 성령님께서 알아서 이끄실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산상수훈을 개인적·공동체적으로 묵상하고, 실천하며, 그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도와줄 기본 정보와 안내를 제공하는 데 있다. 산상수훈을 읽는 데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책들이나 경건 서적, 주석서 읽기와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단순히 정보나 깨달음을 넘어 체험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산상수훈을 먼저 큰 그림으로 파악한 뒤, 각각의 말씀을 하나씩 묵상하며 실천해보는 길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아래는 산상수훈을 공동체로서 함께 읽는 데 필요한 내용이다. 산상수훈 이해를 위한 대략적인 지도와 산상수훈 실천의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산상수훈의 맥락으로서 지상명령

먼저, 산상수훈이 오늘날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모습으로 전해지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저자인 사도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 안에 예수님 말씀을 모아서 삽입해놓은 다섯 개의 모음집 중 하나다.1) 마태가 이렇게 예수님 말씀을 다섯 개의 강화로 모아놓은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마 28:18-20), 우리가 ‘지상(가장 높은)의 명령’이라고 별명을 붙인 그 명령에 순종한 일이었다.

18나에게 하늘과 땅 위의 모든 권세가 주어졌다. 19그러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을 세례하고 20그들을 가르쳐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노라, 세상이 완결될 때까지 모든 날에(마 28:18-20).2)

위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자신이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고, 마태는 그 명령에 문자 그대로 순종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복음서를 읽거나 듣거나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명령을 가르쳐 지킬 수 있도록 했다.

지상명령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령형 동사는 ‘제자 삼아라’ 하나뿐이며, 나머지 동사들은 분사형으로 명령형에 보조로 따라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명령 핵심은 제자 삼는 일, 즉 우리가 사도의 도움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다. 좀 더 확장하면, 우리 중 일부가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도록 돕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그 제자 삼는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들로서 다른 분사형 동사들이 따라온다. 모든 민족에게 가는 것, 세례를 주는 것, 예수님의 명령들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 전도와 사회참여 중 무엇이 더 중한가 하는 문제로 말이 많았지만, 예수님 지상명령의 단 하나의 중심은 제자 삼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 즉 제자도를 살도록 세우고 돕는 것이다.3)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자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것이 필요하고, 그 제자도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과정과 결과가 사회참여로 나타나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 세기에도 현명한 선택은, 제자도 중심 교회, 제자도 중심 신앙생활로 나가는 데 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제대로 순종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제자도의 핵심은, 지상명령에 의하면, ‘예수님의 명령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당신의 명령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으므로,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명령을 배우고 지키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기회가 있으면 할 일이지만, 나 스스로를 배우는 자리에 두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내가 터득하지 못한 것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지킨다’(헬, 테레오)라는 말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존한다는 뜻이다. 목자가 양을 지키고, 간수가 감옥의 죄수를 지킬 때, 경계병이 성을 지킬 때, 제사장이 성소에서 자기 직무의 자리를 지킬 때 사용된 단어다. 예수님의 명령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날까지 잘 보존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제자들이 그 명령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몸으로 체득하여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들은 문서나 동영상 파일이 아니라, 우리 몸 안에 보존된다. 그리고 몸에서 몸으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달된다. 예수님이 글 대신 제자들을 남기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신의 말씀을 저장할 매체가 파피루스나 양피지가 아니라, 사람의 몸이요 공동체의 삶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떠난 후 성경이 중요한 보조 매체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도를 전수하는 1차 매체는 성경 자체가 아니라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팔복 선언 말씀

이제 예수님의 산상수훈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산상수훈 전체 구조를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서론) 5:1-16 제자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 팔복 선언과 소금과 빛 말씀
(본론)  5:17-47 토라의 의보다 더 나은 의
            (5:43-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닮은 의를 추구하라)
           6:1-7:12 하늘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으로서의 의
(결론) 7:13-27 이 명령들을 실천하라는 경고

이런 구조 제시에는 산상수훈 중심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도 들어있다. 바로 ‘새로운 의’이다. 이 구조 중심에 자리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는 말씀도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 사상의 핵심을 보여준다.

산상수훈 맨 처음에는 팔복 선언 말씀(5:3-10)이 나온다. 팔복 선언은 조건문이 아니라 축복문이다. ‘이렇게 저렇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축복 선언문 형식을 써서 하나님 자녀들의 정체성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말씀이다.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A  마음이 가난한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F)
   B 애통하는 자 –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자 –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를 것이다.
  D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받을 것이다.
    E 마음이 깨끗한 자 – 하나님을 볼 것이다.
  D´ 평화를 만드는 자 –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 받을 것이다.
를 위해 박해 받는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F´)

팔복 선언 말씀이 이렇게 정교한 건축학적 구조를 갖는 이유는, 구술이 주된 소통 방식이었던 고대에는 중요한 내용을 암송하기에도 좋고, 배열에 따라 핵심 사상을 강조하기도 좋아서 이런 구조를 의도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문을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전반부 세 개의 복 선언에서 ‘가난한 자’와 ‘온유한 자’는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인 ‘아나브’이다. 그러므로 인클루지오(괄호)를 이룬다. 따라서 첫 번째 세 개의 선언은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즉, 가난한 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 61장의 성취이다. 이사야 61장은 팔복 말씀과 거의 병행을 이루는 본문이므로 이사야 61장과 함께 팔복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서 이해하면 좋다.

1주님 야훼의 영이 내 위에 임하셨다.
야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그가 나를 보내셨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마음이 부서진 자들을 싸매주라고,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갇힌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라고,
2야훼의 은혜의 해를,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라고,
모든 우는 자를 위로하라고,
3시온의 우는 자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울음 대신에 축제의 기름을,
낙심의 영 대신에 찬송의 옷을 주라고.

그들은 의의 나무들, 야훼께서 자기를 빛나게 하려고 심으신 나무들이라 불릴 것이다. 4그들은 오래 버려진 곳을 건축할 것이고, 처음부터 황폐했던 곳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버려진 성읍들, 대대로 황폐했던 곳을 새롭게 할 것이다. (사 61:1-4)

이사야 61:1-4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언급에 이어 의로운 백성이 주제로 나온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마찬가지로 팔복 선언 후반부 다섯 개의 복 선언에서는 ‘의’가 두드러진 주제어로 나오면서 다시 눈에 띄는 인클루지오 구조를 형성한다. 이 두 번째 인클루지오 안쪽에 있는 세 개의 복 선언은 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즉, 의는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만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제자들이 마음에 떠올려야 할 세 가지 이미지가 된다. 인클루지오 구조에서는 바깥 부분과 함께 중심 부분도 강조된다. 즉, 의의 중심은 ‘마음이 깨끗한 것’이다. 그리고 의로운 삶이 가져다주는 절정의 복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팔복 선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그림처럼 제시한다. 그들은 가난했고, 애통했고, 마음이 부서졌고, 포로로 잡혀 종이 되었던 자들이다(사 61:1-3).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지금의 ‘부자들, 배부른 자들, 웃는 자들, 모든 이들의 칭찬을 받는 자들’(눅 6:24-26)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복을 누린다.4) 그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삶의 목적과 지향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의로운 삶’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영하는 삶, 즉 긍휼히 여기고, 평화를 만들고, 마음이 깨끗한 삶을 살도록 변화되어간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빛나게 하기 위해 심으신 ‘의의 나무’(사 61:4)로 자라난다.

소금과 빛 말씀

팔복 선언과 긴밀하게 연결된 소금과 빛 말씀(5:13-16)은 제자 공동체의 사명을 보여준다. 제자 공동체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온 세상을 예수님 안에서 회복하시는 일임을 보여 준다. 그 원대한 목적을 위해 겨자씨와 누룩 한 줌 같은 작은 제자 공동체가 부름을 받은 것이다. 제자 공동체는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만드신다. 그들을 통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신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의 회복을 위해 섬기는 것이다. 세상을 잘 섬기기 위해 교회가 내적으로 충실해질 필요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 강화와 존속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역사 속의 모든 교회가 잠시 빛을 비추었다가 한두 세대 후에 사라졌다. 우리 세대에도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가 새로 나타날 것이다. 또, 지난 세대에는 잠시 소금과 빛이었지만 이 세대에는 사라지는 교회도 나올 것이다. 무엇이 나타남과 사라짐을 갈라놓을까? 교회가 소금과 빛 소명에 충실하고자 하는가이다. 교회가 자신의 소명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은 그 교회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것이다. 반대로, 과거의 영광만 회고하거나 자기 세력 강화, 안락함의 존속에만 급급한 교회는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팔복 말씀과 소금과 빛 말씀은 산상수훈 서론 부분으로서 제자 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말씀들이다. 이어지는 산상수훈 몸통 부분은 모두 제자 공동체의 ‘의로운 삶’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토라보다 나은 의

예수님은 산상수훈 본론 부분(5:17-7:12)에서 제일 먼저 토라(율법, 곧 모세오경을 일컫는 말)를 언급하신다(5:17-48). 이 말씀이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아마도 1세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토라의 위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토라의 성격을 재규정하시는 예수님 말씀 속에 독특하고도 놀라운 부분이 있다. 이 부분에 나오는 말씀들은 세부 단락마다 각각 자세히 관찰하고 묵상해볼 중요한 내용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전체를 아우르는 몇 가지 큰 주제만 언급하려 한다.

먼저, 예수님은 토라를 폐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토라나 예언자들을 허물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온 것은 허물기 위해서가 아니고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다(5:17).” 토라의 성취(충만하게 함)라는 주제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새 언약’ 주제와 즉시 연결된다.

31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 33…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 31:31-33, 새번역).

26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27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겔 36:26-27, 새번역).

이 두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이 토라를 성취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토라를 성취할 수 있도록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을 주신다는 뜻이다. 토라의 요구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내면의 충만한 능력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백성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이런 새로운 백성이 출현하기 전이라면 토라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히브리-유대적 세계관의 안경을 쓰고 이 문제를 보면 새로운 심층적 측면이 드러난다. 히브리어 문법학자 게제니우스는 구약성경 히브리어 명령법 구문을 설명하면서, “명령의 성취 여부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능력을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에는 명령이 분명한 보장이나 약속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5) 즉, 하나님의 명령은 그저 엄격한 복종의 요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성취를 일으키는 능력을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처럼,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는 대상을 사로잡아 목표를 성취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토라의 십계명도 올바르게 이해하고 순종하면, 단순히 일방적인 의무 부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부여와 성취의 약속이 포함된 은혜의 말씀이 된다.

토라의 이러한 성격은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다. 첫째로,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은 백성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둘째로,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계속 반복되는, 옛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졌지만,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에고 데 레고 휘민)이다.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는 특별히 강조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명사 주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동사의 어미가 이미 주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주어(에고)가 강조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가 되며, 예수님 자신이 명령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사실은 제자도의 실천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즉, 제자의 최우선 임무는 예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 예수님의 명령은 그 자체로 성취를 이루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 듣고 순종하는 백성만 나타난다면, 그분의 명령에 담긴 능력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일이 진행된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고 이해하도록 도우시는 영이며(요 14:26), 우리를 마음속으로부터 흥분시켜, 그 자체로 성취의 능력이 있는 하나님 말씀의 놀라운 사역에 동참하게 만드신다. 그러므로 제자는 예수님 말씀을 자기가 이해하는 틀 안에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명령을 경청하고, 분별하고, 순종함으로써, 그 말씀이 지금 일으키고 있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일한다.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시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시다’라고 가르친 것이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학자는 예수님 전후 유대교의 방대한 문헌을 모조리 검토한 후 유대교에는 이런 사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확언했다.6)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고유한 가르침이며,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이러한 관계 변화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은 소금과 빛 말씀인 5:16에 한 번 나온 뒤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다가, 5:45 이후로는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계속 나온다. 이런 전환을 이루는 본문은 5:43-48인데, 특히 마지막 말씀은 산상수훈 전체를 관통하는 말씀 중 하나다.

그러므로 너희는 온전하게 되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마 5:48).

여기서 ‘온전함’(헬, 텔리오스)은 목표에 도달한 모습, 완전히 성장한 모습을 나타낸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점점 성장해나가서 결국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온전히 장성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하시며, 따라서 또한 약속하신다. 물론 이런 온전한 인간의 모습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도 축복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며, 악인들까지도 관대한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닮은 모습이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시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치신 데서도 명료하게 표현된다. 주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 원문의 첫 번째 단어는 ‘아버지’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유대교의 다른 기도들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길고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셨다.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남아있는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아버지’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단 한 번 예외가 있는데,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으로 시작하신 기도다. 그런데 이 기도는 시편 22편을 그대로 읊으신 것이므로 특별한 경우다. 예수님은 자신도 평소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친밀한 대화를 나누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시다’라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서 핵심 부분이며, 제자들의 사고방식에 세계관 단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예수님의 모든 명령은 그것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더 철저히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깊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사도들은 이 가르침의 중요성을 여러 방식으로 강조했고, 이 사상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즉,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전통을 가지게 된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피상적인 문화적 관행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복음이 일으킨 세계관적 변혁의 가장 심오한 부분을 표현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호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형제자매를 진정으로 가족처럼 돌아보는 아가페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호칭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수평적 관계가 단순히 평등주의라는 이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우리들 각자의 신분 변화에서 파생된 관계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는 그저 서로에 대한 수평적 관계만을 친밀화하기보다는, 먼저 각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는 깊은 사랑의 관계를 추구한 결과로부터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자매로 부르고 진실로 그렇게 대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깊이 확신하는 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다. 형제자매 사랑은 하나님의 나 자신을 향한 사랑에 대한 확신의 깊이만큼 표현된다. 

■ 주

1) 산상수훈(5-7장), 파송 설교(10:5-42), 비유 설교(13:3-52), 교회 설교(18장), 종말 설교(24:3-24장).
2) 이 글에서는 따로 언급하는 경우 외에는 성경 본문은 필자의 사역(私譯)을 사용하였다. 원문에 비추어 필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요점을 언급할 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3) 여기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우리가 한두 번 경험했던 ‘제자 훈련 프로그램’과 동일시하지 말자. 옳든 그르든 어떤 선입견을 가지면 예수님 말씀 자체에 귀 기울이기가 어렵다. 지금 우리는 제자 훈련 프로그램을 무시하거나 다시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프로그램의 원천이 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배우고자 한다.
4)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듯이, ‘가난한 자’는 삶이 수치스럽게 무너져서 사람들에게 내세울 만한 자기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곤경에 빠진 벌거벗은 자로서, 구출을 기대하며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부유한 자는 남에게 내세울 만한 뿌듯한 정체성이 많아서 하나님을 특별히 찾고 의존할 필요가 별로 없는 사람일 것이다.
5) E. Kautzsch 증편, 신윤수 옮김, 《게제니우스 히브리어 문법》(비블리카아카데미아, 2003), §110. c.를 보라.
6) 요아킴 예레미아스, 정광욱 옮김, 《신약신학》(엠마오, 1992), 100-106쪽.


노종문
한국과학기술원을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목회학)과 예일대 신학대학원(신약성서학 석사)에서 공부했으며, IVP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행하는 〈좋은나무〉의 편집주간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