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공동체

[402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4-04-30     이한주

SF 거장 아서 C. 클라크의 장편 《유년기의 끝》(시공사)은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인과 인간의 만남을 소재로 했다. 인류가 수백 년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 없는 초고도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온다. 오버로드(스타크래프트의 ‘오버로드’가 여기서 유래한 듯하다)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보낸 거대한 우주선들이 세계 주요 도시 하늘에 떠있고 인류는 혼란과 불안 속에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한다. 다행히 미지의 외계인은 지구인들에게 동물 학대 금지령을 내려 그들이 자비로운 존재인 것을 알리지만, 외계인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계속 투우 경기가 열린다. 그때 투우장에서 한 사건이 일어난다. 수많은 관중이 투우사가 창으로 황소를 찌르는 장면을 보고 있을 때였다.

처음으로 창이 번쩍이면서 황소에게 가 닿는 순간, 지구상에서는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1만 명의 사람들이 황소와 똑같은 상처를 입은 듯이 통증을 호소하며 내지르는 비명 소리였다. 하지만 1만 명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의 몸을 보았을 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것으로 마드리드의 투우는 끝이 났다. 그 소식은 급속히 전해져 지구상에서는 더 이상 투우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아서 C. 클라크, 《유년기의 끝》, 80쪽)

인류보다 훨씬 발달된 문명을 가진 오버로드는 황소와 투우장 관중의 아픔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으로 인간의 오래된 폭력을 중단시킨다. 지구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오버로드의 명령과 지배를 받아들이고 냉전과 분열을 끝낸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류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 신에게 요구했던 가장 간절한 바람인 평화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가 1993년 발표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비채)는 기후 위기와 경제 파탄으로 종말을 맞은 세상을 그린다. 이 소설에서 지구 종말의 시작점으로 설정된 해가 바로 올해, 2024년이다. 2024년의 세상은 법이 무너지고 폭력이 난무하여 차라리 빨리 망하는 게 나을 만큼 암울하다. 이런 종말의 시대에 소수의 사람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여행하며 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그런데 주인공이자 이 공동체 리더인 흑인 소녀 로런은 ‘초공감증후군’이란 질병을 앓고 있다. 초공감증후군은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을 보면 그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똑같이 느끼는 병이라, 폭력이 생존 방식인 세상에서 로런은 지독히 괴롭고 위험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로런은 이 질병 때문에 인간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만약 초공감증후군이 더 흔한 병이었다면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 모든 이가 다른 모든 이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면, 누가 고문 같은 짓을 하려고 하겠는가? 누가 남에게 쓸데없는 고통을 가하겠는가? 전에는 내가 앓는 병이 어떤 식으로든 좋은 효과를 일으키리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내 문제가 도움이 될 것도 같다. 남들에게 초공감증후군을 나눠주면 좋겠다. 그럴 수 없다면 그 증상을 앓는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 (옥타비아 버틀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200쪽)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은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작가는 종말을 맞은 세상에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겪는 로런의 병은 망한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힘, 진정한 능력이다.

《유년기의 끝》과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SF의 고전이라 인정받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이 소설 작가들이 상상하는 것은 고통으로 연결된 몸, 타인의 아픔을 자기 몸으로 느끼는 인간이다. 거장들의 상상을 이어받아 아픔으로 연결된 인간을 상상해본다. 하나님은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을 만드셨고, 타인을 보고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창 2:23)라며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이렇게 창조하실 때 이왕이면 다른 사람이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걸 보면 함께 아픔을 느끼도록 만드셨으면 좋았겠다.

어떤 목적이 있어 악을 허용하셨더라도, 인간이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 해도, 모든 폭력을 다 금지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한 만큼 나도 아프고, 보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지금과 아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은 각자 아프고 자기 아픔만 안다. 아픔을 주는 사람과 아픈 사람, 아픔을 갚아주려는 사람과 아픔을 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보면, 하나님은 아픔이란 걸 모르셨던 게 아닐까 싶다. 살과 뼈를 가진 피조물을 만들 능력은 있지만 정작 자신은 살과 뼈가 없는 신이기에 몸의 아픔은 계획에 없던 일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세상의 아픔과 분리되어있다. 교회는 자주 폭력을 사용했고, 아픈 사람들을 외면했고, 자기들만의 평화를 위해 수고했다. 타인의 아픔과 연결되어있는 교회는 드물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공허하다. 이런 생각에 의기소침할 때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매기 팩슨의 《비바레리뇽 고원》(생각의힘)을 읽었다.

 

비바레리뇽 고원은 프랑스 남부의 외지고 척박한 지역이다. 이 고원 지역에 있는 12개 마을은 나치 정권에 생명을 위협받던 유대인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 프랑스도 독일에 함락되었던 시절이라 유대인을 숨겨주는 일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한두 사람도 아닌 마을 전체가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을까? 이들은 수 세기 동안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에 박해받았던 위그노파 개신교인의 후손들이다. 박해를 피해 고원 지대로 피난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피난처가 된 셈이다.

고원 사람들은 취약한 외지인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종의 습관을 키우며 그들을 숨겨주고, 먹여주고, 프랑스 바깥으로 실어 날랐다. 16세기의 프랑스 종교전쟁 때는 개신교도를 보호했고, 프랑스혁명과 뒤이은 공포정치하에서는 가톨릭 신부들을 보호했다. 19세기에는 산업도시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왔고, 그다음에는 알제리의 아이들을, 스페인내전 중에는 스페인의 어머니와 아이들을, 유럽 전역의 정치적 부랑자들을 데려왔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 점령지에서 도망쳐 나온 수많은 다른 난민들을 보호해주었다. 고통받는 데 익숙했던 이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매기 팩슨, 《비바레리뇽 고원》, 67쪽)

고통이 행동 기준인 공동체, 아픔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현실에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사실에 소망을 갖고 성경을 읽어본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을 듣고 언약을 기억하지만 직접 아프지는 않다(출 2:23-25). 그 하나님이 예레미야서에서는 ‘내 창자가 들끓는다’(렘 31:20) 말씀하신다. 계시가 진행될수록 하나님은 아픔의 가능성을 갖게 되고 마침내 성경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 세상에 온 하나님은 아플 수 밖에 없는 몸을 가졌고, 상처 입고 고통을 겪는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에 있는 것은 아픔이 사라진 흉터가 아니라, 여전히 아픈 상처다. 도마가 손을 넣어볼 수 있을 만큼 벌어져있던 상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부활한 예수가 같은 분이라는 증거이며 온몸으로 사랑하고 아팠던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최종 계시로 믿는 우리는 몸의 아픔을 아는 신, 여전히 아픈 신을 믿는다. 예수님의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탄생했으니 교회는 아픔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몸, 아픔의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세상의 아픔과 연결되어 이 아픔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일이라 믿는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