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의 세계

[402호 공간 & 공감]

2024-04-30     박진영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그게 무슨 소리야?”

야구는 모른다. 스포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다. 몇몇 화제가 되는 경기의 하이라이트만 찾아본다. 특히 야구는 현장에서 보는 것도, 중계를 보는 것도 딱히….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20대 초반, 야구팬이던 친구를 따라 몇 번 야구장에 갔을 때, 깎아지른 경사에 촘촘하게 놓인 플라스틱 의자도 불편하고, 경기 내내 야구공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관중이 막대풍선을 두들겨 내는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찬 그 장소는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경기를 보러 간 건지, 먹으러 간 건지, 춤추러 간 건지 아니면 노래를 부르러 간 건지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그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한 팀에 몇 명이 구성되어 경기를 치르는지, 공격과 수비는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지, 내 눈에는 안 보이는 스트라이크존이 심판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체육 수업 때 자주 했던 ‘발야구’와 같은 ‘야구’니까 경기 규칙은 비슷하겠거니, 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정도만 겨우 알고 있을 뿐이다.

사진: 필자 제공

그런 내가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편도로 2시간 30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야구장에 갔다. 강화도 온수리에 위치한 SSG퓨처스필드에서 오후 1시에 열리는 퓨처스리그의 LG트윈스와 SSG랜더스 경기를 보기 위해. 퓨처스리그는 한국 프로야구 2부 리그로, 11개 구단으로 구성되어있고 남부리그(6개팀)와 북부리그(5개팀)로 운영된다(KBO 홈페이지 참조). 야구에 관심도 없었던 내가 평일 한낮에 바다를 건너서(강화도는 섬이니까) 퓨처스리그를 보러 간 까닭은, 이유를 알 수 없이 지속되는 ‘지는 기분’ 때문이었다.

자영업을 시작한 지 올해로 6년 차. 기독 시민 활동가로 6년 넘게 일하다가, 공인중개사로 전직한 지 만 5년이 넘었다. 졸업 후 첫 직장이었던 시민단체에서 무엇이든 배운다는 자세로 일하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지고 실행해야 하는, 자영업의 세계로 진입했을 때의 그 막막함이란….

공인중개사는 고객들의 이해를 연결하고 조정하여 계약이 체결되도록 돕는다. 국가에서 공인하는 자격을 취득하여 일하는 전문직이지만, 큰 틀에서 스스로를 ‘굴려’ 생계를 일궈야 하는 자영업자다. 매출로 내 실력을 선명하게 확인하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한 자영업의 세계에 적응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하루 10시간, 일주일에 6일 동안 한 달을 일해도 매월 숫자(매출액)를 마주할 때면 힘이 빠진다. ‘파이팅’을 열심히 외쳐봐도 마음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리는 것 같다. ‘열심히’와 ‘성실함’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 오는 무력감, 막막함 같은 것들이 쌓이면서 ‘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누구에게 계속 지고 있는 것일까.

사진: 필자 제공

1부 리그로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한 2부 리그 선수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싶어 잠실구장이 아닌, 강화도에서 열리는 퓨처스리그 경기를 보러 갔다. 100여 석 남짓의 좌석에는 선수들의 가족들로 추정되는 사람이 대여섯, 그리고 대포 같은 사진기를 손에 감아쥐고 바삐 움직이는 몇몇 팬들이 있었다. 나와 생활 동반자 둘만 있는 건 아닐까 하며 갔는데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있었다. 하지만 응원단도 없고, 매점도 없고, 음악도 없는 적막함 속에서 경기는 시작되었다. 경기를 보는 내내 선수들 마음을 상상했다. 목표가 뭘까, 몇 살일까, 어떻게 야구를 시작했을까,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연봉이 얼마일까, 어떤 마음으로 야구를 할까, 그리고 지금, 행복할까?

투수가 던진 공이 공기를 가르며 포수 글러브에 척! 하고 감기는 소리와 양 팀 더그아웃에서 메아리처럼 주거니 받거니 외치는 추임새만이 경기장을 느슨하게 채웠다. 관중석에서 선수의 이름을 연호하거나 응원가를 부르는 사람들은 없었고, 선수들 모습을 포착하기 위한 팬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와 선수의 플레이를 격려하는 박수 소리가 작게, 띄엄띄엄 이어졌다. 함께 간 생활 동반자는 (엘린이 출신 LG트윈스 팬으로서) 야구를 알지 못하는 나에게 경기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그는 선수들 이름을 부지런히 찾아보고 퓨처스리그에 관한 정보를 탐색하면서 어미 새가 둥지 속 새끼 새에게 먹이 물어주듯 쉴 새 없이 내 귀에 많은 정보를 꽂아 넣어줬다. 경기 내용에는 무관심한 채 자기 고민에만 함몰되어있는 나를 끌어낸 것은 ‘퓨처스리그 선수들은 승패나 성적보다, 개인의 실력을 회복하고 기량을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라는 말이었다. 경기는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2부 리그는 1부 리그를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했는데, 목표가 회복과 성장이라니… 의아했다.

프로의 세계에서 연봉은, 수입은, 매출은, 영업이익은 실력과 가치를 말해주는 하나의 지표다. 그런데 숫자가 정말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선수로서 야구를 해왔던 그들의 삶에는 연봉, 리그, 소속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이다. 우정, 애정, 고통, 시련, 기쁨, 환희가 손의 마디마디, 발의 주름마다 숨어있을 것 같다. 선수들에게 지금의 승패로만 설명되지 않는 어제의 서사가 운동장 모래알만큼 있는 것처럼, 그들의 미래 목표 역시 ‘더 큰 리그, 더 큰 연봉’만은 아닐 것이다. 경기를 자주 나가는 것, 건강하고 유쾌하게 야구를 오래 하는 것, 팬들의 응원, 좋은 플레이 기록을 남기는 것, 좋은 팀을 만나 꾸준히 성장하는 것, 선수를 양성하는 지도자가 되는 것, 전혀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도 얼마든지 목표가 될 수 있다. 퓨처스리그 선수들이 수십억대 연봉을 받고 메이저리그로 가는 선수들을 보면서 어떤 박탈감을 느낄까, 얼마나 지는 기분일까 짐작했던 것은 나의 큰 착각일 것 같다. 그들의 목표가, 누적된 승리로 인생에서 ‘진루’하는 것뿐이라 판단했던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연봉이 3천만 원이라고 해서 인생이 3천만 원짜리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자꾸 연봉과 수입이 내가 하는 일의 가치와 실력을 말해주는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또 프로의 시장에서 일의 성패가 마치 인생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곤 한다. 기술의 진보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로 ‘단군 이래 성공하기 가장 좋은 시대’가 열렸다고 하는데, ‘돈을 얼마나 잘 버는지’ 하나만 남고 나머지 기준은 다 희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생계를 일군다. 그러나 인간에게 일은 먹이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꿈의 실현, 사회적 가치, 소속감, 커뮤니티, 재미, 자아실현의 도구 등 각자의 목적과 의미를 담고 있다. 돈을 받고 일하는 프로의 세계에서 연봉과 매출은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이다. 지금 당장 ‘프로의 세계’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인생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기회였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열심’ ‘성실’ ‘진심’ ‘피땀눈물’이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루가 쌓여 인생이 된다는 단순한 진실을 기억하고, ‘일을 대하는 마음’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인생이지 않을까. 한때 누구나 다 알 만한 직장에 다니는 일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명찰이 부러웠고, 급여 명세서에 ‘품위 유지비’ 항목이 그렇게 빛나 보였다. 나도 유지할 품위가 있는데….

‘지는 기분’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승패가 있는 경기를 뛰고 있다고 생각한 나 때문이다. 퓨처스리그에서 성장을 위해 뛰는 선수들을 보면서 알았다. 나는 지금 성장과 성숙이라는 인생을 뛰고 있는 것이다. 이기는 인생이 아니라 빛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프로의 세계에서 필요한 건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숫자로만 설명되지 못하는 일의 의미와 일에 담긴 삶을 스스로 존중하는 것이 내 경기다.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