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공간 방문하기
[402호 월간 에디터의 도전]
이번 호 월간 에디터의 도전은 ‘기억 공간 방문하기’였습니다. 세월호 10주기에 맞춰서 나온 지난 401호 때 하기로 한 도전이었고, 실제로 방문할 ‘기억 공간’을 정해서 에디터들이 다녀왔었는데요. 401호 글 전반에 그리움과 슬픔의 기운이 잔잔히 흐르고 있어, 같이 들어가면 자칫 사족처럼 여겨지거나 분위기를 해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 확장해서 싣기로 했습니다. 지난번에 공간을 방문한 뒤 정리해둔 글을 토대로 에디터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4월 11일 〈복음과상황〉 편집부가 진행한 대담에서는 각자가 다녀온 장소에 대한 소감과 더불어, 세월호를 앞으로 어떻게 더 기억해나가면 좋을지와 가족의 기억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정민호 저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를 다녀왔는데요. 기윤실 뉴스레터를 통해 ‘그리스도인 지킴이’를 지원받는다는 이메일을 여러 번 받았거든요. 그냥 ‘분향소 지킴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지킴이’라는 활동 명칭을 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월간 에디터의 도전’을 계기로 신청하게 됐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는 서울광장, 시청 앞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부가 영정과 위패 없이 추모했던 그 자리에, 유가족과 시민들은 서울시의 방해를 무릅쓰고 분향소를 설치했어요. 설치 후에 서울시로부터 분향소 철거 요청과 행정 대집행 예고를 받았고, 그때부터 유가족들과 지킴이들은 분향소에 상주하며 시민들과 함께 온전하고 진실한 추모를 위해 투쟁해 왔습니다.
지킴이들은 한 시간 단위로 교대하며 자리를 지킵니다. 지킴이의 역할은 시민 조문객 응대, 초와 향 교체, 주변 정리, 관련 자료 배부 등입니다. 지킴이를 담당하는 분께 몇 가지 안내를 받았어요. “시민분들이 분향하는 것을 도와주시거나 보라색 리본을 나눠주는 등의 활동을 해주시면 됩니다. 단지 분향소에 머무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저는 마감 기간 중인 3월 14일 오전에 가서 지킴이 활동 후, 사무실로 출근했는데요. 오전 8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첫 시간을 맡아서 밤사이 닫혀있던 분향소를 열어야 했어요. 처음 지킴이로 참여하는데, 혼자 분향소를 잘 열 수 있을지 걱정이었죠. 그런데 사실 일찍 가서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 말고도 다른 이유로 마음이 무겁고 어려웠어요. 지킴이는 유가족과 같이 있어야 하거든요. 한 사회에서 참사가 일어나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생존자와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하잖아요? 참사와 직접적으로 관계 맺고 있지 않아도, 어딘가 연결된 부분이 조금씩 있으니까요. 그런 마음의 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유가족분을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와 비슷한 또래가 많이 희생당했는데….
그런 마음으로 가서 분향소 문을 반쯤 열었거든요? 손으로는 더 이상 열리지 않는 거예요. 그때 보라색 목도리를 한 여성분이 뛰어오셨어요. 막대기로 해야 한다고 하시며 능숙하게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분이 희생자의 가족분이라는 사실은 설명 없이도 알 수 있었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던 제게 따뜻한 차도 내어주시고, 말도 걸어주셨어요. 긴장해서인지 저는 조리 있게 대답하지 못했고요. 우왕좌왕하면서 대화를 많이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방문객으로는, 출근길에 기도 인사를 올리고 지나가는 시민도 있었고, 분향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는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같이 머물던 유가족분은 어느 영정사진 앞에 한참을 서계셨어요. 아마 보고 계신 사진 속 얼굴이 떠나간 가족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제게 할당된 시간이 끝나기 전에 어느 분의 가족이냐고 한번 여쭤 보았거든요. 그랬더니 누구라고 말씀은 안 해주시고, 그냥 “우리 딸”이라고만 답하셨어요. 그 순간,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위로의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분향소에 머무는 작은 행동이라도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범진 전세사기 희생자 1주기 추모문화제에 다녀왔습니다. 2월 24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렸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1만 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요. 지난해 2월 29일 돌아가신 한 분을 시작으로 총 일곱 분이 전세사기로 돌아가셨고, 그분들을 기리는 추모 집회였습니다. 사실 바로 다음 날에 복상 정기총회가 있어서 못 갈 것 같았는데, 이철빈 본지 이사가 페이스북에 참석 인원이 부족하다고 남긴 글을 읽고 참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복상 인터뷰(2023년 6월·391호)에도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인 이철빈 이사의 피해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지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도 복상 관련 모임에 꾸준히 참여해주시는 이철빈 이사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던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이번에 추모제를 다녀와서 제가 머리로만 이해하던 전세사기 문제를 마음으로도 공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상에 이야기하러 나오신 분들 다수는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분들이었는데, 공통적으로 “내가 피해를 당할 줄은 몰랐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중에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홀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정말 열심히 살아서 전세집을 구했는데 피해를 입은 분도 계셨어요. 지금 살아계신 분들도 정말 벼랑 끝에 계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서로를 붙잡아주는 외침처럼 들리더라고요.
헌화를 하고, 가두시위 행렬을 따라 걸으면서 여러 구호를 외쳤거든요? 그중 “우리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입니다”라는 구호를 같이 외칠 때 들었던 생각이 있어요. ‘내가 구호는 얼마든지 같이 외쳐줄 수 있는데,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 거리를 같이 걷는 것이 맞나?’ 재난이든 질병이든 문제가 닥쳤을 때 ‘왜 나인가?’ 묻기 쉽잖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얼마든지 피해를 겪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마음과 동시에 ‘내가 아니기 때문에 짊어질 책임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내가 아니기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책임감을 복합적으로 느꼈습니다. 마지막 순서에 이철빈 이사가 발언했는데, 그 내용을 옮겨봅니다.
피해자 긴급대책위 위원 이철빈입니다. 이 길을 걸어오면서 저는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제가 왜 이렇게까지 거리를 떠돌면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을 외치고 있어야만 하는가? 저는 전세사기를 당하기 전에 평범하게 일하면서 주말에 어떤 일을 할지 나중에 어떤 일을 할지, 그리고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가정을 꾸릴지 고민하고 있었을 뿐인데, 전세사기를 당하고 난 후에 그 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위 한 번 해본 적 없는 제가 왜 이렇게 맨 앞자리에서 마이크를 잡게 되었는가 생각해봅니다.
왜 전세사기를 당한 건지, 전세사기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국회와 정부와 거리를 다니면서 여러모로 질문하면서 손을 들다 보니까 어느새 저한테 마이크가 계속 쥐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는 제 질문을 했었는데, 제 옆을 돌아보니까, 제 곁을 보니까, 저보다 훨씬 힘들어서 간신히 숨만 쉬고 계시는 그런 피해자분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세 배가 된 이자를 부담하기 위해 투잡·쓰리잡 뛰는 피해자가 계셨고, 물이 새고 건강이 우려되는 집에서 어렵게 하루하루 버티고 계시는 피해자분들이 계셨고, 단전과 단수가 돼서 집에서 살지 못해 거리를 돌아다니는 피해자분도 계셨고, 전세 대출 채무로 개인 회생을 생각하면서 개인 회생에서 조금 더 유리한 그런 입장을 받아보기 위해 억지로 이혼을 선택한 신혼부부 피해자도 계셨습니다.
이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이 자리에 못 오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다 보니 맨 앞자리에서 여러분을 대표해서 마지막에 선언하고 있습니다. 배부른 소리일 수 있겠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습니다. 제 집주인은 천벌을 받았는지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제 보증금을 언제 어떻게 돌려받을지 기약도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만,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짜 참을 수 없이 너무 힘든 건 전세사기로 힘들어하던 분들이 쓸쓸히 혼자 생을 마감했을 때입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사기로 인해서 피해를 당했는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본인의 목숨까지 포기하셔야 했던 문제를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돌아가신 분의 마지막 말은 “엄마 나 2만 원만 보내줘요”였습니다. 제가 그분을 다시 살릴 수가 있다면 200만 원, 그 이상도 드릴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돌아가신 분은 두 배로 불어난 이자를 갚기 위해서 몸이 건강하지 않은데도 쓰리잡을 뛰다가 건강이 악화돼서 과로사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그날도 은행에 가서 대출 문제 어떻게 좀 해볼 수 없을까 노력하셨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전세사기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살해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두렵습니다. 전세사기 피해가 1만 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 순간에도 저희가 알지 못하는 어느 좁은 방에서 피해자가 숨진 채로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런 소식이 저희한테 들려진다면 저는 너무나 힘들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 1년간 전국대책위를 만들고 커뮤니티도 만들고 오픈 채팅방에서 상담도 해드렸는데, 그런 노력과 활동들을 몇몇 분들이 다 몸을 갈아서 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국에 계신 수많은 전세사기 피해자분들, 제발 죽지 마십시오. 제발 살아남아서 우리 함께 이 지옥을 빠져나갑시다. 우리와 함께 살아서 돈을 돌려받고 우리의 일상을 되찾읍시다.
그리고 여기서 함께 봐주시는 시민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전세사기 피해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피해자는 우리 이웃이고, 누군가의 가족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외면하지 마시고 전세사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모아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정부와 정치권에 당부합니다. 총선 전까지 특별법 개정안 조금 더 지켜주십시오. 총선이 지나면 우리 피해자들이 또 버려지는 게 아닌가, 우리 피해자는 또 하루하루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부디 피해자들의 입장을 담은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전세사기 피해 문제 해결 방안을 꼭 내놓아 주십시오.
김다혜 저는 두 공간을 다녀왔어요. 2월 4일 임보라 목사님 1주기 기억 예배에 방문했고요. 3월 8일 ‘초록나무 임보라 이어 말하기’를 다녀왔습니다. 기억 예배는 월간 에디터의 도전과 무관하게 참석했고요. 방문한 후에 도전 주제가 ‘기억 공간 방문하기’로 정해져서 이 내용을 정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요. 곧바로 초록나무 임보라 이어 말하기 행사가 열리더라고요. 그래서 겸사겸사 다녀왔어요.
기억 예배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작년에 임보라 목사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복상에서 일하면서 들었던 나름의 고민 때문이기도 했는데요. 일하면서, 또 과월호를 뒤적이면서, 생각하게 되는 점은 깊은 이야기는 많은 경우 느리게 전달된다는 사실이에요. 어떤 이야기는 1년이 지나고 나서야 다뤄지고, 어떤 이야기는 10년이 지나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할 때도 있고요. 말하는 이도, 전달하는 이도, 듣는 이들도 준비되어있지 않다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다루기 조심스러운 사건들도 있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전달될 만한 ‘적절한 때’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비슷한 이유로 임보라 목사님 부고 소식도 마음속에 빚처럼 묵혀두고 있었죠.
예배 시간 때 마이크를 잡은 어느 한 분이 발인 예배 때보다 적게 모였고, 앞으로 더 적게 모일 거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데요. 그래도 향린교회 예배당을 꽉 채우는 인원이 모였습니다. 현장에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끼는 청년도, 울음을 참아내고자 예배 전에 미리 울고 웃어 보이는 어른도 있었고요. 성소수자 그리스도인과 어린이들이 강대상에 올라 촛불을 밝혔습니다. 늘 먼발치에서 임보라 목사님을 봐왔던 저로서는 그분들 마음을 그저 가늠해볼 뿐이었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이동환 목사님과 자캐오 신부님, 이하나 목사님을 포함한 사제들이 성찬을 집례한 후 예배에 참석한 모두를 축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제 머리와 무릎으로 무지개색 꽃잎들이 떨어졌지요. 김정현의 〈햇살과 나무의 노래〉, 황푸하의 〈사랑은 이긴다〉 등, 예배에서 함께 부른 노래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초록나무 임보라 이어 말하기는 사회자였던 오수경 청어람ARMC 대표님 말씀처럼 “좋은 공동체의 홈커밍데이”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눈물과 웃음이 공존했고, 그분들 이야기를 통해 성소수자 인권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뿐 아니라 다양한 임보라 목사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어를 할 줄 알았던 목사님, 강정 해군기지 반대 운동과 교단 내 성폭력 사건들에도 마음 다해 앞장섰던 분, 모두가 의지하고픈 멘토이자, 아끼는 친구였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 가운데 저는 임보라 목사님께 팔찌 선물을 받았다는 트랜스젠더 여성분이 떠올라요. 그분이 선물을 받고 가격을 몰래 찾아보셨다고 말씀하셔서 모두가 웃었습니다. ‘여자들은 그런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임보라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분은 빚진 마음으로 다른 트랜스젠더 여성과 함께한 하루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이하나 목사님 고백도 기억에 남는데요. 목사님의 부재 가운데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요.
저는 임보라 목사님을 잘 모르지만, 참여하신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임 목사님의 면면을 유추해보기도 했어요. 어김없이 눈물도 흐느낌도 있었지만, 또 운다고 서로를 놀리기도 하고, 왁자한 웃음도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각각의 이야기 조각을 하나의 모자이크로 맞춰가는 시간이었어요.
강동석 저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을 갔다 왔습니다. 다들 무거운 장소를 다녀오셔서, 도서관에 다녀왔다고 말하려니 민망하네요. 왜 이 장소냐면요. 마침 올해가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고, 복상이 2년 전에 ‘이희호 여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커버스토리 기획을 해볼까 어떨까 하는 논의도 했었잖아요. 그때 기억도 나고, 마침 〈길위에 김대중〉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던 시점이었죠. 사실 복상 사무실에서 나와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멀지 않은 곳에 김대중도서관이 있잖아요. 호기심은 있었지만 좀처럼 방문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기회가 시기적으로 딱 좋다 싶었죠. 100% 예약제로만 운영되더라고요. 화요일인 3월 12일 오전 10시로 예약해서 방문했습니다. 저 혼자밖에 없었고요. 제가 다 보고 나니까 전시실을 잠그시더라고요.
김대중 대통령은 제가 개표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첫 대통령이에요. 그때가 아홉 살이었거든요. 이회창 후보와 엎치락뒤치락했던 기억인데요. 찾아보니 김대중 후보가 밤에 표 차이를 따라잡고 아슬아슬하게 이기면서 약 40만 표 차이로 당선되셨더라고요. 새벽 5시까지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밤새워서 봤어요. 이불을 덮고 어머니에게 기대어 앉아서요. 아버지가 경상도, 어머니가 전라도 출신이거든요. 저는 그날까지 우리나라에 지역감정이 존재하는지 몰랐어요. 개표방송을 보면서 어머니가 막 김대중 후보를 ‘선생님’이라고 지칭하면서, 이분이 대통령이 되는 게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골 깊은 지역감정에 관한 이야기부터 쭉 설명해 주셨어요. 그런 어머니와의 추억을 기분 좋게 기억하고 있고요. 지난해에는 제가 목포를 여행했는데,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도 방문했거든요. 그래서 궁금하기도 했어요.
1층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인생 역정이 담긴 온갖 전시품들이 진열돼 있었는데요. 기억에 남는 전시품 중 하나는 못으로 쓴 편지예요. 김대중 대통령이 1976년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서울대병원 병실에 수감된 적이 있었는데, 감시를 받으면서 펜이고 종이고 다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요. 이희호 여사가 면회를 와서 종이를 몰래 전달하면, 못으로 눌러서 편지를 썼더라고요. 햇빛에 비추어 아주 가까이서 봐야지만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요. 그 편지를 전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1980년에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확정받는데, 사형수 수의를 전시해 두었더라고요. 당시가 겨울이었는지, 솜옷이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40대 기수론을 힘입어 197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연설하던 장면을 비롯해 1973년 납치 사건 당시 기자회견 장면 등 영상 자료도 많아서 좋았어요. 1973년 납치 사건을 회고하는 영상도 볼 수 있었는데요. 가톨릭 신자이던 김대중 대통령의 신앙 간증이 담겨 있더라고요.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고 일본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려는 목적에서 일본에 가있을 때 납치를 당한 것이었는데요. 중앙정보부에서 태평양에 빠뜨려 죽이려 하다가 미국에 위치가 발각되면서 실패로 끝났다고 알려졌거든요? 죽음을 예감했을 때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하셨더군요. 체험 직후 비행기가 갑자기 나타나면서 살았고요. 2층에 전시된 옥중에 읽으신 도서 중 《그리스도교 사회론》, 《해방신학》 등 기독교책도 여러 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엄혹한 시기를 지나온 한 인간의 위대한 양심을 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김대중 대통령은 ‘서생적 문제의식’ ‘상인적 현실감각’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중요시하면서 정치에 임하셨다고 들었는데,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떠올리면서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어요.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기간에 브리핑과 기자회견을 한 횟수가 150번이라고 하는데, 불통으로 일관하는 현 대통령과 차이가 너무 많이 나잖아요. 하고픈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
민호 지난 호에 인터뷰가 실린 시찬이 아버님 박요섭 님(2024년 4월·401호, 송지훈이 만난 활동가)이 4월 7일 세월호 10주기 기억예배에 참석해달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때 송지훈 국장님과 같이 간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송지훈 국장님이 아내와 함께 간다고 하고, 제가 여자친구와 함께 간다고 하니까 막 손뼉 치시고 아주 좋아하시더라고요.
제가 9주기 때도 기억예배에 참석해서, 작년보다는 익숙한 분위기였어요. 얼굴을 아는 분들과 인사 나눌 수 있어서 무척 반가웠고요. 끝나고 박요섭 님과도 인사를 나눴어요. 그날 600명 정도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이야기를 나눴는데, 복상 구독자인 친척 조카분에게 인터뷰 잘 봤다는 연락을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가족분들이 매체에 세월호 이야기하실 때 경계하는 태도가 없지 않으신데, 복상에 대해서는 마음을 열고 반가워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고요.
올해가 10주기인데, 그 자리에 어린이집을 다닐 법한 아이들이 앞에 앉아 있더라고요. 이 친구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잖아요? 나중에 세월호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까 고민도 해봤습니다. 10주기로 오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예배에 계속 의미가 덧붙여지는 것 같아요. 이제 기억예배에 가면 어떤 분들을 만날 수 있겠다, 대충 그려지거든요? 세월호로 연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관계는 몇십 년 동안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동석 사실 제가 김대중도서관에 가기 전에 안산의 세월호 관련 기억 공간을 갈까 하고 찾아보기는 했었어요. 갈 만한 장소들은 제가 불편한 몸을 갖고 혼자 방문하기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고, 마감 일정 앞두고 갔다 오기에는 무리가 됐어요. 그런데 공간을 찾아보면서 놀란 부분이 있는데요. 요즘 박물관 같은 데서 VR로 온라인에서 전시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하기도 하잖아요. 코로나를 지나오며 VR 관련 기술이 더 발전한 것 같은데요.
제가 이번에 4·16민주시민교육원 홈페이지에서 기억교실 VR과 단원고 4·16 기억교실 VR 페이지가 있기에 들어가서 봤는데, 깜짝 놀랐어요. 복도를 지날 수도 있고, 교실들이 그대로 재현돼서 나오거든요. 희생자 자리마다 각종 영상 자료를 볼 수 있어요. 교과서나 유인물을 비롯해 남겨진 물건도 다 나와요. 정말 VR 장비를 끼고 하는 체험 활동이 있다면 울 것 같아서 도저히 못 하겠다, 싶을 정도로 VR로 재현하는 현존감이 놀라울 정도였어요. 보니까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 정신과적 문제로 재활할 때 VR 기술이 효과적으로 쓰일 정도로 발전했더라고요. 현장감이랄까, 생각보다 훨씬 리얼리티가 있어서 놀랐고요. 저는 ‘2학년 교무실’이라고 해서 정리한 공간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희생당한 교사분들의 액자 사진이 놓여있거든요. 제가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이기도 하고, 몇몇 교사분은 정말 지금 제 나이 또래인 것 같아서요.
나중에 후세대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한다고 했을 때, 이런 자료들이 매우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기억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한편으로는 재난과 관련한 안전 교육 측면에서도 그렇고요.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는 책도 있잖아요. 고통을 목격한 이후에 해야 할 일도 서술하는 책인데요. 안전한 미래로 나아가는 데 기여되는 방식으로 VR 콘텐츠가 구축되고 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봤습니다. 이제는 유명한 추모 공간이나 기억 공간을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유의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아요. 그렇게 방문하더라도, 실제로 가서 보는 일 못지않게 몰려오는 감정들이 있더라고요.
범진 저는 제 아이들에게 참사를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어요. 실제로 설명하려 해봤는데 어려웠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세월호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것 같아요. 동석 기자가 〈새가정〉에서 세월호 생존자가 쓴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 생각나네요.
동석 지금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까, 여러 매체에서 세월호 10주기를 특집으로 다뤘잖아요?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새가정〉은 3월호에 ‘열번째 봄 : 기억의 길 위에서’라는 특집 주제를 다뤘어요. 사실 그 글 중 하나가 세월호 생존자가 쓴 것이었어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이가 10년이 지나 28세가 된 거죠. 그날의 사건이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면서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쓴 글인데요. 제가 눈여겨본 대목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보니 유가족이 되신 친구들 부모님 마음을 감히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고백한 부분이었어요.
벌써 그때 사고를 겪은 고등학생들이 곧 부모들이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10년이 지나서 다른 결의 이야기로 전해지기도 하는 거죠. 다양한 감정이 짧은 에세이 속에 들어있어서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후세대에 다양한 결을 갖고서 전해진다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범진 우리에게도 각자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기억 공간이 있잖아요? 동석 기자가 예전에 아버님 계신 곳에 대해 말해준 것도 생각나는데요. 혹시 괜찮으면 나눠줄 수 있나요?
동석 제 본적지에 조상들 묘가 있는 선산이 있어요. 거기 아버지가 묻혀계십니다. 높은 산은 아닌데, 꽤 올라가기는 해야 하거든요. 제가 복상에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를 연재할 때 실린 글(2022년 11월·384호)에서 그곳 풍경을 짧게 묘사하기는 했습니다. 아버지가 2010년 4월 9일, 쉰넷일 때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를 화장한 뒤 자리를 마련해서 유골을 묻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돌아가시기에는 젊은 나이인 아버지를 할아버지와 할머니 돌아가시고 10년도 지나지 않아 두 분 곁에 묻으려니까 기분이 묘했죠. 저와 형이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장례식 때 겨우겨우 선산을 오르면서 직감했어요. ‘이 묘소를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그러니까 앞으로 누구에게 업혀서 가거나 아주 힘겹게 올라오지 않으면 이 광경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넓적한 작은 비석에 “성도 강주영의 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적혀있어요. 그날, 그 문구를 비롯해 봉분과 주변 풍경 등을 최대한 눈에 담아두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저는 아버지 묘소를 굳이 가보지 않아도 상상을 통해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놓았어요. 한 장의 사진처럼, 딱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고요. ‘기억 공간 방문하기’라는 주제와 연결해서 보면,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계속 방문하고 있는 셈이겠죠. 그래서 직접 가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얽매이지 않아요.
한편으로는, 제가 아버지의 죽음을 소화하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한다는 감정에 의문이 있어요. 배우자가 결혼 후에도 종종 물어보거든요. “아빠 보고 싶지 않아?” 어떨 때는 굳이 왜 물어보나 싶은 거예요. 평소에 아버지 생각은 거의 안 하고 지내거든요. 좋은 추억도 있지만, 어렸을 적에 별것 아닌 실수에 뺨을 맞은 강렬한 기억들이 남아있어요. ‘혹시 나중에라도 내가 아이를 낳으면 저렇게 안 키워야지’ 하는 지점도 많고, 애증의 감정도 있어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측면도 있죠.
어쩌면, 애도의 시간을 미뤄둔 것 같기도 해요. 돌아가신 해에 저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형은 4학년이었으니까요. 그때 우리 가족은 어머니까지 셋이서 살아남아야 했어요. 공교롭게도 가족들이 다 따로 떨어져 지낼 때 돌아가셔서, 이웃들이 아버지가 자식들과 마누라에게 버림받아 죽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어요. 이런 기억도 있어서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두고 말을 꺼낼 때면 스스로 까칠해지는 측면이 있죠. 아버지에 대해 남은 마음을 돌아보고 애도하는 일은 전적으로 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 누가 옆에서 가타부타할 것은 아닌 듯해요. 이런 반응이, 제 나름대로 아버지를 애도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네요.
범진 저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이천호국원에 같이 모셔져 있거든요. 아버지가 매년 1월 1일이면 꼭 저를 데려가고 싶어 하세요. 제 입장에서는 귀찮거든요. 10년 넘게 모시고 가면서 계속 귀찮았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는 어렴풋이 이해하는 부분이 있어요. 제가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이 죽었을 때 자기를 그렇게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 같은 거예요.
저와 식구들 몇 명이 한 차에 타서 이천까지 가서 예를 갖추고, 이천쌀밥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오는 일정이 1월 1일의 루틴이 돼버렸어요. 그렇게 오가는 길이 언젠가 사무치게 그리울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이제는 불평하지 않게 됐어요.
다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요. 예전에 인터뷰를 통해 만난 분이 저에게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어본 적이 있어요. 사실 거기에 대해 당당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기도 한데, 그냥 솔직하게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기보다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크다”라는 식으로 답을 했어요. 왜 그렇냐고 물어보시기에 그냥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앞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더 생길 것 같아서 그렇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이야기를 들은 어떤 분이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없어야 천국이지 않겠냐”라고 하시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감정이 좋든 싫든 거기서부터 자유로워져야 천국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고, 듣고 나서 복잡 미묘한 마음이었죠. ‘기억이 없어야 천국이라면,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인지 모르겠네’ 싶으면서 그런 천국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기도 했어요.
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을 보면, 화해를 위한 망각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하잖아요? 예전에는 ‘망각’이라는 키워드만 봐도 화가 났거든요. 처벌해야 할 것을 처벌하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은 채로 기억을 잊게 된다면 무슨 소용인가 싶었는데요. 책임 있게 기억해야겠지만, 동시에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재일조선인 감독이 만든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다큐멘터리에서도 제주 4·3을 겪은 감독의 어머니가 나와요. 치매를 겪으시는데, 연구자들이 4·3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거든요. 어머니는 도움을 주려고 그 기억을 열심히 떠올리며 말씀하세요. 그러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시거든요. 그래서 감독이 엄마가 힘들면, 굳이 안 떠올려도 괜찮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대목에서 우리에게 기억이란 무엇일까, 망각의 역할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붙잡게 되더라고요.
민호 제가 설훈 목사님을 인터뷰(2024년 1월·398호)할 때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했거든요. 설훈 목사님이 예전 인터뷰(2017년 6월·319호)에도 밝히셨는데, 세월호 당시 안산에서 목회하셨잖아요? 지금도 세월호 관련 뉴스를 잘 못 보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힘든 기억, 무거운 경험은, 나름대로 정리하려고 시작하는 일부터 오래 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하기 어려운 문제 같아요.
돌아보니까, 이번 ‘월간 에디터의 도전’은 전반적으로 어렵고 무거운 도전이었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