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은 약속, 희망, 기쁨이다

[402호 말씀과 따름] 마태복음 5-7장 깊이 읽기 ② 

2024-04-30     노종문

※ 2024년 1월 20일 열린 ‘2024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 기조 강의로 발표한 내용을 수정했다. 지난 호에 이어지는 글이다.

염려하지 마라

25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 목숨(영혼, 정신)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또 너희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목숨은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몸은 옷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냐. 26하늘의 새들을 잘 살펴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으지도 않지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소중하지 않겠느냐.33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찾아라.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34그러므로 너희는 내일을 염려하지 마라. 내일은 스스로 염려할 것이다. 그날에게는 그날의 괴로움으로 충분하다. (마 6:25-34)1)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말들은 점심으로 밥을 먹을까, 국수를 먹을까처럼 선택에 관한 말이 아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고, 당장 입을 것이 없어서 염려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은 어떻게 보면 조금 섭섭한 일이다. 제자들에게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는 경제적인 불확실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전제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가장 힘들게 하는 세 가지 문제를 꼽는다면, 건강, 관계, 돈 문제일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평소에 주어진 여건 안에서 청지기의 태도로 성실하게 잘 관리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여러 원인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중 경제문제를 언급하시지만, 인생의 다른 문제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실 것이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은, 목숨이 존재하는 목적은 음식을 잘 먹는 데 있지 않고, 몸이 존재하는 목적은 옷을 잘 입는 데 있지 않다는 뜻이다. 즉, 우리의 마음과 몸을 음식과 옷을 위해 바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이다. 마음과 몸을 위해 음식과 옷이 있는 것이지 거꾸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생에는 돈과 경제적 풍요함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건강 문제, 관계 문제, 돈 문제를 주어진 여건 안에서 잘 관리해야 한다. 그 자체에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데 전심을 쏟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리석은 실수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인생에 예상치 못한 고난이 찾아오고 내일 일이 불확실해지는, 그래서 눈앞에 닥친 상황에 압도되어 염려에 빠지는 일이 벌어진다. 당장 내일 먹을 음식이 없고, 당장 내일 입을 옷이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되는 셈이다.

이것은 마치 작은 보트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배에 물이 넘쳐 들어오는 상황과도 비슷하다. 마음이 급박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물을 퍼내고 있지만, 배에는 물이 점점 더 차오르는 것 같고, 결국 배가 침몰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럴 때, 우리를 마비시키는 염려가 엄습할 때,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자녀인지를 다시 기억하라고 하신다. “[아버지께] 너희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소중하지 않으냐.” 고난의 바다 한가운데서 염려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다시 돌아보면서, 잠시 마비되어있는 믿음의 기능이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데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시다’라고 여러 번 반복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오래된 신념과 견고한 정체성 인식을 새것으로 바꾸도록 요구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의 핵심과 관련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님의 때가 왔고, 오래전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을(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탄생하며, 우리 각 사람이 당신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고(행 2:38),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으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거하는 백성이 된다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예수님 안으로(into) 들어왔고(롬 6:3),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헬, 아가페토스)이신 것처럼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헬, 아가페토이, the beloved)이 되었다. 이 ‘사랑받는 자’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함께하셨고,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아들이다. 나의 사랑받는 자다. 내가 그를 기뻐하노라(마 3:17; 막 1:11).”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선언하시는 이 음성을 듣는다. “너는 내 딸이다. 나의 사랑받는 자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천지를 창조하는 힘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 흔들고 새로운 정체성을 심는다. 우리는 이런 음성을 듣고도 우리의 옛 사람, 옛 정체성을 움켜쥐고 고집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빛바랜 사진처럼 완전히 부차적인 기억으로 남아 한구석으로 치워지도록,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정체성이 나 자신을 가장 깊숙한 곳부터 표면까지 모든 수준을 지배하도록,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진실(truth)에 협조해야 한다. 이렇게 새롭게 된 복음적 정체성이 우리 마음에 견고하게 자리 잡게 해야만,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 변화된 신분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2)

눈앞의 불확실성에 압도되어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하늘 아버지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다시 생생하게 우리 마음을 향해 들려주라는 말씀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사랑받는 자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너는 내 딸이다. 내 사랑받는 자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이 복음의 진실을 우리의 피곤한 마음에 늘 생생하게 반복하여 공급함으로써 메말라 멈추었던 믿음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풍랑이 몰아치던 밤바다의 보트 안에서 편안히 잠드신 모습을 상상해보자(마 8:24).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풍랑 안에서도 고요히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날마다 복음의 진실로 자기 영혼을 먹여야 한다. 그래서 웬만한 풍랑이 와도 풍랑이 우리를 염려에 빠뜨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풍랑 속에서도 고요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심지어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롬 5:3; 벧전 1:6), 우리가 오늘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천사가 우리를 돕기 위해 은혜를 준비한다고 믿고(마 6:34) 편안히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기도와 간구로 행하라

7너희는 구하라.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아라. 발견할 것이다.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려질 것이다. … 11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안다면, 얼마나 더, 하늘의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 7:7-11)

산상수훈 본론의 여러 명령 중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오는 명령은 간구하라는 명령이다. 맨 마지막 명령은 ‘황금률’(마 7:12)이라는 별명을 지닌, 모든 명령을 종합하는 말씀인데, 그 직전에 자리 잡은 간구 명령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다른 모든 명령에 영향을 끼치는 특별한 역할을 한다. 사실 이 간구 기도 명령은 원래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다루는 주기도 말씀 다음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누가복음 11:1-13을 보면 이 말씀이 기도에 대한 말씀으로 주기도와 함께 나온다. 마태는 산상수훈 말씀들을 배열하면서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이 위치에 옮겨 놓음으로써 예수님의 중요한 사상을 표현했다.

즉, 산상수훈의 모든 명령을 실천하려 할 때, 실천을 위한 자원을 자신 안에서 찾지 않고 기도와 간구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받으라는 말씀이다. 제자도를 실천하는 자원은 간구 기도이다. 우리의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창고를 열고 하늘의 자원을 받아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누가복음 11:13의 병행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바로 성령님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성령님의 함께하심과 능력 공급하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려 할 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지혜와 능력을 얻어 실천해야 한다.

간구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중요한 특징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도 본질적으로 간구다. 예수님의 사상에서 간구 기도는, 단순히 개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를 넘어, 하나님 나라가 진행되는 수단이었다. 간구 기도는 하나님이 자녀들과 함께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시는 방식으로 정하신 것이다(요 14:12-14).

우리에게 왜 간구 기도가 필요할까? 첫째로, 간구 기도는 우리가 대면한 악의 문제가 거대하며, 인간의 선한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문제에 대응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과거에 인간 능력에 대한 낙관주의가 유행했던 계몽주의 시대 서구인들은 간구 기도를 유치한 종교 행위로 치부하고 희화화하며 조롱하기도 했다. 고대인들의 미신적 종교가 남긴 유물 정도로 취급한 셈이다. 그러나 20세기 세계대전 등 서구인들의 자신감과 오만이 초래한 처참한 비극들을 통과한 오늘날에는, 그때의 낙관주의가 너무도 순진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악은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 겨루기에는 거대하고 위험하고 복잡하고 강력한 적이다.

둘째로, 간구 기도는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왕을 보좌하는 제사장들로서 세상을 위해 중보하는 역할을 맡은 것을 보여준다. 구약시대 제사장 역할의 중요한 부분은 백성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도록 축복해주는 일이었다. 제사장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세를 사용하여 백성을 축복하고 중보하는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백성을 섬겼다. 이는 개인적 구제나 봉사가 아니었다. 제자들의 간구 기도는 이러한 제사장적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기도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며 익숙한 문제 제기를 할지도 모른다. 사랑의 실천이 없는 제자도를 경고하려는 의도는 선하지만, 이 말은 암묵적으로 기도를 사소한 소원 성취 수단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손상시킨다.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도 적절히 행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와 사랑의 실천은 서로 밀고 당기며 대립하며 균형을 맞추는 일이 아니다. 기도로 중보하고 축복하는 일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제사장적 본분이다. 하나님 나라는 자녀들의 기도와 중보와 축복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심으로써 큰 걸음을 내딛는다.

기도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과 대화라는 측면이 있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위한 중보와 간구라는 측면이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사적 특권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제사장들로서 수행해야 할 공적 직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간구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공적인 차원과 개인적으로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적인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나의 명령을 실천하라

24그러므로 나의 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모든 자는, 자기 집을 바위 위에 지어 둔 지혜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비가 내리고, 강들이 넘쳐오고, 바람들이 불어서 그 집에 부딪혀왔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위 위에 기초가 놓였기 때문이다. 26나의 이 말들을 듣지만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모든 자는 그의 집을 모래 위에 지어 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27비가 내리고, 강들이 넘쳐오고, 바람들이 불어서 그 집을 강타했고 (그 집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것의 무너짐이 대단했다! (마 7:24-27)

산상수훈 결론 부분(7:13-27)은 크게 둘로 나뉜다. 전반부는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라는 경고이고(7:15-23), 후반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실천하라는 강력한 권고다(7:24-27). 하나의 주제가 두 부분을 동시에 관통하는데,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좋은 열매를 맺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 그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는 것,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그러나 행하지는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계산되지 않는 일들이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자고 강조하면, 놀랍게도, 이를 진지하게 ‘위험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잠시 곁길로 빠져야겠다. 첫째로, 예수님이 “내 말을 실천하라”라고 하신 것은, 당연히 펠라기우스 이단의 행위 구원론처럼, 하나님께 인정받을 공로를 쌓으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것은 ‘실천의 노력은 무조건 공로의 추구가 된다’라는 성급한 전제로 틀을 만들어 문제를 바라보는 오류다. 문제를 상상하는 그림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님은 당신께 나아온 제자들이 하나님이 심으신 “의의 나무들”(사 61:3)이 되도록 의로움에 자라가기 위해 당신의 말씀을 행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다. 여기에는 실천하려는 노력이 당연히 들어가지만, 성령의 도우심과 간구의 기도로, 하늘의 자원으로 진행하는 일이다.

둘째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이므로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든지 행하지 않든지 구원받는 결과에는 차이가 없다는 식의 말을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정반대로 오히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모든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며,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만 들어갈 것이다”(마 7:21; 비교 요 14:21; 15:10)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는데, 앞의 말은 이런 예수님의 심각한 경고 말씀에다가 물을 타는 짓이다. 이런 주장을 분석해보면, 신학적 개념으로 구원을 칭의와 성화로 구분한 후, 실제로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두 측면을 분리하고, 칭의 부분만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차례로 진행되는 두 가지로 생각해서도 안 되며, 한 실체의 두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 구원은 법적 신분 변화(칭의)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변화된 관계를 누리는 실제적 경험(성화)이기도 하다. 둘은 하나의 실체의 다른 측면들이다. 죽은 사람 옷에 신분을 바꾸어 적어놓으면 죽은 채로 행복할까? 다시 살아서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게 복된 구원의 알맹이다. 이 구원의 복에는 예수님을 믿는 즉시 일어나는 신분 변화의 측면과 성령을 선물로 받아 성령님과 동행하는 생생한 삶의 측면이 있다. 칭의와 성화라는 신학 용어 구분 때문에 구원을 칭의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산상수훈을 사람이 지킬 수 없으므로 실패하게 하여 회개로 이끄는 명령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루터의 초기 가르침을 잘못 읽고 피상적으로 적용한 일종의 율법 폐기론이다. 루터에게는 같은 율법의 말씀이 복음의 말씀이 될 수 있음을 모르거나 간과한다.3) 즉, 예수님의 명령을 내 자원만으로 행할 수 없음을 느끼지만, 그 막다른 길에서 도움이신 성령님의 은혜를 발견하며 신앙의 체험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루터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절망을 주지만(율법이 되지만), 바로 그 말씀이 희망과 기쁨이 된다(복음이 된다).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라는 용어는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가 사용한 1세기 평이한 개념(바울 사도에게 율법은 ‘토라’를 의미한다)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어서, 루터를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혼동을 주고 있다.

이제 본래 가던 길로 돌아오자.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을 실천하라는 명령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셨을까? 나는 여기에 예수님의 교육학적 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교육학은 언어화된 지식을 강의로 전달하는 좌뇌 중심 학습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보고 느끼고 성찰하면서 지혜를 얻는 다층위 학습을 추구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뺨을 맞을 때 왼뺨을 돌려대보는 실제 경험을 하게 되면, 단순히 책이나 강의를 통해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수준에서 자극을 느끼게 된다. 피부의 느낌, 심장의 쿵쾅거림, 수치심, 고집, 윤리적 판단, 실천에 성공했다는 자부심, 하나님에 대한 신뢰 등등 다층적 학습 자료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몸으로 느끼는 실제 경험은 우리 몸에 저장된 오래된 과거 기억들을 흔들고 변화시킨다. 이런 복합적 경험 자료를 성찰해보는 가운데, 예수님 말씀을 입체적으로 대면하고 학습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학습에서는 먼저 경험해본 사람의 모범이나 지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선생이나 동료의 삶을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며 배우는 것이, 글로 정리된 원리나 교훈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몸 중심 학습은 세계관, 즉, 사람의 가장 심층에 있는 신념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우리 몸 구석구석에는 우리가 오래 축적해온 암묵적 기억들의 형태로 우리의 세계관과 신념이 저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종종 의식 수준보다 더 아래에 있어서 끌어내기가 어렵다. 이 오래된 신념들을 흔들어 깨우고 다시 검토하게 만들려면, 몸으로 새로운 사건을 경험해보아야 한다. 즉, 산상수훈의 실천을 통해 예수님이 명령하고 인도하시는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그 경험을 성찰함으로써, 예수님이 경험하셨고 마음에 품으셨던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배우게 되는 셈이다. 이런 학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간다.

요약하면, 산상수훈 말씀을 경청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몸으로 실천하고, 경험을 성찰해보는 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흡수하는 방법이다.

소명과 제자도

지금까지 산상수훈을 읽고 이해하며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주제를 살펴보았다. 사실 제자도는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임과 동시에 삶의 현장 안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맺어지는 열매다. 이 글은 나 자신의 좁은 삶의 경험이라는 한계 때문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의 다양한 적용을 다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자도는 각 사람이 그리고 각 교회가 자기 삶의 자리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가는 삶이다.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 우리 교회가 섬기는 사역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과 동료 성도들일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 나보다 더 나의 문제를 잘 아는 전문가가 있고, 그가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허상이다. 우리는 대개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다잡아 의지하며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다. 이런 실제 삶 속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인 산상수훈을 굳게 붙들어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 안에 감추어진 하늘의 보화를 끌어내고 경험하고야 말겠다는 자세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성공하는 데 그보다 더 명확하고 성공 확률이 높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 개관도 배우면 좋고, 교회사 공부도 하면 좋고, 좋은 설교를 날마다 듣는 일도 좋다. 그러나 이는 산상수훈 말씀을 더 잘 배우기 위한, 또는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 자신을 더 잘 알아가기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의 초점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준비운동을 끝낸 후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할, 평생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경험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 안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실천해보는 가운데 성령님을 통해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들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자리에서 이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개인의 소명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시민단체 활동 영역에서 우리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역할이 바로 우리의 소명이다. 이 소명의 자리에서 산상수훈 말씀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경청하고, 순종해보고, 일어나는 일을 성찰해봐야 한다. 이 일을 개인적으로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동료들을 모아서 소그룹으로 함께해봐야 한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나와 우리를 이끌어 행하게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발견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기존에 우리가 하던 신앙생활이나 다른 선한 활동들을 대치하지 않고, 그 활동들을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행하는 모드로 변환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복음에 근거한 강력한 낙관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암울한 분위기로 채색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방해하는 세력이 있고,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피상적 낙관주의에 염증을 느껴서 반작용으로 심각한 표정을 짓는 비관주의를 예수님의 십자가 도의 특징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표면만 보고 심층을 보지 못하는 것, 작은 부분만 좁게 보고 더 큰 이야기를 보지 못하는 것, 벌어진 일들만 보고 성령님이 그 속에서 행하시는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것, 그래서 너무 쉽게 절망하고 불안해하는 것, 즉, 어리석음과 불신앙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는 이사야 61장과 산상수훈의 팔복 선언, 소금과 빛 말씀과 같은 하나님의 계획의 원형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성취될 약속이기 때문이다. 또, 복음의 진실에 의존하며, “너는 내 딸이다. 내 사랑받는 자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내 영광을 나타낼 의의 나무로 심었다”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 자신에게 반복해서 날마다 다시 들려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작은 이야기들이 반드시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되리라고 굳게 확신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이야기는 지상과 천상의 경계를 초월하고, 삶과 죽음, 현세와 내세를 초월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지상이든 천상이든, 현세든 내세든, 살든지 죽든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신실하신 성령님과 항상 함께 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명령은 부담스러운 요구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우리의 희망이며, 또 이미 성취되고 있는 기쁨이다.

■ 주

1) 따로 언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성경 본문은 필자의 사역(私譯)을 사용하였다. 원문에 비추어 필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요점을 언급할 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2) ‘사랑받는 자’(아가페토스)는 형제자매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또 하나의 호칭이 되었다. 아쉽게도 우리말 번역에서는 ‘사랑하는 자’로 능동태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복음을 상기하는 뉘앙스가 상실되었다. 사도들의 서신에서 ‘사랑받는 자들이여’(헬, 아가페토이, the beloved)라는 호칭은 빈번히 등장한다(롬 1:7; 12:19; 고후 7:1; 12:19; 딤전 6:2; 히 6:9; 벧전 2:11; 4:12; 벧후 3:1·8·14·17; 요일 2:7; 3:2·21; 4:1·7·11; 요삼 1:5·11; 유 1:3·17·20.). 이 수동형용사 ‘사랑받는 자’의 사랑하는 주체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이나 형제자매 둘 다 지칭할 수 있다.
3) 파울 알트하우스, 《루터의 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290쪽 이하 ‘한 말씀의 두 기능으로서 율법과 복음’ 단락을 참고하라.


노종문
한국과학기술원을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목회학)과 예일대 신학대학원(신약성서학 석사)에서 공부했으며, IVP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행하는 〈좋은나무〉의 편집주간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