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바다 깊은 데로

[402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2024-04-30     송진순

※ 3월 4일 YWCA연합회 월례기도회 설교를 대폭 수정한 글입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누가복음 5:4-6).

호모 프롬프트 시대

2024년이 시작되면서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분초 사회, 호모 프롬프트, 육각형 인간’이 제시되었습니다.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고(Don’t Waste a Single Second), 인공지능(AI)의 특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명령을 통해 그 결과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호모 프롬프트(Homo Promptus)가 시대의 인간상으로 부상했습니다. 금수저론에서 나아가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집안 등 어느 면에서 빠지지 않는 육각형 인간(Hexagonal Human)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올 초 베스트셀러가 되어 뜨거운 관심을 받은 《시대예보》(교보문고, 2023)라는 책은 이 같은 시대 변화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전망합니다. 저자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지능화된 시대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령화 사회로의 전환 앞에서 핵개인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진단하고 제안합니다.

가령 이전에는 ‘경험, 연륜, 전문성’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여 획득한, 그래서 ‘특정의 소수가 소유한’ 고급 정보를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동산 현황은 아파트 거래 정보 앱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여행은 에어비앤비와 스카이스캐너에서 검색하면 최적화된 계획을 즉시 제공받습니다. 가전제품은 얼리어답터의 리뷰 콘텐츠 영상에서 확정하여 주문하고, 세계 석학의 강의와 교양 지식은 어디서든 저렴한 비용으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예배와 설교, 명상 등 신성함의 경험도 취향과 기분에 맞춰 선택하고 구매하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정보와 지식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쉽고 빠르게 취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소위 전문 영역의 권위는 사라지고, 정보의 민주화로 인해 사람과 권위에 대한 존중이라는 기존 문법이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이와 함께 100세 시대를 준비하는 50-60대에게는 은퇴 후 전원주택에서 보낼 안락한 노후가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경력과 역량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제2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현재 60대 이상 자영업자는 200만 명으로 전체 자영업자의 36.4%를 차지하고, 구직자 5명 중 1명이 60대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생애주기가 확대되고, 디지털 도구와 인공지능이 삶 깊숙이 들어오면서 소위 ‘정상’과 ‘보편’으로 여겨지는 인간관계와 개념들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중년 세대는 자녀 부양과 부모 부양이라는 이중의 돌봄이 부담으로 다가오지만, 20-30대에게 효도는 “불공정 거래”라고 말합니다. 20년 부양받은 대가로 수십 년을 부양해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공정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MZ세대를 폄하하거나 세대를 가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기존의 가족 개념으로는 변화하는 관계들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생존을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돌봄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몫이 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자신을 도구화하지 않으면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 저자는 진중한 목소리로 새로운 시대를 예고합니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매일 쏟아지는 정보와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 경탄을 보내면서도, 개인으로 존재하라는 다그침에는 서글픔과 처절함마저 느껴집니다. 이 세계가 역사상 최고의 풍요와 편리를 기반으로 진화한다 해도,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유토피아는 더더욱 아닌 유동하는 사회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생존하는 것’은 버겁고 힘겨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수명 연장, 유무형의 자산에서 초월적인 영적 체험까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시대임에도,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쫓기듯 시간에 맞춰 자기계발을 하고, 보다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가족과 사회 공동체에서 타인은 민폐와 염치 사이에서 줄다리기해야 하는 대상이기에, 오롯이 나 자신을 책임지고 돌보는 데 사력을 다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니 주체적인 개인으로 살라는 시대의 요청은 희망과 연대의 메시지가 아니라 서열화된 세계에서 불안과 분열에 발 딛고 있는 강박적 자기암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상황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시대 변화에 대해 많은 교회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고령화되는 교인들에게 맞는 프로그램과 강의를 제공하는 한편,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온라인 예배와 성경공부는 이제 익숙한 광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에서 우리는 놓치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하게 됩니다.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두 개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하나는 먹고 마시며 사랑하고 갈등하며 사는 일상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되는 세계, 앞으로 올 세계이면서 이미 우리 안에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한 발은 일상의 세계에, 다른 한 발은 하나님 나라 세계에 딛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세계에 서있는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상식과 교양을 갖추고, 어려운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인색하지 않은, 꽤 괜찮은 인간입니다.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할 줄도 아는 인간입니다. 반면 마음의 다른 문 뒤에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한 꿈으로 좌절과 실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내가 서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올라오는 이를 은근히 밟고자 하는 일그러진 욕망을 감추고, 뜻대로 안 되는 삶에 귀 닫고 눈 감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치유가 필요한 인간이 나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 역시 두 세계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상처받아 깨어지고 분열한 나, 보잘것없는 나, 어둠 속에 있는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온전하지 않다” “인간은 누구에게든 상처받기 쉽고, 언제든 악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구원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지금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하셨음을 아는 것이며, 나아가 나를 위해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더 완벽해지려는 열망이나, 분초를 다투며 보다 우월한 능력을 갖추려는 내가 아니라, 흔들리고 실패하는 지금의 나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셨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혜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다가와 보여준 사랑과 은혜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타적인 행위와는 다릅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 한계와 취약함에도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셨음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회의 낮은 곳, 어두운 곳, 불편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남들이 거리끼는 사람, 당연히 여기는 일, 질문조차 사라진 자리를 향해 내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행하신 사랑의 방식입니다.

《시대예보》라는 책은 변화하는 우리 시대를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철저하게 핵개인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좌표를 발판 삼아 새로운 삶의 지형을 그리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하지만 각자도생하며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헐거운 연대를 공동체의 가치로 포장하는 길이 궁극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일상의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선해야 하는 것은 시대 한가운데서 들어가 더불어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열어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셨듯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의 삶을 위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넘어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고령화, 지능화, 기후변화 그리고 공동체 가치가 무너지는 시대에서 말입니다.

핵개인의 삶을 넘어서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5:1-11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을 보도합니다.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4:18-22)과 마가복음(1:16-20)에도 나와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걸으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던지는 시몬과 형제 안드레를 보시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시니 그들이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곧이어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그리하시니, 그들이 배와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보도합니다. 예수의 말 한마디에 홀리듯 네 명의 어부는 생계를 저버리고 제자가 됩니다. 본문이 간략한 탓도 있지만, 예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이 상당히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이른 아침 게네사렛 호숫가에 두 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올라 배를 육지에서 좀 떼어달라 명하시고, 거기서 육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가르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종종 배에서 가르치셨다고 기록합니다. 무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소리가 잘 들리도록 사람들 가까이 가거나, 청중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오르는 방법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뭍에서 떨어진 배에서 가르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마가복음 3:7-12에 나와있습니다.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람들에게 귀신을 쫓고, 중풍병자, 손 마른 자, 나병환자와 같은 중증의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르침을 즐겨하셨습니다. 소문이 퍼지자 소위 ‘예수가 떳다’는 얘기만 돌면,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미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예수의 옷자락 한번 만지고, 몸에 손 한번 대려고 수많은 병자가 달려들었다고 보도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대기하게 하고 배에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 짧은 설명에서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의원에게 찾아갈 엄두도 못 내는 이들, 핍절하고 억압받는 상황에서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이들, 전쟁과 가난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기에 16장밖에 안 되는 짧은 복음서에 이렇게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는지 새삼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오늘 본문도 상황은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마치고, 시몬에게 명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사실 고기를 잡는 데는 예수보다 시몬이 전문가였습니다. 경험, 연륜, 전문성 모든 면에서 그는 우위에 있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을 따르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지만,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은 내려 보겠습니다.” 그 말이 무색하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다른 배에 도움을 청해 겨우 고기를 내리고, 시몬은 무릎을 꿇고 예수 앞에 엎드립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선의 기적을 베푼 은인에게 감사의 인사가 아니라 거부와 사죄의 인사라니요. 왜 그랬을까요?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이 장면을 읽으며 우리는 본문을 대략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건 정도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만선의 사건은 시몬에게 일생이 바뀌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경험, 생활, 지식이 무너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나아가 지금이 모든 것을 버리고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삶으로 가는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는 두려움에 엎드렸습니다. 그의 행동은 만선, 즉 풍어의 기적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목도하면서 예수가 소문대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고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고, 고기잡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며 살아왔던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에서 온 반응이었습니다. 당황하고 놀란 시몬에게 예수님은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5:10)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취하다’의 헬라어 단어는 ‘조그론’(ζωγρῶν)으로 ‘살아있는 채로 잡다’(take alive)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시몬아, 너는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살아있는 채로 잡아 올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를 ‘예수의 제자나 선교사’로 연결 짓는 성급함을 잠시 내려놓고 시몬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시몬의 삶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나의 동역자가 되어 세상에서 죽어가는 이들, 병들어 신음하고, 가난과 전쟁으로 삶이 파괴되고,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들, 그러나 정말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살려내지 않겠는가? 제안하신 것입니다. 배 안을 가득 채운 펄떡이는 물고기들과 같이, 너 시몬아, 나와 함께 뭍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펄떡이는 저들에게 함께 가지 않겠는가? 요청하신 것입니다.

시몬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예수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세상을 꿰뚫어 아는 현자의 여유였을까요? 혹은 모든 권력을 거머쥔 자의 카리스마였을까요? 우리는 예수가 어떤 눈빛으로 시몬에게 제안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압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고, 그 이상으로 이 말을 듣고 있는 시몬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예수가 건네는 확신의 눈빛은 다시금 시몬에게 자신의 동역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밤새 고기 잡는 데 실패하고 지치고 고된 시몬은 만선에 놀라고, 감당하기 어려운 제안에 두려웠습니다. 그는 만선에 대한 기쁨 대신 예수에게 내 삶을 흔들지 말고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나는 실수투성이 죄인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삶 깊숙이 들어온 예수와 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비록 예수와 한배를 타고 있지만, 뭍에 있는 무리와 자신이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시몬은 자신조차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시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에게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흔들리기 쉬운 인간에게 다가와 그의 믿음과 확신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시몬의 두려움이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시몬에게 다가가 동역자가 되어달라고 하십니다. 인간적 실패와 근원적 불안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시몬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데 자신의 삶을 걸었습니다. 예수의 제안대로(5:4) 그들은 세상 가장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사람을 취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시대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도 하나님이 인간을 믿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삶의 한가운데로 나아가 사람과 만나고 사람 안에서 희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모든 현장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편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질문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어부들이 매일 그물을 기우고 손질하듯 몸과 마음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다시금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핵개인으로 사는 것을 넘어 때로는 누군가의 곁이 되어주고 때로는 곁을 요청하며 사는 것, 그렇게 서로의 삶에 다가가 동행의 거리감을 익히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지금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임으로 모두의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 또 다른 시대를 예고하는 몸짓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송진순
이화여대에서 성서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하고, 이대 대학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면서 사회와 성서가 만나는 일에 관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