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병을 겪으며
[402호 커버스토리]
다시 찾아온 봄
봄꽃이 흐드러졌다. 만개한 봄꽃 아래를 거닐어보았다. 마음이 일렁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아, 봄이 다시 왔구나!’
작년 1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어느 날부터 가슴에 딱딱한 뭔가가 만져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번역 원고가 밀려 병원 갈 생각을 못 했다. 번역하면서 대학원 입시도 치렀다. 12월 중순에는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들었다. 이제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나 보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올리며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아무래도 미뤄둘 수 없어 새해에 찾은 유방외과에서 암을 진단받은 것이다.
초음파를 보던 의사 선생님은 모양이 별로 좋지 않다며 조직 검사를 제안하셨다. 세 부분에서 조직을 떼었다. 결과는 전화로 듣기로 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데 이튿날 내원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성경을 읽던 중이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돌아보는 내 책상에 성경이 펼쳐져있었다.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결과는 유방암이었다. 세 조직 중 하나에서 암이 발견되었다. 순간, 뭐랄까, 참 멍했다. ‘내가 정말 암이구나….’ 설마 암일까 했는데, 암에 걸리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런데, 내가, 암이었다. 의사 선생님에게 강남세브란스병원을 추천받아, 바로 예약을 잡았다. 암 환자로서 생활이 시작된 순간이다.
세브란스 예약부터 모든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고맙게도 여동생이 모든 순간 내 곁을 지켜주었다. 병원 일정을 따라가기도 벅찬데 옆에서 유방암에 대한 정보, 필요한 물품, 항암 치료 전 준비 사항, 보험 관련 사항 등을 모두 알아봐주었다. 부모님께는 어떻게 알려야 충격이 제일 적을까 고민했다. 밤에 전화드리고 다음 날 직접 찾아뵙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크게 충격을 받으셨고, 소식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시고 눈물을 멈추지 못하셨다. 그러나 이튿날 찾아뵈었을 때는 차분히 안아주시고는 바로 가정예배를 드렸다. 전화를 끊은 후 부모님은 한참 멍하셨지만 이내 무얼 해줄까 고민하시다가 이 예배를 준비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시편 121편 말씀을 준비해 놓으셨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암 선고를 받고 처음으로 울었다. 왜 암이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도움이, 나를 만드신 여호와의 도움이 내게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막하기만 했던 마음에 안온한 위로가 스며들어 참 많이 울었다. 그리고 딸기를 먹으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밝게 웃으며 ‘예기치 못한’, ‘그래서 예상할 수 없는’ 길을 주가 지키시리라 믿고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대대적인 검사를 받기 위해 처음 강남세브란스병원에 갔던 날. 한겨울 새벽 캄캄할 때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던 뭐라 형언할 수 없던 마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불안이 감도는, 그러나 착 가라앉은 마음. 택시기사님은 CBS라디오를 켜놓고 계셨다. 〈쿰바야〉(Kumbaya)라는 흑인 영가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쿰바야’는 ‘Come By Here’(컴 바이 히어)로, 즉 ‘여기 오소서. 여기 임하소서’라는 뜻이다. 느닷없이 노예로 끌려와 살게 되었던 흑인들이 영어를 모를 때, ‘컴 바이 히어’를 들은 대로 발음한 것이 ‘쿰바야’다. 조용히 노래를 들으며 고요히 기도했다. 나와 함께해주소서.
당시 만져보면 느껴지는 덩어리가 꽤 컸다. 검사 결과 문제가 있는 영역은 약 5센티미터, 다행히 암은 2센티미터였고 나머지는 병변이었다.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도 않았다. 치료 방법은 ‘선항암 후수술’로 결정되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친절하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장담하지도, 겁을 주지도 않으셨다. 그냥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차분히 따라가면 잘되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다른 많은 이야기는 듣지 않기로 했다. 불안한 만큼 여러 치료법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아보고 선택하기엔 치료 일정이 너무 빠듯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자랑, 국민건강보험
암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되었던 점은 치료비였다. 소득이 높지 않고, 치료가 시작되면 일도 할 수 없는데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런데 처음 내게 암이라고 말씀해주신 유방외과 선생님이 치료비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부터 해주셨다.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이 잘 갖춰져있어 암 치료비 중 5퍼센트만 부담하면 된다고 하셨다.
실제로 세브란스병원에서 대대적인 검사를 받던 날, 영수증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건강보험이 없었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인 엄청난 비용의 청구서를 받았는데, 5퍼센트만 부담하면 되니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건강보험이 없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첫 영수증을 받고 장기려 박사님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건강보험료를 납부하기만 했지, 큰 혜택을 받은 적이 없어서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 그런데 첫 영수증을 받은 순간, 건강보험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했다.
건강보험 제도를 잘 지키고, 영리병원에 대한 계획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수명이 늘면서 아픈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아프면 반드시 치료받아야 한다. 당연히 치료비보다 치료가 우선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돈 때문에 잃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런 이유로 의료 분야는 돈에 혈안인 된 이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그래서 이들은 무산된 영리병원 계획을 틈만 나면 또다시 들고 나온다. 눈속임으로 건강보험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는다. 영수증 금액을 확인하는 순간, 기업들이 의료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우연한 일치로 지강유철 선생님이 쓴 《장기려 평전》(꽃자리)이 작년 7월 재출간되었다. 놀랍게도, 이 책의 북콘서트에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받는 영광을 얻었다. 이 자리는 내게 뜻깊었다. 건강보험의 가치를 절실히 느끼게 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건강보험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작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건강보험을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들에게 특권처럼 제공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실질적으로 그가 도입한 것은 특권적 의료보험 제도였다. 전 국민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범위를 확대하자는 요구가 민주화운동을 통해 제기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는 ‘전 국민 의료보험 혜택’을 공약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시민의 힘, 즉 우리 힘으로 의료보험을 현재의 건강보험으로 바꾼 것이다. 장기려 박사의 청십자 의료보험 자료가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무서웠지만, 치료받을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것에 사무치게 감사했다.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환자가 치료에만 전념해도 생활할 수 있을 만큼 건강보험을 지원받는 나라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면, 온전히 치료받지 못했을 것이다. 큰 병에 걸리면 자연히 자기 자신만을 돌아볼 것 같지만, 이렇게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되기도 한다. 큰 병일수록 치료의 가능 여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인프라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보험이 널리 이용되지만 철저히 보조적인 지원에 머물러야 한다. 나 역시도 오랫동안 보험 없이 지냈고, 나이가 들면서 혹시 모르니 들어두자는 생각에 가입했던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가입이 늦어 암 지원금은 받지 못했고, 실손 보험만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생활은 무너지지 않았다. 건강보험이 기본 보호막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제도적으로 더욱 건강해지길 바란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가 굳건히 서야 한다. 민주주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 각자가 좀 더 지혜롭고 책임감 있는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곳
모든 검사가 끝나고 치료 방법이 결정된 후, 드디어 본격적인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항암 치료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독한 약으로 세포 증식을 억제해서 몸 곳곳에 부작용을 일으킨다. 미뢰가 손상되어 미각이 변하고, 음식을 먹으면 잘 토하며, 손톱이 빠지거나 손발의 감각이 마비되기도 한다. 피부가 온통 다 뒤집어지기도 한다. 변비나 설사가 반드시 동반되는데, 나는 설사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변비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소변 볼 때마다 설사하기도 하고, 참을 수 없이 급격히 신호가 오기도 해서 화장실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위도 매우 약해진다. 첫 번째 항암 치료를 마치고 왔을 때는 위경련이 와서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미각이 손상되고 속은 계속 메슥거려 음식을 먹을 수 없음에도 먹어야만 했다. 그래야 약을 먹고 치료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먹을 수 있거나 입에 맞으면 뭐든 먹어야 했다. 항암 첫 단계를 겪고 너무 힘들어서 산책 중에 울기도 했고, 하나님께 왜 하필 이 병이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암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유방암의 경우는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다. 첫 항암 치료 후 약 열흘 만에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무서운 수준으로 빠졌다. 머리에 손을 대는 순간 한 줌씩 빠졌기 때문에 미리 머리를 밀어버릴 걸 후회했다.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주문해 둔 가발을 찾으러 가던 날, 그곳에서 머리카락을 다 밀었다. 나는 모자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평소에 잘 쓰지 않는 편이었는데, 1년간 신나게 모자를 사서 쓰고 다녔다. 두건도 착용했지만, 갑갑해서 집에서는 벗고 지냈다. 빡빡이가 된 나를 동생은 귀엽다고, 잘생겼다고 해주었다. 내 민머리에 별로 당황하지 않는 동생이 참 고마웠다. 동생의 그런 태도 덕분에 나도 마치 별일 없는 것처럼 일상을 살 수 있었다.
아프고 나서 병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병원은 그동안 나에게 어둡고 음울한 곳이기만 했다. 모두가 표정이 없거나 우울해 보였다. 밝음이라고는 없어서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보니, 병원은 삶을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불타는 곳이었다. 상급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으며 수많은 환자가 생명을 붙잡고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1리터 링거와 피 주머니를 몇 개씩 달고도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시 살기 위해 어떤 어려움이나 힘겨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입원실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기존 항암약이 잘 듣지 않아 임상시험 중인 약으로 치료를 시도하게 된 환자가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그 환자에게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계획했던 양의 80퍼센트만 투여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자신의 컨디션이 좋다며 정량대로 투여해달라고 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검사 수치를 근거로 그 양을 감당할 수 없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환자는 계속해서 자신은 괜찮다며 아쉬워했다.
병원은 이런 곳이다. 환자들은 당장 링거주사나 피 주머니, 수술 후 회복 과정이 가져다주는 아픔과 힘듦으로 종종 표정을 잃거나 우울한 기색을 보인다. 그러나 이건 다시 살아나기 위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보다 더 강렬한 삶에 대한 열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의료진도 모두 친절하다. 환자들의 열망과 노력을 이해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에, 가능하면 서로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보인다.
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참 편했다. 내 아픔이 여기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함께 있는 이들이 보여주는 삶을 향한 찬란한 노력이 아름다워서, 그들을 보며 조용히 기도했다. 부디 우리 모두를 낫게 해달라고. 좋은 내일을 달라고. 우리 기도를 들어달라고. 전에는 아픈 분들의 기도제목을 들었을 때, 기도할 때도 있고 지나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지나치지 못한다.
아픔으로 인한 불면의 밤이면 내가 아는 아픈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잠들 때까지 내내 기도했다. 낫게 해주시라고. 부디 건강한 내일을 맞이하게 해주시라고.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선항암 여섯 차례, 그리고 수술, 이후 방사선 치료에 이어 열두 번의 표적 항암 치료까지. 모든 치료가 끝났다. 처음 암을 진단받았을 때는 막막했지만, 돌아보니 숱한 사람들이 기도해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 같다. 암이라는 사실을 알렸을 때부터 정말 많은 사람이 응원과 기도를 보내왔다. 오랜만에 연락한 사람 중에서도 내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전화해서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나에겐 정말 뜻밖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나에게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한 그들의 마음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법으로 연락해왔다. 위로의 말은 물론, 도움을 주려는 구체적인 방법들까지. 차가 없어 오고 가기 힘든 나를 위해 일을 잠시 멈추고 매번 병원까지 태워다준 친구, 멀리서도 망설임 없이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준 친구,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며 돈을 보내온 친구들까지. 정말 많은 이들이 내게 힘을 주었다. 동생의 회사는 병원에 갈 때마다 내 곁을 지켜줄 수 있도록 동생의 근무시간을 배려해주기까지 했다. 이 모든 사람과 사건 속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주치의 선생님과의 만남도 내게는 큰 복이었다. 수술 당일, 수술실 앞에서 동생과 작별하고 혼자 수술 대기실에 누워있을 때, 그때의 심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올려다본 천장에 시편 3:4이 적혀있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처음 집에서 예배할 때 읽었던 시편 말씀이 떠올랐다. 불안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이 오셨다. 수술복을 입은 선생님은 잠은 잘 잤냐며, “함께 기도할까요?”라고 제안하셨다. 그리고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기도 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아무 걱정 말라며, 잠시 잠들었다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건강해질 거라고 웃으며 말씀해주셨다. 이후 세브란스 원목님이 오셔서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수술실로 옮겨졌다. 잠시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회복실에 있었다.
경과가 좋았다. 표적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전주에 계시는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시곤 했는데, 어느 날 기차역에서 시간이 남아 어머니와 손을 잡고 걸었다. 그날을 잊지 못한다. 내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어머니는 내게 “내가 건강해서 얼마나 다행이니.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해서 네가 치료에 전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아프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몰라.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라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어떻게든 건강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고마우면서도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무수한 기도와 사랑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다.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복학해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으며, 다시 자란 짧은 머리로 벚꽃 아래를 걷고 있다. 내게 봄이 다시 왔음을 실감한다. 때로는 마음이 지쳐 기도할 수 없을 때, 주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나를 위해 기도해줄 수많은 이들을 내 곁에 불러주셨다. 지금 나는 다시 일상을 거닐게 되었다. 물론, 큰 병이었기에 아직 5년을 지켜봐야 한다. 조금만 아픈 구석이 있어도 나는 나의 건강을 불에 덴 듯 걱정하며 신경 쓴다. 그러나 잘 관리하면서 서서히 이겨내리라 생각한다. 아픔이 없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아픔을 통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나 역시 많은 사랑과 기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 그게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무섭지만, 내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산에서 나에게 응답하실 것을 믿는다. 그래서 기도할 수 없을 때조차,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내 삶의 날 동안 내내….
임자헌
잠시 미술 잡지 기자로 일했으나 한학의 매력에 빠져 진로를 변경했다. 《일성록》 번역을 시작으로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조선왕조실록》 현대화사업에 참여해 실록을 번역하고 있다. 깨어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사료와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과거와 오늘의 상호 교차를 통해 ‘지금-여기’를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대중서도 썼다. 역저서로는 《공자의 말들》 《나의 첫 한문 수업》 《하루 한문 공부》 《마음챙김의 인문학》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오늘을 읽는 맹자》 《시민을 위한 조선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