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대가로 치러야 얻을 수 있는 것

[402호 커버스토리]

2024-04-30     이슬아

자녀를 키우는 지인들은 공통적으로 말했다.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가 편한 거라고, 임신보다 육아가 훨씬 힘들다고. 그럼에도 나는 육아보다 임신이 어렵게 느껴졌다. 육아는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지만, 임신은 오로지 내 몸으로 해야 하니까.

예측 불가능한 몸

해산의 고통(!)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지만, 상대적으로 임신기 몸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여러 책을 읽어보니 임신부가 겪는 변화의 스펙트럼은 너무 넓었다. 어떤 사람은 몇 개월 동안 누워만 있어야 했고, 어떤 사람은 몸의 변화를 거의 느끼지 못해 한참 뒤에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몸이 어떨지는 결국 임신을 해봐야 아는 거였다. 예측 불가능성에 유독 취약한 기질 탓에, 어떻게 그러한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어느 순간 아기들이 무엇보다 예뻐 보였다. 심지어 육아에 치여 도저히 자기 삶이 없다는 사람조차도 부러워지는 순간이 왔다. 아기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온갖 두려움을 넘어섰다.

임신은 시작부터가 예측 불가했다. 원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뤄지는 일도 아니었다. 경기 중 발가락이 골절되어 그만뒀던 풋살을 재개하고, 될 대로 되라고 마음을 놓아버리자 아기가 찾아왔다. 0.93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배 속 아기에게 혹시 공이 날아올까 봐 풋살을 재개한 지 한 달 만에 다시 중단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술, 담배, 사우나, 날음식 섭취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했지만, 아기가 사는 몸이 된 순간 전과 같을 수 없었다.

낯설어진 몸

아기가 와준 기쁨과 함께 입덧도 같이 왔다. 어릴 적 미디어에서 본 입덧의 모습은 음식 냄새를 맡고 화장실에 달려가는 장면이 전부였다. 실제 입덧의 양상은 사람마다 매우 다양했다. 임신기 내내 입덧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산 직전까지 입덧을 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입덧의 종류에도 음식이 잘 들어가지 않는 입덧뿐 아니라 속이 비어있으면 울렁거려서 계속 먹어야 하는 ‘먹덧’, 양치하려 하면 구토가 나오는 ‘양치덧’ 등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입덧을 하느냐에 따라 몇 개월 만에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 감소하는 경우도 있고, 그만큼 증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입덧과 먹덧을 동시에 했다. 속이 비어있으면 헛구역질이 나와서 입맛이 없어도 뭐든 먹어야 했고, 많이 먹어도 헛구역질이 나와서 조금씩 자주 먹어야 했다. 업무 특성상 외근이 많아서 간식을 매일 들고 다녔다. 그래도 헛구역질이 구토로 이어지지는 않아서 비교적 수월한(?) 입덧에 속했다.

입맛도 변했다. 온종일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매콤한 음식이 아니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맵기는 항상 1단계만 고르고 라면도 진라면 순한 맛만 먹던 내가, 얼큰 쌀국수를 시키자 회사 동료들이 놀랐다. 낯설어진 몸에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인이 한 몸에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에 적응하느라 속이 부대끼는 거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위로했다. 실제로 유산이 된 다음 날 입덧이 바로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여서, 막상 입덧이 잠잠해졌다 싶으면 걱정이 앞섰다. 입덧의 고됨을 아기의 안위를 확인하는 신호로 이해하며 견뎠다.

모든 게 임신 때문이라니

임신 초·중기에 일상의 질을 떨어뜨린 몸의 변화는 입덧 외에도 다양했다.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나 느끼던 두통이 며칠 동안 지속되어 산부인과에 가면 ‘임신성 두통’이라고 했다. 너무 심하면 타이레놀을 먹으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번 잠들면 아침까지 좀처럼 깨지 않던 내가, 임신 후에는 빈뇨 증상으로 밤중 여러 차례 화장실에 가면서 수면의 질도 떨어졌다. 자궁이 커지면서 방광을 압박해서 그런 거라 출산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배가 거의 나오지 않았는데도 좌골신경통이 생겨 밤이 되면 다리를 절기도 했다. 의사는 그 또한 임신기에 피할 수 없는 통증이라며 요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 외에도 비염, 치은염, 여드름, 변비, 다리 저림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불편한 증상이 차례로 나타났는데 모든 게 ‘임신성’이라는 이유로 설명됐다. 대부분은 ‘흔한’ 증상이자 ‘어쩔 수 없는’ 증상이었고, ‘출산을 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황당했지만 원인이 분명하고 끝이 있는 불편이라는 데서 위안을 삼았다(그렇게 긍정회로를 돌려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몸은 어떠냐는 친구들 안부에, 일상적으로 겪는 불편함을 모두 나열할 수는 없어서 ‘괜찮다’고 답할 때가 많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정말 괜찮은지 되물었다가, 더 심한 어려움을 겪는 임산부들을 떠올리며 내가 겪는 정도는 비교적 수월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기를 품은 몸

온갖 낯섦과 불편함을 동반한 임신기였지만, 그렇다고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임신 20주쯤 입덧이 서서히 잠잠해지면서 태동이 거세졌고, 내 몸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더 생생히 실감할 수 있었다. 배 속에서 물고기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 때면 아기가 잘 놀고 있는 것 같아 안심했고, 배 속에서 밖을 두드리는 느낌이 들 때면 아기가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아 신기했다. 배 위에 손을 얹고 아기의 움직임을 느끼며 황홀해하는 배우자를 보면 어쩐지 우쭐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임신 후기로 갈수록 태동이 요란해져서 잠들지 못할 정도가 되자 다음 날 피로가 예상되어 한숨이 나오기도 했지만, 아기의 안위를 계속 확인할 수 있다는 데 감사했다.

집안일을 대부분 도맡아 하는 배우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했을 때 그가 말했다. “아기는 네가 혼자 다 키우고 있잖아. 존경스러워!” 나는 몸의 변화를 그저 받아들일 뿐 달리 무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배우자의 말을 들으니 자부심이 느껴졌다. 막상 배우자에게 할 수 있다면 너도 임신하겠느냐 물었을 때, 굳이 그러고 싶진 않다는 답을 들었지만 말이다.

아기를 낳는 몸

출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자궁과 아기가 커지면서 다른 장기들을 압박했다. 밥을 먹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전처럼 소화가 잘되지 않았다. 출산 시 골반이 잘 열려야 아기가 나올 수 있어, 관절과 인대 사이를 느슨하게 만드는 릴렉신 호르몬이 자연히 분비됐다. 이 과정에서 허리 통증이 심해졌고 손목을 쓰지 않아도 손목 시림이 동반됐다.

몸 전체가 출산만을 위해 변해가고 있었다. 배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튼살도 심해졌다. 임신 초기부터 매일 튼살 크림을 발랐지만 아예 피해갈 수는 없었다. 꽤 많은 경우, 임신 후 변한 몸이 출산 후에도 전과 같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능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기를 낳는 몸은 어떤 흔적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몸을 대가로 치르고 태어난 사람들

문득 임신기의 온갖 어려움을 겪어보고도 나에게 임신을 권했던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임신과 출산을 해보면 모든 사람이 그 자체로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될 거라고, 널 위해서 그 경험을 꼭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과연 임신 경험만으로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부터가 달라지긴 했다. 필연적으로 엄마의 몸을 갉아먹으며 태어났을 나라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로 달라졌다. 모든 사람이 10개월간 누군가의 애씀과 애정으로 지켜졌을 것이다. 다른 이의 몸을 대가로 치르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귀했다.

그럼에도 엄마처럼 누군가에게 임신을 권하는 건 망설여진다. 임신이 한 번쯤 해볼 만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임신을 선택할 수 있겠냐고 하면 역시 자신이 없다. 같은 사람이라도 첫 번째 임신과 두 번째 임신 양상이 다를 수 있다고 하니, 역시나 예측 불가능한 몸의 변화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예측할 수 있다고 해서 선택하기가 쉬울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래도 욕망이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이 다시 와야 하지 않을까. 출산하여 아기를 보는 순간 지난 모든 수고가 잊힌다던데, 어디 한번 두고 볼 일이다.

이슬아
쉽게 단정 짓는 것을 경계하여, 주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