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403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2024-05-30     박혜은

하지만 봄은 올 것이고 꽃도 필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파멸을 재잘거려야만 한다 … 기억은 일종의 성취이고 일종의 갱신 심지어는 일종의 입문, 왜냐하면 그것이 열어 보이는 공간은 새로운 장소들이기에 지금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부류의 무리가 살고 있는 —왜냐하면 그들의 움직임은 새로운 목표를 향해 있기에 … 전적으로 패배로만 이루어진 패배는 없다— 왜냐하면 그 패배가 열어 보이는 세상은 늘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장소이므로. 어떤 잃어버린 세계,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 절망으로 이루어졌고 아무 성취도 없는 하강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 그것은 바로 절망의 반전. 

—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황유원 옮김, 《패터슨Paterson》(읻다, 2024), 113~114쪽.  

얼마 전 〈듄: 파트2〉를 2회차 관람하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다시 정독하는데 〈듄〉의 주인공 폴과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주인공 레·샤르휘나(이하 ‘샤리’)가 같은 고뇌에 빠지는 설정을 발견하고 퍽 흥미로웠다. 샤리는 BC 5세기 초, 고대 갈데아의 작고 신비한 나라 아르미안의 넷째 황녀다. 대대로 전사의 여왕이 다스려온 신지(神地)이자 전설과 샤머니즘의 나라인 아르미안에서는 신성한 여왕을 ‘레·마누’라고 부른다. 37대 레·마누는 딸이 네 명 있었고 하필 첫째와 넷째가 동시에 여왕의 운명을 타고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역사적으로 ‘마누의 불문율’에 따라 누군가가 제거되어야 하는 상황. 당시 겨우 열 살이던 샤리는 자기보다 연장자이자 야심가이며 정치적 수완과 초능력을 타고난 첫째 언니 레·마누아의 계략으로 죄인이 되어 사막으로 추방된다. 마누아가 율법에 따라 ‘불새의 깃털’을 찾아오면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말을 건네자 샤리는 자기 운명과 싸워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한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레·샤르휘나의 운명과 맞붙은 싸움 혹은 불새의 깃털을 찾아가는 여정.    

폴 역시 자기 가문이 차지했던 아라키스에서 지배권을 빼앗기고 쫓겨나 아라키스 원주민 프레멘이 사는 사막으로 간다. 사막에서 꿈을 꾸다가, 자기가 예언된 메시아가 되면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미래를 내다보고 이를 바꾸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기도 한다. 사막으로 추방된 샤리 또한 사경을 헤매다 본인의 예지 능력으로 자기가 불러올 미래를 내다보는데 그 운명이 어쩐지 폴과 비슷하다. 

붉은 꼬리를 가진 별이 나타나요. 그것은 나의 운명을 나타내는 별이에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병과… 지진… 기아… 슬픈 일이 생겨요. 많은 사람이 죽어요. 난 알 수 있어… 그 사람들은 나 때문에… 내가 가진 운명 때문에 죽어요… 나의 별이 그 운명을 가지고 와요…! 나의 미래는… 나의 운명은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난…. (1권, 145쪽)

샤리는 세 언니들과 아버지가 달라 신과 인간의 피가 섞인 존재다. 그 덕인지 불새의 깃털을 찾는 여정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변주한 《아르미안의 네 딸들》 버전 신들의 조력을 받는데, 바다의 신 ‘라아나’는 자기 운명에 좌절하는 샤리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를 건넨다. “레·샤르휘나… 너의 일은 너 스스로 이겨나가는 수밖에 없다. 미래가 그렇다면 그대는 미래를 바꾸어라! … 운명의 전사, 싸우거라! 최선을 다해! 운명과….” 라아나는 운명과 싸우라고 말로 임파워링할 뿐 아니라 강력한 싸움 아이템인 ‘물의 검’까지 선물한다. 

이렇게 불새 찾기 여정에서 다양한 인간의 조력과 신들의 선물을 받으며 여전사 아마조나로 성장하는 샤리. 미래를 바꾸는 싸움 과정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도 하고 여정을 마친 후엔 끝내 아르미안의 왕이 되기도 하는데, 사실 샤리의 운명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에는 왕을 넘어 자기에게 주어진 비밀스러운 존재로까지 나아가니까. 이렇게 자기 운명 때문에 전쟁과 기아로 파멸하게 될 인류의 미래를 바꾸고자 ‘살리는’ 싸움을 시작한 샤리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생명의 대서사시’다.

〈듄〉의 폴은 자기가 죽게 되더라도 ‘순교자’로 추앙받으며 종교전쟁이 일어날 미래가 달라지지 않을 걸 알고 황제가 되기를 선택해 우주전쟁의 한가운데 선다. 샤리 또한 개고생 후 자기를 추방했던 아르미안으로 돌아와 왕으로 등극하는 것까지는 언뜻 비슷하지만, 어린 샤리가 파멸의 운명에 맞서 사람을 살리는 미래를 선택했듯 조국으로 돌아온 성인 샤리는 왕으로서 폴과 사뭇 다른 선택을 한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생명을 위한 싸움의 여정

막 여왕 자리에 오른 38대 레·마누의 정적이자 전설에 예언된 초대 여왕 마하시바야와 같은 금발의 소유자 샤리는 불새의 깃털을 찾아 돌아오는 미션과 함께 자기가 초래할 전쟁의 운명에 맞서 싸워야 할 숙제를 갖고 있다. 샤리가 그 과정에서 써내려간 생명의 대서사시는 결말보다는 과정이 핵심이다. 우선 샤리는 혼자 힘으로 불새를 찾을 수 없고, 그 운명에 따라 예비된 조력자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팀을 이룬다. 첫 번째 핵심은 팀플레이, 그러니까 인간은 서로가 서로의 운명에 얽혀 있다. 이렇다 보니 샤리는 불새를 만나기까지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존재를 만나는데 그 여정만으로도 등장인물이 많고 서사가 복잡하다. 이 서사가 나머지 세 언니의 운명 서사와 맞물려 전개되니(책 제목이 ‘아르미안의 샤르휘나’가 아니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므로), 레트로판 20권을 소화하는 데 우리는 온 지성을 쏟아부어야만 한다(MZ 두 명이 제3권쯤 읽다가 중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음). 

예비된 조력자들 만나랴, ‘물의 검’에 이어 ‘불의 방패’ ‘멤브린 서클릿’ 등 운명 개척 아이템 획득하랴 바쁜 와중에도 샤리는 이 여정이 단지 자기 안위를 위한 목적 지향적 싸움이 아님을 마음 깊이 알고 있다. 이 서사가 길고 복잡해지는 데는 샤리의 이런 성향이 한몫한다. 가장 깊은 자매애를 나누었던 셋째 언니 아스파시아의 운명의 상대 페리클레스(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그 페리클레스 맞다)를 살리기 위해 목숨 걸고 불의 나라에 들어가 죽음의 신 마흐툰과 싸우느라 한세월 보내는가 하면, 이 과정에서 자기 운명의 상대인 파멸의 신 에일레스를 만나 관계를 만들어나가기도 한다. 파멸의 운명을 가진 샤리에게 운명의 상대가 파멸의 신이라니, 작가님이 다음 서사를 만들어가는 휘황찬란한 솜씨에 독자는 그저 어질어질.

힘들게 아스파시아 언니의 운명의 상대를 구해놓았더니 이제는 불새와 친한 산신 쿠울레를 찾아야 한다. 힘들게 쿠울레 신전에 도착했더니 이게 웬일. 쿠울레는 엊그제 인도의 로말레스라는 곳으로 신들의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나 뭐라나. 샤리는 또 몇 년에 거쳐 인도를 향해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 샤리에게 우호적인 신들의 도움을 받아 단숨에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자기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샤리는 기꺼이 먼 길을 돌아간다. 이 여정을 지나며 십대 초반 샤리는 어느새 10대 중후반 청소년으로 자라고…. 

로말레스로 가는 길에 어둠의 성지인 앙고르에 빠져든 일은 또 어떠한가. 그곳에서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빛의 세계로 이끌어내기 위해 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우리의 아마조나. 이렇게 죽음과 어둠의 골짜기에 빠진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살려내려는 마음이야말로 자기 싸움의 본질임을 그 소녀는 알고 있었던 걸까. 이 지난한 소모 과정에서 운명의 상대와 관계가 깊어지고 불새의 깃털을 찾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줄 조력자를 만나니 이 일 또한 소녀의 운명일지니.

인간과 관계 맺으며 성장하는 만들어진 신

샤리의 싸움은 살리기 위한 팀플레이일 뿐 아니라 단 하나의 연인을 찾고 성장하며 사랑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샤리 운명의 상대인 파멸의 신 에일레스는, 처음엔 열두 명의 신들이 술에 취해 장난삼아 자기 약점을 하나씩 투사해 만든 ‘고렘(golem)’에 불과했다. 그 고렘이 혜성의 기운을 받아 뜻하지 않게 독립적인 생명체가 되었을 때부터 신들의 장난은 그 의도를 벗어난다. 신들에게도 또한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일까? 에일레스의 창조자인 열두 명의 신은 에일레스가 전쟁터에서 샤리를 만나 ‘자율정신’을 각성하는 장면을 보고 심각한 토론에 들어간다. 

“만약 그가 그녀를 알아본 것이라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여태껏 전쟁터에선 자율정신을 갖지 못했어요! 만약 그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거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 “한 가지 해석밖엔 없지 않소? 그는 신들에겐 절대 불가능한 ‘성장’이란 것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것도 분명 저 소녀에 의한 것이므로 그녀가 그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17권, 91쪽)

신들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성장’이란 것을 하는 ‘만들어진 신’ 에일레스. 그는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는 다른 신들과 다르게 한 인간 여성을 운명의 상대로 맞아, 전쟁터에서 무자비하게 파멸을 일삼다가도 사람을 인지하는 등 각성하는 성장캐가 된다. 신들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고렘이 우연히 독립적인 신이 되고 성장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되자, 그를 만든 열두 신은 점점 존재가 희미해지며 흩어지는 설정이란! 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세계관인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속 크리처가 점차 인간의 지성을 갖추고 자기와 교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를 갈구하듯 에일레스는 점차 자기를 인식하고 성장하며 단 하나의 연인과 사랑을 나눈다. 그 단 하나의 연인은 바로 우리의 아마조나 샤리.

열두 신과 에일레스 이야기만으로도 스핀오프 한 편 만들 수 있을 만큼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세계는 지금도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이게 35년의 세월을 거슬러 새 판으로 복원되게 한 이야기의 힘이며 1억이 넘는 펀딩 금액을 모으게 한 작품의 힘이겠지? 생의 대부분을 이 위대한 이야기와 함께 보낼 수 있는 한국 순정만화 팬이어서 행복합니다.

때로 그 의미가 처절한 슬픔을 내포한다 해도…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시그니처 대사인 “미래는(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는 나름 유명한 문장으로 여기저기 인용되기도 하고, 작품의 결정적 장면마다 곡의 후렴구처럼 반복되어 독자를 심쿵하게 만든다. 그래, 인생이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되지 않지. 그런데 그 예측불허성이 생의 의미라고? 아르미안에서 추방되어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그 과정에서 운명의 사람들을 만나 끝내 자기 존재 의미를 찾는 샤리를 보면 그 말뜻이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문장이 인용될 때 종종 제외되는 다음 문구야말로 생의 의미를 드러내는 본질 아닐까. “때로 그 의미가 처절한 슬픔을 내포한다 해도…”. 

샤리는 자기를 쏟아부은 최선의 투쟁에 여러 조력자의 도움을 보태 가까스로 불새의 금역에 도착하지만 거기서 결정적 문제에 봉착한다. 앞서 불의 나라에서 싸울 때, 불의 방패가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불의 도마뱀 사라만다의 심장이 필요했고 샤리는 그때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 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상황.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어쩌면 이때부터 불새의 깃털을 얻으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암시가 작품 전체에 깔리게 되었을 테다. 여정의 마지막에 예상대로 샤리는 조력자 친구들 ―글라우커스, 야수말다, 칼리엘라, 미카엘― 의 희생 없이는 불새의 금역을 통과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 딜레마는 오로지 사랑의 힘으로만 풀 수 있다. 친구를 모두 잃고 나서야 예측불허한 삶 속에는 처절한 슬픔이 내포된다는 진실을 깨닫는 레·샤르휘나. 그는 그제야 비로소 왕이 될 조건을 갖춘다.  

“슬픔 속에는 진실이 있다. 보석보다 찬란한 진실의 빛이….” (18권, 89쪽)

10대와 20대를 거치며 읽을 때는 나도 샤리처럼 저렇게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나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랑과 희생으로 오늘의 삶을 이루게 되었는지가 보인다. 이 또한 생명의 싸움 여정을 지난 이만 획득하게 되는 삶의 진실일까.   

전쟁하지 않고 소멸하기를 선택하는 왕

샤리는 불새의 깃털을 찾아 조국으로 돌아와 39대 레·마누가 되지만, 사랑하는 친구를 모두 잃고 곁에는 오로지 단 하나의 연인 에일레스만 남아 있다. 그 힘든 여정을 지나 친구를 잃고 얻은 왕의 자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답은 샤리의 마지막 선택에 담겨 있다.

샤리가 다스리게 된 아르미안은 38대 레·마누의 호전적 성향에 따라 주변 강대국과 전쟁 중이었다. 하지만 샤리는 서로 죽고 죽이며 승패를 낸다 해도 결국 전쟁의 승리란 수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만들어지며 누구도 살리지 못하는 결말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 자신, 살라미스 해전에 그리스군으로 참전해 자기가 가져오는 파멸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했으므로(그리스군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기적적으로 이긴 역사를 샤리의 참전으로 인한 것으로 엮은 작가의 상상력!). 

그래서 샤리는 최종적으로 전쟁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한다. 사실 불새가 될 운명이었던 샤리의 신적 능력이라면 어느 전쟁이나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희생될 수많은 생명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력한 왕’으로 존재했던 샤리였다. 결국 고뇌 끝에 샤리는 아르미안 백성을 모두 피난시킨 뒤 아르미안을 소멸시키는 선택을 한다.

누군가는 허무하다고 말하는 샤리의 선택으로 아르미안 백성들은 땅을 버리고 흩어지고 아르미안이란 나라는 안개처럼 사라져버린다. 살리기 위해 패배해야 하는 운명이랄까. 생명을 얻기 위해선 죽음이 먼저 있어야만 하는 진리랄까. 전쟁을 택하지 않고 사라짐으로 다른 이를 살리는 선택은, 그동안 자기 운명의 싸움에서 피할 길을 찾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샤리답지 않단 생각도 든다(나다운게 뭔데!). 그런데 다시 보니 샤리는 비로소 자기 길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자기를 살리기 위해 사라져간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배운 존재의 방식으로.

“패배가 열어 보이는 세상은 늘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장소이므로. 어떤 잃어버린 세계, 생각지도 못한 세계”(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패터슨Paterson》, 113쪽). 이기고 지키는 방식이 아니라 하강하며 사라지는 방식으로, 생각지도 못한 세계를 열어보이는 “절망의 반전”을, 핵심은 결말보다 과정이라는 걸, 생의 의미 안에는 처절한 슬픔이 내포된다는 삶의 진실을 난 오늘도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배우고 있다. 

박혜은
문화기획자. 뉴스레터 〈에밀앤폴〉 발행인. 책을 직접 만지는 일에서 책 문화를 다루는 일로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