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잘난척쟁이

[403호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

2024-05-30     정다운

시인은 보통 사람들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뛰어넘습니다. 잘난척쟁이들은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 위에 올라섭니다. 잘난척쟁이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묘하고 칙칙한 것을 모두 편견이고 미신이라고 매도합니다. 잘난척쟁이들은 사람들로 바보 같은 기분이 들게 하고, 시인은 사람들로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이 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시인은 종종 돌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평범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잘난척쟁이들은 대체로 땅을 차지하고 왕관을 씁니다.
― G. K. 체스터턴

무시는 쉽고, 존중은 어렵다. 교만은 쉽고, 겸손은 어렵다. 오해는 쉽고, 이해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어려운 이해보다는 쉬운 오해에, 어려운 존중보다는 쉬운 무시에, 어려운 겸손보다는 쉬운 교만에 머문다. 쉬운 편을 두고 어려운 편을 택할 필요는 없으니까.

한 바보가 있었다.1)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바보인 줄 몰랐다. 자신이 바보인 줄도 모르는 바보이니 늘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지레짐작했지만, 그런 인생이 있을 리가. 그에게도 그만의 고민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늘 무시가 따라다녔다. 아무리 뭘 몰라도 자신이 일상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맞는 말을 하든 틀린 말을 하든 사람들은 비웃었다. 좋은 이야기를 고민해서 해도, 다들 동의하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무시당하며 사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

그럴 즈음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현자가 마을에 방문한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 현자를 찾아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 똑똑해질 수 있나요? 모든 사람이 저를 무시해요.” 잔뜩 주눅이 든 바보의 모습을 측은히 여긴 현자가 그에게 물었다. “진짜로 똑똑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그렇지만 똑똑해 보이기만 하는 것은 쉽지. 똑똑해 보이기만 하는 방법이라도 괜찮으냐?” 무시당하지 않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바보는 졸랐다. 현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 이야기를 부정하고 비난하면 된다.”

바보는 돌아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에게 당장 그 비법을 실천해보았다. 친구가 한 그림을 보고 감탄하자 그는 말했다. “저게 멋지다고? 저런. 저 작품은 정말 형편없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저런 삼류 작품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줄은 몰랐네.” 친구는 흠칫 놀라면서 바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 어느 날, 한 사람이 어떤 작가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자 바보는 말했다. “사람들은 정말 글을 볼 줄 몰라. 글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 텐데. 너라도 눈을 떴으면 좋겠어.” 그러자 그 사람은 사실 자신도 그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어느 날, 다른 사람이 한 현자에 대해 칭송을 늘어놓자 바보는 말했다. “분명히 알아둬. 그 사람은 하나 마나 한, 뻔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 사람에게는 배울 게 전혀 없다고. 사람들이 속고 있는 거야.” 그러자 그 사람은 바보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츰 사람들은 그를 똑똑한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그는 날카로운 비평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인간의 뇌는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부정적 자극은 우리가 생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위험신호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뇌는 긍정적인 자극보다 부정적인 자극을 더 강하게 각인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우리에게 오는 부정적인 자극 한 번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번의 긍정적인 자극이 필요하다. 한 번의 좌절 경험은 긍정적 사건에 비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다섯 배까지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여러 개의 선플보다 하나의 악플이 정서에 큰 영향을 끼치곤 한다는 이야기다. 한 번의 비난에는 그처럼 강력한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것’이 아니라 ‘힘’에 끌려간다.

우리는 우리를 이해해주는 시인이 아니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잘난척쟁이에게 굴복한다. 아름답고 선한 것에 합당한 찬사를 보내는 시인보다 선한 것을 무시하며 아름다운 것에 코웃음 치는 잘난척쟁이를 강하다고 느끼고 강한 편으로 끌려간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엇이든 일단 무시하고 보는 ‘바보’가 똑똑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저 우화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그러나 그런 ‘현실’이 다는 아니다. 모두가 그런 현실에 굴복하는 것도,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잘난척쟁이에게 굴복하지 않는 시인이 존재한다. 세상에는 언제나 그런 시인들이 있었다. 체스터턴은 말한다.

평범한 것들이 비범한 것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 아니, 평범한 것들이 더 비범하다. 인류보다 한 사람이 더 존엄하다. 그러니 권력이나 지성, 예술이나 문명이 이룬 기적보다 ‘이웃 사랑’이라는 기적을 더 생생하게 경험해야 한다. 두 다리로 서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볼 때 그 어떤 음악을 들을 때보다 더 가슴이 미어지고, 그 어떤 그림을 볼 때보다 더 경탄해야 한다.

이것이 시인의 논리다. “평범한 것들이 비범한 것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 아니, 평범한 것들이 더 비범하다.” 시인은 이러한 눈으로 희소한 것에 자본과 관심이 쏠리는 이 세계의 논리에 저항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희소한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획득한다. 희소한 것은 아무나 소유할 수 없으므로, ‘아무나’가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은 희소성에 열광한다. 희소함 자체에는 그저 ‘드물다’는 것 외의 다른 의미가 없음에도 그렇게 한다. 독특한 것, 거대한 것, 희소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참된지, 선한지, 아름다운지, 의미 있는지를 일러주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적이고, 흔하고 평범한 것들 속에 참되고 소박하고 진실한 것들이 담겨있다.

평범함이 곧 진부함은 아니다. 소박하고 작은 것이라 해서 가치가 적은 것도 아니다. 작은 산책길에도, 흔하지만 생명으로 충만한 것,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다. 평범하지만 경이로운 일상이 우리의 하루를 채운다. 소박하지만 소중한 식사가 오늘 우리의 하루를 지켜준다. 평범함을 곧 진부함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익이 되는 것, 독특한 것, 힘이 있는 것에만 가치를 두는 잘난척쟁이의 시선이다. 소박하고 평범한 것들을 경시하며 ‘독특한 것, 비범한 것, 탁월한 것’을 갈망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세상에 많고, 흔하고, 약한 것들에게로 눈을 두며, 기꺼이 ‘아무나’가 되어 평범한 비범함을 살아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교는 시인의 종교다. 그리스도교의 이야기는 강한 ‘바보’들을 더 강한 ‘힘’으로 압도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잘난척쟁이가 되는 넓은 길 대신 시인이 되는 좁은 길로 우리를 초대한다. 체스터턴의 표현을 빌리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시인이 되어 잘난척쟁이에 맞선다.

잘난척쟁이들은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더 나아가 이해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그들은 미묘하고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모두 무시한다. 그들은 그처럼 평범한 것들을 조롱하여 특별한 지위를 누리려 한다. 아니, 실은 그것이 그들이 자신의 진부함을 감추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비법이다. 평범을 경멸하는 그들은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고귀한 평범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교는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이해한다. 미묘하고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조롱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했다.

우리가 어려운 것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을 향합니다. … 무언가가 어렵다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무시는 쉽고, 존중은 어렵다. 교만은 쉽고, 겸손은 어렵다. 오해는 쉽고, 이해는 어렵다. 그리고 그 어려운 편에 인간의 길이 있다.

■ 주

1) 이반 투르게네프의 짧은 우화 〈바보〉를 각색한 이야기다.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