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던가?

[403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2024-05-30     김정훈

시편은 특별한 성경입니다. ‘찬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제목을 지닌 이 책은 이전에 ‘기도’라는 이름을 지닌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시 72:20). 찬양도 기도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말입니다. 그런데도 신약성경은 시편을 ‘율법’이라 부르고 ‘예언’이라 부르며 인용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 인간의 말’, 이것이 바로 시편의 본질인 셈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어떻게 명백한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일까요? 이렇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편의 기도와 찬양에 완전하게 동의하시고 그것을 하나님 백성 공동체에 돌려주셨다면 가능합니다. 그 간절한 간구와 벅찬 찬양과 넘치는 감사에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온전히 담겨 있다면 가능합니다. 그 시편이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진실하고 내밀한 소통 창구가 된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모든 측면을 경험했고 시편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에 시편의 또 다른 특별함이 뒤따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하고 판단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판석에 앉아 자신의 이해관계와 욕망에 따라 말씀을 왜곡하고 취사선택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때 시편은 우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애초에 시는 논리만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를 음미하려면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시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린 존재가 되고, 잔인한 삶에 치이고 찢긴 자신을 직면하게 되고, 믿음을 지키려는 시인의 몸부림에 공명하게 되고, 악인의 번영과 하나님의 침묵에 경악하게 됩니다. 시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변적인 반응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현실에 참여합니다. 그중에서도 시편 23편은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삶의 가장 본질적인 관계를 생생하게 그려주는 찬양으로 유명합니다.

1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새번역)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그림을 떠올리셨습니까? 어쩌면 너무도 잘 아는 시편이니 그저 아무런 감흥도 없이 읽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편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기독교인도 이 찬양만큼은 익숙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생각도 인상도 없이 곡조에 이 가사를 얹어 노래하거나 그저 진부한 종교적 표현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히 온 정신을 집중하여 반복하여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다 보면 본문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껍질이 깨어지고, 주목하지 않던 부분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가 이 시에 오롯이 집중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시적 화자가 누리고 있는 2중의 행복일 것입니다. 첫 번째는 2~3절이 보여주는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에서 누리는 평온한 안식과 회복입니다. 두 번째는 4절이 묘사하는 죽음의 그늘 골짜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그 결과 시적 화자는 자신에게 부족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고 노래합니다. 이쯤 되면 부러움과 질투가 동시에 떠오릅니다. 결핍과 불안에서 해방된 상태라니, 현대인에게 가당키나 한 자리일까요? 

결핍과 불안

오늘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고 과로에 시달리며 경쟁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그 두 가지, 결핍과 불안입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결핍과 불안에 쫓기는 상태가 하나의 미덕으로 여겨집니다. 그 상태는 우리의 생산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우리를 만족을 모르는 소비자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결핍과 불안의 상태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초래했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만족과 평안이 아니라 불행과 피로를 호소합니다. 내면은 한없이 빈곤하고 가정은 위기에 처했으며 무엇보다 자연과 생태계에는 회복 불능의 파괴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개인과 사회에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은 그야말로 엄청난 도발이요 매혹적인 초대입니다. 부족함도, 두려움도 없는 삶이 정말 가능할까요? 하지만 부족함과 두려움에 길든 우리는 동시에 이렇게 저항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선한 목자이신가? 그분이 나를 지키시고 먹이시며 안식으로 이끄신다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인가 진짜 현실인가? 그분은 부족함도 두려움도 없도록 나를 돌보고 계시는가? 그렇다면,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가? 성도가 누릴 특별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기는 한가?” 시편은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시적 화자가 그런 고백을 하게 된 상황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을 선한 목자이시라고 기꺼이 인정하고 고백하며 찬양하려면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할까요? 우리가 선한 목자께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좋은 직장을 얻게 해주시고, 빚이 해결되게 해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선한 목자라 인정하게 될까요? 언제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껏 여행 다닐 수 있는 여유를 주시면, 복잡하고 불편한 관계를 청산해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선한 목자라고 인정하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상태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서게 된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선한 목자라 고백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변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는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가 파악하게 되는 것은 경제 상황의 변화나 나의 노력, 누군가의 도움 따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사형통한 삶의 자리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세상이 조화롭고 정의로워 보이며 내가 이룬 성과에 만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흡족함의 자리에서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히 여건이 좋아지기만 하면 하나님이 선한 목자이심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불만과 무료함이 뒤섞인 오늘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고난에 처한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는 구원의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타락한 세상에는 언제나 고통과 결핍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누군가의 낙오와 희생, 착취와 눈물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요 심지어 질서의 한 부분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웃의 고난을 외면한 채 자신만의 풍요와 안전을 만끽하는 사람을 의인이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고백하는 이유가 단지 그런 것뿐인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힘없는 백성들이 가난과 학대에 시달리는 현실을 외면한 채 하나님의 축복과 평화를 말하는 권력자들을 향한 예언자의 신랄한 고발을 기억하면, 이 고백은 내 소원을 이루고 불안을 달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갑자기 흥미가 사라지시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 마치 게임 중독에 빠진 청소년처럼 한없이 시야가 좁아진 우리는 당장의 결핍과 불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는 게임보다 더 풍요로운 재미와 고상한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청소년이 깨달아야 하듯이, 우리 현대인도 물질적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 인도하심을 더욱 넓고 깊은 맥락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호와 공급

그렇다면 시적 화자가 경험하고 노래하는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 인도하심’이란 무엇일까요? 신학자 토마스 머튼은 《성서를 열다》(비아)라는 책에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성서가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그 내용과 의미, 진정성을 따지고 드는 우리는 동시에 ‘이런 질문을 하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관점을 가지고 시편 23편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런 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정말 제가 신뢰할 선한 목자이십니까?” “그렇게 묻는 너는, 나의 양으로서 나를 따르고 있는가?” 

그러므로 이 시편의 고백을 이해하려면 목자이신 하나님만이 아니라 양으로서 우리 자신을 동시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의 주인공은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는 동시에 자신을 양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살아가며 맞이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법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일상에 틈을 내어 말씀을 연구하며 기도로 자신과 세계와 하나님 나라의 융화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주인공의 걸음을 따라가 봅시다. 그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다가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를 노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문맥상 이곳이 목적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목자는 양이 쉬어야 할 때와 먹어야 할 때를 알기에 적절한 장소로 양을 이끕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공급받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얻는 만족감과 풍요를 그저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만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반대로 오로지 물질적인 차원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 나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한 존재임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인간의 창조, 생명, 부활에 관한 말씀은 시종일관 인간의 육체성과 영성을 포괄합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길로 인도하시되 정신적인 힘만이 아니라 육체의 필요도 함께 채우십니다. 우리 육체의 필요가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채워져야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는지 판단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이 시대의 욕망과 문화가 결정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필요는 하나님께 공급받고 육체적인 필요는 세상에서 세상의 방식으로 공급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장면에서 푸른 풀밭이라는 무대는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바뀝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 말만 들어도 섬뜩합니다. 그곳은 빛보다 어둠이 더 강해 보이는 곳이며 생명보다 죽음이 더 흔한 곳입니다. 앞 장면과 너무도 대조적이게도 고난과 결핍이 가득한 장소입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 앞에 놓인 이곳은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반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고난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누리는 공급과 회복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누리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평지에서의 위험은 돌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골짜기에서는 길이 하나뿐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 곧 악의 완전한 패배와 온전한 공의의 실현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구원의 여정은 부패한 세상과의 처절한 직면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불안과 욕망을 부추기며 소외와 차별, 착취와 파괴를 당연시하는 세상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걸림돌이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당도한 죽음의 그늘 골짜기에서 시의 주인공은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가던 걸음을 계속합니다. 놀라운 점은 단순히 안전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조차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 이유는 그 컴컴한 곳에서도 자신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막아주고 달려드는 맹수를 타격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5-6절에서 무대는 갑자기 잔치로 바뀝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양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목적지,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서의 잔치입니다. 그때가 되면 공의는 완전하게 실현되고 완전한 기쁨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시의 주인공은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라고 찬양합니다. 앞서거나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돌보심은 앞서서 이루어지고 실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제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돌보심 덕분에 우리는 거짓과 폭력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라 

마 6:33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23편의 완전한 요약입니다. 

일제강점기 〈성서조선〉을 발행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태를 보이셨던 김교신 선생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의 신앙적 강직함과 진실함이 담긴 글들은 언제 읽어도 죽비처럼 우리 정신을 번쩍 일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 그분도 의식주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성서조선〉 제148호(1941년 5월)에 실린 ‘생활의 염려’라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고 있으면 생활 문제는 해결될까? 2천 년 전이라면 모를까 20세기 오늘날의 생활에서도? 믿음 없는 사람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는 이 물음에 스스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노력에 노력을 더하여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생애를 살아보고 나서 그래도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보지 않으려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보지도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거부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상식적으로 고난을 초래하는, 사서 고생하는 삶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경험 질서와 물리적 인과 관계에 지배당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압니다. ‘염려’는 실체도 아니고 사실도 아닙니다. 아무리 짙은 어둠도 빛 앞에서 힘없이 스러지듯,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 앞에서는 그 어떤 염려도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김정훈
묵상지 〈하나님 나라 큐티〉를 만들고 있으며, 소박한 청년 공동체 씨앗교회의 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