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한국성결교회의 ‘사부’
[403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성결교회는 해방 이전 한국에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교세를 자랑한 개신교 교단이었다. 세 교단은 흔히 머리글자를 따서 ‘장감성’으로 지칭되었다. 1950년대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순복음교회 등으로 인해, 현재는 이전과 같이 3대 교단 안에 드는 위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는 2년 전 설문 조사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목사 500명과 장로 500명 중 절반 이상인 51.9%가 성결교단이 더 이상 한국 개신교회의 3대 교단이 아니라고 응답했다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1) 그러나 해방 전 성결교의 위상은 높았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미국과 캐나다, 호주의 중산층 주류 모교단이 파견한 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1880년대부터 전도(교회)와 교육(학교), 의료(병원) 사업을 종합적으로 진행하며 성장했다. 이와는 달리, 일본에서 활동하던 작은 미국 선교단체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성서학원을 졸업한 두 한국인 전도자 정빈(鄭彬, 1878-?)과 김상준(金相濬, 1881-1933)이 1907년부터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태동한 성결교회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 비해 재정과 인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이들은 오직 복음 전파와 교회 개척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장로회 4개 선교회(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와 감리회 2개 선교회(미국 북감리회, 미국 남감리회)가 1880년대 말부터, 한국인이 거주하던 한반도와 제주도, 만주, 시베리아를 대상으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채택하여 지역별로 선교지를 독점했다. 이 분할 정책에는 오직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회들만이 동참했으므로, 이른 시기에 입국한 영국계 교파인 성공회와 구세군은 말할 것도 없고, 선교가 늦었던 성결교회도 이 협약에서 소외되었다. 따라서 이미 장로회와 감리회가 선점한 선교 구역에서 활동한 성결교 사역자들은 지역의 장로교 및 감리교 선교사들뿐 아니라, 한국인 장로회 및 감리회 신자들에게도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성결교회는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 및 전라남도 신안의 도서 지역에서 상당한 전도 성과를 보이며 성장했다. 현재 한국성결교회연합회(한성연)라는 이름의 성결교회 협력 기구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나성), 세 성결교회가 소속되어 협력하고 있다.
한국성결교회의 기원을 만든 이들은 1907년에 일본에서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서울 종로에 복음전도관을 세워 전도를 시작한 동양선교회 출신의 두 전도자 정빈과 김상준이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가 해방 전 3대 개신교 교파 중 하나이자, 오늘날의 대교단으로 성장하기까지 중생-성결-신유-재림이라는 사중 복음에 입각한 신학과 교리의 체계를 세우고, 교단 조직을 정비하고,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단연 이명직(李明稙, 1890-1973)이었다. 이런 업적으로 그는 성결교회에서 “북극성적 존재”라는 최상의 명예로 추앙되기도 한다.2) “성결교회 및 신학교를 키워놓은 인물”이자, 성결교단의 “사부요, 교부”3)라는 호칭도 있는데, 이 중 성결교회의 “사부”라는 표현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별칭인 것 같다. 사실상 그는 해방 이전 한국성결교회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다. 성서학자로서, 교단 행정가로서, 문필가와 저술가로서, 목회자로서, 부흥사로서, 신학 교육자로서 그는 주위의 모든 산 위에 우뚝 선 가장 거대한 산이었다. 그러나 한편, 일제강점기 한국성결교회를 이끈 압도적인 일인자였기에, 다른 교단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일제 말기 친일 부역에 대한 책임과 혐의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해방 후 새로운 시대의 성결교회 후손들에게 그는 “1,000인이 좌에 쓰러지고 10,000인이 우에 넘어져도 선생만은 피로 부딪힐 줄 알았던 후배들을 실망케 했고, 침울하게 만들었던” 인물이자, “신앙적 지조와 절의를 사수하지 못한”4) 선생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5)
중생과 소명: ‘은혜기’
이명직의 초기 생애와 기독교 입교 과정은 1922년 11월에 창간된 성결교회의 대표 정기간행물 〈활천〉에 실린 간증문 ‘은혜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6) 이명직은 1890년 12월 2일에 서울 서대문 충정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없는데, 어떤 문헌은 부친이 이성태(혹은 이승태)로, 대궐 주전원 전무과(主殿院 典務課) 주사로 근무했다고 주장한다.7) 어린 시절부터 이명직은 종교성이 두드려졌던 것 같다. 남자로 태어나 출세하여 비상한 업적을 이루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인물이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산림으로 들어가 미륵을 따르거나 나무꾼으로서 자유롭게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계기는 속세에 떨어져 자리 잡은 집 뒤편 불교 사원에서 새벽과 저녁마다 울려 퍼진 종소리와 한정하고 정갈하게 수행하던 탈속 승려들의 신비로운 삶이었다. 그는 수도자가 되어 금수강산 전국을 돌아다니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은혜기 (상), 30쪽).
불교 승려가 되고 싶다던 그의 종교적 열망은 청년회학관에서 기독교 성경을 공부하며 방향이 바뀌었다. 청년회학관은 1901년부터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1903년에 확장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건물을 뜻했다. 15세쯤 되었을 때 이명직은 집과 가까운 종로1가 거리에 신축된 YMCA 건물에서 자신의 종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다 “예수를 믿는 것을 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완고한 유교적 보수성을 지켰던 당대 대다수 가정이 그랬듯, 예수교 입교를 허락받지 못한 그는 “중심(마음)으로만 신앙하는 것이 가하다는 판단”을 내렸다(은혜기 (상), 30쪽).
그러나 약 3년 후 18세가 된 그는 불교 신자로서든, 기독교 신자로서든 종교에 귀의하고자 하는 생각을 버렸다. “목소촉견(目所觸見)과 이소접문(耳所接聞)에 물욕에 대한 정이 맹동하여” 그는 1909년 20세에 남대문역에서 부모님께 편지 한 통으로 도쿄로 건너가는 연유를 밝히고 홀연히 떠난다.8)
일주일 여정 끝에 도쿄에 도착한 이명직은 학교에 들어가려고 알아보았다. 그러나 서당에서 배운 한학 외에는 학문 배경이 없고, 재정도 넉넉지 않았고 일본어도 능숙하지 않았던 그가 들어갈 수 있는 학교를 찾기는 어려웠다. 이런 그에게 다시 손길을 내민 이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었다. 도쿄 거리에서 북과 나팔을 울리며 전도하던 구세군 전도대를 만나 복음을 다시 들었다(장병일, 위의 글, 65쪽). 정규 예배에 꾸준히 출석하며 주초도 끊고 1년간 신약성경도 두어 차례 통독하고 기도 생활에도 열중했다. 그는 당시 경험에 대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듯 부르신 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은혜기 (상), 31쪽).
이명직은 교회에 출석하던 이 시기를 정규학교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한 예비기간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향의 부모로부터 더 이상 학비와 생활비를 보낼 수 없으므로 속히 귀국하라는 서신을 받은 그는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할지, 어떻게든 새 길을 뚫어볼지 고민에 빠졌다. 일본에 남기로 결심한 그는 YMCA 총무 김정식9)과 상의한 후, 미국 성결운동 계열의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던 도쿄성서학원에 “피궁(避窮)삼아”, 즉 일종의 도피처로 삼아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피궁삼아” 입학한 학교가 그의 미래를 결정했다. 잠시의 도피처였던 성서학원에서의 공부는 그에게 처음에는 “흑암의 상태” 같아서, “마치 별건곤(別乾坤)에서 노는 것과 같은 기감을 느끼면서” 하루하루 생활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미디안 광야에서 방황하는 모세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재학 중에 세례까지 받았으나, 세례 전후에 별로 달라진 것도 없이 영적 방황을 계속했다(은혜기 (상), 32쪽).
성결교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중생의 경험을 하게 된 계기는 그보다 1년 반 늦게 성서학원에 입학한 이명헌(1876-1928)10)이 들려준 간증, 미국인 부흥사 슐함마의 집회였다. 이렇게 “검은 막이 덮여 있는” 심령이 “운권청천(雲捲靑天)11)이 되고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게 되고 진리의 새 광선이 나의 마음에 비치게” 되었음을 깨달은 그는 22세 1911년에 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했다(은혜기 (상), 32쪽).
이명직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무렵, 기독교를 완고히 반대하던 집안도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가족은 북감리회 벙커 선교사를 통해 신자가 되어 매 주일 교회에 출석했다. 귀국 직후 이명직은 개성교회 전도자가 되었다. 요한복음 3:16을 첫 설교 본문으로 삼은 것은 그가 단순 명료하게 복음을 전하는 전통을 강조하는 성결운동 전도자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개성에서 목회한 지 4년 차이던 1914년에 그는 부흥회를 위해 한국을 찾은 D. D. 왓슨에게서 4월 21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7년에 정빈과 김상준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세우고 선교를 시작한 후, 1921년 9월에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새 이름을 사용하게 되므로, 이명직은 안수받은 당시에는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소속이었다. 목사가 된 후에는 부여로 이동하여 규암교회에서 1916년까지 목회했다(장병일, 위의 글, 66쪽).
목사 안수를 받은 지 2년여 시간이 흐른 1916년에 이명직은 동양선교회 한국 복음전도관 목회자를 양성하는 경성성서학원 교사(교수)로 임명되었다. 불과 27살에, 목사 안수를 받은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교단 신학교 교사가 된 것은 아마도 그가 교단의 선교사와 한국인 지도자들에게서 지적 영민함과 지도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신학원 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수년간 자신의 자격에 의문을 품었다. 이유는 “성서학원이 신성한 수양장이라 하면 교사는 성직이다. 나와 같이 냉담한 무력, 불신성, 타락자가 교사란 칭호를 더럽힐까 염려이다. … 전에 여간 은혜받았다 하여 도적 맞은 지 오래고, 마귀의 화전에 중독된 내가 무슨 교사의 자격이 있으며 또한 무슨 선량한 영유를 내어 후진을 양육하랴!”는 고백에 들어있다. 그는 성결을 강조하는 교단의 신앙과는 달리, 자신이 성결을 내적으로 체험한 적이 없으며, “복음을 억해하여 사람의 뜻을 맞추고자 하는” 의도로 전했으며, “사곡하고 누추한 심리로 여자를 대한 적이 많았”다고도 고백한다(은혜기 (하), 38쪽).
1916년 이래 성서학원 교사와 기숙사 사감, 아현교회 목회자직을 동시에 수행하던 이명직에게 새로운 전환점은 1921년에 찾아왔다. 그해에 그는 교단 목회자 양성원의 교수이자 교단 지도자로서의 직분에 대한 자기 비하 대신, 영적 각성을 경험하며 자기 직분에 대한 새로운 소명을 발견한다. 1921년 가을 학기 강의 중에 그는 “성신의 감화를 받았”고, 자신의 “무영력함을 깨닫게” 되었고, “성신에 충만하게 되었”고, “새 능력에 포위되었다.” 그는 “이것은 나의 낙지후 처음의 영험이다. 한참 동안 울고, 한참 동안 웃고, 혼자서 춤추고, 취한 사람이 아니면 미친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은혜기 (하), 41쪽).
이런 그의 경험은 성서학원 전교생, 선교회, 전국 교회에도 퍼져나갔다. 17세기 독일 경건주의와 18-19세기 영미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직계인 성결운동의 후손답게, 그와 성서학교, 교단은 1921년에 전형적인 복음주의 부흥을 체험했다. 그러나 1921년의 이 성결교 부흥운동이 이명직 개인뿐 아니라 한국성결교회의 성격을 전체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박명수는 그렇지 않아도 지성보다는 감성과 체험을 강조하는 성향을 갖고 태동했던 복음전도관과 성결교회가 이 시기 이후 더 반지성적인 색깔을 갖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새로운 학문을 경계하고 지성적인 노력을 무시하며, 반대급부로 신앙만 강조했다. 민족의 독립운동이나 계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불신앙적 세속화로 폄하하며, 종말론적 내세를 지향하는 탈민족·탈현실 성향이 강화되었다.12)
〈활천〉
1921년은 성서학원에서 부흥과 회개운동이 일어난 해인 동시에, 성결교회가 선교단체 조직을 벗어나 정식 교단 조직으로 발돋움한 해이기도 하다. 이미 언급했듯, 1921년 9월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은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재조직되었다. 이때 이후 1943년 12월에 조선총독부령으로 교단이 강제해산되기까지, 한국성결교회에서 이명직은 군계일학, 지존무상의 자리를 지킨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 시기 그가 역임한 직책은 다음과 같다: 1921년 ‘동양선교회’ 조선 감독 고문, 1922년 ‘한국성결교회’ 기관지 〈활천〉 주필, 1924년 ‘한국성결교회’ 이사, 1925년 ‘한국성결교회’ 조례 편찬, 1929년 ‘경성성서학원’ 부원장 및 유지재단 이사, 1933년 ‘한국성결교회’ 제1회 총회장, 1934년 ‘한국성결교회’ 제2회 총회장, 1935년 ‘경성신학원’ 원장, 1938년 ‘한국성결교회’ 제6회 총회장, 1939년 ‘한국성결교회’ 제7회 총회장, 1940년 ‘경성신학교’ 교장, 1941년 ‘동양선교회’ 재단 이사장(최인식, 위의 글, 56쪽).
1921년 이후 이명직은 위에 언급된 직책을 차례로 맡으며, 한국에 파견된 대표 선교사들인 존 토마스(John Thomas, 1868-1940), 찰스 카우만(Charles E. Cowman, 1868-1924), 어니스트 킬번(길보른, Ernest A. Kilbourne, 1865-1928)을 뛰어넘는 군계일학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이 시기 이명직이 한국성결교회를 이끈 정신은 그가 주필로 활약한 〈활천〉에 잘 드러나있다. 그가 〈활천〉에 남긴 수많은 설교와 성경 강해, 간증이 곧 전국 성결교회의 교리로 확장되었고, 신학교 강의안이었으며, 전국 성결교 신자들의 신앙과 삶의 규범이자 표준이었다. 따라서 〈활천〉에 실린 이명직의 글에 담긴 내용과 정신이 곧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이었다.
박명수에 따르면, 1922년 〈활천〉의 등장은 한국 개신교회에 서양 문명에 저항하는 일파가 등장했다는 상징성을 띤다. 1880년대에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교회를 세우고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며 서양 종교와 문화, 의술과 교육체계를 전하면서, 한국인에게 개신교와 서양 문명은 동일시되었다.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에서 성결운동은 신앙과 정치, 세속 문화를 연결된 한 문명 체계로 수용한 주류 개신교 교파들과는 달리, 교회의 세속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등장한 반문화 운동이었다. 마찬가지로, 1919년 3·1운동 이후 총독부 당국의 상당히 관용적인 문화정책으로 다양한 신사상이 유입되자, 많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강단과 신학교, YMCA 같은 청년 조직에서도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포용하기 시작했다. 이명직의 성결교회와 〈활천〉은 이런 변화에 저항하는 기독교계의 반동적 대응이었다.13)
1921년 3월에 열린 전국 교역자 수양회에 모인 복음전도관 교역자들에게 이명직은 교단 역사상 처음으로 동양선교회와 서양 선교사들에게 재정을 의지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운영되는 기관지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당시 교역자 간담회에서 논의된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1. 목적: 동양선교회성결교회의 기관지로 함.
2. 주의 강령: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순복음주의로 관철함.
3. 기사 내용: 성경 강의와 연구, 간증과 신자의 신앙을 양성하며 이단과 속화를 퇴치함.
4. 명칭은 〈활천〉이라 함: (〈활천〉이라 함은 요한복음 7장 27-8절에 “나를 믿으면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가 강과 같이 흐르리라”는 말씀의 사상으로부터 취한 것이라.)
5. 자금: 선교비로 취할 것이 아니라 조선인 남녀 교역자가 공심 합력하여 1922년 3월까지 5백 원을 저축하기로 함.14)
위 결의 사항을 통해 1920년대에 복음전도관과 성결교회가 지향한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박명수에 의하면, 〈활천〉은 첫째, 불신자의 구원과 중생, 신자의 성결, 병자의 신유,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사중 복음 신앙을 선언하는 잡지였다. 둘째, 〈활천〉에 실릴 기사 장르는 성경 강의와 연구, 간증으로, 지성적인 색채의 신학과 교리보다는 실천과 적용성을 강조하는 대중적인 신앙 잡지였다. 셋째, 이런 기사들의 목적은 이단과 속화, 즉 세속화를 퇴치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박명수가 주장했듯이, 〈활천〉은 1920년대에 물밀듯 밀려들던 반기독교 사상과 새로운 신학 풍조에 저항하는 순복음-반문화 잡지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는데, 〈활천〉이 맞서 싸운 주요 사상은 자유주의·고등비평·사회복음·공산주의 등이었다. 넷째, 〈활천〉은 동양선교회가 한국에서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선교를 시작한 이래,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자립적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사역이었다. 이렇게 창간이 합의된 〈활천〉의 첫 발행인은 길보른 선교사, 주필은 이명직이었다. 길보른이 발행인이 된 것은 당시 기독교계 잡지 대부분이 일제 감시와 압박, 체포를 피하는 수단으로 서양인 선교사를 발행인(사장)으로 세우는 관행 때문이었다. 공식 직책과 상관없이, 〈활천〉은 주필 이명직과 편집 주무 이상철의 잡지였다. 특히 해방 전 이 잡지의 원고 절반은 이명직의 설교, 논문, 성서 강해로 채워졌다(박명수, 위의 글, 72-75쪽).
〈활천〉을 통해 이명직으로 대표되는 성결교회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공표한 메시지와 정신은 간담회에서 합의한 대로 “속화 퇴치”였다. 이를 박명수는 셋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재림과 신자의 준비. 성결운동이 강조한 사중 복음의 네 번째 항목 재림은,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이었다. 이명직은 전천년주의에 입각한 전형적인 재림론을 믿었다.15)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휴거, 7년 대환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천년왕국, 최후의 대심판이 순서대로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전천년주의 재림론자들은 대개 종말의 때에 일어날 징조에 관심이 많다. 이명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20년대 초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적백 충돌, 중국의 남북 갈등, 유럽에서 여러 혁명이 일어나는 현상, 무엇보다도 1차 대전 중이던 1917년 11월 2일에 연합국이 승인하여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가 세워질 수도 있다는 소식을 모두 재림의 징조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림의 징조가 만연한 때에 신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다른 재림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명직 역시 신자가 할 일은 순결한 신부가 되어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교세 확장이나 사회사업 같은 것은 재림과 함께 무너질 세상에서는 무용지물이다. 1923년에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이를 임박한 종말의 징조로 이해했다. 그는 1920년대에 교회와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도 종말의 징조로 파악했다. 설교가 교양 강좌가 되고 교회당이 문화센터처럼 되어버렸다는 비판은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계에 흔했지만, 이미 1920년대에 이명직이 자주 지적한 내용이기도 했다. “나무와 같은 음악대, 풀과 같은 활동사진, 집과 같은 강습회, 야학, 토론회, 청년회 같은 것으로 교회의 재료를 삼으려 하니 이것이 어찌 신성한 교회가 되어가며, 이 가운데 어찌 구원 얻는 자가 일어나리요. 오히려 교회를 요란하게 하고 속화케 할 뿐이로다.”(이명직, ‘진리대로’, 〈활천〉(1923년 8월), 4쪽)
이명직은 기독교인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일도 세속화의 일종으로 보았다. 해외에서 전개된 무장투쟁이나, 국내에서 전개된 민족 개량을 위한 계몽운동도 모두 말세에 일어날 교회의 타락이라고 보았다. 만사를 전능하신 하나님께 위임하고 복종하는 무저항주의만이 성결한 자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방인과의 분쟁 당시 양보한 구약의 이삭이 그 모델이었다.16)
둘째, 사회복음과 공산주의. 1920년대는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신학과 사상들이 쏟아져 들어온 시기였다. 특히 20세기 첫 20여 년 어간에 미국에서 발흥한 사회복음은 진보적 교인들이 널리 수용한 신앙 유형이었다. 이들은 당대의 여러 노동운동과 인권운동들과 연대하여, 사회의 불평등을 타파하고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사회적 복리를 누리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자”라는 이들의 외침은 보수주의자들을 자극해 근본주의 운동을 태동시켰다. 미국에서 성결운동은 대표적인 근본주의 운동 중 하나였으므로, 한국에서도 이명직과 선교사 길보른은 사회복음 운동에 분명하게 반대했다. 〈활천〉에서 발행인으로 주로 사설을 맡은 길보른은 “이 천국은 불의한 문명 위에 세우지 아니하고 죄를 멸하고 악을 심판하심으로 임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17) 이명직의 생각도 길보른과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혁명 성공을 계기로 공산주의 사상도 1920년대 일본과 한반도의 지식인과 학생 사이에 유행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라 반기독교적이지만, 기독교인 중 일부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공존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는 당시 한 목사가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초대교회를 공산주의의 예시로 설명했다는 이야기에 분개하면서, 사유재산을 부정하거나 강제로 바치거나 공유하게 하는 내용은 성경에 없다고 주장했다(이명직, ‘성경은 공산을 인정하는가?’ 〈활천〉(1927년 7월), 1쪽). 오히려 그는 교회 안의 빈부 격차와 차별을 해결하는 일은 회개와 성결을 통해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모든 신자 개인이 성결하게 된다면, 교회 내에서 분과 기름을 바르고 사치한 옷을 입는 일이 없으며, 그 돈으로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여 성경의 오순절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성경은 공산을 인정하는가?’, 4쪽). 결국 교회는 세상이 아니라 개인 영혼을 구하는 단체이므로, 교회의 사회운동은 속화와 타락으로 가는 길이다(박명수, 위의 글, 77-83쪽).
셋째, 남녀 교제, 교회의 세속화, 성결한 가정. 마지막 세 번째는 성 윤리 문제였다. 1920년대에 한국에 불어닥친 또 하나의 열풍은 소비적 자본주의로, 이는 특히 여성의 패션, 화장, 연예 문화였다. 이명직과 성결교회는 이를 심각한 말세의 징조로 보았다. 성결한 삶을 강조했던 성결교회가 이미 성 문제로 초기 지도자 이장하와 최홍은을 치리한 사례가 있고, 이명직 스스로도 이런 문제에 휘말려 회개한 경력이 있었으므로, 성 윤리를 더 엄격하게 다루고자 한 면도 있었다. 그는 일본 기독교인이 쓴 글을 번역해서 〈활천〉에 실었는데, 이 저자는 기독교인이 전통 개량을 명목으로 서양 풍속을 받아들여 이혼을 용인하고 교회를 남녀 관계의 소굴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한다.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크리스마스를 이용해 이런 타락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이명직의 견해와 다르지 않았다(이명직, ‘남녀교제의 청결’, 〈활천〉(1922년 12월), 17-20쪽). 이듬해 3월에 그가 쓴 글에 거의 같은 논조의 주장이 나오기 때문이다(포원생, ‘남녀교제의 근신’, 〈활천〉(1923년 3월), 7-10쪽).
이명직은 사회가 교회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 근본 원인을 교회의 세속화라고 판단했다. 한 외부인은 교회가 한국 사회에 공헌하는 유일한 점은 한국처럼 클럽이 없는 사회에 남녀가 어울릴 수 있는 클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8) 이런 비판을 의식한 이명직은 성결교회의 성탄절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① 연극을 하지 말 것 ② 소아에게 긴 연설을 하게 하지 말 것 ③ (가증스러우므로) 가장을 하지 말 것 ④ 남녀의 혼잡을 주의할 것 ⑤ 세속적 창가를 부르지 말 것 ⑥ 호화스러운 아동의 의복을 금할 것 ⑦ 무도를 하지 말 것 ⑧ 전도로 주안을 삼을 것(‘성탄 축하를 어떻게 할까?’, 〈활천〉(1925년 12월), 23쪽).
그는 말세의 징조 중 가장 강력한 증거를 음행의 유행이라고 보았다. 그에게는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이야말로 음행을 조장하는 악습이었다(‘음행은 말세의 징조’, 〈활천〉(1925년 10월), 3쪽). 이명직은 결혼 자체를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사랑 없는 구식 결혼이 이혼의 원인이라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자유결혼을 한 사람들의 이혼율이 더 높다는 것이다(‘이혼과 재혼에 대하여’, 〈활천〉(1925년 12월), 3-7쪽).
결국 1920년대에 이명직은 〈활천〉을 통해서 한국성결교회의 표준으로서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 복음 신앙과 그 실천 규범을 널리 선언함으로써, 한국성결교회의 신앙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이명직을 통해 성결교회는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강조하는 대응 문화-반세속 기독교 공동체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박명수, 위의 글, 84-90쪽).
강점기 말기와 그 이후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4,383명 중 종교계 인사는 182명이었다. 이 명단에는 한국 교계 대표 인사가 대다수 포함되었는데, 성결교의 이명직도 이름을 올렸다. ‘국민정신총동원성결교회연맹’과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전력이 문제가 되었다. 이명직목사기념사업회는 즉각 《과연 이명직 목사는 친일인사인가?》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여 항의했다. 사업회는 “표면적인 것만을 가지고 이명직 목사를 친일파라고 운운하는 것은 교단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이명직 목사도 이용만 당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특히 일제로부터 특혜를 누리기는커녕,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오히려 피해를 당했고, 신사참배 이후 일제가 한국교회를 통합하고 구약성경을 폐기하려 할 때 적극 저항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고 변호했다.19) 〈한국성결신문〉에 실린 박명수의 기고문도 유사한 논조를 띤다. 그는 교단을 대표하는 지도자였기에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친일 협력한 부분을 인정하지만, 일제 정책에 반대하며 저항한 내용도 기술해야 공정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20)
해방 후 이명직은 교단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오직 신학교 강의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한국전쟁기에 교단 지도자 다수가 납북당해 행정에 공백이 생기자 다시 복귀하여 교단을 이끌었다. 1951년에 경성신학교에서 서울신학교로 이름을 바꾼 학교의 교장을 다시 역임했고, 1959년에는 신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자 초대 학장이 되어 2년간 학교를 이끌다 명예학장으로 은퇴했다. 이명직은 1973년 3월 30일에 충정로 서울신학교에 위치한 자택에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 ‘‘장감성’은 옛말?… 절반이 “성결교 3대 교단 아니다” ― 기성 목사·장로 1천명 대상 설문조사 결과’, 〈기독일보〉(2022.05.20.)
2) 이상훈, ‘성서학자로서의 이명직 목사: 그의 성서 이해와 해석에 관한 서설적 탐구’, 이현갑 편, 《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신학》(도서출판 청파, 1991), 228쪽.
3) 이천영, 《성결교회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출판부, 1970), 59쪽.
4) 김기삼, ‘이명직 선생을 논함’, 〈역사와 문학〉(1991년 여름), 31쪽.
5) 최인식, ‘이명직 목사의 생애: 해방 이전까지’, 한국성결교회연합회 신학분과위원회 편, 《이명직·김응조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도서출판 바울서신, 2002), 37-74쪽.
6) M. C. 생, ‘은혜기 (상)’, 〈활천〉(1924년 9월): 30-33쪽; M. C. 생, ‘은혜기 (하)’, 〈활천〉(1924년 10월): 36-43쪽. 창간호부터 발행인이 선교사 길보른, 주필이 이명직이었던 〈활천〉의 발행 초기에는 이명직이 모든 기사 중 거의 절반을 작성했는데, 본명 이명직 외에도 포원생, 인왕산인, 규암생, 주의 소복, M. C. 생, ㅁ. ㅈ. 생 등 필명으로 썼다. ‘은혜기’는 신앙과 관련된 이야기에 집중하는 신앙 간증문이므로, 역사적 사실관계는 누락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다른 사항은 장병일, ‘세속에 솟은 성결의 기수: 이명직 목사 편’, 〈기독교사상〉(1965년 2월), 64-70쪽을 참고해서 보충했다.
7) 장병일, ‘세속에 솟은 성결의 기수: 이명직 목사 편’, 64쪽. 이명직의 생부는 이승태가 아니라, 이승원이며, 그가 일찍 소천했기에 이명직과 남동생은 조부 이원익과 백부 이승태의 집에서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yellowroses.tistory.com/15853664).
8) ‘은혜기’에서 스스로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홀연히 일본으로 갔다는 증언과는 달리, 장병일은 1907년 정미칠조약(한일신협약)으로 관직으로 물러난 부친이 근대문화와 학문을 습득하게 하려고 아들에게 일본 유학을 강권했다고 기록한다. 장병일, 위의 글, 65쪽.
9) ‘은혜기’에는 “어느 선생”으로 적혀있지만, 이천영은 이 선생을 김정식 YMCA 총무로 특정한다. 이천영, 위의 책, 59쪽.
10) 1907년에 연동장로교회의 신자가 되었고, 동양선교회 김상준과 정빈의 설교를 듣고 성결운동에 관심을 가진 후 도쿄로 건너가 공부했다. 귀국 후 1914년 경성성서학원 1회 졸업생으로 한국성결교회가 안수한 첫 여섯 목사 중 하나가 되었다.
11)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는 뜻으로, 병이나 근심이 사라져 청명하고 맑은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
12) 박명수, ‘각성운동의 원형, 1921년의 경성성서학원의 대부흥운동’, 〈활천〉(1995년 3월), 40-50쪽.
13) 박명수, ‘이명직 목사와 1920년대 한국성결교회: 〈활천〉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사학회지〉(Vol.14, 2004), 67쪽.
14) 이명직, ‘활천의 역사담’, 〈활천〉(1931년 3월), 6쪽.
15) 이성주, ‘이명직 목사의 신학사상’, 《이명직·김응조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 101-105쪽.
16) 규암생, ‘신년의 나의 소원’, 〈활천〉(1924년 2월), 7쪽. 박명수, 위의 글, 77-79쪽에서 재인용.
17) ‘금일 교회 내에서 유행하는 이단 ‘지상천국설’에 대하여’, 〈활천〉(1926년 9월), 1쪽.
18) 이명직, ‘‘교회에 향하여 放一失’라는 제목을 읽고서 교회의 반성을 촉구하노라’, 〈활천〉(1923년 12월), 9쪽.
19) ‘〈친일인명사전〉, 그 앞에 서 보자’, 〈교회와신앙〉(2009.11.9.)
20) 박명수, ‘〈특별기고〉 이명직 목사를 친일인사로 단정할 수 있나?’, 〈한국성결신문〉(2009.11.21.)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