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현장에서 사회선교의 의미

[403호 사회선교 더하기]

2024-05-30     전남식

성서대전을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성서대전이 커진 적은 없다. 10명 남짓한 실행위원들이 각자 회비를 내고, 주변 지인들에게 후원을 요청해 근근이 이 모임을 이끌어왔다. 성서대전 활동을 중단하는 것도 진지하게 논의했었다.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이 많지 않았고, 많을 수도 없었다. 실행위원들도 모두 각자 일터가 있었고, 재정도 현저하게 부족한 상황에서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서대전은 정말 작고, 정체성 역시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가끔 성서대전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받곤 한다. “성서대전은 누구를 위한 단체냐? 노조? 그것도 특정 노조? 환경단체? 교회개혁?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그때마다 이렇게 답한다. “성서대전은 환경단체도 아니고, 노동단체도 아니고, 교회개혁을 위한 단체도 아니다. 그저 고난받은 현장이 있다면, 고난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을 찾아가려 한다. 사람이든, 생태계든, 그 대상이 고난을 받고 있다면, 누군가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행 16:9) 요청한다면, 기꺼이 건너가려고 모인 단체다.” 이것이 성서대전의 존재 이유이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고난받는 사람의 곁을 지켜주고, 찾아가 위로하고 연대하는 조직이 개신교에 적어도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성서대전이 활동을 이어오는 이유다.

따라서 언제까지 성서대전 활동을 할 예정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한결같다. “고난받는 사람이 없어지면요.”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신 이유, 즉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눅 19:10)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도 이와 같아야 한다. 누가복음에서 ‘잃어버린 자’는 시종일관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소외된 자들,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도 “형제자매들”에게 권면한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다음과 같은 요청 전화를 자주 받는다. “목사님,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위한 위로 예배를 드려주실 수 있을까요?” “보문산에 서식하고 있는 하늘다람쥐를 보호하기 위한 기도회를 성서대전이 해주면 어떨까요?” “현 정부가 화물연대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는데, 그분들을 위해 연대 발언 부탁드려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격하는데, 우리 정부가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주세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강행하고 있는데, 개신교 목사로서 이를 반대하는 성명서 씁시다.” 그때마다 성서대전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인한다. 그렇다고 성서대전이 모든 곳을 찾아갈 수 없고, 그럴 역량도 부족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그런 요청을 받아들이고, 찾아가 힘을 보태려고 애쓴다. 성서대전을 포함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의 자리가 이곳, 즉 고난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고난의 현장’이란 말을 사용해왔다. 이 글의 제목은 ‘투쟁의 현장에서 사회선교의 의미’인데, 나는 ‘투쟁’보다는 ‘고난’이라는 단어를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투쟁’이라는 단어가 잘못되었다거나, 과격하기 때문이 아니다. 성서대전 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투쟁’인데, 성서대전 초창기에 이 단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난’은 수동성을 내포한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대한 고난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런데도 고난은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원치 않는데 갑자기 찾아와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것이 고난이다. 반면 ‘투쟁’은 적극성을 내포한다. 불청객 고난으로 힘겨워하고, 한숨짓고 눈물 흘리고 있던 사람이, 고난의 원인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한 것임을 인식하는 순간,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저항하는 것이 ‘투쟁’이다. 그것을 이해한 순간, 현장에 나가 구호를 외칠 때마다 ‘투쟁’을 자연스럽게, 아니 좀 더 힘을 내서 ‘투쟁’을 외치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평화주의자로 살아왔다. 평화주의자는 기본적으로 ‘비폭력적’ 삶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투쟁’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부담스러웠고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고난의 현장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하면서 차츰 ‘투쟁’이 자연스러워졌다. 평화주의자 노선, 비폭력적 삶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이 단어를 오독했다는 점을 고백하는 것이다. 고난의 현장에서 투쟁을 외치는 사람들은 누구도 폭력적 쟁취를 주장하지 않는다. 집회 신고를 하고, 평화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오히려 폭력은 공권력이 행사한다. 정당하게 시위하는데, 공권력은 무력, 즉 폭력으로 그들을 저지하고, 억누르고, 입을 틀어막고, 공공연하게 진압봉을 휘두른다.

보문산 난개발 반대 고함기도회 오세준 목사 설교. (사진: 필자 제공)

반면 고난받는 사람의 투쟁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이다. 오체투지 투쟁, 삭발 투쟁, 단식 투쟁…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것들이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투쟁이다.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처절함을 넘어 처연하기까지 하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윤리학》의 ‘교회와 세상1’에서 상충하는 듯한 두 구절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와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마 12:30). 본회퍼는 전자를 세속 사회에서 정의와 진리와 인간성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권세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한다. 반면 후자는 교회가 적그리스도에 맞서 싸워야 할 때, 침묵이나 중립으로 불의한 권력을 인정하던 당시 교회를 향한 메시지로 이해한다.
 

적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서 교리와 생활의 엄격한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를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했던 작은 고백교회들이 모였을 때, 투쟁에 몰린 이러한 고백교회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중립성 속에서 교회의 내적 붕괴와 해체의 가장 위험한 요소, 곧 진정한 적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배타성으로 인해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점점 줄어들었을 때, 그때에 고백교회는 이처럼 본질적인 것에 집중함으로써 불안하게 경계를 긋지 않는 내적인 자유와 넓이를 느끼게 되었다.(《윤리학》, 414쪽)

본회퍼는 이 두 구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전체성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배타성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져오며, 전체성은 교회 밖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단체와의 연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본회퍼가 경계하는 것은 이러하다. 

고립된 배타성 요구는 열광주의와 분파주의를 낳으며, 고립된 전체성 요구는 교회의 세속화와 자기포기를 낳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점점 더 배타적으로 인식하고 고백할수록 주님의 통치 영역은 우리에게 점점 더 크게 열린다.(위의 책, 414-415쪽)

본회퍼가 예를 든 두 구절은 성서대전이 투쟁의 현장에 찾아가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성서대전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배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한다. 대표적으로 특정 이슈를 위한 시민단체 기자회견장에서 발언할 때마다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언인지를 분명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태도로 현장에 나왔음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목사들이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런데 나와요? 기독교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립성 요구는 결국 본회퍼의 말처럼 교회의 내적 붕괴와 해체를 가져올 것을 알기에, 즉 중립성이라는 단어는 허구이고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현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고난의 현장에 함께 서있을 때 그 현장은 투쟁의 현장으로 변화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고난받는 자가 곧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며, 그들이 우는 자들이기에, 그들과 함께 우는 것에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는다. 또한, 고난의 현장에서 투쟁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켄 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라는 영화를 봤다. 그곳에서 이런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 “희망은 고통스러워요.” “희망에는 용기가… 믿음이 필요해요.” 한국교회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고난의 현장에 교회가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고난의 현장에서 교회가 사라졌고, 투쟁의 목소리보다는 고난받는 이들의 투쟁을 비난하는 목소리만 넘쳐나기 때문이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먹고, 고난 너머 찾아올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데, 이것이 믿음인데, 이제는 믿음도, 노래도 교회에서 사라져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남식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모토로 대전에서 목회하는 꿈이있는교회 목사이자 성서대전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