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죄인들과 함께 먹습니까?”

[403호 신학자의 말] 이동환 목사 출교를 보며

2024-05-30     정혜진

지난 3월 4일 이동환 목사 출교 결정이 내려졌다. 변선환, 홍정수 교수가 종교다원주의와 예수의 부활 이해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근거로 출교당한 지 32년 만이다. 이동환 목사가 2019년 여름 인천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여 축복식을 진행한 일이 발단이었다. 그곳에 있었던 이들이 들었던 축복의 한 구절이다. “우리의 삶, 우리의 숨, 우리의 사랑과 시간이 모두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나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땅의 다양한 소수자와 함께하십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과 춤추며 웃고 떠드시는 우리들의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을 지켜내며 더 많이 사랑받게 하소서. 더 많이 사랑하게 하소서!”1)

여기 어디에 이동환 목사가 처벌받을 사유가 있는지 필자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를 기소한 경기연회 자격심사위원회나 ‘정직 2년’을 선고한 동 연회 재판위원회는 이 축복이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2020년 10월 20일 판결). 참 고단한 시간이었을 텐데, 사회적 소수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그의 신앙과 신념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에도 이동환 목사는 ‘한국교회를 향한 퀴어한 질문’을 슬로건으로 내건 ‘큐앤에이(Q&A)’를 설립하고 성소수자 환대 목회를 더 열심히 이어갔다.

필자는 이동환 목사의 투쟁에 함께하고 항소 결과를 기다리며 일말의 기대를 가졌었다. 물론 이 기회에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성소수자들에게 보여온 차별적인 입장에서 전향적으로 돌아서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경기연회의 재판 과정에 절차적으로 명백한 하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만 인정하더라도 원심이 유지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전과 다르게 ‘처음으로 재판답게’ 했다는 후기도 있어서 기대했었는데,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결과를 마주하니 너무 참담하다. 절차적 하자를 모두 부인하면서도 부당하게 전가된 재판 비용 일부를 경기연회에 부담시킨 모순적 결정, “교회 모함과 악선전”이라는 사유까지 인정한 점을 보면 그들에게 어떤 성찰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이동환 목사 재판 과정 뒤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이하 감리회) 〈교리와장정〉, 일반재판법 제3조 8항이 있다. 이 조항은 “마약법 위반, 도박 및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를 처벌 가능한 범과로 규정한다.2) 문제는 이 조항이 마약법을 위반하거나 도박을 ‘직접 하는’ 것과 타인의 동성애에 ‘찬성, 동조하는’ 2차적 행위를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점이다. 이동환 목사 재판을 돕고 있는 신하나 변호사는 이 문구가 국가보안법을 참조한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는데,3) 아닌 게 아니라 “반국가단체나 이적행위를 찬양·고무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문구가 힌트가 되었던 것일까. 졸속으로 개정된 이 조항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진행된 입법을 되돌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제 이동환 목사는 〈교리와장정〉 제3조 8항을 적용하여 출교라는 최고형을 받은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문화연구자 엄기호는 이 상황을 보며 보안법 시대의 도래를 읽어내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행태가 기본적으로 인권에 반하는 이유는 ‘나를 지키기 위해 안보에 위협이 되는 너를 없애겠다’는 공포정치의 실행이기 때문이다.4) 감리회의 행태는 한 교단의 문제이기보다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보수 개신교의 행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감리회 외에도 동성애를 향한 입장을 교단법상으로 규제하려는 시도가 계속 행해지고 있었다. ‘이동환 출교’라는 최초의 사례가 선례가 되어 이후 제2·제3의 이동환이 나올 것이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차별적 교단법들의 폐기가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이다.

필자는 성서학자로서 성서 읽기가 성소수자들에게 차별적인 한국 개신교단들의 입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해왔다. 여러 선배 신학자가 ‘공포의 본문’(text of terror)이라 불리는 동성애 혐오적 구절들을 진지하게 논의했기에 선행 연구들을 소개하려고 나름 애써왔다. 그런데 이동환 출교 사태를 보면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정죄할 때 ‘칼’처럼 휘두르는 본문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나와 다른 이들을 포용하고 수용할 때 무엇을 또는 누구를 모범으로 삼을지, 그 ‘모델의 부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과 다른 입장에서 다른 실천을 하는 신앙인들을 상대적일 뿐인 자기 입장으로 규제하려는 이 불관용적 태도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 문제는 이동환을 출교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인들로서 예수의 정신과 실천을 되새기며 그를 따르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복음서를 전공한 신약성서학자로서 필자는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예수 이야기를 자주 떠올렸다. Q자료라 불리는 마태와 누가의 공통 전승에 따르면,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받았다(마 11:19; 눅 7:34). 또한 마가복음과 병행 본문은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가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가 자기 실천을 변호하는 논리를 폈다는 점이다. 필자는 ‘논쟁 대화’라 불리는 후자의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실천과 자기변호에 비추어 이동환 목사 출교라는 현 상황을 성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이 글은 성서 본문과 오늘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 사이의 ‘대화적’(dialogical) 읽기라 할 수 있다.

‘논쟁 대화’를 통해 본 예수의 실천과 자기방어

예수의 조건 없는 초대

마가복음 2:13-17과 병행 본문들은(마 9:9-13; 눅 5:27-32) 예수가 특정 집단에 ‘죄인’이라 불리던 이들을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일원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최초 버전인 마가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처음부터 혼자만의 활동이 아니었다. 예수는 시작부터 갈릴리 네 어부를 제자로 부르고(1:16-20) ‘세관에 앉아’ 세리 일을 하던 이도 ‘나를 따르라’고 불렀다(2:14). 부름받은 ‘세리’의 집에서 예수가 함께 식사하는데,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집주인 레위가 세리였다 보니 동료 세리도 많았고, 그 밖에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도 많이 동석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를 알려면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세리’라고 하면 우리는 월급 받는 세무공무원을 생각하기 쉽지만, 1세기 로마제국 치하 팔레스타인의 세금 구조는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예수와 제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에서 세금은 갈릴리의 왕 헤롯 안티파스에게 갔다. 안티파스는 이 세금 가운데 일정액을 로마 황제에게 바친 후 남는 것으로 자기 왕국을 유지했다. 최고위직인 안티파스는 최고액을 가져오겠다고 입찰하는 자를 총책임자로 임명하면 그만이었다. 임명된 사람은 입찰 과정을 통해 또 몇 사람을 책임자로 두고, 그들도 또 자기 밑에 여러 세리를 고용하는 식이었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면, 여러 단계의 외주 하청 시스템이었다. 안티파스와 상대하는 고위직 세리도 있었지만, 중간 관리자급 세리장들도 있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민들을 직접 만나 세금을 걷고 장부를 기록해야 하는 말단 세리까지, 같은 세리라 해도 계층이 다양했다.

레위는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주민들을 상대해야 했던 말단 세리였을 것이다. 주민들에게는 말단 세리들이 로마제국이나 이를 갈릴리 땅에서 대변하는 헤롯 안티파스, 또 그들과 결탁한 엘리트들이나 지지층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만만한 출구였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세금이 흘러가는 곳은 헤롯 안티파스의 궁전이겠으나, 그곳에 좌정한 임금님은 욕을 퍼붓고 싶어도 너무 높이 계셨다. 주민들로서는 당장 얼굴을 마주하고 내 주머니에서 동전을 털어가는 최하급 세리를 원망하기 쉬웠을 것이다. 세리 입장에서는 생계 수단인 것을 어쩌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주민들 입장에서는 제국과 토착 권력에 빌붙어 동포를 착취한다는 정치적 거부감도 있었을 것이다.

이 착취 구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세리들에게는 이스라엘의 계약 신앙에 근거해서 백성들이 준수하는 율법을 위반한다는 종교적·도덕적 정죄도 따를 수 있었다. 세금 하청 구조 때문에 상납 후 남아야 각자의 생계도 도모할 수 있다 보니, 적절한 금액보다 더 걷을 때도 있었고, 십계명이 금한 ‘이웃의 것을 탐내는’ 착복이나 수탈도 할 수 있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삭개오는 말단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이었는데, 예수를 만난 후 그가 착복한 것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한다(눅 19:8). 이처럼 당시 세리들은 여러 이유에서 정치적·종교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대표 집단이었다. 특히 종교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때 그들을‘죄인들’로 통칭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그런 세리 중 하나를 예수가 제자로 불렀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었다. 앞서 네 제자를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나를 따르라’, 권위 있는 부름만 있었다. 이 부름은 자기 집을 열어 예수의 무리를 초대하는 레위의 호응으로 이어진다. 예수와 한 세리의 만남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의 연결로도 이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고대 근동에서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깊은 수용과 사회적 연대의 표현이었다. 예수에게는 자신의 이 실천이, 사회적으로 ‘죄인들’로 불리는 이들을 조건 없이 ‘따르도록’ 초대하고, 그들과 함께 머물며 먹는 연대와 환대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초대했고, 그에 응답해서 만남들이 이어질 때 이 모든 과정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확장이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질문

그런데 예수의 이런 무조건적 초대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함께 먹는 현장에서 질문을 던진다. 질문자들로 언급된 바리새인들은 율법, 그중에서도 정결법이나 안식일 규정 등을 철저히 지키기로 유명했다. 그 점에서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구별된 자의식을 가진 집단이었다. 공관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에게 적대적 집단 중 하나로 바리새파에 주목하기에 전반적으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예수 시대 바리새파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라기보다는 각 복음서 관점이 반영된 서술인데, 마가복음 2:13-17을 시작으로 예수의 실천에 질문을 가장해 계속 비난하던 그들이 곧이어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고 묘사된 점이 눈에 띈다(3:6).

그러나 이처럼 뒤에서 확인되는 노골적 적대를 근거로 바리새파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이들이 강력한 단죄의 어조로 질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아픈 이들을 치유하고 귀신 들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지도자로서 예수가 가진 영향력을 의식하고 일정 부분 인정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자들을 향해서 스승의 행태를 가리켜 질문했을 때 그저 순수하게 행동의 동기를 알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질문은 겉으로는 중립적이나 적어도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를 향한 의구심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속뜻은 “소위 백성들의 지도자면서 어떻게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세리 같은 죄인들과도 아무렇지 않게 어울릴 수 있는가?”였을 것이다.

왜 바리새인들은 ‘죄인들’로 간주되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함께 먹는 것을 경계했을까? 이동환 목사가 출교된 지금의 상황과 겹쳐보기 위해 동성애자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오늘날의 개신교 혐오 세력과 그들을 바로 등치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온건하게 그들이 보기에 동성애 같은 ‘일탈된’ 성적 실천이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의 의로움(또는 의롭고자 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경계하는 수준에서 잠시 비교해보자. 기독교인들이 애호하는 시편 1편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새번역)라고 하지 않던가? 주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을 경계하겠다는데 무엇이 나쁜가?

우리에게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사자성어를 예로 들어보자. “검은 것과 어울리다 너도 검어진다”라는 경고는 언뜻 보면 좋은 친구 만나라는 덕담으로 들리지만 따져 보면 불평등한 시선이 느껴진다. 부모들 입장에서 자기 자식은 언제나 검은색에 물드는 하얀색이고, 남의 자식은 자기 자식을 물들이는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근원적인 자기모순이 있다. 자신은 타인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 취약한 존재로 여기며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지만, 타인은 한 번 죄인이면 영원한 악인으로 낙인찍으며 변화 불가능한 자들로 고정하기에 불균형한 시선이다. 타인도 나와 같이 취약한 존재라면 ‘희디흰’ 나도 그에게 영향을 주고, 희고 싶은 나의 지향이 그에게 침투할 수 없을까? 아니, 사실은 흰 줄 알았던 내가 검고, 죄인으로 보이던 그의 속이 하얗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 속도 모르고 ‘검다’ 비난받으며 살다 보니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진 않을까? 거기에는 이와 비슷한 상호주체적인 성찰이 들어갈 틈이 없다. 아무리 중립적 질문의 형태를 띠어도 이처럼 바리새파의 자기 이해와 타자 인식에는 근본적인 불평등이 있다.

예수의 자기변호와 역할 규정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받고 예수가 한 답변은 단 두 문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관점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확인한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도덕적·종교적 흠결이 있는 사람들과 당연히 거리를 두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온전함을 지키려 한다. 자신들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해서, 그들에 의해 ‘죄인들’로 규정되는 사람들이 양산되는 데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바리새인들의 지도력은 ‘죄인들’을 수용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들과 ‘분리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시선은 어떠한가? 예수도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 가운데 율법이 금하는 죄, 도둑질을 저지르는 자들이 일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세리’로 일하는 한 사람을 그들이 속한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에 근거해서 판단하지 않는다. ‘세리’인 사람들이 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다른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성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는 예수의 진술이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의로운 자’에 해당되는 ‘건강한 자’가 따로 있고, ‘죄인’ ‘악인’에 해당되는 ‘병든 사람’이 따로 있는가? 우리는 모두 똑같이 언젠가는 아프고 병에 걸리는 환자이거나 잠재적 환자이다. 우리는 하나님 뜻을 따르며 선한 삶을 살고 싶지만 그 지향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 또는 잠재적 ‘죄인’이다. 기독교의 원죄 교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우리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나 살아지지 않는 이 근본적 소외의 지점을 서술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는 자기 자신도 ‘선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단언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와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더해야 하는지 물었던 적이 있다. 질문한 이는 이제껏 얼마나 율법에 명령된 것들을 잘 지키며 살아왔는지도 밝혔다. 그런 그를 향해 예수는 ‘선하다’는 칭찬을 물리치며,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재산을 다 팔아 그들에게 줄 수 없는 한, 당신은 충분한 의로움을 자신할 수 없으며, 적어도 ‘부족한 한 가지는 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막 10:17-22). 내가 지키는 율법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찾아라. 그것도 타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으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처럼 근원적인 평등의 감각, 나아가 자신을 먼저 성찰하는 삶의 태도에 근거해 예수는 이제 자신의 역할을 정의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먼저 예수가 ‘의인’과 ‘죄인’을 언급하는 것은 바리새파 관점을 그대로 수용해서가 아니라는 데 유의하자. ‘의인’과 ‘죄인’을 규정하는 바리새파의 ‘당파적’ 정의에 도전하고자 의도적으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인용이다. 누가복음 18:9-14의 비유를 참조하면, 이런저런 악은 행하지 않고, 이런저런 ‘의’는 행한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이 최후에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다. 마가복음 2:17의 ‘의인’ 역시 ‘자칭 의인이라고 하나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기껏해야 반어적인 진술이다.

‘죄인’이라는 말 역시 예수는 “당신들이 ‘죄인’이라 해도 나는 동의하지 않으니 전혀 개의치 않고 기꺼이 초대하겠다”는 뜻에서 강조해서 쓴다. 결국 이것은 예수의 자기 역할 규정으로 귀결된다. “당신들은 대체 왜 ‘죄인’들과 어울리냐고 묻지만, 나는 당신들이 ‘죄인’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죄인’들인 바로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기에 그들을 초대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더 중요한 점은 사회에서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공평한 시선이 결국 그들을 향한 편향적 옹호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도(not only … but also) 부른다’가 아니라 ‘의인 아니라 죄인을(not … but) 부른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여기서 “예수는 무슨 보편애나 박애주의를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눌린 자, 박해받는 자, 약자의 편에 선다.”5)

여기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예수의 초청은 먼저 회개하고 잘못된 삶을 청산하라고 요구하는, 조건부가 아니다. 물론 누가복음 버전에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라는 편집 구절이 있는 것은 맞다(5:32). 이 편집구는 이 전통의 최초 버전인 마가복음의 예수가 얼마나 급진적인 초대를 했는지를 역으로 부각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기본적으로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과 수용을 전제한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예수에게서 무조건적 부름을 받고 예수의 길을 함께 걷게 된 세리 레위, 세리장 삭개오, 그 밖의 많은 ‘죄인’이라 불리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예수의 실천과 답변이 이동환을 지지한다

이상에서 세리, 죄인과 함께 어울리고 먹는 예수를 이상히 여긴 한 집단이 질문했을 때, 예수가 자신의 실천을 옹호했다고 기억하는 복음서 전승을 살펴보았다. 물론 오늘날 성소수자를 기독교 신앙으로 환대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출발해 이동환 목사가 출교에 이르게 된 현 상황을 세리, 죄인과 함께한 예수가 비난받은 상황과 완전히 겹쳐 읽기란 가능하지 않다. 당대의 세리가 유대교 신앙 안에서 ‘죄인들’로 여겨지는 맥락과 오늘날 한국의 보수 교단이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는 것 사이에 당연히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동성애는 타고난 성향이든 선택과 취향에 의해서든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할 성적 지향이다. 우리나라 헌법이나 법률에도 동성애는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성서의 단 몇 구절이 동성 성행위에 반대한다고 해석되지만, 그것은 오늘날 ‘성적 지향으로서 동성애’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번 출교 사태를 보면서 과연 동성애가 죄인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바리새파가 죄와 관련해 사유하는 방식 자체에 주목해서 오늘날 동성애를 혐오하는 기독교 세력의 행태와 그들의 기본 전제를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핵심은 예수가 ‘세리’라는 직종이 죄를 저지를 잠재성에 근거해서 ‘세리’인 한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동환 목사가 자신에게 커밍아웃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성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마주한 것이 예수가 세리인 한 사람 레위, 또 다른 세리를 만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아가 바리새파의 의구심을 만난 순간에도 예수의 무조건적 환대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역설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박경미 교수는 이처럼 바리새파가 대변하는 ‘당파적’, 즉 ‘상대적’ 윤리의식에 편승하지 않는 예수의 실천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소수자를 환대해야 하는 근거라고 말한다.

예수는 … 법에 의해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이웃으로 받아들였다. … 예수는 기존 사회의 법과 통념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도덕적 우월감에 편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윤리의식이 지닌 상대성과 한계를 드러냈고, 법과 윤리가 근거해야 할 근원적 토대로서 하느님의 급진적인 사랑을 제시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말하자면, 아마도 그처럼 법과 통념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성소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소수자는 예수가 제시한 하느님의 급진적 사랑의 일차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6)

그렇다면 이동환을 정죄한 교단 지도자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정신과 실천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가 바리새파라는 특정 집단이 ‘죄인들’로 여기는 세리를 조건 없이 초대하고 그들과 친구가 된 것처럼, 동성애를 죄라고 여기는 교단법을 모르지 않았지만 성소수자들(퀴어)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환대하고 축복한 이동환 목사가 예수를 진정으로 따른 것이다.

반면, 이번 재판에서 경기연회나 총회 지도자들이 보여준 죄 인식은 처음부터 위선적이었다. 산상설교에서도 예수가 강조했듯 남의 눈의 티가 아니라 자기 눈에 들보를 살피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기본자세이다(마 7:3-5).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 행하지 않을 행위에만 ‘죄’라는 규정을 붙이고 가뜩이나 소수자여서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죄인이라는 딱지를 다시 붙이고 있다. 김근주 교수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의 유사한 상황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 대목이 떠오른다.

목사들이 ‘앞으로 내가 동성애를 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을 향해 존재 자체가 죄라고 소리치는 거다. 예장통합 총회가 명성교회 세습을 눈감아 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들도 세습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김삼환 목사에게는 (총회 석상에서) 말할 기회를 줬다. 반면, 성소수자를 향해 따뜻한 마음을 보여 줬던 신학생들은 결국 목사 고시에서 탈락했다. 자기가 안 할 것 같은 일에는 순교할 각오로 핏대를 세우며 반대하고, 자기가 할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은 방조했다. 추악한 모습이다.7)

자신이 교단의 교권주의적 행태에 상처받는 피해자임에도 재판 과정에서 상처받았을 성소수자들을 위로하며 대신 용서를 구하는 이동환 목사의 모습은 이런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이번 재판에서 가장 속상했던 건 ‘출교’라는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성소수자’라는 존재가 그저 단어로서 사용된 것이 내내 마음에 아프게 남습니다. 성소수자라고 뭉뚱그려지지만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 누구도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이 재판 내내 계속해서 대상화되고, 부정적으로 호출되며, 온갖 오해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분들에게 마음 깊이 위로를 전하고 또한 용서를 구합니다.8)

이처럼 상처받는 소수자들을 향한 그의 정직한 관심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교단의 몰이해와 차별이 상상 이상이라는 점을 직시하게 했다. 감리회를 비롯한 개신교 보수집단에 의해 ‘죄인’들로 정죄당하며 상처받고 모욕당하는 이들을 향한 그의 올곧은 관심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선언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한’ ‘앨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동했다. 사회에서 차별받고 혐오를 당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편파적으로 편드시고 사랑하시는 존재임을 선포하는 자리로 결국 한 걸음 더 내딛게 된 셈이다.

감리회의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며

이동환 목사라고 성소수자를 환대하는 일이 처음부터 당연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 좌담에서 이동환 목사는 자신도 ‘동성애는 지옥에 갈 죄’라는 식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그러한 편견이 깨지게 된 것은 동성애자들을 직접 만나면서부터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나와 다르지 않고 똑같다”고 느끼는 데 어떤 극적인 사건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저 열린 마음과 일상적인 만남”만으로 충분했다고 덧붙였다.9)

스스로가 이 같은 관점과 인식의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동환 목사는 자신의 실천을 이상하게 여기고 기소한 이들이라 해도 재판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며 대화해간다면 성찰과 상호 이해의 가능성이 있다고 일관되게 기대한다. “처음 고발당하고 심사받으며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말 걸기였다. 무조건 내 의견만 말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찬반을 논의해보고 어떻게 접근할지 고민하자는 의도였다.” 그들이 요구한 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각서였지만 자기 생각을 편지로 적어 보내고, 동성애에 대한 찬성, 반대, 중립 등 여러 의견을 정리해 50장 분량 보고서를 낸 것도 그래서였다.10)

하지만 이동환 목사를 기소하고 재판한 경기연회나 총회의 구성원들에게는 경청하는 자세가 없었고,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 바리새파보다 더 완고했다. 기대한 대화나 토론이 이루어지기는커녕, 끝까지 ‘찬성이냐 반대냐’만 확인하며 교단법으로 굴복시키고 싶어 했다. 아니, 처음부터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 답을 정해놓고 이견을 제기하는 구성원을 처벌하려 드니 돌아보면 어긋난 기대였는지 모른다.

그들은 교단 구성원들 간의 서로 다른 생각들을 허용하지 않고 무조건 검열하고 처벌하면서 그것이 차별도 혐오도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필자는 이동환 목사가 겪은 것이 전형적인 ‘집단 괴롭힘’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성애라는 죄는 밉지만, 동성애자는 사랑한다’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허울 좋은 말들로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이 차별인지 아닌지 성찰하지 않고, 차별한다는 비난을 돌아보지 않고 무시와 방어로 일관하니 드러나는 것마다 위선일 수밖에 없다.

같은 교단 구성원인 이동환 목사의 호소도 경청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만나지도 못한 동성애자들을 사랑할까. 기껏해야 다수자로서 이성애자인 상대적 자기 위치도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당신들과 다른 성소수자들을 사랑하겠는가?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성육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피상적인 것을 ‘사랑’이라고 들이밀 수 있는가? 당신들은 자기들이 하는 이성‘애’만 알고 동성‘애’가 사랑이라고 상상조차 못 하지 않는가?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터울의 날카로운 지적을 읽어보자.

1) 이성애자는 종종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 속에 동성애자의 지분을 갖고 있지 않다.

2) 그들의 사랑은 이성애적 문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외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3) 이렇게 머릿속으로 아예 상상할 수 없는 성소수자의 지분은, 곧 현실 속 성소수자에 대한 실질적인 배제로 이어진다. 과거 많은 백인들이 그들이 생각한 사람의 범주 속에 흑인의 존재를 상상하지 못했듯이.11)

이동환 목사 항소심 증인으로 출석한 영광제일교회 교인은 “동성애가 무엇인지 아느냐”는 원고 측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네. 저도 사랑을 하니까요.”12) 과연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할 이들은 교단 지도자들인 것 같다.

교단 지도자들의 이러한 무지를 짚어보고 있자면 상황은 절망적이기만 한데, 이동환 목사는 기자회견에서 복직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성소수자 환대 목회에 앞서 노동 투쟁에 착실히 연대했던 그인 만큼, 돌아가신 변선환 교수님과 누가 먼저 복직하는지 경쟁하겠다며 결의를 보여주었다. 함께하는 연대인들을 도리어 위로했던 이 결의 뒷면에 어떤 절망과 좌절감이 있을지 필자는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가 있다. 그의 복직 투쟁이 그를 내쫓은 감리회를 향해 다시 한번 말 걸기를 하겠다는 절박한 다짐이라는 점이다. 당신을 내쫓은 교단인데 왜 또 고단한 싸움을 이어가려 하느냐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예수를 닮아가고 있다. 자신을 출교한 교단을 향해서 마지막 용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그 증거라 생각된다. 축복식을 진행했던 2019년부터 지금까지 이동환 목사는 교단이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 것이라 믿고 우직하게 대화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제 그들이 답할 차례이다. “왜 예수가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함께 먹었는가”라고 물었던 바리새파의 질문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스스로에게 던져 보길 바란다. 남아있는 재판 과정은 당신들이 행한 잘못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고 이동환을 출교시킨― 에서 돌이킬 수 있는 또 한 번의,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사회 재판에서 이동환 목사를 만나게 될 감리회 지도부에 간곡히 부탁드린다. 또 한 번 말 걸기에 나서는 이동환의 호소를 듣고 제발 돌이키시길 바란다! 

■ 주

1) 노랑조아(김은선), ‘목사는 퀴어를 축복했을 뿐’, 〈한겨레21〉, 1432호(2022.10.10.)
2) 기존에 “음주·흡연, 마약법 위반과 도박 등을 하였을 때”라고 되어있던 데에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추가하여 개정한 것이다(2015-2016년).
3) 2024년 3월 12일 창비 서교빌딩에서 열린 긴급 좌담회 ‘법정에 간 성소수자 환대 목회,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재판 보고회를 진행한 신하나 변호사 발언 중.
4) 임지영, ‘성소수자 축복을 이유로 재판받는 목사님’(엄기호·이동환), 〈시사IN〉, 669호(2020.7.14.)
5) 안병무, ‘예수와 민중: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김진호·김영석(편저), 《21세기 민중신학》(삼인, 2013), 106쪽.
6) 박경미,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한티재, 2020), 356-357쪽.
7) 이용필, “나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지 않겠다”…반동성애에 목숨 건 한국교회, ‘존재에 대한 앎’ 없어, 〈뉴스앤조이〉(2019.10.14.)
8) 3월 4일 출교가 확정된 직후 이동환 목사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한 내용 중.
9) 이동환·이은혜·임보라·자캐오·정경일·정혜진, ‘차별금지법 앞에 선 한국 개신교’, 〈뉴스앤조이〉(2020.10.8.)
10) ‘성소수자 축복을 이유로 재판받는 목사님’, 〈시사IN〉, 669호(2020.7.14.)
11) 터울, 《사랑의 조건을 묻다》(숨쉬는책공장, 2015), 40쪽.
12) 긴급 좌담회 ‘법정에 간 성소수자 환대 목회, 어떻게 볼 것인가’ 중에서.


정혜진
신약성서학자로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기독여민회 연구위원장, 한국퀴어신학아카데미 대외협력위원장, 차별과혐오없는평등세상을바라는그리스도인네트워크(평등세상)의 연구분과장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