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 ‘사이’에서
[404호 사회선교 더하기]
선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명확하게 구분 가능한가? 20대에 종종 들었던 표현 중 하나가 ‘박쥐 인간’이었다. 영어로는 ‘배트맨’이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었다. 자기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늘 고민만 하는 인간, 양다리를 걸치는 인간이란 뜻에서 박쥐 인간이었고, 이를 전문용어로 ‘회색분자’라고 부른다. 회색분자를 영어로 ‘Fence Sitter’라고 한다. 직역하면 ‘울타리에 걸터앉아있는 사람’, 어느 편에 서지 못하고 중립을 지키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악을 구별하는 일이 어려웠고, 선악에 분명한 선을 긋는 일을 난감해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새찬송가 586장). 그 무렵 자주 흥얼거렸던 찬송가였다. ‘참과 거짓 싸울 때 어느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해 답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결국 참, 옳음, 정의에 서야 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택해야 할 자리매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고민했던 지점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가 아니었다. 빛과 어둠이 뒤섞여있고, 선과 악이 중첩된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 나를 박쥐 인간으로 만들었고, 울타리에 걸터앉은 채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망설이다가 양측으로부터 회색분자라는 말을 듣게 했다.
이데올로기 시대는 오늘날보다 선악의 기준, 피아 식별이 명확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최인훈의 《광장》 속 ‘이명준’과 같은 이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을 당했다. 이데올로기 시대가 지났다는 지금은 선악 간에 선 긋기가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졌다. 사회주의는 다 나쁘고, 민주주의는 다 옳은가?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참인가, 거짓인가?
그 시절에는 교회 밖은 다 위험했고, 세속적인 일은 모두 부정했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집, 교회, 학교가 보수 그리스도인의 세계였다. 교회에서 철학·사회학을 포함한 인문학 서적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부 ‘희극’과 같은 금서였다. 따라서 인문학책에 접근하는 일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읽는 순간 영혼이 죽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청년부 성경공부 때 공과 답을 ‘공동번역’으로 썼다고 담임목사에게 혼나기도 했다. 공동번역은 위험한 책이라나 뭐라나….
성서대전 활동을 하면서 목사가 왜 그렇게 세상일에 관심이 많냐는 비난 섞인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대학교 청소노동자가 집단 부당 해고를 당했던 일이 있었다. 성서대전에서 그분들을 응원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누군가 그 대학 총장도 교회 장로라고 말했다. 교회 장로가 총장이고, 해고된 청소노동자 중 누군가는 서리집사라면, 누가 옳고,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 대형 병원 노조에서 파업을 진행했고, 파업이 길어지자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컵라면 수십 박스를 들고 찾아가 격려한 적이 있었다. 주변에서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원 파업을 하면 환자들은 어쩌라고. 그게 올바른 행동이냐?”
무엇이 옳은 선택일까? 위와 같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 성서대전 실행위원들과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로는 목에 핏대를 세우거나 감정이 살짝 상하는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은 많지 않다. 심각한 사안을 놓고 함께 대화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선명하게 하고, 최선의 입장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성서대전 실행위원들은 말 그대로 벗이고 동지다. 깊이 있는 사람이다.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문학동네)에서 인간 이해의 깊이를 갖고 있는 자를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바로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는 옳은가? 권력자와 부자는 악하단 말인가? 이런 논리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참여에 방해와 걸림돌이 된다. 성서대전은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가 항상 옳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연대하고, 그들과 함께 ‘고함기도회’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약자이기 때문이고, 도움의 손길,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사 25:4)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는 사회적 약자를 대표한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자기 정체성을 사회적 약자의 아버지라고 밝히셨다. 그들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힘 있는 사람들보다 공정한 재판을 필요로 하며, 그들을 위한 울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에는 배운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들만 남아있다.” 이런 비판은 통렬하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에서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 같은 부류, 같은 색깔의 사람들만 남아 자기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게토’(ghetto)란 본래 소수 인종이나 소수민족, 소수 종교 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이 살았고, 유럽에서는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을 지칭했다. 한국교회는 게토가 되었다. 그런데 배운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집단으로서 게토가 되었다. 다양성을 밀어내고 획일성, 단일성이 지배하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제 교회에는 긍정성만이 넘쳐난다. 동질 집단에서는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1)
동질 집단에서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이 명확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있고, 빛과 어둠의 중간 지대가 펼쳐져있다. 중간 지대는 그늘이다. 회색지대라 할 수도 있겠다. 그늘은 참과 거짓 중 어느 것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늘은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지쳤거나 밀려난 사람들이 잠시나마 쉴 수 있는 피난처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 17:8). 시편 기자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야훼 하나님의 그늘을 간절하게 찾았다. 야곱이 파라오 앞에 섰을 때 “정말 고달픈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현대인의성경)라고 고백했다. 에서에게 쫓기고, 라반으로부터 도망치고, 세겜 땅에서 전전긍긍하고, 아들을 잃고(잃었다고 확신), 고향 땅을 떠나 이집트까지 떠밀려 내려온 야곱의 인생 궤적은 한마디로 ‘고달픈 세월’의 삶이었고, 사회적 약자의 전형이었다. 그런 야곱과 같은 사람이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겁습니다”(시 63:7, 공동번역)라고 고백한다.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장미의 이름》의 첫 문장이다. 이 책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도 나온다.
진리라고 해서 모든 것에 다 유익한 것은 아니고, 허위라고 해서 모든 눈에 다 거슬리는 것은 아닙니다.(73쪽)
선악에 대한 명확한 구별 짓기가 가능해서 사회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모호하고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명확한 것은 사회적 약자, 고통받는 타자, 이웃이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찾아가는 것이다. 타자를 밀어내고 동질화하는 긍정성이 충만한 현실 속에서, 강도 만난 이웃에게 손바닥만 한 그늘 ―빛과 어둠의 중간 지대― 이라도 되어주고자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것이다.
신형철은 고통의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에 가까이 있어 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2쪽) 아픔의 현장으로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가장 큰 이유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곧 성품이고, 능력이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새찬송가 586장)…. 이 찬송가를 빛과 어둠이 혼재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좋아한다. 전에는 빛과 어둠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빛과 어둠 ‘사이’에 있다. ‘사이’가 있기 때문에, 그늘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말한 것처럼, 괴물과 싸우다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또는 고통받는 이웃이 명확히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애매모호한 태도, 회색분자이자 박쥐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참여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깊이 있는 인간이 되고자 복음을 들고 산을 넘어가려 한다.
그곳은 “빛과 어둠이 왔다갔다하거나 공존하며 교체되는 공간 … 하늘과 땅, 환상과 현실, 초자연과 자연, 너와 나, 다르면서도 어우러지는 그 사이 … ‘숨은 신’의 세상”2)이기 때문이다.
1) 한병철, 《타자의 추방》(문학과지성사), 7쪽.
2) 김응교, 《그늘: 문학과 숨은 신》(새물결플러스), 6-8쪽.
전남식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모토로 대전에서 목회하는 꿈이있는교회 목사이자 성서대전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