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겠다”
[404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아이다호(IDAHOBIT)는 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and Transphobia의 줄임말로, 매년 5월 17일에 기념하는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을 뜻한다. 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가 국제질병분류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것을 유래로 만들어졌다. 올해 5월 17일에는 무지개신학교, 한국예수교회연대, 환대와연대가 주최한 제2회 아이다호 기념예배가 열렸다. 예배에서 사용된 설교문(본문: 사도행전 2:1-8; 39-42)을 편집하여 싣는다.
태어난 곳을 떠나 체험한 다름
저는 한인 디아스포라입니다. 먼 옛날, 열네 살 되던 해에 네덜란드 국적의 배 ‘찌짜랭카’호를 타고 이민을 갔습니다. 부산항에서 우리를 태운 배는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인도양과 대서양을 건너 53일 만에 브라질에 닿았어요. 비행기로 하루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수 있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 항해가 얼마나 길고 지루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가 탄 배는 대양을 가로지르면서 오키나와, 홍콩, 다낭, 싱가포르, 자카르타 등에 이틀이나 사흘 정박하면서 다음 항구로 가곤 했기에 너무도 흥미진진했어요. 며칠마다 우리가 전혀 보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졌지요. 그곳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우리와 생김새가 달랐고, 입고 있는 옷이 달랐고, 먹는 음식이 달랐고,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습니다. 다른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어요. 토양이 달랐고, 그 땅의 초목들도 달랐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을 보았고, 이름 모를 열대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도 봤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남아프리카 어느 항구에 배가 닿았을 때 우리를 맞이한 건 해변을 뒤뚱뒤뚱 걷는 펭귄들이었습니다. 세계는 넓었고, 듣도 보도 못했던 다양한 생물들의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때 체험한 다양성은 눈에 보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즉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제한된 것이었지만, 진실로 신기했기에 매료되었습니다. 항해를 시작하면, 다음에 만날 세계를 향해 상상의 날개를 폈습니다. 차이는 멋진 것이었습니다. 우린 차이를 그냥 즐겼지요. 그 여행은 ‘다름’의 축제였습니다.
그런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항구도시 구경을 나갔을 때 ‘다름’과 ‘차이’가 항상 멋지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항구에 닻을 내리자 우리 가족은 평소처럼 시내로 나가 버스를 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이층버스가 나타난 거예요. 한 층에는 피부가 하얀 사람만 타고 있고, 다른 층에는 피부가 하얗지 않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어요. 우리는 어느 층으로 갔을까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유색인종’이 타고 있는 층으로 갔어요. 마치 컴퓨터에 프로그래밍이 된 것처럼. 물을 마시려고 할 때, 화장실에 가려고 할 때, 음료를 사려고 줄을 섰을 때, 이 경험은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유색인종이 사용하는 화장실에 갔고, 유색인종이 사용해야 하는 식수대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를 자발적인 행동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는 어떤가요? ‘너희는 여기에만 있으라’ 지정해놓은 자리가 있나요? 아니면, 그 자리마저 없나요? 써놓지 않았어도, 말하지 않아도 ‘너는 여기에 들어오면 안 돼. 네 자리는 없어’라는 무언의 규칙이 있지는 않나요?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봐라!’ ‘내 자리가 없다면 내가 만들겠다!’ 외치며 금지된 곳으로 들어간 적이 있나요?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해 민권운동을 하시다가 39세에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우리가 ‘난동’이라고 부르는 ‘riot’를 “아무리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언어”라고 말했습니다.
남아공에서 차이를 근거로 한 사회구조적 차별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했지만, 이 기억이 제 몸에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아이라서 그랬는지, 그때는 혼란스러웠지만 이 경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브라질에 닿으면 나의 ‘다름’으로 인해 고생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험을 쳐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다는 중학교에 들어갔던 열네 살의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반에서 여섯 살도 안 된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공부라 해봤자 연필로 줄 긋는 것, 동그라미를 그리는 일이었어요. 제가 왜 그런 굴욕적인 경험을 해야 했을까요? 브라질의 규범 언어는 포르투갈어인데 저는 포르투갈어를 하나도 모르니, 브라질 사회구조 안에서는 사회적 생명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타인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규범을 따라가려고 죽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2년 8개월이 지나 포르투갈어를 좀 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 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말을 못 하는 사회적 타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자신의 다름으로 인해 타자화되는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차이가 문제 되지 않은 오순절 사건
이렇듯 저는 제가 사는 고장의 말을 못해서 계속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하며 살아야 했는데요. 이런 저에게,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성서에 나오는 가장 기쁜 소식으로 들렸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브라질에서 살 때는 “아, 내 입에서 포르투갈어 방언이 터져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한숨짓고, 미국으로 가서는 “아, 영어 방언이 터지는 기적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탄식했죠.
오늘 우리가 읽은 오순절 사건은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두 그룹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이 두 그룹에 속한 누구도 제가 겪었던 차별과 불통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올 능력을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수의 제자들인 한 그룹은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사람들”이란 “촌락사람들, 로마주도의 도시화에 동화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답니다.1) 다른 그룹은 조상이 유대인이지만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언어를 쓰며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역이민해서 온, 즉 세계화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태어나 살던 고장의 언어로 전하는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데, 자기네들이 알아듣는 말로 담대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이들이 갈릴리의 촌사람들이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성공회 신부인 에릭 로(Eric Law)는 이 오순절 사건을 “말하는 혀의 기적”이자 “듣는 귀의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다름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되어 소통한 이 사건은 과연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두 그룹 사이에는 다름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요. 두 그룹 모두 타자로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디아스포라는 물론 다른 고장에서 오랫동안 타자로 살았던 경험이요. 갈릴리 사람들의 다름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완전히 타자화되어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니, 그들이야말로 지금 자신들의 다름으로 인해 유대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타자로 살아본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말을 귀가 아닌 마음으로 알아들어요. 아시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모두 다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하고, 알아들어요. 한국처럼 나이, 성별, 지위 등으로 아주 세밀하게 계층화된 피라미드 사회에서 한 가지 언어만 해도 되는 사람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뿐이죠. 여기에 모인 우리는 아마도 여러 언어에 통달한 사람들일 거예요. 안 그러면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한 가지 이상의 말을 하며 생존하는 사람들은 타자로서 산 경험이 있다는 말입니다.
훼방꾼 하나님과 육체
오순절 사건은 많은 사람의 입을 힘으로 틀어막아서 말하지 못하게 하고, 말해도 들어주지 않고, 위협적인 존재라면 죽여서 제거해버려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뒤집어놓은 사건이에요. 종교 세력도 완전히 정치화해서 자기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다양한 존재와 목소리를 견제하고, 부정하다며 죄인으로 규정하고, 사회에서 격리해 타자화하고, 예수님 같은 불편한 존재가 나타나면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제거해버리는 세상에, 하나님이 성령님을 보내셔서 훼방을 놓으신 거예요. 하나님은 훼방꾼이에요. 힘으로 제압해 다양성을 없애고 하나로 만들어 버리려는 세상의 프로젝트에 ‘아니오! 내가 사랑하는 세상은 절대로 그런 곳이 아니오!’ 하신 거예요.
능력을 입은 제자들은 예수에 대해 증언했어요. 그런데 육체를 입고 이 땅을 살다 가신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죠? 유대교는 육체를 존중하는 종교예요. 〈엔틀〉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 사실을 배울 수 있었죠. ‘엔틀’은 영화 속 주인공 유대인 여자의 이름이에요. 유대인 남자처럼 토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엔틀은 남장을 하고 예시바(유대교 전통 교육기관)에 들어가 한동안 아주 열성적인 남학생으로 살아요.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다스라는 여자와 결혼까지 하게 돼요. 하다스는 안식일이 시작하는 어느 금요일 밤 자기와의 성관계를 계속 피하는 엔틀에게, “신이 안식일에는 특별한 은총을 내리신대요”라고 말하면서 엔틀을 침대로 이끌어요. 이 장면을 볼 때까지 나는 한 번도 성(sex)과 하나님을 연결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러한 유대교가 뿌리인 기독교, 말씀이 육신이 됐다고 설파하는 종교인 기독교는 육체를 혐오하는 종교가 되어버렸어요. 마치 육체와는 별개인 영적 존재인 것처럼 살아가라고 해요. 육체적인 차이를 아예 무시해 버리거나, 차등을 두거나, 없애버리려 해요. 사도행전을 보면, 제일 먼저 이방인으로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에티오피아 내시였답니다(행 8:26-40). 내시는 전통적인 사회가 규정한 성별로 말하자면 여자도 남자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죠. 그야말로 ‘퀴어’한 사람이에요.
신명기를 보면 내시는 이스라엘의 예배 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고 했어요(신 23:1).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에게 예수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들은 내시가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라며 묻죠. 빌립은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고, 내시는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라고 적혀있어요. 오순절 사건 기적의 핵심은 이런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에 있어요.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체, 퀴어한 에티오피아 내시도 당당하게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가 생긴 거예요.
예수를 모른다 말하고 도망갔던 사도 베드로가 능력을 받아 담대하게 설교를 전하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오순절 사건 바로 다음에 나와요. 이때 베드로는 예언자 요엘(욜 2:28-32)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오순절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증언했어요. 그 약속이 무엇이었나요? 마지막 날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라는 약속이에요. 그런데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sarka’, 우리말로 ‘육체’예요. 즉, 마지막 날에 “내가 모든 육체(sarka—flesh)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따라서 토마스 보해치(Thomas Bohache)는 ‘퀴어하게 된 오순절’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일정한 육체, 곧 이성애자 육체 … 독신자 육체, ‘점잖고’ 용납되는 육체만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육체라고 말씀하신다.”2)
다름이 자산이 되는 믿음 공동체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우리가 “수실이 서로 엮어져서 운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옷감 일부분이 된 것 같이 상호 관계의 그물망에 걸린 공동 운명체”이며, 더불어 “한 곳의 불의는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어요. 우리의 다름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우리의 다름이 우리 공동체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거지요. 미국 교회에서 우리끼리 하는 농담이 있어요. “만약 게이들이 모두 주일에 일을 안 하고 시위를 하면, 교회에 꽃장식이 없을 거고, 오르간 연주자들이 없어서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할 거다.” 아름다운 꽃과 가슴을 울리는 음악이 사라진 예배를 통해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를 즐기기는 어렵겠죠? 우리의 다름은 우리 공동체의 자산이에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그래서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찾아가 먹고 마시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셨다고 생각해요. 자산을 모으신 거죠. 공동체는 더 풍요로워졌을 거고요.
오순절 사건의 기적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제 설교를 마치겠어요. 저는 오순절 사건이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했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해졌다고 단정하지 않겠어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사회가 서로 이해하고 연결되어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나요? 만약 그렇다면 한반도가 70년 넘도록 분단돼있지 않겠지요?
한 50년 전까지만 해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은 밖에서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어요.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인권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았어요. 사회가 여자들이 있어야 할 공간이라고 규정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드러내고, 경찰과 의료진, 법관들을 교육하고, 법안을 만들어내는 일을 해낸 사람들은 가정 폭력 피해 당사자들과 그들을 믿어준 사람들이었어요. 가정 폭력을 근절하는 운동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한 일 중 하나가 가슴에 ‘We Believe You’(우리는 당신을 믿는다)라고 적힌 커다란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었어요. 그 배지는 ‘(사람들이) 당신이 여자라고 당신의 증언을 믿어주지 않는 걸 알아. 그런데 우린 당신을 믿어’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말하는 사람을 신뢰할 때만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고 진정한 연결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차별받는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장애물들을 없애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이,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해요.
한 달 전쯤에 성소수자 가족 모임에 갔어요. 제 옆에 한 어머니와 트랜스젠더 딸이 앉아 있었는데요. 그 두 사람이 너무 친밀해 보여서 다른 부모님들이 참 부럽다고 했어요. 그중 한 분이 딸에게 어떻게 어머니에게 커밍아웃할 수 있었냐고 물었는데, 딸은 “어머니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이라고 믿었어요”라고 답했어요. 딸의 믿음대로 어머니는 딸을 믿어줬고, 딸은 어머니의 사랑 어린 지원을 받으며 트랜지션(transition, 성별 재지정 과정)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믿는다’라는 말은 ‘사랑한다’ ‘신뢰한다’는 뜻이고, 기독교도 17세기까지만 해도 ‘믿는다’는 말이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답니다.3) 여기에 모인 서로 다른 육체를 가진 우리가 “한 곳의 불의는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서로를 믿고, 연결되어서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들이 될 것을 약속합시다. 우리의 다름은 우리의 공동체를 더 다채롭고 풍요롭게 할 것을 믿고, 갈릴리 제자들처럼 예수의 증인으로 자유인으로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1) 윤소정, ‘예수가 살았던 갈릴리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 리처드 A. 호슬리의 《갈릴리》’, 〈기독교사상〉 제590호(2008년 2월), 115쪽.
2) 토마스 보해치, ‘퀴어하게 된 오순절’, 《퀴어 성서 주석 2: 신약성서》(무지개신학연구소), 185쪽.
3) 마커스 보그, 김태현 옮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비아), 160-161쪽.
이은주
미국장로교회(PCUSA) 목사로서 총회 여성목회부에서 20년간 사역했으며, 2021년부터 한국에서 선교부 동아시아 리에종(Liaison)으로 일하고 있다. PCUSA 선교부와 한국, 북한, 홍콩의 파트너들, WCC 산하 한반도에큐메니칼포럼 등을 연결하고 협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1.5세이자 5대째 크리스천으로서, 스스로를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