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질문으로 성경 다시 읽기
[404호 비하인드 커버스토리] ‘박영식 교수 해임 사건’을 향한 한 평신도의 시선
어느 문자주의자
나는 경상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 작은 농촌 교회를 배경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신앙 환경에서 성장했다. 주변의 아는 교회가 전부 합동 교단이었을 정도다. 대학교 때까지도 교회는 모두 합동밖에 없는 줄 알고 살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호기심 많고 의심이 많았어야 할, 세상에 대한 도전과 질문이 가득해야 할 시기에 왜 그렇게 순진하고 멍청하게 살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학생 시절에는 크리스천 친구들이 다 하는 SFC, IVF, CCC 등의 선교단체를 학기 초 한 번씩 순회하듯 방문했다가 교회 ‘사역’이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선교단체가 조금 이상하다(?)는 이유로 더는 가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매우 보수적이고 고집스러운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이었다.
성경을 읽는 방식 역시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미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믿는다고 주장하는 문자주의, 저자나 장르에 대한 고려 없이 성경은 하나님이 한 번에 우리에게 계시로 내려주신 말씀이라고 이해했다. 그렇게 성경을 읽으니 재미가 없었고,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가 안 되니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성경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성경에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도 그저 모든 부분을 ‘믿음’으로 읽어야 하니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구약에서 이방인들과 가나안 민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읽으면서는 지금의 현실에서 하나님이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들은 심판받을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을 갖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성경을 읽어내는 문해력이 이 정도였으니,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매우 편협했다. 타인의 상황에, 아픔에,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감정이 메마른 신앙인이 되었다. 교회에서 들은 조언 대다수는 확신에 찬 정답들이었다. 그 누구도 ‘생각해보라’ ‘고민해보라’ ‘이런 책을 참고해보라’는 말이나 논리적인 설명을 해준 적이 없었다.
성경, 다시 읽다
성경을 읽는 관점이 바뀐 시점은 30대에 이르러서였다. 책이 나를 바꾸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은 모두가 인정하는 진리다. 하지만 나는 책이, 특히 성경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조금씩 바뀌었고, 여전히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대학원에 진학해 과학 분야를 공부하면서 보수적인 신앙관, 이를테면 창조과학을 진리로 알고 있던 나에게 과학과 신앙의 양립은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과학과 신앙의 엇물린 관계를 푸는 일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래서 먼저 같은 고민을 거친 크리스천 과학자들의 관점, 특히 창조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과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질문하는 자세가 생겼고, 그 질문의 대상이 신앙과 신학으로 확장된 게 아닐까?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성경을 읽는 문해력의 기초가 아닐까 싶다. 자기에게 적합한 책을 읽으려면 바르고 솔직한 질문을 해야 하고, 그 질문에 적합한 책들이나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나아가 내가 가진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 이야기를 듣고, 그 지점에서 또 묻고 대화하는 것이 순서다.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 여정을 짧게 예로 들자면, 새물결플러스 출판사에서 펴낸 창조·기원 관련 도서들을 시작으로, 서울대 우종학 교수님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 관장님의 강연 영상, 김영웅 박사님이 쓰신 책과 글 등을 보았다(이후 ‘바이블 클래스’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등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점차 답을 구했고, 결코 과학과 신학이 충돌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은 성경을 읽는 눈이 변화했다기보다는 스펙트럼이 넓어진 거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의 관점이 달라졌다고 그 지점만 고집하면서 지나온 길이나 다른 면을 배척한다면, 이전의 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전 나의 모습을 기억하면 슬퍼진다. 그저 기독교의 아주 작은, 좁은 부분만을 맛본 채 매우 빈궁한 상태로 너무 오랫동안 살았다는 후회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알아가며 배우는 중이다. 하늘나라 가기까지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씩 더 배워가는 재미가 있고, 말씀이 늘 새롭게 다가온다.
박영식 교수의 창조신학
이런 배경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박영식 교수의 해임 사건1)을 유심히 보게 된다. 나처럼 글을 써본 적도 없는 이공계 사람이 이렇게 무리하게 글을 쓰는 이유는 박영식 교수 해임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어떤 식으로든지 도움이 되어보겠다는 결심에서다.2)
나의 신학 공부 시작이 ‘창조’였기 때문에 최근 불거진 이 사건에 처음부터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 사역의 시작이 창조이기에 창조는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주제다. 나는 박영식 교수의 수업을 들을 수 없었기에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의 책을 사서 읽는 것이었다. 자세를 고쳐 잡고 책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읽고 또 읽어도 책 내용 어디에서도 그를 해임할 사유를, 잘못된 창조신학을 찾을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박영식 교수의 해임은 부당하고 그 사유가 매우 주관적이다. 학교 측은 그의 창조신학에 대해 유신진화론이 가지는 부정적 프레임을 씌워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창조론과 맞지 않다고 해석하면서 해임을 결정했다.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성결교단이 따르는 창조론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창조과학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창조론으로 분명히 정의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박영식 교수 해임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공부를 하지 않는 한국 개신교의 반지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단편적 사례다. 내가 과학과 진화론, 창조에 대해 호기심과 질문을 갖게 된 때를 기점으로 공부를 시작했듯이 조금이라도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다면, 다른 의견을 듣고자 마음을 조금만 연다면 (다른 의견은 결코 사탄의 계략이 아니다!) 충분히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 EBS 특별기획 〈당신의 문해력〉을 보았다. 디지털 시대에도 책을 읽어야 한다며 전두엽의 활성화 정도에 대한 실험 결과를 보여주었는데, 비슷한 내용을 보더라도 동영상이나 오디오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글을 통해 읽는 활동이 더 고차원적이고 능동적인 정보 처리 과정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반면, 글을 읽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뉴스를 식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결과도 보여주었다.
카카오톡에서 떠도는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더 크게 퍼트리는 데 일조하는 이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가짜뉴스가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전달하고 퍼트리는 풍토가 결국 글을 읽지 않는 반지성적인 태도의 연장선이 아닐까. 이는 하나님 말씀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씀을 새롭게 읽지 않고 자기 마음에 맞는 말씀만 자기식대로 이해하여 그 말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아주 위험한 태도다.
이런 모습은 자신들만을 진리라고 여기며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핍박했던 중세의 잘못된 크리스텐덤 양식들처럼, 본인들 생각만 진리로 고집한다는 점에서 창조과학 이론과 짝을 이룬다. 타자를 악마화하여 희생양을 찾고 내부를 결속하고 타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전형적인 근본주의 성서관이 창조과학과 맞물려 거세게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기시감, 김근주
나는 ‘김근주읽기’에 동참하고 있다. 그보다 전에 김근주 교수의 강의를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서 수강한 후 그의 다른 강의와 책들을 읽은 터였다. 당시의 큰 소득은 타자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구약성경을 통해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구원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조금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일산은혜교회가 합신 교단을 탈퇴하게 된 이야기를 기사로 접했다. 당시 제삼자인 내 시각에서는 김근주 교수는 약자였고, 이 사건은 권력이 있는 교단 측에서 일산은혜교회의 김근주 교수와 여성 목회자 한 분을 쫓아내려는(사임 권고) 폭력에서 시작된 일로 보였다.3)
놀라운 점은 일산은혜교회의 대응이었다. 내 시점에서는 교회 성도들이 두 분을 지키기 위해 (여기에는 내가 모르는 더 많고 큰 의미가 있다고 예상된다) 의견을 모아 교단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 일이 평소 김근주 교수가 강조하던 약자를 보호하는 구약의 말씀, 보잘것없는 권력을 휘두르며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항의, 정의가 실현되는 한 예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계속 주목하다가 ‘김근주읽기’에까지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근주읽기’가 박영식 교수의 책 ‘《창조의 신학》 함께 읽기’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박영식 교수께는 죄송하게도, 그의 강의를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떠올렸다.
박영식 교수 해임 사건은 신학교 교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창조과학 비판이, 교단 혹은 학교의 이익(집단의 이익)과 충돌하는 데서 빚어졌다. 결국은 권력의 이익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개인을 억압하는 형태인 셈이다. 집단 권력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억압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늘 되풀이되어온 폭력의 한 형태다.
내가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은 결국 내 이웃을 내 몸같이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이를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약자들이 세상의 정의와 자비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배웠다. 내가 쓰는 짧은 글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약자와 함께하고 정의를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은 안다.
내가 읽은 성경, 그리고 당부
넓은 의미로 (양보하여) 창조과학이 ‘하나의 창조 가설’이라고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만을 진리로 내세우고 다른 주장들을 이단화하는 태도는 매우 독선적인 것이다. 우리는 독선적인 집단 권력이 한 사람을 공격하고 억압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이것은 내가 기대하고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평신도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결국 이 모습 그대로 굳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유사한 일이 더 많은 사람에게 벌어지는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가 읽어낸 성경은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와 자비를 전하라고 끊임없이 독촉한다. 나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종하고 행동하고 싶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교수님’ ‘목사님’들이기에 이 정도 관심이나마 생기는 것이라면, 알려지지 않은 보통의 성도가 당하는(당할) 고난과 고통은 더 크고 많을 것이다. 이에 대한 관심이 부디 그동안 모르고 지나왔던 내 주위의 이웃, 약자를 위하는 마음으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1)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는 지난 6월 4일 학교 징계위원회로부터 해임 결정을 통보받았다. 박 교수가 창조과학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온 것이 문제가 됐다. 관련한 박영식 교수 인터뷰는 본지 제402호(2024년 5월호)에 실렸다. - 편집자 주
2) 처음 〈복음과상황〉에서 원고 청탁이 온 것을 보고 바로 거절하려 했으나 ‘박영식 교수에 대한 평신도의 생각을 듣고 싶다’라는 요청에 눈이 번쩍 뜨여, 못 쓰는 글이지만 (나중에 실리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동참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 필자 주
3) 본지에 실린 박찬욱의 ‘일산은혜교회 교단 탈퇴, 한 교인의 시선’(2021년 10월호)과 강경희의 ‘‘김근주읽기’를 함께하자’(온라인, 2022.9.30.), ‘함께 읽고 쓰고 노는’ 이야기 공동체 ― 김근주읽기 강경희 운영위원·일산은혜교회 이광하 목사(2024년 3월호) 등에 자세한 이야기가 담겼다. 필자 황순욱 독자의 신앙 이야기는 김근주읽기 뉴스레터(maily.so/foucault)에서 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황순욱
자칭 평신도 신학자. 배터리를 연구하는 연구원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신앙과 세상에 더 좋은 질문을 하고 싶은 세 아들의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