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잘못 쓰는 말들
[404호 커버스토리]
기독교는 ‘말’의 종교다.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 그 말씀은 창조력을 지닌, 말한 대로 되는 능력의 언어였다. ‘말씀’인 성자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말로 복음을 전파하셨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을 기록한 인간 저자들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문법과 단어를 취사선택할 때 극도의 정밀성과 정합성을 고려했고, 기독교 역사 2천 년 동안 등장했던 특출난 신학자와 설교자들 모두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이렇듯 기독교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전파하는 데 만전을 기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한국어를 선물로 주셨고, 이 한국어로 당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서 신앙을 표현해야 한다. 과연 현재 한국교회에서 쓰이는 말은 어떤가? 국문학 전공자이며 신학을 공부한 필자가 보기에, 문법에서 벗어난 언어 습관들, 신학적으로 문제 있는 표현들이 많다. 영어 표현을 잘못하면 민감하게 반응해도, 우리말 틀린 데 대해서는 둔감하기 일쑤다. 불신자가 교회에 와서 이런 표현을 듣고, 국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흉보지는 않을까,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면 어쩌나 조바심하곤 한다.
필자는 30여 년 동안, 교회에서 쓰이는 말 가운데 잘못되었거나 부자연스러운 표현을 틈틈이 메모해왔다. 예배 때 쓰는 말, 기도할 때 쓰는 말, 설교 때 쓰는 말, 예식에서 쓰는 말, 이렇게 네 가지다.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색해보겠다.
예배 때 쓰는 말
(1) 준비 찬송 합시다
예배 진행자가 예배 전에 찬송을 인도하면서 쓰는 표현이다. 예배 전에 ‘준비 찬송’하자는 말이다. 찬송은 항상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행위여야 한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며 기다리자는 의도에서 나온 표현이겠지만 자칫 찬송의 본질을 오해하게 할 수 있다.
“찬송이나 부릅시다” 같은 표현도 종종 듣는데 곤란하다. 할 일이 없어, 시간 때우기 위해 찬송을 부르자는 말로 들려, 하나님께 매우 민망한 일이다.
‘준비 찬송’ 대신 ‘예배 전 찬송’이라는 표현이 좋다. 아니면 그냥 ‘찬송하시겠습니다’라고 할 일이다.
(2) 아무개가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대표기도 순서에서 쓰는 표현이다. ‘대표기도’는 그 자리에서 예배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간구 사항을 한 사람이 집약하여 드리는 기도다. ‘대신’해서 드리는 게 아니라 ‘대표’해서 드리는 것이다. ‘대신’과 ‘대표’는 다른 말이다.
그러니 ‘대신해서’라든가 ‘기도해주신다’는 표현은 잘못이다. ‘아무개가 대표기도를 인도하겠습니다’로 표현하는 게 맞다. 그 시간에 모든 사람이 같은 심정으로 그 기도에 호흡을 맞추고 있다가 일제히 ‘아멘’하는 게 대표기도 시간이다.
(3) 사도신경하시겠습니다 / 주기도문하시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집약해놓은 글의 제목이다. ‘신경’(信經)은 믿음의 내용을 글로 적은 것이다. ‘신조’(信條)라는 말과 같다. 믿는 내용을 조목화한 것이다. 따라서 예배 순서 중의 ‘신앙고백’ 시간은, 사도신경에 근거해, 사도신경을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순서이다. 그런데도 예배 인도자가 ‘사도신경하시겠습니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잘못이다.
‘성경하시겠습니다’ ‘성혼선언문하시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성경을 봉독하겠습니다’ ‘성혼을 선언합니다’라고 하듯,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시겠습니다’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사도신경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사도신경으로(사도신경을 낭송하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라고 해야 올바르다.
‘주기도문하시겠습니다’라는 표현도 그렇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담은 글의 제목이다. ‘주기도’를 하는 것이지 ‘주기도문’을 하는 게 아니다. 주기도(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주님 가르치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4) (무슨 성경 몇 장) 몇 절로 몇 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성경 봉독을 인도하는 사람이 쓰는 표현이다. ‘몇 절에서 몇 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몇 절로 몇 절까지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어느 대형교회 주일예배 녹화방송을 봤는데 그렇게 큰 교회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한글맞춤법이 제정되는 1933년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사서삼경을 읽는 구결식 표현이 지금까지 내려온 결과이다. 관습적으로 굳어진 표현이라 하겠다. 이제는 어법에 맞춰 바로잡아야 한다.
(5) 성경을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본문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하는 말이다. 봉독(奉讀)이란 말 자체가 ‘받들어 읽음’(받들 봉, 읽을 독)이니, 의미가 중첩된 표현이다.
‘거룩한 성일’ ‘서울 역전 앞’과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성경을 봉독하겠습니다’ ‘성경을 받들어 읽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6) 종님
대표기도하면서, 목회자를 지칭해 ‘종님’이라 표현하곤 하는데 어색하다. 우선 ‘종’에다 ‘님’이란 접미사를 붙인다는 게 우습다. ‘노예님’ ‘하인님’ ‘머슴님’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목회자 스스로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종’ ‘주의종’이라 할 수는 있다. 일반 신자가 목회자를 ‘종’이나 ‘종님’이라 하는 것은 부적절한 표현이다. ‘사역자’ ‘목자’ 등의 표현이 더 좋다.
기도할 때 쓰는 말
(1) 사랑하시는 하나님 / 감사하신 하나님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면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곤 한다. 적절하지 못하다.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맞지만, 그냥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곤란하다. ‘저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라면 ‘사랑하옵는 하나님’이라고 해야 옳다. 우리말 존대법상 내가 하는 행위를 높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감사하신 하나님’ 표현도 마찬가지다. 존대법에 어긋난 표현이다. ‘고마우신 하나님’ 또는 ‘감사하옵는 하나님’이라고 해야 어법에 맞다.
(2)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말에서 ‘당신’은 다음 두 가지 경우에 사용한다.
첫째, 2인칭 대명사로서, 자기와 동등하거나 그 이하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쓴다. 예컨대 운전자 간에 ‘당신 잘못이 아니고 내 잘못이요’라고 말한다거나, 남편이 아내더러 ‘당신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워요’라고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 3인칭 극존칭 대명사로서,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을, 그분이 안 계신 자리에서 아주 높여서 지칭하는 말로 쓴다. 예컨대 남매가 모여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신의 소원은 남북통일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었지”라고 하는 경우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두 번째 경우를 잘못 적용한 것이다. 기도 아닌 다른 상황에서 우리 신도 간에 ‘당신의 영광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우린 살아야 해’라고 한다면 무방하지만, 지금 예배에 임하셔서 내 기도를 들어주고 계시는 하나님께 ‘당신’이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2인칭 대명사로서의 ‘당신’이 되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를 마무리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완료형이 문제다. 현재형으로 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옳다.
기도는 예배 중에 하는 것이며, 예배는 시작하여 마치는 순간까지, 모두 현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인간의 현재적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종결형 어미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도합니다’와 같은 현재형 어미를 쓰는 게 적절하다. ‘기도드립니다’ 또는 ‘기도합니다’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영어 기도에서도 항상 현재 시제로 표현한다. ‘In Jesus' name, we pray.’
설교할 때 쓰는 말
(1)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계시옵기를
예배 끝 순서는 축도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히 함께하게 해달라는 내용으로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청중에 따라 약간의 변형은 있을 수 있지만,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감동케 하시는 역사가 늘 함께하기를 비는 중심 내용만은 변하지 않는 요소다.
축도 중에 우리말 어법에 비추어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더러 있다. ‘은혜가 영원히 함께 계시옵기를 축원하옵나이다’인데, 여기서 ‘계시옵기를’은 부적절한 표현이다. ‘계시다’의 주어가 하나님이라면 맞지만, ‘은혜’가 주어이기 때문에, ‘계시다’라고 높일 수는 없는 게 우리말 어법이다. ‘은혜가 영원히 함께하기를 축원하옵나이다’라는 표현이 옳다.
(2) 되어지다
어느 조찬기도회에 참석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할 때 아주 빈번하게 쓰는 표현이 있었다. ‘유익함이 되어지기를’ ‘되어질 수 있기를’ ‘하나가 되어져서’…. 마치 영어를 직역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한국 목사인데, 우리말답지 않은 언어 구사였다. 외국 유학을 오래 한 탓일까? 아니면 우리말 감각이 둔해서일까? 아무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유익하기를’ ‘되기를’(될 수 있기를) ‘하나가 되어서’… 이러면 충분하다. 더 자연스럽다.
예식에서 쓰는 말
(1) 아무개가 소천하셨습니다
누가 작고했을 때 이를 알리는 말로, ‘아무개가 소천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그러나, ‘소천’(召天)은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풀어 보면, ‘하늘로 부름’이라는 말이다. ‘아무개가 소천하셨습니다’는 ‘아무개가 하늘로 부르셨습니다’란 말이 되니, 어불성설이다.
누구나 아는 표현으로, ‘별세하셨습니다’라고 하든지, ‘소천을 받으셨습니다’(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로 표현해야 맞다.
(2)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冥福)은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이다. 그러므로 ‘명복을 빈다’는 말은, 어두운 저승 세계에서 복되게 살라는 말이다. 죽으면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 저승으로 간다고 믿은 우리의 전통 내세관 및 사후 서방정토에 환생하기를 비는 불교적 염원을 담은 표현이다. 고인을 위해 남은 자손들이 굿을 하거나 불사를 행하면 고인의 영혼이 더 나은 상태로 바뀌리라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명복을 빈다’는 말은 기독교인이 쓰기에는 부자연스럽다.
기독교 내세관은 불신자는 지옥, 신자는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죽는 순간 그 길이 정해진다고 믿는 신앙관에서는 고인의 미래를 위해 복을 빌거나 기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유족에 대한 위로밖에는 없다. ‘하나님의 위로를 빕니다’ ‘고인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등이면 족하다.
(3) 이혼, 죽음
결혼식은 장례식과는 달리 매우 기쁜 예식이다. 전통적인 용어로는 길례(吉禮)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좋은 말만 해야 한다. 그래서 상을 당한 사람, 즉 초상 중에 있는 사람은 남의 결혼식에 가지도 않았다. 그게 우리 전통이다.
목회자들 주례사를 듣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이혼’이니 ‘죽음’이니 하는 말을 쓸 때 그렇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이혼율이 1위’라거나, ‘하나님이 이 두 사람을 부르시는 날까지 행복하게 해주시길’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설교 시간에 할 일이지 신랑 신부와 하객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일본에는, 특정한 예식에서는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 목록이 있다고 한다.
몇 가지 제언
왜 잘못되거나 어색한 표현들이,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 교회 안에서 많이 쓰이고 있을까? 문해력, 즉 글을 읽거나 말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이해한 만큼만 표현할 수 있다. 요즘 한국인, 특히 고령층의 문해력이 OECD 국가 중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라고 해서 걱정이다. 한글이 쉬워서 글을 다 읽기는 하는데, 정작 그 주제,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위 사례들을 보면 교회의 문해력도 우려할 만하다. 일반 신자들은 물론 모범이 되어야 할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탁월한 글쓰기나 말하기는 타고난다고 하지만, 노력에 따라 향상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문해력도 높이면서 위와 같은 표현들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몇 가지 제언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미심쩍은 대목이 있으면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필자의 경우, 국어국문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평생 이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지만, 지금도 수시로 국어사전을 들춰본다. 요즘은 종이책이 없어도, 휴대폰으로도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들어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둘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성경을 상고”(행 17:11)하였다는 베뢰아 교인들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설교를 비롯해 교회에서 하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충분히 활용해, ‘이것이 그러한가’ 확인하며 믿어야, 교회 말의 품격이 높아질 수 있다. 맹목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지성과 영성이 균형 잡힌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즐겨 책 읽기와 글쓰기도 생활화해야 반지성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셋째, 장기적인 희망 사항이지만, 신학 교육 커리큘럼에서 말하기와 글쓰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영국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민경배 교수의 전언에 의하면, 그곳에서는 학기마다 말하기와 글쓰기 훈련을 혹독하게 시킨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공과대학에서도 글쓰기 교육을 강도 높게 시키고 있다.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는 더욱 그래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신학교 교육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이것이다. 목회자들의 설교 실력 저하가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있는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과제다. 주지하듯, 목회자의 수준이 교인들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기독교는 말의 종교라고 했다. 언어는 창조력을 발휘하며 서로를 소통하게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교회에서 하고 듣는 말이, 땅에 떨어지는 말이 아니라, 진리와 진실을 담아 울림을 주는 말,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려 변화를 일으키는 말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말 어법에 비추어서도 정확하고 아름다운 말, 신학적으로 보아도 건강한 말, 잠언의 말씀처럼, “경우에 합당한 말”(잠 25:11)만 교회에 충만하도록 모두가 노력했으면 좋겠다.
이복규
서경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명예교수. 아현동 산성교회 장로로서 밥죤스신학교 학부와 연구원에서 신학을 공부해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다. 저서로 《설공찬전의 이해》(지식과교양),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잡기》·《기독교 이해의 길잡이》(새물결플러스) 등이 있다. ‘이복규 교수의 교회용어·설교예화 카페’(cafe.naver.com/bokforyou)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