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오해를 푸는 열쇠

[404호 커버스토리]

2024-06-30     이유림

말과 글을 통한 소통, 오해의 시작

소통은 참 어렵다. 상대방이 내 말에 담긴 의도를 다르게 받아들여 오해가 생기고, 말이 잘 통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각자 이해한 바가 달라 당황스러운 일을 겪는다. 이렇게 우리는 소통의 오류로 오래 맺은 관계가 틀어지는 사건을 경험하거나, 중요한 일에 차질을 빚기도 한다. 말이 아닌 글을 주고받으면 소통이 더 쉬워질까? 아니다. 같은 메일을 받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카톡 메시지로 오해가 더 깊어지는 경우도 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난 이들이 같은 언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인데, 왜 우리 사이의 소통은 이토록 어려울까?

그런데 우리는 그 어려운 소통을 매일 시도한다. 가족, 연인, 친구끼리도, 회사에서도 수없이 소통을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소통하며 관계를 맺어가고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에게 소통하기 어려운 존재가 또 한 분 있다. 바로 하나님. 우리는 기도와 말씀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소통을 시도하지만, 하나님을 오해하곤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와 소통하고 관계 맺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스스로 나타내셨다. 그 기록이 바로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텍스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간다. 성경을 통해 우리와 소통하기를 시도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는 셈이다.

기독교의 본질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고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그 기반이라면, 우리가 텍스트를 ‘잘 읽는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우리가 ‘기독교 문해력’을 기르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줄여나갈 수 있을까?

문해력, 오해를 낳는 소통의 장벽

문해력(literacy)이란, 사전적 의미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한다. 그러나 최근에 이 말은 단순히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넘어서,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디지털 리터러시’ ‘AI 리터러시’처럼 이해가 필요한 개념에 붙어서 사용되기도 한다. 읽는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우리는 글을 읽으며 의미를 파악하고 자신이 가진 배경지식, 경험과 연결하여 자기만의 의미를 도출해낸다. 사유와 사색을 통해 텍스트를 나의 세계로 넓혀가는 것이 넓은 의미의 문해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 문해력’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의 삶과 세계로 연결하고,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나의 신앙을 넓혀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기독교 문해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 즉 문해력과 기독교 문화 및 관련 어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의 문해력 수준이 낮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 문해력의 현실

‘문해력’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21년 3월, EBS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한국 청소년들의 문해력 실태를 다뤘고,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학부모들 사이에 문해력 열풍이 불었다. 당시 전국 중학교 3학년 학생 2,4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문해력 진단평가’ 결과 10명 중 3명은 중학교 3학년 수준에 미달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어휘력 진단평가’에서는 10명 중 9명이 어휘력 부족으로 교과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 콘텐츠를 기획·개발하고 수업 현장을 모니터링할 때마다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를 실감하게 된다. 학생들의 집중력은 해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특히 수업에 활용되는 텍스트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이해력과 몰입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게다가 글을 작성하는 활동까지 있으면 학생들은 더욱 힘들어한다. 특히 비교과 과목에서 한 페이지 분량 이상 글을 작성하는 활동은 더욱 어렵다.

요즘 학생들이 살아가는 곳은 책 한 권도 1분 만에 읽는 세상이다. ‘○○○ 1시간 요약본’ 콘텐츠가 인기를 끌다가도, 이것마저도 지쳐서 ‘3분 만에 끝내는 ○○○’에 이어 ‘○○○ 30초간 떠먹여 줌’ 같은 숏폼 콘텐츠 요약본으로 책을 접한다. 미디어를 통해 짧고 강렬하게, 쉽게 타인의 생각이 나의 생각인 양 밀려 들어온다. 그리고 금방 사라진다. 이로 인해 우리는 책을 읽으며 각자의 시간에 맞춰 사유하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경험을 빼앗기고 있다. 이런 환경에 이미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교육할 것인가는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깊이 고민하게 되는 문제다.

얼마 전 우리 팀은 생성형 AI 교육 콘텐츠를 론칭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는 미래 세상에서 학생들이 AI 기술을 주체적으로 잘 활용하되, 사람의 성장을 위한 가치 있는 방향으로 ‘나를 더 나답게, 세상을 가치 있게’ 만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생성형 AI를 경험하고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기획을 진행하면서 방향을 수정했다. 학습자들이 생성형 AI를 활용해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기 전에, ‘어떻게 질문하고 명령할지’조차 낯설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성형 AI가 내놓은 답변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도 어려워했다.

그래서 생성형 AI의 다양한 활용에 앞서, ‘생성형 AI 문해력’에 더욱 중점을 두게 되었다. ‘생성형 AI 문해력’이 기초가 되어야 그다음 활용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습 위주의 기존 소프트웨어 교육과는 결이 달랐기에 오픈 당일까지 현장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프로그램 론칭 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장에서 학생들과 가장 밀접하게 마주하는 교사와 강사들에게 꼭 필요했던 콘텐츠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이미 많은 교사와 강사들이 코딩 교육, 수학 교육, 과학 교육에서 학생들이 (관련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설명 자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 깊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해력 저하가 청소년만의 문제일까? 문해력이 부족한 청소년이 자라서 읽기에 능숙한 어른이 되기란 쉽지 않다. 이를 크게 체감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업무 현장이다. 문서를 다루는 많은 직업이 그러하듯, 콘텐츠를 다루는 우리 팀에서 ‘글’은 매우 중요하다. 신입 사원이 되면 기본적인 업무로 메일 쓰기, 회의록 작성 등을 통해 다른 부서와 글로 소통하기도 하고, 기획·개발을 위해 수많은 관련 자료를 읽고 요약하며 해석하고 의미를 도출하여 교육 콘텐츠로 재창조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의 기본은 바로 ‘문해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을 갖춘 신입 직원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한 대학생이 ‘금일까지 과제 제출’이라는 말의 뜻을 ‘금요일까지 과제 제출’로 이해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얼마 전 우리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콘텐츠에 필요한 제작물 견적을 의뢰하는 중에 ‘○월 ○일까지 납품이 필요한 제작물에 대한 견적을 이번 주까지 받아주세요’라는 상사의 메신저를 잘못 해석하여 업체에 ‘희망 납품일: 이번 주 금요일’까지로 메일을 보낸 것이다. 당연히 업체로부터는 납기일을 맞출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게다가, ‘1,000부 제작 시 비용은 ○○원이며, 디자인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라는 답변에 대해 해당 직원은 ‘인쇄 비용은 모르겠고, 디자인 비용은 ○○원이래요!’라고 상사에게 전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상사가 메일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오해가 풀렸다. 하마터면 메일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에 해당 업체를 ‘넉넉한 납기일도 맞춰주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비용을 요구하는 업체’로 오해할 뻔했다.

이제는 회사에서도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온 걸까?

소통의 장벽 1: 성경 텍스트 읽기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일상에서 읽기에 능숙하지 않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그대로 주일에 교회로 오기 때문이다. 문해력 저하의 현실은 교회 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올해 청년부에서는 통독 모임을 시작했다. 많은 청년이 1년에 성경을 1독하는 것을 목표로 모임에 신청했다. 통독 모임은 매일 정해진 본문을 각자 읽고 카톡방에 나눔을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목사님은 청년들의 깊은 묵상을 위해 2주에 한 번씩 앞으로 읽을 본문을 개괄해주시고, 매일 해당 본문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여 올려주신다. 하지만 연초의 희망찬 다짐과 목사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은 날이 갈수록 성경 읽기를 어렵게 느낀다.

하루는 함께 통독 모임을 하는 몇몇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들 ‘제발 통독을 잘할 수 있게 해주세요!’가 기도제목이었다. ‘성경을 읽고 싶다’라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모두 동일하게 성경 읽기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 읽기를 어려워하는 원인은 제각기 달랐다. 어떤 청년은 삶 속에서 성경 읽기를 ‘우선순위’ 삼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어렵다고 했다. 또 다른 청년은 성경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해서 나누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한 친구는 성경을 펴서 본문을 읽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10분 동안 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고 했다. 분명히 한글을 읽는데도 다른 나라의 문자를 읽는 것처럼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고 했다. 제각기 다른 영역에서의 문해력 부족이 성경 통독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교회 내 문해력 저하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방해한다. 성경 속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성경의 언어와 문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 읽기가 겉핥기에 그치고, 이는 얕은 신앙으로 이어져 하나님과의 관계도 피상적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결국, 잘못된 읽기로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거나, 성경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고 관계 맺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올바르게 읽지 못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진다면 이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에는 기독교 관련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가 생산되고 있다. 성경 본문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은 물론,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릴스나 숏폼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또 성경과 기독교를 짧게 소개하는 영상들도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콘텐츠는 긴 텍스트 읽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적합한 방법이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2차 저작물로 재창작되는 과정에서 복음의 내용이 변질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찾아온 미디어 콘텐츠 시대에 긴 텍스트로 이루어진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흥미를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처음부터 성경과 신앙 서적 읽기만을 강조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까?

‘3분 요약 영상’으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할 수 없듯이, 아무리 잘 만들어진 미디어 콘텐츠라도 성경을 완전히 대체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콘텐츠의 목적이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흥미를 높이고,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둔다면 성경 읽기를 위한 훌륭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의 장벽 2: 교회 언어와 문화의 이해

사실 교회 내 문해력 문제는 성경 읽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초신자들에게는 교회의 모든 언어가 장벽이 될 수 있다. 나는 작년부터 청년부에서 새가족부 리더로 섬기고 있다. 한 주에 평균 한두 명의 청년이 등록하는데, 그중 교회를 처음 나오거나 오랜만에 나온 청년들 비율은 상당히 높다. 그들을 맞이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가장 크게 느낀 변화는 ‘새가족의 시선’에서 교회를 다시 바라보게 된 일이다. 이전에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이 초신자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찬양이 끝나면 언제 자리에 앉아야 할까?’ ‘헌금은 왜, 어떻게 하는 걸까?’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걸까?’ 교회 문화가 낯설고 어려운 초신자들에게 떠오르는 질문들이었다. 많은 초신자는 조용히 지나쳤겠지만, 용기 있는 몇몇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기도제목이라는 게 뭔가요?’ ‘주보가 뭔가요?’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닌 사람들에게는 ‘사과가 뭐예요?’처럼 느껴질 질문들이 초신자들에게는 매우 낯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신자에게도 교회의 언어와 문화는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 생활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교회에는 성경 이외에도 많은 텍스트가 존재한다. 교회 소식을 전하는 주보, 안내지, 주일 설교 PPT, 새가족 교재, 성경공부 교재 등 다양한 곳에 텍스트가 있다. 초신자들은 교회의 텍스트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에 문해력 열풍을 일으켰던 EBS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이렇게 말했다.

문해력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발아 조건이 되지 않아 식물의 싹이 돋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읽기 능력인 발생적 문해력도 아예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임을 가정에 물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교육의 시스템이 나라의 학교라면 그 아이들을 도와줄 책임이 있습니다.
― EBS 다큐 프라임 제작진, 《다시 공부, 다시 학교》(EBS BOOKS)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복음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교회로서 우리는 초신자들이 복음을 마음에 심을 수 있는 신앙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이 과정에는 낯선 ‘교회 언어’와 기독교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방법이 포함돼야 한다. 그것이 사랑에 빚진 우리들, 교회의 책임이다.

결국,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한국 사회는 이미 심각한 문해력 저하 상황에 처해있다. 이 현상은 점점 더 가속화될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더욱 깊이 관계 맺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욱 ‘깊이 읽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일상에서는 다양한 읽기를 통해 기초 문해력을 향상시키고, 교회 안에서는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계속돼야 한다.

미디어 콘텐츠의 활용, 다양한 교육을 통한 ‘깊이 읽기’, 소모임을 통한 ‘함께 읽기’도 좋은 방법이다. 교회 언어와 기독교 문화가 낯선 초신자들을 위한 배려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성경 읽기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성경을 통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글을 마치기 전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기독교 문해력’을 넓혀가는 것은 우리의 열심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말씀을 읽어도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지식적으로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 역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문해력’을 위해 계속해서 구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 말씀을 깨닫게 도우시길 구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문해력’의 핵심일 것이다.

‘기독교 문해력’을 넓히기 위해 우리는 일상생활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동시에 ‘영적 문해력’을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계속해서 구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의 열심과 함께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성경을 펼친다. 그리고 소망한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기뻐하며 반응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나는 다시 또 읽는다. 

이유림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육인으로서, 교육 콘텐츠를 통해 만나는 아이들이 행복을 누리며 자라나, 스스로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꿈꾼다. 매일 그 다짐으로 글을 쓰듯, 삶을 써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