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과 비관

[405호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

2024-07-31     정다운

■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는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흰색 두건을 쓴 여인〉(c.1435)

제가 전에는 어리석어서 지혜가 크고 미래를 다 아시는 하느님이 왜 내 죄를 막지 않으셨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때는 하느님이 죄를 막으셨다면, 모든 게 잘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려는 충동을 억눌러야 했지만 그래도 이것 때문에 울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환상에서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 주신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죄는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게 잘될 거다. 모든 게 잘될 것이며, 온갖 일이 다 잘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선하신 주님이 저의 모든 물음과 의심에 답해 주셨고, 저를 위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든 일이 잘되게 할 것이다. 내가 모든 일이 잘되게 할 수 있다. 내가 모든 일이 잘되게 하리라. 내가 모든 일이 잘되게 하겠다. 온갖 일이 잘되는 것을 네가 보리라.”
― 노리치의 줄리안

“모든 게 잘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는 분명 강한 낙관, 긍정이 있다. 그러나 종종 그러한 비전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앞에 무력해 보인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과 같은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묻는다. ‘모든 게 잘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 나쁜 일이 있어도 결말은 좋을 거라는 뜻인가? 세상에서는 눈물을 흘려도 결국 천국에 가니까 괜찮다는 뜻인가?’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이런 비전은 종종 낙관주의로, 결국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근거 없는 전망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게 하는 거짓 위안으로 오인된다. 이른바 ‘의심의 대가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교의 강한 낙관에 의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마르크스에게 이 낙관은 인민의 아편이었다. 프로이트에게 이 낙관은 환상이었다. 니체에게 이 낙관은 노예의 도덕이었다.

어떤 면에서 ‘의심의 대가들’의 비판은 옳았다. 그리스도교 안에도 종종 흔한 낙관주의가 위세를 떨치곤 하니까.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진짜 핵심, 복음이 선언하는 낙관을 그러한 낙관주의, 현실 도피적 이해와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틀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어려운 부분은 실은 이 낙관에 있다.

그리스도교의 ‘낙관’은 ‘긍정적인 믿음은 결국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와 같은 기이한 순환논법의 낙관주의가 아니다. ‘인생사 새옹지마이므로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 뒤에는 또 좋은 일이 있다. 무엇이 진정 나쁘고 좋은 일인지는 모르는 법이다. 그러니 지나치게 기뻐할 것도 지나치게 슬퍼할 것도 없다’는 식의 세속적 지혜도 아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는 말장난 같은 권유도 아니다. 여기에는 은연중에 ‘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든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든 물이 컵의 반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그러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편이 낫다는 현실에 대한 미묘한 체념이 담겨있다.

그리스도교의 낙관은 긍정과 부정 중에 긍정을 선택하는 편이 우리에게 ‘유익’하므로 긍정을 택하자는 실용주의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낙관은 새로운 현실에 대한 선언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눈물겹고, 절망적이고,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물음을 끌어안는 하느님의 낙관이다. 그 하느님의 낙관이 우리의 “고백과 눈물 그리고 커다란 웃음으로 목이 메는 그런 예”의 원천이다.

이와 관련해 G. K. 체스터턴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비관주의는 악에 진저리 난 상태가 아니라 선에 진저리 난 상태이며, 절망은 고통에 지친 상태가 아니라 기쁨에 지친 상태다.

비관주의와 절망은 고통과 악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쁨’과 ‘선’에 대한 것, 즉 ‘낙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비관’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낙관’에 지쳐 ‘비관’에 빠진다. 더 정확히는, 그분의 거대한 낙관을 거부함으로, 비관주의와 고통에 빠진다. 그분의 낙관, 그분에 대한 낙관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우리는 우리가 상정한 성취, 우리가 상정한 기쁨, 우리가 상정한 행복을 두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시 즐거워하고, 그것에 실패했을 때 슬퍼한다.

다시 한번, 복음의 낙관은 비극을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삶을, 신앙을 낙관과 비관 둘 중 하나로 축소시킨다. 여기서 축소된 낙관은 그분의 낙관과는 비할 바 없이 아주 작고 초라한 것이다. 우리를 “하느님의 형상”으로, 영광스러운 인간성을 회복시키시겠노라는 하느님의 선언(하느님의 ‘낙관’)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그저 이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 명예를 되찾으면, 건강해지면, 경제적으로 좀 나아지면, 그걸로 족합니다(우리의 축소된 ‘낙관’). 제가 원하는 것은 그거예요’라고 답한다. 비관도 축소되기로는 마찬가지다. 그분의 ‘낙관’과 씨름하지 않는 비관은 파괴적인 에너지가 되어 폐허로 마친다.

그러나 폐허가 끝은 아니다. 뜻밖에도 그리고 경이롭게도 그리스도교의 이야기는 그 폐허에서 시작된다. ‘혼돈과 공허, 어둠’에 빛이 임하고, 아담이라는 폐허에서 다시 시작된 이야기는 두 번째 아담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G. K. 체스터턴과 J. R. R. 톨킨

처음 노래가 시작된 곳은 일루바타르의 보좌였다.1) 유일자 일루바타르가 선포한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주제가 그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아름다운 주제는 너무 크고 완전해서 피조물 중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고, 이해하더라도 일부만을 이해했다. 아이누들은 자신이 이해한 한도 안에서 각자의 지혜를 따라 그 노래를 아름답게 꾸몄다. 일루바타르의 주제, 아이누들이 덧붙이는 노래와 함께 위대한 아름다움이 깨어났다.

바이올린, 비올라, 베이스, 하프, 류트, 오르간이 제각기 다른 소리로, 그러나 하나가 되어 울리는 음악처럼 장엄하고 다채롭고 아름다운 음악. “하늘의 높이와 바다의 깊이가 함께 들어있는 음악이었다. 음악에는 아무런 흠이 없었고”, 일루바타르는 흐뭇해하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 노래가 못마땅한 이가 있었다. 그는 멜코르, 일루바타르가 창조한 피조물 중에서도 “힘과 지식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받은” 아이누였다. 그는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세상에 울리는 유일한 노래가 일루바타르의 노래뿐이라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의 생각에는 일루바타르의 노래에 부족한 점이 있어 보였다. 그에겐 일루바타르의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신만의 노래, 자신만의 상상이 들어간 노래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렇게 그는 허공으로 나아가 자신만의 생각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 일을 시작하자 “즉시 음악에 불협화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노래에 혼란이 일어났다. “크고 과시적이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멜코르의 음악에 일부 아이누들이 동조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소리가 커지면서 음악은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이전의 아름다운 선율이 그 혼란의 바다에 침몰해버렸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멜코르의 음악이 세계를 채우는 듯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일루바타르가 드디어 보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루바타르는 두 번째 주제를 시작했는데 이 주제와 멜코르의 소리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이누들은 이 전쟁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멜코르가 승리를 거뒀다. 잠시 동안은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일루바타르가 세 번째 주제를 시작했다. 일루바타르로부터 시작된 주제는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웠으나, 이전까지의 주제들과 다른,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이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노래가 함께 진행되는 듯했다. “일루바타르의 노래는 느리고 깊고 넓고 아름다웠으나 한없는 슬픔이 배어있었고, ‘노래의 아름다움은 주로 그 슬픔에서 나왔다.’ 멜코르의 주제는 크고 과시적이며 끝없이 되풀이되는 단조로운 제창 같은 것이었다.”

이제 일루바타르가 입을 열었다. “궁극적으로 내게서 비롯되지 않은 주제는 어느 것도 연주될 수 없으며 아무도 내 뜻과 달리 음악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멜코르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시도하는 자는 본인은 깨닫지 못할 뿐 결국 더 놀라운 세계의 창조를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 “그대들의 음악을 보라!”그리고 그는 이전까지 그들(아이누)이 귀로 듣기만 했던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환상으로 펼쳐 보였다. 그리하여 아이누들은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 그들이 바라보며 놀라워하는 동안 이 ‘세상’은 자신의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보기에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자라는 것이었다. … 일루바타르가 다시 말했다. “그대들의 음악을 보라! 이것이 그대들이 부른 노래로다. 그대들이 각자 구상하고 덧붙인 모든 것들이 내가 그대들에게 제시한 구도 내에서 이 음악 속에 담겨 있음을 그대들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 멜코르도 마음속의 모든 은밀한 생각들을 만날 것이고, 그것들이 다만 전체의 일부이며 영광이 곁가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루바타르의 노래는 멜코르의 노래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의 노래는 멜코르를 지우지 않는다. 멜코르를 무저갱에 가둔 뒤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추운 겨울을 사는 우리는 멜코르가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밝고, 찬란하고, 명랑한 첫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멜코르는 자신의 노래를, 시끄럽고 과시적이며 파괴적인 노래를 이어간다. 일루바타르의 깊은 지혜는 멜코르를 파괴하지 않는다. 그는 거기에서부터, 멜코르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새로운 노래를 시작한다. 처음, 멜코르의 시끄러운 노래가 없었던 때에 불렀던 노래보다 슬프지만 “그 노래의 아름다움은 슬픔에서 비롯된다.” 더 깊고, 더 풍부하며, 더 아름다운 노래가 온 우주를 채운다. 내가 믿기는 이것이 노리치의 줄리안이 본 비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 주

1) 아래는 J. R. R. 톨킨이 쓴 《실마릴리온》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것이다. 《실마릴리온》은 톨킨의 《반지 의 제왕》 세계관과 배경을 담고 있는 미완성 작품이다.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