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한국 근대 여성 기독 지식인의 초상
[405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자기 서사: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이 걸은 “승리의 길”
김활란(金活蘭)은 1899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할 때까지 70여 년을 살면서, 20세기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기간을 한국 교육계와 여성계,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저명인사로 활약했다. 한국에서 처음 세워진 여자대학의 최장기(22년 5개월) 교장(학장/총장)직을 역임한 그는 ‘한국 여성 최초의 박사’로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단체인 YWCA와 근우회 창립자 중 하나였고, 3·1운동 참여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농촌운동, 여성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했다. 강점기와 해방 이후 국제연합(UN), 유네스코, 세계선교협의회(IMC), YWCA, 미국 감리교 총회 등, 국제정치 및 기독교 기관 회의 대부분에 한국인 여성을 대표해서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전쟁기에는 얼마간 전시 내각의 공보처장직을 맡아 정치 무대에서도 활약했다.
말하자면, 1920년대부터 사망한 1970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국내외 모두에서 ‘한국 대표 여성’이라는 공식적·비공식적 정체성을 부여받아 활동했다. 그가 이런 저명한 명성과 지위를 획득하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와 이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나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은 김활란의 내면과 외적 활동 모두를 형성하고 규정한 주요 동인이다. 한편, 일제강점기 말기에 식민지 한국 사회의 지도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강요된 전시 협력과 친일 활동을 그도 피하지 못했다. 그 역시 적극적 친일 부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자기변호 서사를 갖고 있다. 이 자기변호의 진실성과 정당성에 대한 후세의 평가 역시 다양하다.
김활란은 1965년에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을 발표했다. 죽음을 5년 앞두고 출간된 이 책은 이화여대 제자인 작가 정연희에게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정의숙 외, 298쪽). 김활란은 ‘자서’(自序)에서, 친구들의 강권에 의해 썼으며, “사실들의 정확성”에 중점을 두었다고 밝혔다(김활란, 6쪽). 그의 회고는 다분히 기독교적이다. 자기 삶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친절,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받은 “그 빛 속의 한 작은 생명”이 걸어온 길이라고 강조한다(330쪽). 그를 높이고 우러른 이들, 특히 이화의 동료와 제자들은 그 길을 “승리의 삶”으로 규정했다(정의숙 외, 19쪽). 한편, 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 서사를 연구한 장영은은 김활란의 자서전이 “자기 재현과 자기 해석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거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들을 ‘오해’로 규정”하려는 의도,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보다는 생의 사건들을 시간적으로 배치하여” 일종의 ‘성공담’으로 구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장영은, 108쪽).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한국 여성, 철저한 남성 중심 가부장주의 세계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과 자기 계발 투쟁을 ‘승리’로 이끈 여성, 그러나 자신은 그저 하나님과 기독교가 선물한 ‘빛’을 받은 ‘작은 생명’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여성, 한편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 및 기타 활동을 놓고서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을 ‘오해’로 규정하고 해명하려는 여성. 따라서 본 글은 김활란을 세 가지 키워드로 분석하고 정리한다: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성공과 승리’ ‘오해와 해명’.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기독교 신앙
김활란은 19세기 마지막 해 1899년 2월 27일에 인천 배다리마을에서 아버지 김진연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8남매 중 일곱째, 딸로서는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연은 평북 의주에서 상당한 농토를 물려받았지만, 1870년에 인천으로 이주하여 농사 대신 창고업과 중개업으로 성공했다. 이후 고향에서 아내를 구해 제물포로 데려왔다. 김활란이 태어난 배다리마을은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몰려오면서 항구 근교에 살던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만든 보금자리로, 밀물 때 배 여러 척을 연결해 다리로 만들어 사람들이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마을로 불렸다. 김활란이 태어난 1899년에 경인철도가 개통되어 학교와 시장,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번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태어날 때 ‘기득’(己得)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기해년에 얻었다’는 뜻이었다. 딸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가정이 적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상, 이 사실만으로도 그의 집안은 상당히 개화한 집안이었다. 대가족을 어머니 혼자 건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김활란은 여덟 살 많은 언니 애란(신득, 엘렌)에게 돌봄을 받았다. 김활란은 거의 제2의 어머니라 할 만큼 언니 애란을 사랑했다(김활란, 13-15, 30쪽).
집안의 종교 가장은 어머니였다. 당시 여성 대부분이 그랬듯, 김활란의 어머니도 가족의 번영과 평안을 위해 모든 신들에게 고사와 치성을 드린 열혈 종교인이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에게 전환기가 찾아왔다. 인천은 모든 새로운 것들이 들고나는 개항장이었던 만큼, 서양 문명과 함께 기독교가 가장 먼저 도입된 곳이었다. 한국 첫 감리교회 중 하나인 내리교회의 전도부인 백헬렌이 김활란의 집안을 드나들기 시작한 후 어머니가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대장부 기질을 지닌 어머니의 개종은 전 가족의 개종으로 이어졌다. 1906년에 어머니 박씨는 세례명을 ‘또라’로 받아 ‘박또라’가 되었고, ‘득’을 돌림자로 쓰던 자녀들도 각각 세례명(존, 엘렌, 마리온, 폴 등)을 받았다.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기득은 이후 김헬렌이 되었다. ‘활란’(活蘭)이라는 새로운 한국 이름은 훗날 이화학당에 다니던 헬렌을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아버지와 한문 선생이 논의해서 만들었다. 이로써 인천 출신 김기득의 새 한국 이름은 김활란, 영어 이름은 Helen Kim이 되었다(17-24쪽).
세례를 받은 이듬해에 여덟 살 김활란은 인천 첫 근대 교육기관인 감리교 영화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인천에서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가족의 대소사를 주도하던 어머니는 서울 이사를 결정했다. 이로써 1907년 늦은 가을에 큰아들 가족과 함께 인천에 머물며 사업을 모색하던 아버지를 남겨두고, 어머니는 다른 자녀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김활란도 영화학교에서 같은 감리교 이화학당으로 전학했다. 이화학당에는 이미 언니들인 애란과 마리온이 기숙 생활을 하며 다니고 있었다(24-29쪽).
내리교회, 영화학교, 이화학당에 다니며 기독교를 기반으로 성장기를 보내던 김활란이 처음으로 민족문제를 고민한 계기는 1910년 8월 29일의 경술국치였다. 당시 애란 언니는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채,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관원 김달하와 결혼한 상태였다. 열한 살 김활란은 애란 언니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날 일찍 귀가한 후 관복을 벗고 대성통곡하던 형부의 모습을 보고 한일강제병합 소식을 알게 된다(37쪽).
한편, 형부 김달하는 1913년 이후 가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망명해서 중화민국 북양군벌 돤치루이(段祺瑞)의 부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놀랍게도, 1925년 3월 30일에 조선총독부 밀정으로 몰려 의열조직 다물단원에게 처단된다. 김달하가 밀정이었다는 사실은 근래 학계의 연구 결과로 드러났다. 그런데 김활란은 자서전에서 1928년에 애란 언니가 병으로 사망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김달하를 여전히 ‘독립지사’로 지칭한다(137쪽). 애란 언니를 지극히 사랑했듯, 김활란은 처가 식구를 모두 돌본 김달하를 인격자이자 독립지사로 존경했다. 김활란의 호 우월(又月)은 김달하가 1922년 5월 북경에 온 처제에게 “하늘에도 밝은 달이 있는데 이 땅에도 또 하나 달이 있으니 그이가 김활란이요”라는 의미로 지어주었다(74-76쪽). 김활란은 1965년 자서전을 쓴 시기까지도 존경하는 형부인 ‘독립지사’ 김달하가 밀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달하의 북경 시절 진실이 어떻든 간에, 김활란은 경술국치일에 통곡하던 ‘애국자’ 형부의 모습을 목격한 일이 청년을 일깨우는 계몽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을 깨운 계기였다고 밝힌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암흑기 청년들이 교육을 받아 민족과 국가를 재건하도록 돕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며, 특히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야말로 그 사명을 감당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라고 판단했다. 이 판단으로, 1913년 이화학당을 졸업할 즈음 김활란은 1년 대학 예비 과정과 4년 정식 대학 교육을 받겠다고 결심했다. 여전히 봉건시대 사고방식을 가진 아버지가 공부를 중단하고 결혼하라고 요구했음에도, 또다시 어머니로부터 지지를 얻은 그는 1914년에 이화학당 내에 설치된 대학과에 진학했다(38-40쪽).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결합한 김활란의 인생관을 새롭게 한 사건은 대학 진학 직후 1914년에 일어났다. 1913년과 1914년에 연이어 일어난 남동생 폴과 언니 마리온의 사망, 대학 진학을 반대한 아버지와의 갈등, 나라의 비참한 운명,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등이 그의 영혼을 옥죄었다. 이 시기에 학교 부흥회에 찾아온 강사들은 죄 고백과 회개를 외쳤다. 습관과 의례에 따르던 위선적 신앙생활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신앙을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며칠 동안 학교 기도실에서 밤새워 기도하던 그에게 영적 각성이 찾아왔다.
기도실은 어둠침침하고 좁았다. 예수의 사진 하나만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매일 밤 혼자서 그 곳엘 갔다.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어 꿇어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이마 위에 얹으면 헤아릴 수 없는 갈등과 회의와 슬픔이 가슴 속에서 아우성칠 뿐 내 마음은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으로 꺾이지 않았다. 매일 밤 그 캄캄한 기도실에서 꼬박꼬박 새웠다. 소리 없는 기도였지만 인간의 영혼의 문제와, 나라의 비운을 슬퍼하는 비애와 울분과 의욕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며 아우성치는 처절한 마음의 부르짖음이었다.
어느 날 한밤중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드는 순간, 나는 희미한 광선을 의식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 예수의 모습에서 원광이 번져 내 가슴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사방은 어두웠고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득히 먼 곳에서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처절한 부르짖음은 아득히 먼 것도 같았고 바로 귀 밑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울부짖고 호소해 오는 처절한 울음소리. 그 소리를 헤치고 문득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가 들리느냐?” “네, 들립니다.” “저것은 한국 여성의 아우성이다. 어째서 네가 저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느냐? 건져야 한다. 그것만이 너의 일이다.”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두 손을 모아 쥔 나는 어느 틈에 흐느껴 울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나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꿇어 엎드린 채 오래오래 흐느껴 울었다. 감사의 눈물이었다. 나에게 뚜렷한 목표를 주신 예수님께 드리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김활란, 42쪽)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얼굴이 희미한 빛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비추었다는 김활란의 경험은 사도 바울의 다마스커스 도상 회심 체험 이래로, 기독교 역사 가운데 넘치도록 많은 인물이 경험한 복음적 회심 경험이었다. 그러나 김활란에게 이 영적 각성이 단순히 영적 경험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 영적 각성이 민족, 국가, 여성에 대한 2차 소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반응과 결심은 논란이 될 만하다.
이러한 경험 후에 고집과 교만과 일본에 대한 증오까지도 죄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강렬한 증오가 애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의 죄까지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빛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기쁜 마음으로 믿었다. (43쪽)
기독교인 김활란은 영적 각성을 통해 그리스도가 가르친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킬 수 있을 만한 마음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일본을 더는 미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결심은 의도적인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완전 성화’ 교리를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를 잘 아는 이들이라면, 김활란이 각성 당시에 자신이 깨달은 바와 결심한 것을 다른 의도 없이 사실 그대로 기록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김활란이 1930년대 말부터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자신의 행동을 1965년에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신앙의 용어로 정당화하려 시도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사실이 어쨌든, 많은 진지한 연구자들은 김활란의 이 신앙고백 서사가 그의 내면과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점에 대부분 동의한다(장영은, 111-114쪽; 정현주, 125쪽).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김활란의 내면과 행동을 규정하는 중요한 틀이자 동인이 되었다. 내리교회, 영화학교, 이화학당은 모두 기독교 기관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다닌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보스턴 대학도 모두 감리교계 대학이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컬럼비아 대학은 그가 공부하던 당시 세속 대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고, 그가 제출한 박사학위논문 제목도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교육〉이었으므로, 딱히 종교성을 강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위 전후로 그가 진행한 모든 농촌운동이 기독교적 가치하에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농촌계몽운동의 기독교적 특징도 부인할 수 없었다. 특히 김활란의 농촌계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기독교 정체성이 분명한 YWCA였다.
성공과 승리: 박사, 총장, 대표
김활란이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 여성의 대명사가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이화학당과의 만남이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심지어 광복 이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까지도 이화의 위상은 그저 한국의 여러 기독교 여학교 중 하나가 아니었다. 해방 이전 이화는 한반도에서 여성에게 서양식 근대 교육을 제공한 최초의 여학교로서, 한국 여성이 고립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학문, 세계, 근대, 서양인, 외국어, 외국 문화, 기독교, 남성 지식인 지도자를 만날 수 있는 독보적인 창구였다.
1908년부터 이화학당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초등, 중등, 대학 과정까지 약 10년간 학생 신분으로 머물렀다. 이미 두 언니가 이화학당에 다녔기에 이화의 선교사 교사들은 김활란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기숙사비가 없어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었을 때, 당시 교장 룰루 프라이(Lulu E. Frey, 1868-1921)는 장학금을 주어 기숙사 입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1913년에 중등 과정을 졸업한 후에는 선교사들과 어머니에게 지지를 받아 대학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1917년 5월 31일 이화 창립기념일에는 당시 한 명밖에 없었던 졸업반 학생이어서 메이퀸(5월의 여왕)으로 선발되었고, 1918년 3월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영어와 한국어로 “여자의 고등교육과 가정과의 관계”라는 제목의 졸업 연설을 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학교 동아리 공주회(King’s Daughter’s Circle)에 가입하여,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에 수시로 참여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김활란은 선교사, 한국인 교사, 선후배 동문이 모두 인정하는 이화의 대표 학생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대학 졸업 후 이화학당의 교사가 된 그가 처음 맞닥뜨린 민족운동은 3·1운동이었다. 3·1운동 당시 전국 기독교계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특히 여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이화학당은 그 선봉에 서있었다. 이화 출신의 동료 교사 박신덕·신준려(신줄리아)를 비롯해서, 유관순·김복순·서명학·김희자·국현숙 등의 재학생, 이애라·최금봉·박승일·채애효 등의 졸업생이 3·1운동을 적극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거나 심문을 받았다. 당시 국내 독립 단체의 자금을 해외로 전달하는 비밀결사 연결망에 속해있던 김활란은 선교사들과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아 영국성서공회 직원의 집으로 피신하여 늑막염을 치료했다(김활란, 62-68쪽). 1920년부터는 기도실에서 서원한 대로, 조선의 농촌 주민과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몽하기 위해 교사와 학생으로 ‘이화의 7인 전도대’를 결성해 한반도 이북 지역을 순회했다. 대학 학위를 가진 이화의 교사 신분, 영어 구사 능력, 분명한 기독교인 정체성 등으로 김활란은 1922년부터 한국 여성 기독교인 대표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해 5월에 북경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총연맹(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대회에 감리회 대표로서, 장로교 대표 유각경·김필례와 함께 참석했다. 이 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귀국 후 한국에서 YMCA에 대응하는 여성 기독 청년 단체 YWCA를 창설했다(74-76쪽).
국제 무대를 처음 경험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김활란은 북경에서 귀국한 직후 7월에 미국 유학을 떠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사과정을 밟았고, 이어서 1925년 6월에 보스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김활란의 유학은 선교사들 사이에서 이전부터 논의되어온 것으로, 이화가 한국인의 손에 운영되어야 한다는 장기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룰루 프라이를 비롯하여, 한국에서 활동한 많은 감리교 여성 선교사들이 졸업한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이 김활란의 첫 유학지로 선택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학 시기에 김활란은 한국 기독교 대표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세계여자해외선교회 임원회의, 세계YWCA 대회, 국제선교위원회 대회, 북감리회 총회 등에 참여하여 한국을 대표해서 발언했다. 특히 YWCA 대회에서는 일본YWCA와 구별된 한국YWCA가 개척회원국 자격을 얻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이 시기 김활란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견고히 했다. “마라톤 경주를 하는 사람이 골인을 할 때까지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듯이 나도 일을 향하여 달리는 동안 결혼을 생각할 단 한 번의 겨를도 없었다.”(100쪽) 아마도 이화에서 만난 많은 선교사 교장과 교사들이 그의 결심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결혼 후에는 도저히 경력을 이어가는 일이 불가능했던 당시 한국 실정을 고려할 때, 평생 비혼을 결정하여 남성에 종속되지 않는 여성의 자율적 주체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김활란은 한국 페미니스트 운동의 선구자라 불릴 만했다.
1925년 가을에 귀국한 후 김활란은 이화학당의 영어 및 종교 교수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4월에 학감으로 취임했다. 당시 교장은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 1885-1950)로, 첫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의 딸이자 한국에서 태어난 첫 외국인 여성이었다. 아펜젤러 재임기 1925년에 이화학당 대학과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전)로 발전했다. 김활란은 이 발전기에 아펜젤러 교장의 한국인 동반자로서 학교의 발전을 도왔다. 1928년에는 미국 북감리교회 총회가 경제공황에 따른 재정 악화로 한국 주재 감독을 없애고 필리핀 감독이 한국을 동시에 맡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참석한 그가 강력히 항의하여 결정이 번복되고 한국 감독직이 유지되었다. 이 대회 연설로 김활란은 한국 교계뿐 아니라 미국 및 세계 교계에서 남녀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도 지도력과 연설 능력이 뛰어난 한국 기독교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124-127쪽). 같은 해 4월에 김활란은 당시 세계 개신교계 최대 모임인 국제선교회의의 예루살렘 대회에도 YMCA 소속 신흥우와 농촌부 간사 홍병선과 함께 유럽을 거쳐 참석했는데, 유럽 여정 중에 덴마크 농촌으로부터 큰 인상을 받았다. YMCA가 주도하여 장로회와 감리회로 확장된 1920년대 한국 기독교 농촌운동에 덴마크 모델이 소개된 이유였다. 국제선교대회에서는 당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독교인 존 모트(John R. Mott)의 연설과 대회 진행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지도자의 이상적 모델을 발견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아펜젤러 교장을 비롯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동료들이 김활란을 다시 미국으로 보내 박사과정을 밟게 했다. 그는 뉴욕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 등록해서 여성교육과 농촌교육을 연구했다.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이미 언급한 대로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운동〉이었다. 학위를 예상보다 일찍 마치고 1931년 10월에 귀국하기 전 6월에는 《정말(丁抹)인의 경제부흥론》이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이는 박사과정 연구 주제를 이전에 경험한 덴마크(정말) 농업 현실과 연결하여 한국에 적용하려고 한 시도였다. 이렇게 해서, 김활란은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확보했다. 그러나 자서전에 따르면,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선풍적인 화젯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이 사명감을 갖고 있고, 쓸모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었다(139-142쪽).
학감으로 복귀한 김활란은 1936년에 안식년을 떠난 아펜젤러를 대신하여 교장직을 대리했다. 1939년에는 드디어 아펜젤러를 이어 이화여전의 교장이 되었다. 미국인 교장 여섯을 이은, 첫 한국인 교장이었다. 김활란의 교장직 취임은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일이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만주와 중국을 침공하며 전시체제에 돌입한 일본이 2차 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는 영미 선교사들을 적국 국민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1940년 11월에 미국인이 모두 한국을 떠나게 되는 상황에서, 김활란의 1939년 교장직 취임은 그에게 기회인 동시에 모험이자 위기였다. 일본이 한국인과 기독교인을 압제할 때 어느 정도 울타리와 방패 역할을 했던 서양인이 모두 떠나자, 학교와 교회 등 조직을 유지하는 이들에게는 일본에 순응하는 길 외에 다른 학교 유지 방법이 없었다. 호남의 남장로회나 서북과 경북의 북장로회가 1938년 어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일괄 폐교 정책을 취한 것과는 달리, 감리회는 일제 정책에 얼마간 순응하며 학교를 유지했다. 김활란은 바로 이 절대 위기 시기에 학교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잘 알려져있듯이, 이화는 충실한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보육소로 전락했고, 김활란은 부인 궐기 촉구 강연, 결전 부인대 강연과 방송, 징병 유세 등을 통해 한국 청년에게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선전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정현주, 123쪽).
해방 후 김활란은 1946년부터 정치 무대 일선에서 독립촉성부인단 결성, 국제연합 파리 회의 참석, 1948년 제헌의회 국회의원 출마 및 낙선 등으로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참여했다. 한국전쟁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잠시 전시 내각 공보처장직을 맡았고, 영자 신문을 발행하여 한국 소식을 외국인에게 알렸으며, 이화 동문을 중심으로 ‘논란이 많은’ 낙랑클럽 등의 위문단을 조직하여 민간외교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이화여전은 미군정 초기 1946년 8월 15일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이화여자대학이 되었다. 이후에도 그의 화려한 한국 대표 경력은 지속되었다. 대한여학사협회(1950), 한국여성단체협의회(1959)의 창설자이자 회장이었다. 다섯 차례(1956-1959, 1965) UN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국가 승인을 요청했고, 유네스코 총회에도 세 차례(1962·1964·1965) 참석했다. 1961년 9월에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직한 후에는 명예총장 및 재단이사장에 취임했다. 1965년 9월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에 임명되어 1970년에 사망할 때까지 활약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 한국인과 한국 기독교의 대표로 활동한 일을 큰 영예와 보람으로 여겼다(김활란, 261-277쪽).
오해와 해명: 부역
전술했듯, 김활란은 이화여전 교장이 된 1939년 어간부터(혹은 그 이전부터) 총독부의 정책에 순응했으므로, 해방 후 친일 부역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화(학당/여전/여대)와는 아예 동일시할 수 있을 만큼 장기간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한국과 미국 감리교회, 국제조직 YWCA, WSCF, IMC 등을 통해 한국과 한국교회를 세계에 알리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근대 시기 억압받던 한국 여성이 처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해준 여성운동가로서 공헌한 바도 컸다. 이런 공로를 세계가 인정했기에 막사이사이상(1963)과 미국 감리교 다락방상(1963)을 받았고, 대한민국 정부도 대한민국장(1963)과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1970)으로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나 오명도 분명하다.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었던 그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한 친일 부역자 명단에 김활란도 이름을 올렸다. 김활란은 자서전에 자신이 어떤 친일 행위를 했는지 소상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를 회피하지는 않는다. 몇 가지 사례를 예시하면서 행위 이면의 상황, 자신의 심리 상태 등을 밝힌다. 배경은 이미 언급한 대로다. 일제는 1930년대 이후 한국인 조직 전체에 전시체제 협력을 강요했다. 선두 대상은 교육계였고, 무기는 심사참배였다. 여전히 권위자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1930년대 전반기에 선교사들은 저항했지만, 하반기에 들어가면서 점차 힘을 잃는다. 모국 선교부와 한국 주재 선교회의 지침, 내부 회의 등을 거쳐, 교육 인퇴(引退)와 폐교를 결정하기도 하고, 신사참배를 결행하며 학교 유지를 결정하기도 했다. 감리교에 속한 이화는 후자에 속한다. 1939년에 아펜젤러가 물러난 교장직을 김활란이 승계하고, 이듬해에 선교사들이 반강제적으로 한국을 떠나면서 식민지의 한국인 교장 한 사람이 총독부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장영은, 121쪽). 다른 기독교계 교육 지도자(연희전문의 백낙준 등)와 사립학교 지도자(보성전문의 김성수·유진오 등), 기독교계 여성 지도자들(유각경·모윤숙·박인덕·박순천·임숙재·최정희 등)의 일관된 친일 선택도 집단 명분과 방어 논리를 구축하는 데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회한이 담긴 김활란의 자기 서사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때때로 나는 교장으로서 중요한 연설을 강요당했다. 나는 많은 일본인 간부 교직원의 보고 대상이 되어 가면서 일본말로 준비된 연설물을 낭독하곤 했다. 나의 일거일동은 샅샅이 상부에 보고되었고 연설문을 작성하는 사람은 정부에서 파견된 사람이었다. 연설문의 내용은 주로 학생들에게 태평양 전쟁을 일본측에 유리하도록 그 목적을 이해시키라는 것과 일본 정부에 협조하라는 요지였다. 나는 그 한 마디 한 마디, 나의 의사가 결코 아닌 말들을 옮길 때마다 고문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웠다. 그것이 거듭될수록 정신적 고통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러한 괴로운 연설을 할 때마다 학생들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나의 숨은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도 그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친 걸음으로 조용한 모퉁이를 돌아갈 때였다. 애처로운 표정을 한 학생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선생님, 기력이 없으신 같아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그는 나를 위로하려고 했다. 내가 무엇이라 이를 말이 없어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짓자 그는 믿음이 깊은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선생님의 깊은 마음을 잘 알아요. 오늘 하신 연설도 결코 본의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이 학교를 지켜 나가야만 하는 선생님의 처지를 저희는 마음 속으로 돕고 있어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진실은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거니까요.” 나는 그 따뜻한 마음에 접하고 마음이 밝아졌다. 학생의 손을 꼬옥 쥐어 주며, “쉬잇! 우리들은 따로 말이 필요치 않은 거야. 마음과 마음이 지키고 있는 한……. 자중해요.” 하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와 사랑만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 친구들이나 졸업생 중에도 나를 오해하고 등을 돌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교장직을 탐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굴욕적인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교장직에 머물려고 온갖 모욕을 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오해를 나는 받아야 했다. “흥, 김활란도 어쩔 수 없이 친일파가 되어 가는군!” (김활란, 163-165쪽)
급기야 1944년 여름에 강제로 동원되어 징병 유세를 다닌 후에는 영혼이 시커멓게 타버려 안질에 걸릴 지경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를 당연한 형벌로 여겼다. “남의 귀한 아들들을 죽는 길에 나가라고 권했으니 장님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남의 밝던 마음 어둡게 하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각오하면서 더듬거리는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졌다.”(174쪽)
자서전에 묘사된 김활란의 회한을 진정 어린 회개로 받아들일지, 위장된 자기변명으로 이해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다.
김활란, 《우월 김활란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65/1999).
장영은, 《변신하는 여자들: 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오월의봄, 2022).
정의숙 외, 《저 소리가 들리느냐: 김활란, 그 승리의 삶》(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6).
정현주, ‘김활란’, 《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118-127쪽.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