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평화교회의 등장과 협력의 발자취
[405호 평화교회 한 걸음]
‘역사적 평화교회’란 기독교 사상으로서 평화를 말하고 실천하는 아나뱁티스트와 퀘이커 등을 지칭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404호(2024년 7월호)에 실린 김홍석 대표의 인터뷰 ‘협력적 의사 결정을 일깨우는 평화교회의 발자취’ 참고. ― 편집자 주
때는 1683년, 바람이 살랑거리는 기분 좋은 어느 날, 콩코드라는 이름의 여객선이 신대륙 도시 필라델피아 항구에 도착하였다. 콩코드 안에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땅에 온 첫 번째 아나뱁티스트 이주민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북아메리카에 첫 번째로 정착하기 위해 이 배를 타게 된 이유는 영국 귀족 출신 퀘이커 교도인 윌리엄 펜 경에게 당시 왕이었던 찰스 2세가 부친이 진 빚을 대신해 하사한 아메리카 식민지 땅이 있었는데, 유럽 전역 소수 종파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약속하면서 이주를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도착한 메노나이트 같은 사람들은 저 먼 도시라는 곳에서 5천 에이커(약 6백만 평)의 땅을 경작할 수 있었고, 곧이어 온 아미시를 비롯한 아나뱁티스트 교인들은 펜실베이니아주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16세기 급진적인 종교개혁파이자 평화교회인 ‘메노나이트’와 17세기의 또 다른 평화교회인 ‘퀘이커’(친우회)의 첫 번째 협력이 시작된다. 유럽 전역에서 쫓기던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적 핍박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신앙을 후대에 전할 자유를 얻었다.
아나뱁티스트와 퀘이커의 등장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초기 등장한 급진적 혹은 근본적 종교개혁파로 불린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에 의해 주도된 종교개혁 와중에 그의 일련의 제자들은 더 근본적인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산상수훈과 초대교회의 모델을 온전히 따르기 위하여 가톨릭에서 행해지던 유아세례는 회심에 의한 세례가 아니므로 거부하고, 성인이 온전한 의지로 이루어지는 세례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주장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세례를 주었다. 훗날 이들이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점을 가진 종교개혁가들이 메노 시몬스의 지도하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중 야코프 후터를 따르는 이들은 초대교회처럼 재화를 공동 소유하는 공동체 형태를 발전해 나아갔다.1) 17세기에는 제이콥 암만을 따르는 이들이 전통을 고수하며 아미시 신앙 공동체를 이룩했다.
이들은 ‘공동체’ ‘제자도’ ‘평화’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실천하는 다양한 공동체를 발전해 나아갔다. 사료에 따르면 이들은 초기에 대단히 열정적으로 전도를 하였는데, 이들을 향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핍박 또한 대단히 심해 수많은 지도자가 화형을 당하거나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였다. 아나뱁티스트에서는 이들의 순교 이야기를 담은 책 《순교자의 거울(Martyr’s Mirror)》을 통해 역사를 기억한다.
퀘이커의 경우는 아나뱁티스트보다 한 세기 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찰스 1세의 왕당파와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 동안, 많은 사람이 구교와 신교 모두를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구도자[seeker]가 되었다. 그중에는 양치기이자 구두 수선공인 조지 폭스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구도 여행 중에 펜들 힐이라는 언덕에서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고 퀘이커 모임이 만들어진다.
그의 체험은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라는 생생한 음성을 듣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훗날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내면의 빛”이 있으며 이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믿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다는 생각은 곧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스스로를 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라 칭하였다.2) 이들이 가진 남녀평등 관점은 약 한 세기를 앞선 사상이었으며, 이후 퀘이커가 최초로 자발적으로 노예해방운동에 참여할 때 신앙 근거가 되었다.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여정과 상호 협력
아나뱁티스트는 종교개혁 초기, 급진적인 개혁을 외치며 유아세례와 전쟁 참여를 거부했다. 이러한 주장과 행동은 곧 구교와 신교로부터 대대적인 핍박을 받는 계기가 된다. 이는 단순히 신학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국가 제도와 정치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중세의 가톨릭교 국가에서는 유아세례를 기준으로 시민들에게 세금과 노역 등이 부과되었다. 그런 중 아나뱁티스트의 급진적 주장은 많은 종교개혁가와 농민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기에, 종교 국가의 시스템을 유지해야 했던 가톨릭과 개신교 국가들은 아나뱁티스트를 핍박하거나 통제하려 들 수밖에 없었다.
아나뱁티스트는 유럽 전역에서 체포, 고문과 화형에 시달렸다. 《순교자의 거울》에 적힌 순교자만 해도 8백여 명에 이른다. 이런 압박에 맞서 때로는 폭력적인 형태의 저항이 일어나기도 했으나3) 메노 시몬스를 비롯한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은 비폭력, 평화, 공동체라는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갔다. 핍박과 순교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나뱁티스트 그룹 사이의 상호 협력과 외부의 도움이었다. 초기 메노나이트 그룹은 연이은 핍박으로 커다란 재정적 어려움이 있을 때 스위스 형제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메노나이트 그룹은 다시 후터라이트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상호 도움의 정신은 북미에 정착한 아나뱁티스트 그룹이 유럽에서 러시아혁명과 양차 세계대전을 피해 온 아나뱁티스트 그룹을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울 때 결정적인 빛을 발한다.
아나뱁티스트에게 핍박과 고난으로부터의 피난을 가능하게 한 외부의 초대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이 글 초반에 서술한 퀘이커 교도인 윌리엄 펜의 초대로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일이었다. 이때 이동한 아나뱁티스트 그룹은 북미에서 신앙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특히 17세기 아나뱁티스트 그룹은 공업과 농업 분야에 뛰어난 역량이 보였고, 이는 토지를 개척하는 이주민으로서 커다란 이점이었다. 이들은 펜실베이니아주 북동부의 광활한 토지를 개척하고 경작함으로써 수 세기 동안 성실한 농부이자 부농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두 번째는 유럽을 떠돌던 아나뱁티스트 그룹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방에 정착하여 농토를 개간하도록 초대한 일이다. 이전에는 헝가리 지역에서 일정 정도의 세금을 내며 공동체를 이어가던 아나뱁티스트들은 정부가 군역을 핑계로 커다란 세금을 매기자 러시아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약 한 세기 동안 일정한 자치권을 가진 아나뱁티스트 공동체가 번성하였다.4)
퀘이커 신앙의 여정과 연대 정신
퀘이커는 등장 이후 내전의 혼란기 속에서 빠르게 전파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내면의 빛”을 지닌 자들이기에 평민이든 귀족이든 왕이든 여자이든 동등하게 존칭을 쓰고 인사할 때 모자를 벗지 않는 것으로 신앙을 표현하였다. 계급을 따지지 않는 존중은 이들을 다양한 산업군에서 신용 있는 사람들로 인식하게 하였으나 계급이 살아있는 17세기에 이들의 행동 양식은 큰 핍박을 가져왔다. 한 세기 전의 아나뱁티스트처럼 화형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감옥에 수감되었다. 크롬웰의 집권 시기에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누렸으나 왕정복고 후에는 많은 수의 신도가 감옥에 갇혔다. 해군 제독의 자제인 윌리엄 펜조차도 퀘이커로 개종한 후, 인생의 수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극적이게도 퀘이커를 탄압하던 찰스 2세는 윌리엄 펜 아버지의 전쟁 교부금의 대가로 현 펜실베이니아주 지역을 펜에게 하사하였다. 이에 따라 퀘이커 교도는 종교와 사회에 대한 이상을 실험할 새로운 땅을 얻게 되었다. 윌리엄 펜은 이곳에서 기독교 신앙의 소수 종파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주었으며, 주 정부가 퀘이커의 이상에 따라 운영되도록 하였다. 유럽의 다양한 소수 종파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이들로 인해 초기의 계획도시인 필라델피아는 미국 건국 후 10년간 미국 수도로 사용될 만큼 번성하였다. 이후 독립전쟁 전까지 펜실베이니아주의 퀘이커는 주 의회를 이끌면서 퀘이커 방식으로의 정치를 펼쳤고 이 시기를 거룩한 실험(Holy experiment) 시대라고 불렀다.5)
역사적 평화교회의 역할
퀘이커의 초대로 이루어진 역사적 평화교회의 만남은 이후 다양한 인권운동에서,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대체복무제를 위한 입법 활동 연합을 통해 빛을 발하게 된다. 수 세기 동안 핍박을 거치며 응축한 이들의 비폭력과 평화에 관한 깊이 있는 고민은 세계대전 이후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수단으로 질서를 정립해야 하는 국제사회에 도움이 되었다. 비폭력 방식으로 휴전과 평화적 협상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퀘이커의 경우, 일찍이 모든 사람에게 “내면에 빛”이 있다는 신앙의 기초가 수직적인 목회 체계 대신 협력적 의사 결정 체계를 만드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교회에서의 남녀평등,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위한 솔선수범을 이끌었다. 이들은 남북전쟁 무렵에는 미국의 노예해방 네트워크의 핵심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아나뱁티스트의 경우, 오랜 피난의 역사 속에서 끈끈한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문화를 만들어내었고, 이는 지금도 후터라이트 공동체, 아미시 공동체 등에서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 평화교회는 또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구호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립하여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퀘이커는 미국과 영국에서 친우 봉사회를 세워 세계대전과 국제분쟁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1949년 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아나뱁티스트의 경우, 러시아혁명과 양차 세계대전 때 어려움을 겪는 유럽의 아나뱁티스트 형제들의 구호와 이주를 위해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를 설립한 후, 국제 구호와 평화를 위한 활동에 힘쓰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경상북도 경산에 메노나이트 직업학교를 세워 전쟁고아들과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에게 낙농과 농업을 비롯한 전문 기술을 가르쳤다.
역사적 평화교회의 원동력
평화교회와 공동체는 어떻게 시련의 시기를 견뎌내고 평화신학의 산파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 역사적 평화교회는 핍박과 위기 앞에서 상호 도움과 연대를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아갔다. 물론, 반목과 분열의 역사도 있다. 아나뱁티스트의 다양한 갈래들은 공동체의 수많은 갈등에서 촉발되었고 퀘이커 또한 예배 방식과 타 종교와의 관계 등을 두고 많은 분열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를 통하여 종교적 자유를 얻은 일이나, 앞으로 소개할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대체복무제를 위한 입법을 추진할 때, 그리고 다양한 국제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할 때마다 이들은 협력과 연대를 통해 소수 기독교 종파의 한계를 극복하고 놀라운 역사적 진보를 이루었다.
둘째, 역사적 평화교회는 종교개혁 시기에 신앙을 지키며 받은 박해에 대한 트라우마를 다른 핍박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전환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아나뱁티스트 공동체가 난민과 이주민들에게 베푸는 환대를 경험했고, 퀘이커 봉사 기구가 아시아의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들의 연대 정신은 어느 한 리더의 즉흥적인 결정이나 선교 전략이 아닌, 역사의 아픔 속에서 캐낸 깊이 있는 신앙의 실천이었다.
한국의 개혁적인 신앙인이자 아나뱁티스트 교인으로서 나 자신에게 질문하곤 한다. 나는 한국 사회와 기독교의 위기 앞에서 협력과 연대로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인가? 그동안 나는 내가 경험한 구조적 폭력과 트라우마를 내가 적대시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과 보복의 에너지로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과연 나는 어렵고 힘든 내 이웃을 위해 얼마나 공감하고 연결하고자 나의 에너지를 사용하였는가? 오늘이 가기 전, 역사적 평화교회 교인으로서 “내면의 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1)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홈페이지(kac.or.kr)
2) 퀘이커라는 표현은 이들이 예배할 때 감명을 받아 “몸을 떠는 것”을 비하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친우회 를 지칭하는 특정한 이름이 되었다.
3) 뮌스터 반란
4) 신앙의 관점에서는 이 두 가지 초대는 하나님이 그루터기처럼 이들을 남겨두시기 위해서 보호하신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사적, 사회적 측면에서는 이 두 가지의 초대를 다른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 주와 러시아로의 이주 모두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지배 그룹이 부여한 임무는 농지 개간이었다. 펜실베이니아주의 경우 윌리엄 펜의 통치 기간 비교적 평화롭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선주민들의 터전을 이주민의 경작지로 만드는 것이었고, 러시아 남부에 예카테리나 대제가 메노나이트 그룹을 초대한 이유도 유목민의 땅이었던 지역을 개간하 여 곡창지대로 만드는 일이었다. 비록 일차적으로는 전쟁과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비폭력 평화를 신앙으로 삼았지 만, 전 지구적 식민 지배와 제국의 역사 속에서 수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5) 다른 한편으로 윌리엄 펜은 펜실베이니아주라는, 개인이 소유하기 어려운 정도의 부를 가진 대가를 톡톡히 치 른다. 자신의 대리인이 자신을 속여 펜실베이니아주의 소유권을 도둑질했었고 이를 되찾기 위한 소송에 많은 시간 을 쏟다가 안타까운 말년을 보냈다.
김홍석
평화교육을 비롯해 건강한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 ㈜조율컬렉티브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