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다움을 회복하자? 어떻게?

[405호 사회선교 더하기]

2024-07-31     전남식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탈교회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교회가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린이들로 북적거리던 교회는 이제 노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탈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탈기독교시대 교회》(두란노)는 미국 교회의 탈교회 현상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2020년 미국 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50% 이하로 떨어졌고, 미국 교회 중 69%가 100명 이하 규모의 작은 교회이고, 출석하는 교인 중 70%는 250명 이상 다니는 교회에 나간다. 작은 교회들은 사라지고 중대형 교회만 살아남는 형색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다. 교육 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이 교회에 남아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저소득층, 이민자, 난민, 유색인종 등이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해 주었던 교회가 지금은 그들을 교회 가족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자선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그들을 섬기는 경우가 많다. 현대 미국 교회들은 재정적인 이유로 부유한 사람들을 겨냥하고 그들이 편안해하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적인 환대는 문제가 있는 곳에 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위의 책, 51쪽)

위의 글에 따르면 현대 교회는 초대교회 모습과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초대교회의 핵심 정신은 환대였다. 성경에서의 환대는 가난한 사람을 향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 14:12-13, 개역개정) 존 맥스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은 타자를 향한 환대를 통해 해소 내지 극복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타자를 향한 환대의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말이다.

청년 시절 같은 교회에 다녔던 자매님을 우연히 어떤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남식 형제, 지금 어디 살아요?” “천동에 살고 있어요.” 천동이라고 말하고는 이 지역이 어디쯤에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천동이요? 나 그곳 잘 알아요. 우리 교회에서 매년 연탄 나눔 하던 곳이거든요.” 그에게 천동은 겨울철에 연탄을 때야 하는 곳이고, 자신이 속한 교회는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곳이었다. 아마도 그가 속한 교회에서는 연탄을 때면서 겨울을 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 교회의 다수는 중산층 지식인이다. 그들은 저소득층에게 연탄을 나눠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위무하는 자들이다.

《탈기독교시대 교회》에 따르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된 이유는 교회가 문화 전쟁만 강조하고, 타자에 대한 사랑·온유·친절·베풂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인종을 비롯한 성(젠더)을 차별하는 데 있었다. 교회가 거룩한 삶은 곧 타자를 향한 차별·혐오·배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거룩한 것이 부정한 것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셨고, 당시에 부정한 자들에게 손을 대어 고쳐주셨는데 말이다.

7월 6일, 대전에서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축복 부스’ 앞에 모인 성서대전 회원들과 참가자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동질성 집단의 위험성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동질성 집단이 되고 말았다. 동일 수준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교회가 아니라 동호회다. 교회 안에서 일명 거룩한 자들이 저소득층, 이민자나 외국인노동자, 난민, 장애인, 성소수자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한 공동체가 동질성 집단이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일까? 타자에 대한 배려, 즉 환대의 태도가 사라지고, 인권 감수성이 결핍된다. 그렇게 되면 자동으로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고, 이는 폭력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올해 7월 6일에 대전에서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되었다. 1천여 명의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시간이었다. 성소수자와 그들을 응원하는 앨라이(ally), 시민사회 단체 및 종교 단체가 참여했다. 성서대전도 참여해 존재 자체로 축복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기도해주고,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결혼 5주년을 뜻깊게 보내기 위해 참석했다는 부부, 성소수자에게 축복해주는 목사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기도받고 싶다는 비기독교인 동성 커플 등을 만났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목사인데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당해 교회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20대 초반의 성소수자 여성이 목사의 기도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정말 모처럼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불이익과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기꺼이 퀴어 축제에 참여한 성서대전 동지들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축제의 마지막 순서는 거리 행진이었다. 출발을 앞둔 시점에서 반동성애 단체, 일명 ‘거룩한방파제’ 사람들이 행진을 막아섰다. 막아선 것도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우리를 더욱 당혹하게 했던 것은 그들의 복장이었다. 흰 셔츠에 검정 바지. 수백 명이 같은 색깔 옷을 입고 적개심에 이글거리는 눈빛과 함께 고함을 질러댔다.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그 순간 동질성 집단의 폭력성이 상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20년 전 영국 유학 시절, 만 다섯 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찾아간 학교 모습이 떠올랐다. 교실에 스무 명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앉아있었는데, 모두가 금발, 푸른 눈동자, 백인이었다. 순간 거부감이 밀려왔다. 이 학교에 오래 다닐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딸은 전교생에게 인종차별을 당했다. 다음 학기에 다인종이 어우러지는 학교로 전학을 가야만 했다. 그곳에 가서야 딸은 학교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한병철은 《폭력의 위상학》(김영사)에서 부정성의 폭력을 말한 보드리야르를 비판하면서 이 시대의 주도 질병은 긍정성의 폭력에 기인하는 심리적 질병이라고 말한다(142쪽). 그는 내부로 향하는 파열적(implosiv) 폭력과 외부로 향하는 폭발적(explosiv) 폭력을 구별하면서, 동질 집단이 파열적 폭력을 행사할 위험성이 높다고 진단한다(144쪽). 퀴어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색깔의 옷차림을 하고, 무지개 깃발을 들었다.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고, 포용하면서 모두를 환대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 팔레스타인과 연대했다. 한마디로 축제였고,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타인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할 때, 다양한 색들이 어우러질 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에서 한병철은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 곁에 머무르면서 다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발현된다고 했는데, 그 말은 진리였다.

공간 채움의 미학

예전에는 인류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벨탑 사건의 저주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때 언어가 통일되었다고 배웠다. 바벨탑 사건 이전으로의 회복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연 그 말이 맞을까? 성령을 받고 각종 방언으로 기도했던 것이지 모두가 동일한 방언으로 기도한 것은 아니지 않았던가! 다양한 방언으로 기도했지만 모두가 그 언어를 이해했다는 데 방점을 둬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공간 창조와 공간 채우기 두 단계 과정을 거치셨다. 공간이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장소다. 공간은 여유, 여백이 있는 곳이고, 그곳에서 생명체는 숨을 쉴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공간을 확보하신 후 좋아하셨다. 그리고 그 공간에 각종 동식물로 채우셨다. ‘각종’이란 ‘다양성’을 뜻한다. 각종 동식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 ‘좋다’는 곧 ‘선’이고, ‘옳음’이다. 다양한 개체들이 어우러지는 것이 아름다움(미)이요, 좋은 일(선)이며, 그것이 진리다. 인간을 진흙으로 빚으신 후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시자 진흙이 생명이 되었다. 신과 인간의 최초의 만남이었고, 거룩한 입맞춤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려움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와 더불어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용기를 내어 사회 속으로 나갔다.

이것이 진정한 거룩이다. 동일 색상의 옷을 입고, 동일 부류의 사람들이 똘똘 뭉친, 타자가 없는 무균실은 밀실이다. 숨을 쉴 수 있겠으나 깊은숨을 들이쉬거나 내쉴 수는 없다. 제대로 숨 쉴 수 있는 곳은 공간이 될 수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오히려 추함을 넘어서 타자를 향한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광신적 집단이 되기 십상이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한 곳이 되었기에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 따라서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발걸음을 돌이키고자 한다면 공간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비롯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소수자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공동체가 초대교회였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어느새 우리는 잊고 지내온 것이다.

교회는 하늘나라와 땅을 연결하는 가교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고,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존중받는 곳이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 사랑의 입맞춤을 하는 공간, 즉 계급·인종·언어·성별을 초월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다!

전남식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모토로 대전에서 목회하는 꿈이있는교회 목사이자 성서대전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