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민주노총 지부장이 되어서는

[405호 커버스토리]

2024-07-31     익명

난 공공기관에서 학교를 돕는 국가시책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계약직이지만 해마다 계약을 갱신하며 일한 지 13년째다. 3~4년 간격으로 승진도 했다. 급여는 낮은 편이지만 매년 조금씩이라도 올라 감사하다. 우리 회사는 직원 중 3분의 2가 비정규직이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의원들에게 지적을 받지만 바뀌지 않는다. 특히 우리 부서의 경우 ‘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몇몇 보직자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인 나는 몇 해째 팀장으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나는 우리 회사의 일원임이 자랑스럽다. 지금 하는 일은 대학 전공과 관련이 없고 계획했던 일도 아니다. 졸업 후 우연히 ‘봉사 활동’을 하다가 이 직업을 얻었고 그 경험을 인정받아 지금 직장에 들어왔다. 그 덕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산다. 지금껏 이 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 회사 생활이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니다. 나의 젊음을 바친 직장 옆에는 양재천이 흐르고 있다. 내게 양재천은 고되게 일하면서도 조롱을 견뎌야 했던 ‘그발 강가’다. 주님의 보좌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와 이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길, 구원을 구하는 자리였다.

‘해고’가 아니라 ‘종료’라고 했다

우리 회사에는 해마다 새로운 과제가 추가로 주어진다. 회사에 새로운 일이 들어오면 그 일을 할 사람들을 새로 채용한다. 일이 잘되려면 ‘경험 있는 사람’인 중간관리자도 필요하다. 기존 일원들은 현재 자기가 맡은 일에 소명 의식과 책임감이 있기에 새로 시작하는 낯선 업무를 하겠다고 나서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았다. 새로운 팀을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길래 나는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팀을 옮겼다.

새 팀에서 내 소개를 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 회사는 언제 어떻게 와서 지금껏 무엇을 했는지, 대다수는 크리스천이라 신앙고백을 담아 나눴다. 새로운 나의 형제, 자매들과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야 내가 가장 오래되었지만 새로 맡은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새로 만난 분들은 이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정부정책사업’의 특성이나 우리 회사의 업무 진행 방식이 낯설었기에 서로 존중하며 빠르게 ‘원팀’이 되었다. 최근에 부각된 기후환경과 같은 문제를 학교에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는 업무였기에 같이 미래를 내다보며 대안적인 논의를 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우리는 의미 있는 결과물을 하나씩 내놓으며 업계(?)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새로운 팀의 팀장으로 3년째 일하던 어느 날 4년 차에 해야 할 일을 계획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발주처에서 갑자기 ‘죄송하다’라며 사업 위탁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생각할수록 분했다. 이러려고 우리가 이렇게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했나? 일자리를 잃게 될 수 있어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비정규직이어도 2년 이상 일했는데 회사 내 ‘다른 일’을 맡게 되겠지 싶었다. 우리 회사는 매년 그런 위수탁 사업이 수백억 원 규모로 수십 개가 진행되기에 자연히 일부는 중간에 중단되기도 하고 또 많은 일들이 새로 시작되기도 한다. 사업은 끝나더라도, 일자리는 유지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발주처와 별개로 기존 사업의 연장선에서 관련 사업을 수주하고자 노력했다. 그 무렵 전 정부에서 임명받아 사퇴 압력을 받는다던(?) 대표가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하던 일이 없어지게 되었으니… 우리를 ‘해고’하는 것이 아니고 계약을 연장할 수 없어 ‘종료’되는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해고’ 통보한 인원보다 더 큰 규모로 새로운 과제, 다른 과제를 담당할 인력을 새로 채용하겠다고 공고했다. 현재 있는 직원들을 나가라고 하면서 ‘제한 경쟁’이라든지 어떠한 해고 방지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어쩔 수 없다’라고만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원래 있던 팀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라고 선심을 썼다. 우리 회사에는 2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 직원들이 상당수였기 때문에 회사가 술렁였다. 함께했던 형제, 자매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불행한 해고를 막아보고자 ‘공인노무사’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자문을 요청했고, 법률 의견서(현행 법률, 판례 등을 고려할 때 이는 ‘부당해고’임)를 받아 회사 대표(대행)와 담당 부서에 전달했다.

혹시 ‘저항’해 보셨어요? 저항은 처음이라…

우리 회사에는 삼성전자에도 있는 노동조합이 없다. 노동자 측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게 다 우리 회사는 ‘노조’가 없어서 그래, 푸념할 뿐이었다. 특정 전공을 중심으로 대다수는 학계 선후배이고 사제 관계도 있어 노조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다들 노조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었지만, 늘 같은 질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위원장은 누가 맡을 건데?”

회사의 부당해고(사측 입장은 비정규직원의 ‘고용계약 기간 만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응하려면 노동조합이 필수였다. 긴 투쟁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는 조언과 권고가 이어졌다.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한 만큼,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나의 동료, 아니 나의 형제, 자매가 부당하게 퇴직해야 하는 상황에서 침묵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민주노총에도 들어가자, 그래서 쫓겨난 이들이 명예롭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고용 안정, 처우 개선이라는 명확한 필요를 사측에 ‘부탁’만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지 말자. 우리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자고 했다.

반응은 싸늘했다. 없었던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만들기만 하면 다 가입할 줄 알았는데…. ‘살아남은(?) 우리까지 피해를 당하면 어떡하냐?’ ‘현 정부가 노조에 얼마나 적대적인데 무슨 짓이냐?’ ‘저항하면 더 가혹해질 테니 저항하면 안 된다’라는 말이 많았다.

회사 특성상 우리 동료들은 많이 배운 분들(기본 석사학위 이상)임에도 우리 헌법이 노동삼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관심했다. 일을 할 때 ‘관련 근거’가 필요한 것처럼 노조 관련 얘기를 할 때마다 ‘헌법(제33조)’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약칭: 노동조합법)을 먼저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스스로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법률로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단단히 일러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라고 하면 뭔가 불법적이고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다.

비밀리 노동조합을 만들고 사측과 맞설 수 있는 실제적인 대응을 위해 민주노총 소속 산별노조에 가입했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 말들을 들었다.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가입할 줄 알았던 같은 계약직 동료들 중 절반 정도만 함께해주었다. 나는 늘 감시를 받는 것처럼 책잡히지 않으려고 개인 휴가를 쓰며 활동했고, 근태 등 철저한 자기 검열 속에 살았다. 그 무렵 나는 힘들어서인지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 나만 살지 않겠다고 형제, 자매인 내 동료를 사랑하니까 싸우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10년을 넘게 일한 회사에 책임감이 있었다. 우리 회사를 사랑하고 우리 동료들을 사랑하니까 우리 회사가 더 좋은 회사가 될 수 있도록 사측과는 다른 관점으로 의견을 내고 협력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왜 내 마음이 이렇게 힘들지? 이러다가는 부당해고를 당한 나의 형제들을 내가 더욱 원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침묵하며 주님 앞에 머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다른 사람이 안 한다고 하는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나서서 일부 동료들에게 지지받고 ‘의로운 일’을 한다고 칭찬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일을 벌인 것은 욕먹기 싫어서, 나쁜 사람 되기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나 사실 되게 자기중심적이잖아. 나, 나밖에 모르는 놈이잖아아(아내랑 싸울 때마다 늘 듣듯이)! 그런 내가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쁜 사람 안 되겠다고 주변에 더 큰 폐를 입히는 사람이 한둘인가?’

해야 할 일 다 해가면서 ‘내돈내산’으로 노동조합을 하려니 힘들고 피곤해서 도망치고도 싶었다. 나를 목양하는 교회 간사님께 기도 부탁을 했다. 간사님은 노조든 뭐든 ‘사랑과 정의가 같이 있는 십자가 사랑으로 해야 한다’라며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아내와 ‘부부교회’로 원팀으로” 함께해야 한다고 했다. 기세를 이어가려고, 헨리 나우웬의 《기도하라 저항하라》라는 책도 꺼내 읽었다. 기도는 내가 어떻게든 하겠는데, 저항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나 두려운데… 나 피곤한데…. 내가 느끼는 불편함에 직면해야 했다.

난 뭐가 그렇게 스트레스이고 뭐가 이렇게 두렵지? 그러면서 내 속마음을 보았다. 노조로 사측과 대면해서 직접 싸우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짜 내가 두려웠던 것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느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한다는 현실이었다. 대외적으로 “사랑해서” “정의롭게” 운운했지만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나 또한 뭔가 포기하고 싶지 않고, 잃기 싫다. 왜 노조에 가입하지 않느냐고 내가 욕하는 분들과 너무 똑같았다.

업무도 바쁜데, 노동조합 세우는 일까지?

장래를 생각해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으로 하느라 앉아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무리해서라도 둘 다 멋지게 해내고 싶었다. 그렇다. 내가 두려운 건 ‘악한 사측과의 투쟁’이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내 욕망과의 투쟁’이 두려웠다. ‘네가 진짜 간절히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주님의 물음 앞에서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주일예배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나는 누구인지 생각하며 투쟁 의지를 고취하는 정신교육 시간이다. 힘들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같이 이기적인 놈이 이런 고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일하시는 증거다. 노조 만들고 긴장감 속에 한 명 한 명 사람들을 만나고 조합원 수를 늘려갈 때 내 마음은 전투력에 불타오르기도 했고, 아! 이렇게 해서 이길 수 있을까? 낙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주님은 내게 도망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설교를 들어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이 신앙생활의 영역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에 합당하게 사는 것임을 새겼다. 나의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에 더하여 내가 처한 상황과 맥락으로는 우리 직장에 노동조합이 잘 세워지도록 하는 게 (내가 염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날 향한 주님의 선명한 부르심이었다.

나만 생각하지 않고 나보다 더 열악한 대우를 받는 선생님들, 노조가 만들어지기만 기다렸다는 경비, 미화 선생님을 만나고 섬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는 평소 인사는 잘하지만, 그뿐인 사람이었다. 사교적으로 관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 많이 다니는 곳을 싫어하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로 다니길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치 ‘원목’ 또는 ‘사목’ 같은 마음으로 여기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무척 부담스러웠다.

원수야! 이 ‘말씀’이 너를 살린 거야

부당해고를 당한 분 중에 이직하며 다른 길을 찾아가신 분도 있지만, 네 분이 끝까지 남아 법의 판단을 받겠다고 지역노동위원회(지노위)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다. 정신적으로 몹시 소진된 당사자들이 포기하지 않고 잘 견뎌주었다. 우리를 대리한 노무사님의 도움으로 드디어 ‘부당해고’라는 판정을 받았다. 아! 이 당연한 결과를 받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어려웠나! 우리는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내고 부당함을 호소했다. 곧 일간신문과 지역 방송 등에 우리 회사 비정규직 직원들이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지역 시민단체와도 소통하고 연대를 도모하게 되었다.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으니 이제 곧 복직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 거라 기대했지만, 회사는 불복했다. 벌금(이행강제금)을 내는 것도 감수하겠다며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 재심을 청구했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구제 신청을 했듯이 회사도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증오가 부글부글 치밀어 오르는 걸까? 폭력이라도 쓰고 싶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이런 말씀 앞에 회개하고 감화와 감동을 받지 않는다. ‘야! 이 말씀 없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원수 같은 사측 인사들을 미워하고 저주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예배를 드리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지, 미워하지 말고 잘 싸워야지 결심하지만 쉽게 무너진다. 그때 내가 바로 그 원수 중의 원수였잖아. 나도 용서받고 용납받았잖아, 예수 닮는 게 인생의 목표잖아, 회사에서도 ‘목자’로 살기로 소원했잖아. 미워하는 마음을 주님께 올려 드렸다. 꾹 참고 ‘배운 대로’ 설교하곤 한다.

“우리의 인간성을 잘 지키면서 조금만 버팁시다. 지금 우리는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책을 읽으며 이 비인간적인 압제로부터 우리의 인격을 지켜야 합니다. 해고당한 것도 억울한데, 우리의 소중한 인격과 건강까지도 상하면 더 억울하잖아요.”

나의 노동조합 동료들 대다수는 광화문 촛불집회조차 가보지 않은 분들이었다. 지부 창립총회 때 노동의례가 있어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등을 해야 하는데 가능할까? 걱정했다. 총회에서 단독 후보였던 나는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모였나요?’ ‘저는 어쩌다 이 앞에 선 지부장이 되었나요?’ 우리가 노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렸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취임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사 간 첫 상견례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사측에서 회사 발전을 위해 애쓰는 것처럼 우리 노동자들도 각자 자기 자리에 우리가 사랑하는 회사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노위 재심 청구하는 것은 알겠으니, 지노위 판정대로 해고자들을 복직은 시키라고 요구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만 행정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복직이 미뤄지고 투쟁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돈은 돈대로 더 들고 내부에서 불만이 나왔다. 모두 지쳐간다. 현재 부당해고 투쟁은 법적으로 다투고 있으니 이 법적 대응을 이기는 일이 중요하다. 지노위에서 이겼으니 중노위에서도 이길 확률이 높다. 그런데 질 확률을 배제할 수는 없다. 승리로 이끈 노무사를 다시 쓰면 확실히 이기겠지만 돈이 문제다. 그만할까?

힘들지만 우리가 지금 애쓰는 것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다’ ‘이득이 된다’라는 말에는 한계가 있다. 지속 가능하지 않다. “혜택이 뭔가요?”라고 먼저 물어오지만, ‘편익’을 따라서만 움직일 수는 없다. 그래서 부탁을 시작했다. “그렇게 같이 싸우는 것이 선생님한테만 좋은 게 아니라 지금 같이 싸우는 다른 분들에게도 좋아요” “서로 도왔으면 좋겠어요” “뭐가 좋냐고요? 선생님은 몰라도 선생님 동료들에게, 선생님 팀원 선생님들에게는 확실히 좋아요.”

다시, 기도하라

회사 안에서 나를 향한 이런저런 모양의 기대감을 느낄 때가 있고, 나를 보는 불편한 시선과 적대감도 느껴진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로 살고 싶은가? 인상 쓰며 한번 건드려 봐, 센 척하고 싶은가? 있는 척 아는 척 뽐내고 싶은가? 무력하게 매가리 없이 살 건가?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은가?

나도 사랑하기 힘든데…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거울을 보며 “사랑하자”라고 다짐해야 하는데, 거울 속엔 나는 없고 낯선 아저씨뿐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주 아프다. 연로하신 부모님도 자주 병원에 가신다. 나 자신 내 가족 챙기기도 이렇게 버겁다. 회사를 사랑한다고 동료들을 지키겠다고 호기를 부렸지만, 아내와 큰 소리로 다투는 내 모습을 보면 내 삶도 대책이 절실하다. 이런 나의 삶에 하나님이 드러날 수 있을까? 나의 깨어진 모습을 통해서도 예수님이 보일 수 있을까?

사실 나도 세련되고 지적이고 유능한 모습으로 살고 싶다. 나도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바라는 삶과 실제 내 삶은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다. 내 인생의 자리에서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직면해야 할 것 같다. 주말에 아내가 가정교회 나눔을 이끌며, 마지막으로 무엇을 기도하고 싶은지 물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라고 배우지 않았나. 나는 정답을 잘 알기에 깨어지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깃든 존재로 감히 ‘사랑’으로 동료들을 마주하고 사랑으로 싸우며 화해의 직분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의 로망,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욕망하는 모습이 아니어도 좋겠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는 목회자도 선교사도 아니지만, 만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삶에 관심을 두고, 그들을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이며, 목소리를 높여 함께 싸우려 한다. 깨어진 내 모습 속에 조금이나마 예수님이 보이길… 그거면 된다는 마음으로.

익명
모태신앙인이지만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모든 일상이 신앙생활의 영역임을 뒤늦게 인식했다. 그러면서 매일 출근하는 나의 ‘회사’가 주님이 보내신 ‘사역지’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직장 내 부당해고에 저항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올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기도하고 저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