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몫의 질문을 짜는 모임

[405호 커버스토리]

2024-07-31     유상희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2016년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해였다. 매일 새로운 뉴스거리가 쏟아지는데 기사 한 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는 부끄러웠다. 그러다 당시 큰 화두였던 사드 배치 문제를 첫 모임 주제로 다룬다는 홍보물을 보고 한 동아리에 덜컥 지원서를 냈다. 그렇게 지원한 ‘한반도 평화 동아리’는 결과적으로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매주 동아리 모임을 하면서 한(恨) 많은 현대사와 분단 문제에 대해 배웠다. 모임은 밤늦도록 이어져 때때로 성토의 장이 되기도 했다. 고민과 걱정, 형편, 처지가 한데 얽혀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고 나면, 이 사회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서로에게 있는 어려움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이 뒤따랐다. 나는 그때 동아리 모임을 이끌던 선배를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또 존경했다. 선배가 가자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보고 싶었다.

그해 말 광화문도 그랬던 것 같다. 유독 추운 겨울날 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경찰과 몸싸움하다 스피커와 유인물을 모조리 빼앗겨버린 일도 이제는 어렴풋한 기억이 됐다. 그맘때는 주말마다 피켓을 들고 지하철에 타면 한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한반도 정세를 알리는 연설도 했다. 그나마 그런 방식의 대학생 실천이 가능한 때였다. 동아리 선배들은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를 외치며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텐트 치고 농성했다. 나도 소녀상 바로 옆에서 열리는 집회엔 자리를 지켰다. 매해 5월엔 광주를 찾았고 방학 땐 제주 4·3 기행을 떠났다. 노조가 복직 투쟁을 벌이는 현장에서 간담회를 진행하거나, 미군 기지가 들어선 마을에서 농활을 하며 여름을 보내기도 했다. 동아리에서 울고 웃었던 기억들이 내 대학 생활을 채웠다. 좋았던 순간을 뒤로하고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선배들은 모두 떠났다. 얼마 없던 동기와 후배들도 다 연락이 끊겼지만, 나는 아직 대학에 남아 동아리를 하고 있다.

(아직도) 동아리를 하는 이유

주요한 동아리 활동은 시사를 주제로 뉴스도 보고 책도 읽는 것이다. 함께 배우면 좋을 주제를 꼽아 학기 활동으로 다룬다. 노동, 역사, 외교, 정세 등 다양한 주제로 학기 모임을 진행한다. 대학 내내 해온 동아리지만 모임을 이어가기란 매 학기 쉽지 않다. 학기가 시작할 무렵 모집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잘 모르는 친구들도 한마디씩 꼭 하며 지나간다. “이런 동아리는 대체 누가 해?” 모집도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한두 명 모였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문턱이 낮은 학내 동아리 특성상 다양한 전공과 학번, 서로 다른 경험과 고민을 품은 학우들이 오간다. 그럴수록 가지각색 의견과 관점을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간혹 최소한의 도리마저 동의하지 않는 학우를 만나는 일도 있다. 쿠팡의 가혹한 노동환경과 산재를 다루면 ‘다 돈 받고 한 일인데 그렇게 싫으면 그만두면 될 일 아니냐’ 따져 묻거나, 참사와 재난을 다뤄도 나 몰라라 하는 정부 책임자보다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이 더 잘못이라는 투다. 바야흐로 ‘누칼협’1)과 ‘알빠노’2)가 횡행하는 대학가다. 그 말을 듣고 열을 내는 나를 보고선 스스로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듯한 태평한 얼굴. 사실은 그 말이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씁쓸하다. 단순히 이쪽과 저쪽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사정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는 더욱 그렇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학교에 어느 한 명 한가한 사람이 없다. 아르바이트나 교내 근로를 하면서 학점 관리도 하고 대외 활동도 하는데 속마음은 늘 외롭고 괴롭다며 기진하고 탈진하는 후배들을 계속 본다. 모임 이후 뒤풀이 자리에서 고민이 있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취업과 진로다. 딱히 쓸 데는 없어도 방학마다 각종 자격증과 어학 시험을 준비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단박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이 사회에서 무엇이든 한다. 동아리를 순회하며 특색 있는 경험이라도 쌓거나 학회와 소모임,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적을 수 있는 공모전을 준비하며 틈틈이 인턴 지원서를 낸다. 자신을 돌볼 여유 없이 정신없이 ‘갓생’을 살아야 취업을 위한 ‘자격’을 얻는 것 같다고 말한다. ‘목표하는’ 기업과 사회의 기준으로 자신에게 자를 대고 줄을 긋고 실컷 가위질한다. 그렇게 3학년쯤 마치고 나서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져 버리는 친구들을 종종 봤다. 그 결과 내가 나일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고 동굴에 가둬버린다. 동아리를 하며 갓생과 은둔, 그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걸 아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혼자 등허리에 모든 짐을 지다 보니 사는 일은 팍팍해진다. 나와 관계없어 보이는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긴 더욱 어렵다. 어떤 사안에 대해 내 입장을 가지는 건 그 자체로 낭비다. 그렇게 살다 보니 세상의 물결에 깎이고 뒤섞여 희미해지고 말았다. 내 것인지 다른 누구의 욕망인지 모를 것을 얻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내어주고 마침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까 봐 자꾸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내내 압박 속에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모임을 한다고 달라질 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동아리에서 하는 일이라곤 어쩌면 지루하고 무능력해 보이는 이야기를 온 마음을 담아서 하는 것이다. 뉴스를 함께 본 후에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까?’ 질문을 던지면 다양한 해법들이 오간다. “저 높은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되묻기도 한다. 해결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지 생각해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방치된 구조하에서 발생한 책임을 오로지 개인이 떠안게 되는 대부분의 사안을 접하면 먼저 피해자의 이야기를 찾아 듣는다. 그러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왜 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올바르게 해결되기 위해선 누가 나서야 하는 건지 묻고 고민해본다. 가장 강력한 스피커만 켜두고 크게 들리는 소리에만 귀 기울이다 보면 정부와 자본의 입장이 꼭 내 것인 양 동일시하기 쉽다. 다른 누구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내가 나로서 대답할 수 있도록 좋은 질문을 짜는 게 모임의 핵심이다.

그러다 보면 마치 사람들 모두가 어떤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그 질문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동체 안에 있는 나를 떠올려보게 된다.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누군가 울먹이는 뒤풀이 자리에선 나도 덩달아 울컥한다. 반듯하게 그어진 선을 넘어,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마구 상상해보자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진다. 나도 그 속에서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는 저변의 목소리를 한 명 몫만큼 전하고 싶다. 뭐라도 하고 싶은 애타는 마음을 가진 한두 명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게 판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동아리를 통해 배웠다. 그렇게 모임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입안에 닳고 닳은 말들이 남아서. 찝찝한 꿈을 꾸느라 찌뿌둥하게 일어나 카페로 출근한다.

밀물처럼 들어온 애들이 한두 학기를 보내고 썰물처럼 떠나가고 나면 ‘내가 뭘 잘못했을까’ 상념에 빠지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때는 나 혼자 찰박거리는 얕은 물에 온몸을 푹 담그고 허우적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바지를 접어 올리고 발만 적시고 가는 개울에 나 혼자만 깊고 넓은 바다인 양 얼굴을 처박고 간신히 잠겨있는 건 아닌가, 꼬리를 문 생각이 이어졌다. 둘러보니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막막했다. 대학이 대학답지 못한 현실이 문제라고 머리론 이해하더라도 반복되는 상황에 대체 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계속 묻고 대답해야 했던 시기였다.

지난주 역시 모임을 마치고 정리하다가 왜 동아리를 하는지 궁금하다는 후배의 질문을 받았다. 돈도 안 되고 경력도 안 되는데 어떤 이유로 이걸 여태껏 하고 있느냐는 말이었다. 나는 익숙한 그 질문에 곧잘 대답하는 편이다. 그날도 대충 비슷한 대답을 했다. 학내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사회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어렵지만 해나가고 있다. 취업은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집에 걸어오면서, 그 이유가 옳긴 해도 내 진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를 설득하고, 나와 싸우고, 나를 바꾸는 일

요새 나는 진심으로 즐거워서 한다. 어렸을 때는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선배의 모습이 좋았다. 그때 나는 선배 의견에 번번이 동의하지 못하는 못난 후배였는데, 선배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여러 현장으로 이끌어주었다. 나를 갉아먹는 불굴의 논리를 무너뜨리고, 지고 마는 사람들의 말을 힘주어서 하는 그 언니가 내 삶을 볕으로 꺼내주었다. 그래서 이 일이 나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게끔 이끈다. 활동을 해나간다는 건 나를 둘러싼 사회와 내 앞의 너를 바꾸는 일인 줄만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나를 설득하고, 나와 싸우고, 나를 바꾸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수년 전, 선배와 아예 작별하던 날 언니는 내게 “네가 가진 힘을 스스로 믿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땐 섭섭하고 못 미더웠다. 지금은 혼자 있어도 그 말이 내내 울린다.

그렇다면 과연 대학에서 하는 활동의 장점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다. 가장 먼저, 돈이 적게 든다. 학교 카페에서 값싼 커피를 마시고 학교 공간에서 모임을 한다. 도서관에서 책과 잡지를 빌려 보고, 돈이라곤 뒤풀이할 정도 비용만 있으면 된다. 만나서도 꼭 좋은 곳에 가거나 비싼 걸 먹을 필요가 없다. 있으면 내주고 없으면 때우는 식으로 그럭저럭 생활을 충당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새 학기가 있다. 시끌벅적한 개강 후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종강이 있고, 긴 방학을 지나면 새롭게 학기가 시작된다. 이번 학기에 잘 안되더라도 부단히 준비해 다음 학기에 다시 띄울 수 있다. 나름대로 위안 삼는 점이다. 잘해보고 싶었는데 번번이 실패하는 바람에 시무룩해지다가도, 방학이 끝날 무렵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용기가 난다.

지금은 어김없이 여름방학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한 달 내내 팔레스타인 분쟁을 주제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현재 팔레스타인엔 마을, 학교, 병원 할 것 없이 이스라엘의 최첨단 미사일이 쏟아진다. 어린아이, 노인, 여성을 가리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무참히 죽어가고 있다. 이번 방학엔 이와 관련한 책과 기사를 함께 본 후 이야기 나눌 예정이다.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 정책으로 거대한 감옥이 된 가자지구 상황과 이스라엘군에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해온 그동안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주요한 목표다. 더불어 팔레스타인 학살이 중단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고민해보려 한다. 모임을 무사히 마친 후 개강 직전에 진행할 동아리 MT도 구상하고 있다. 다녀오자마자 다시 2학기 준비를 바삐 해야 하겠지만, 당장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를 동아리 활동을 성실하게 해보자는 마음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왜인지 부끄러운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자주 슬펐다. 여느 날처럼 그런 기분에 빠져 나를 타박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척박한 나라에서 가장자리 사람들은 매일같이 죽어나간다. 사고로, 재해로, 온갖 이유로 끄트머리 사람부터 한 발짝씩 등 떠밀리고 그게 기다란 행렬이 된다. 이 앞에 온전한 자기 선택이란 있을 리가 없다. 가장 약한 고리부터 끊어지고, 가장 상처 입은 사람부터 사라지는 기이한 세상에서 모두가 병들어가는데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썩어가는 물에 살면서 조금 더 건강하거나 조금 더 행복한 물고기는 없으니까. 더 좋은 내가 되기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그 속에 같이 살자며, 모임을 하고 돌아온 어느 날, 일기에 적었다.

■ 주

1) 누가 (그거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을 줄인 말. 자기 의사에 따라 선택한 일이라면 결과도 전적으로 개인이 져야 한다는 의미.
2) ‘(내가) 알 바 아니다’를 줄인 말. 두 표현 모두 커뮤니티나 댓글 창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유상희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오픈 파트타임 알바를 하고 있다. 오후 2시 퇴근 후엔 하고 싶은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