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대로 향하는 사랑의 역설
[405호 커버스토리]
우리는 종종 사람을 숫자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진다. 모든 사람을 위해 한 사람 정도 희생시키는 방식을 쉽게 괜찮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의미는 두 사람의 의미와 비교했을 때 절반의 무게를 가지는가? 두 사람이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과 비교한다면 한 사람의 의미는 0에 수렴하는가? 한 사람의 의미를 0으로 수렴시킨 ‘모든 사람’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사람이긴 한 것인가? 실상이긴 한 것인가?
이 질문들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허상을 직시하게 한다. 특별히 이 글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두 작품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죄와 벌》을 통해 바라본 ‘한 사람’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인인지 궁금해했다. 자기도 나폴레옹처럼, 수만 명을 죽여도 살인자로 몰리기는커녕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었다. 고립되고 단절된 삶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돈 많고 쓸 줄 모르는 고리대금업자인 한 노파를 도끼로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 노파의 돈으로 자기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가난에서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는 호기로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만약 자신이 비범인이라면, 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가난을 해결하는 영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설픈 공리주의에 입각한 철부지 엘리트 대학생의 얕은 생각에 불과했다. 운명 같은 우연의 도움을 받아 계획대로 노파를 살해하고, 현장 목격자라는 이유로 그 노파의 여동생이자 유로지비(юродивый)였던 리자베타까지 우연히 같은 도끼로 살해한 직후,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마도 단번에 깨달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비범인은 허상이며 과거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많은 사람의 가난을 해결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한다 할지라도 멀쩡히 살아있는 한 사람을 ―그 한 사람이 아무리 이[蝨]같이 보인다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건 사람으로서 상식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선을 넘어선 자의 머릿속은 과부하가 걸리기 마련이다. 그는 이 한 마리를 죽였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은 이처럼 될 수는 있어도 결코 이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그가 무엇을 하든 태어난 이상 엄연히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란 ‘하는 것’(doing)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being)으로 규정된다.
사람에겐 사람을 죽여도 되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선을 넘는 행동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이길 포기하는 행동과도 같다. 이는 생각하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자연법 혹은 도덕률에 속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의 존재론적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일까.
이렇게 본다면,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를 단지 노파 살인에 국한할 수 없다. 그의 죄는 더 근원적인 것에 있다. 바로 사람을 범인과 비범인으로 나누었던 것, 사람을 ‘모든 것이 허용되는 존재’로 등극시키려 했다는 것, 즉 사람의 존재론적 위상을 벗어나 신의 자리로 오르려 했던 것이 더 근원적인 죄이지 않았을까. 이것은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죄, 즉 하나님을 닮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려 했던,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도 같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갇힌 나머지 모든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소견대로 삼게 된 행위와도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일 때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우리 자신이 되고, 모든 사람으로 확장된다. 당신에게 한 사람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의 생명을 산술적인 의미로 환원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많은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을 범인과 비범인으로 나눌 수 있다고 여기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유한한 존재다. 언뜻 보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종이 한 장 차이 같지만, 라스콜리니코프가 생각했던 한 사람의 희생은 정반대의 의미를 띤다. 《죄와 벌》은 한 사람의 희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희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의인지 타의인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 모두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일까. 한 사람의 존재론적 의미는 이미 무한대를 향해있다. 무한대에 어떤 수를 더하거나 빼거나 곱하거나 나누어도 무한대라는 사실. 한 사람을 숫자로 환산하면 1이 아니라 무한대라는 것. 이것이 라스콜리니코프가 놓쳤던 한 사람에 대한 의미이지 않을까. 우리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간단한 산수이다. 잊지 말자.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친히 선한 목자 예수께서 구해내신 하나의 작은 생명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바라본 ‘한 사람을 향한 사랑’
라스콜리니코프 덕분에 알게 된 한 사람이 갖는 존재의 무한성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무한성으로 이어진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며 자신의 불신을 고백하는 미망인 호흘라코바 부인에게 조시마 장로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불신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여 완전한 자기희생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의심도 부인의 영혼 속에 깃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내세라는 추상적 개념을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씀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신 사건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부인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솔직한 두려움을 표명한다. 조시마 장로는 이어서, 오래전 노의사에게 들은 서글픈 농담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류를 사랑하긴 하지만 스스로에게 놀라곤 한다고 하더군요.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몽상 속에서는 인류에 대한 열정적인 봉사를 생각하기에 이르고 정말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정작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 방에서 지낼 수 없다, 이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하고 말하더군요. 꼬박 이십사 시간 동안이면 심지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증오하게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공상적 사랑과 실천적 사랑을 비교·대조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시마 장로가 말하는 ‘공상적 사랑’이란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실천적 사랑’이란 개별적인 사람, 즉 이웃에 있는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말한다.
인류, 즉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류는 막연한 대상에 불과하고, 인류에 대한 사랑은 내세에 대한 믿음처럼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쉽다.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고도 가능하다. 증명되지도 않을뿐더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즉 그야말로 공상적인, 구름 위에 떠있는 공허한 부유물에 불과하다. 어쩌면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인류를 향한 사랑과 비교할 때 0으로 수렴하게 되는 건 전자가 아닌 후자일지도 모른다. 책임질 필요가 없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을 위하려 했다는 점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기소외는 쉽게 몽상가를 낳는 법이다.
반면,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구체적이다. 오감을 통할뿐 아니라 자발적인 희생이 동반된다. 이런 사랑은 전혀 쉽지 않다. 증명할 수 있고 가시적인 실체를 사랑한다는 건 실제 내 삶을 나누고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만 가능하다. 배려와 양보와 자기 내어줌은 사랑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의 문을 여는 제사로 요한복음 12:24을 인용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스콜리니코프라면 이 구절을 공리주의적으로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오독이다. 이 구절은 밀알 하나의 희생을 강요한 타의가 아닌, 스스로 희생을 감행한 거룩한 자의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노파 살인과 예수의 자기희생이 극명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씨와 열매의 관계는 강요된 희생이 아닌 자발적인 희생, 자발적인 순종에 기인한다. 자연의 섭리이자 창조주의 섭리에 속할 것이다. 한 사람을 향한 실천적인 사랑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사람이 행할 수 있고, 행해야만 하고, 행하게 되는 진정한 사랑의 방식이다. 조시마 장로는 이러한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천적 사랑,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크기
이즈음에서 사랑장이라고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바울이 정의한 기독교적 사랑과 조시마 장로를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정의하는 사랑은 놀랍게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사랑은 실상이고 책임지는 것이며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거룩한 자기 내어줌이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그건 사랑이라 할 수 없다.
‘하나’의 소중한 의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양파 한 뿌리’라는 짧은 우화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강조된다. 이것은 ‘대심문관’이라는 서사시의 거울에 비춰서 볼 때 더욱 도드라진다.
‘대심문관’은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살인마저도 가능할 정도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에 심취한, 무신론과 이성주의를 대변하는 인물, 이반 카라마조프가 지은 서사시다. 이 서사시의 핵심에는 이단들을 잡아 가두고 처형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던 대심문관과 그런 대심문관까지도 긍휼히 여기고 조용히 다가가 입맞춤을 한 예수의 극적인 대조가 있다. 이 서사시의 저자인 이반이 대심문관을 ‘위대한 비애로 고뇌하며 한평생 인류를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묘사한 점은 도스토옙스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대심문관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가 사탄을 대적할 때 잘못된 선택과 대응을 했다고 일갈한다. 인간에 대한 예수의 기대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 존재에 비해 너무나도 고결하여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의 존중과 사랑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그 자유는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이었다는 말이다. 설령 그 자유를 감당할 만한 인간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극소수에 불과할 테고, 그렇다면 결국 예수는 인간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된다. 한마디로, 예수는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가 인간에게 주었던 자유(의지)는 결국 그들을 옭아맸을 뿐이며, 그들에게 준 평화는 그들을 불안과 초조함에 떨게 만든 나머지 구속하는 효과를 냈을 뿐이라는 결론이다.
대심문관은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이유로 자유가 아닌 빵을 선택했다. 그는 한 사람의 의미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든 사람을 획일적으로 취급하여 사람만이 가지는 존재의 무한성을 거세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민중은 개, 돼지”라고 언급한 장면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다. 전체주의적으로, 일괄적으로 취급될 때 사람은 사람의 의미를 상실한다. 이때 유일하게 웃는 자는 그런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뿐이다. 이를 ‘대심문관’ 서사시에 비춰볼 때 그 장본인은 사탄일 것이다. 거짓의 아비는 인류의 파멸을 위한 방법으로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섬뜩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양파 한 뿌리’라는 우화는 ‘밀알 하나’의 변주로 읽을 수 있다. 평생 착한 일이라곤 하지도 않았던 한 여인이 죽어 지옥 불바다에 떨어졌는데, 그 여인의 수호천사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 여인이 살아있을 때 행했던 선행 하나를 기억해낸다. 구걸하던 거지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었던,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천사는 그 사실을 곧장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은 천사에게 그 양파 한 뿌리를 들고 불바다로 가서 여인이 잡고 올라올 수 있게 내밀라고 지시한다. 요컨대 단 한 번의 선행도 구원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참고로, 이 우화는 이게 끝이 아니다.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지고 결국 여인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며, 구원에 대한 심층적인 교훈을 던져준다. 궁금하신 분은 작품을 살펴보시길 바란다.)
지금까지 《죄와 벌》을 통해 ‘모든 사람’과 ‘한 사람’의 의미를 살펴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공상적 사랑’과 ‘한 사람을 향한 실천적 사랑’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사람의 존재론적인 의미가 결코 산술적으로 커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결코 산술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 굳이 산술적으로 표현하자면 오히려 역전된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은 0으로 수렴하여 허상이 되고, 한 사람과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무한대의 실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 있으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환원되기는커녕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아, 도스토옙스키는 이 전복적인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을 완성했던 것일까. 그 수혜자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한 사람의 의미와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어서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자명하리라 판단된다.
김영웅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클리블랜드 클리닉, 인디애나 의과대학, 시티오브호프 국립암센터에서 연구원 생활을 마쳤다. 현재 기초과학연구원에서 마우스 유전학, 분자세포생물학 등을 기반으로 위, 장, 골수 안의 줄기세포, 암세포, 그들의 미세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과학자의 신앙공부》, 《닮은 듯 다른 우리》, 《생물학자의 신앙고백》(이상 선율)을 썼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 Q&A》(IVP)를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