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그곳에 ― 세월호 10주기 이후 우리는 어디에
[406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2024년 4월 1일 YWCA에서 했던 설교(본문: 에스겔 47:1-12, 마태복음 28:6-10)를 수정·보완하여 싣습니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에서 3월 11일부터 연재 중인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슴이 부서진 이들의 예배] ‘세월호 이전’ 예배의 기억’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안산과 서울에서 10년 동안 예배를 드리며, 4·16 가족들의 예배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담은 글이었습니다. 편집자는 이것을 ‘4·16 가족의 신학’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글을 읽으며 제 마음에 부딪혔던 내용 중 하나는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나흘 뒤 맞은 부활절에 대한 가족들의 경험이었습니다. 참사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아직 실종된 가족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기독교인 (유)가족들에게 부활주일은 ‘당황스러운’ 날이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나눌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며 4·16 가족들에게 위로보다는 상처가 되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2024년 10주기를 맞으며 읽은 4·16 가족의 신학은 저와 현 한국교회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와, 10주기가 지나고 5개월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우리는, 교회는 어디에 서있는 것일까요? 그날, 그리고 10년이 지나도록 교회는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나누었지만, 여전히 고난의 현장에 있는 이웃들에게 부활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도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에스겔 47:1-12, 그리고 마태복음 28:6-10은 희망의 말씀으로 널리 읽히는 본문들입니다. 폐허에서 회복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말씀들입니다. 두 본문 모두 생생한 고난의 경험, 고통의 현장과 맞물려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에스겔서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쪽 유다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인, 기원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유다 사회 지배층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상황이 반영된 책입니다. 예언자 에스겔도 포로민 중 한 사람으로 바벨론에 유배됩니다. 자신의 땅에서 뿌리 뽑힌 채 바벨론까지 포로들 행렬 속에서 걸어야 했던 유다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죽음 혹은 실종을 경험한 채, 고향 집이 불타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채 타국으로 끌려가는 백성들, 험난한 여정 끝에 도착한 타국에서 흩어져 집단 거주 생활을 시작하며 고향 생각으로 울음을 삼켜야 했던 백성들…. 시편 137:1은 바벨론 포로민들의 아픔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하지만 이들에게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들 편이라고 믿었던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전쟁은 신과 신의 싸움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민들은 우리의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질문을 던지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유배지에 머물던 포로민들은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던 성전의 파괴로 이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라는 포로민들의 절망은 더욱 깊어집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온몸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하곤 합니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전부터 예루살렘에 곧 닥쳐올 멸망과 수난의 시간을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봅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몸이 밧줄로 묶인 채 일정 기간 누워 지내면서 백성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그뿐 아니라, 에스겔 24장에서 예언자는 아내의 죽음을 통해 나라의 운명을 상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스겔에게는 애도조차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에스겔은 모든 고통을 감당하며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에스겔서 33장을 기점으로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로 그 처참한 고통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회복과 생명 살림의 말씀을 환상으로 다시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에스겔은 바벨론 대제국 한복판에서 백성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경험하며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인과응보적 사고는 구약성서 전반에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다 백성들의 종교적 성찰로부터 연유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고난을 경험할 때 혹시 내가 무언가 나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고난을 만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구약성서에도 반영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오늘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고난에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구약성서에도 인과응보적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유를 모른 채 고통을 경험하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욥기서가 대표적 예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사에는 이유 없이 다가오는 고난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바벨론 대제국의 횡포로 인한 고통은 오늘날 국가폭력으로 고통을 경험하는 이웃들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합니다.
중요한 점은 에스겔서의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찾아오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시작이 있을 것이라고 환상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47:1-5에서 예언자 에스겔은 무너진 성전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가 발목을 넘어 무릎과 허리까지 차오르고, 그리고 마침내 건널 수 없이 큰 강이 되는 환상을 봅니다. 47:6-12에서 에스겔은 모든 생명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봅니다. 강 주변에는 나무가 무성하게 심겨져 있습니다. 강물은 아라바 사막 낮은 지대로 흘러들어 가는데, 아라바 계곡 즉 사해 아래쪽 계곡으로 흘러갑니다. 죽은 바다, 사해의 물이 물고기가 살 수 있는 물이 되고, 어부들은 각종 물고기를 넘치도록 잡는 경험을 합니다. 강가의 과실나무는 번성하여 열매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열매를 먹기도 하고, 그 열매는 치유하는 약재가 되기도 합니다.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라는 9절의 선포처럼 모든 것이 소생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물이 성전에서 흐르는 물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버리지도 않았고, 바벨론 대제국에 의해 패배하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통 속에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위로와 치유의 하나님이며, 새 창조로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물은 종종 혼돈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혼돈의 물은 하나님에 의해 질서로 예편되고, 그 물은 온 지역의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바벨론 제국의 압제 가운데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곧 새로운 시작을 하시겠다고 예언자 에스겔은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부활주일에 종종 선포되는 마태복음 28:6-10 핵심 내용도 에스겔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제국의 강압적 통치하에 억압과 착취로 백성들 삶은 완전히 피폐해져 갑니다. 이때 등장한 예수, 이분이야말로 민족을 구원하고 해방시킬 메시아라는 믿음으로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 다가올 새로운 삶을 기다리며 예수를 따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었던 구원자, 해방자 예수는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를 따랐던 제자들과 백성들은 절망하고 모든 게 끝나는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처참한 십자가 죽음 가운데서도 끝까지 그 고통을 함께한 사람들이 마태복음 28장에 등장합니다. 예수와 함께했던 여성들입니다. 28:1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만이 등장하지만, 27장과 마가복음 15:41(“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에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지키고 따랐던 많은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성신학자들은 이들을 예수를 따르며 제자로 활동했던 여성으로 추정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라는 언급이 27:55-56에 있습니다. 로마제국 당시 십자가 처형은 정치적 처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처형받은 사람을 애도하거나 그것을 오래 지켜보는 일이 지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발각될 경우 그들도 십자가에 처형될 위험이 있었고, 그래서 여자들은 멀찍이 앉았던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멀리서나마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고통의 장소에 여전히 함께 머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뿐 아니라 27:61에 보면,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이들은 예수의 무덤 곁에서 무덤을 지키며, 예수를 기억하는 여성들이었습니다. “거기 막달아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이것을 에이미질 레빈이라는 학자는 여성들이 무덤 맞은편에 앉아서 “불침번을 선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일찍 여성들은 다시 예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이렇듯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한결같이 예수의 무덤 곁에서 예수를 지켰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제 가운데 처형된 정치범들의 무덤에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다시 뜻을 모으기도 했기에, 무덤으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 처형을 받은 사람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잊지 않고 무덤에 찾아간 여성들은 결국 천사를 통해 예수가 살아났다는 믿지 못할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여자들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천사의 말을 듣고, 빈 무덤을 확인하고,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말씀을 행동으로 알리기 위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원자료로 간주되는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성들은 두려움 때문에 무덤에서 도망가고,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이 여성들이 침묵하지 않고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한 첫 살아있는 증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달리던 길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아직은 두려운 마음으로 달려가는 여성들에게 예수가 건넨 “평안하냐”는 음성은 아마도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용기를 준 말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렇듯 마태복음의 여성들은 예수를 잊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제와 예수의 죽음이라는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예수의 무덤을 지키며(27:61) 예수를 기억하는 여성들이었습니다. 예수를 기억할 뿐 아니라, 부활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여성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그의 죽음을 목도하며, 십자가 곁에서, 무덤 옆에서, 이후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기까지 예수의 사역 전 여정에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예언자 에스겔의 모습에서, 그리고 마태복음 28장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저는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이제까지 걸어온 4·16 가족들의 모습을 봅니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추운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진실을 감추려는 세력과 맞서서 외로운 싸움을 지속했던 4·16 가족들의 아픔을 봅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그 곁을 함께했던 여러분들과 이름 없이 묵묵히 곁을 지켰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봅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았지만 진실은 여전히 가려져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와 같이 일어나서는 안 될 또 다른 참사가 우리를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의 상처는 4·16 가족들에게, 참사를 목도한 우리에게 계속 남아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어도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4·16 가족들의 말 속에서, 그날의 참사로 부서진 가족들의 마음이 뼈아프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부활을 말하기에는 여전히 사회구조적 악으로 일어나는 참사들이 편만한 세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감추려는 어둠의 세력 한가운데에서 길을 만들고 걸어왔던 4·16 가족들과 함께 가는 그곳에 희망의 환상은 현실이 되고, 진실은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중국 소설가 루쉰은 〈고향〉이라는 단편에서 희망을 길로 비유합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10주기가 지나고 다시 5개월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는, 교회는 어느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질문해봅니다. 10주기가 되도록 4·16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미안함과 부끄러움 등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저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절실한 건 연민이 아니라 연대다”라는 〈뉴스앤조이〉 3월 11일 자 글의 내용을 되새겨봅니다.
나는, 우리는, 교회는 참사의 진실이 드러나는 그날까지 악한 세력에 맞서 아픔의 현장에 동참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예언자가 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달리는 여성들이 되기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멈추지 않고 고통받는 이웃들과 연대하며 함께 가는 그곳에 예수님이 평안으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4·16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그날까지 함께 가는 길 그곳에 위로와 치유와 생명의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박지은
히브리성서를 전공했고,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신학 &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