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실천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406호 사회선교 더하기]

2024-09-01     전남식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 말한다.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는 믿음을 전제한다. 로이 클라우저는 《종교적 중립성의 신화》(아바서원)에서 궁극적 실재에 대한 믿음을 종교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종교’는 실재에 대한 물음으로, 실재는 종교 영역뿐 아니라 과학이나 수학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학문에는 종교적 신념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나가는 책이다. 수년 전 이 책을 선물로 받았는데, 최근에야 펼쳐 들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과 행동, 신앙과 실천, 신학과 윤리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 둘은 분리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믿음과 행동에는 ‘사이’가 존재할까?

사회선교란?

사회선교란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해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개념을 탈피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려는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와 같은 개념이다. 교회는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가 선교 현장이며, 고난받는 사람, 차별받고 소외된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겠다는 신앙고백이고, 따라서 사회선교와 선교적 교회는 동의어라 할 수 있겠다. 마이클 고힌은 《교회의 소명: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적 교회론》(IVP)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적 교회론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삶 전체가 선교적 차원을 지닌다고 강조한다. 즉 교회는 모였을 때든 흩어졌을 때든 존재하며, 교회의 삶 전체는 의도적인 말씀과 행위에서, 혹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교회의 삶 나머지에서 증언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217쪽).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이며, 예배, 설교와 성례전, 기도는 선교적 과업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누가복음 10장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눅 10:26, 이하 새번역) 되물으셨다. 이는 해석학적 질문이다.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율법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했고,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눅 10:28) 말씀하셨다. 이는 신앙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믿음과 행위, 신앙과 실천, 복음과 상황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정수라고 이해하고 해석한 율법교사에게 예수께서는 그대로 행해야 살 것이라고,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기독교의 복음이 살아나려면, 복음을 현장(상황)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복음은 죽지 않았고, 죽을 수도 없다. 다만 복음을 해석하는 자들이 행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복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고 해석은 하지만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의 생명력을 경험하지 못한 것뿐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믿음과 행위를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 7:21) 산상수훈이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본문이 병으로 죽어가는 종을 고쳐달라고 예수께 찾아온 백부장 이야기와 중풍병 환자를 예수께 데려온 이웃들 이야기다. 예수께서는, 죽어가는 종을 고쳐달라며 찾아온 로마 장교를 향해 이스라엘 사람 중에 이런 믿음은 본 일이 없다(마 8:10)고 하셨고, 중풍병 환자를 데리고 온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마 9:2 이하). 여기서 믿음은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드러난다. 

공동체에서 고난받는 이웃이 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예수께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믿음이 고난받는 자를 살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분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곧 타인의 아픔에 동참하는 행위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서 행해야 할 지침이라 할 수 있다. 마음과 뜻,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는 명령은 곧바로 나이 많은 부모를 공경하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곧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러할 때 그 땅에서 장수하고,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고난받는 자들을 돌보고, 그들과 더불어 살 때, 즉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할 때 비로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며, 그런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다는 의미다.

한 선교사와 ‘믿음’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그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점을 선교지에서 열심히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에 딴죽을 걸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예수처럼 살지 않는 게 가능할까요? 말(고백)과 성품이 분리 가능한 걸까요?” 물론 이 질문에는 예수를 몰라도 예수처럼 살면 구원이 가능하다는 뜻이 함축되어있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논하기에는 지면도 부족하고, 이 주제를 논할 능력은 더더욱 부족하다. 다만 믿음과 행위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이 말을 꺼냈다. 선교란 미명하에 현지인을 차별하고 분리하고(아파르트헤이트) 착취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그런 심술궂은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지난 호(2024년 8월)에서 성서대전이 대전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사실을 언급했다. 퀴어문화축제 참여가 쉽지만은 않았다. 성서대전뿐 아니라 내가 목회하는 꿈이있는교회, 교단이나 교계에도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축제 참여를 앞두고 성서대전 실행위원들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두 명만 참여하자. 젊은 목회자는 앞날이 창창하니 참여시키지 말자. 성서대전 후원회원들에게 알려야 할까? 그나마 몇 안 되는 후원자마저 더 떨어지면 어쩌나? 교회에는 알려야 하나?” 고민 끝에 퀴어문화축제 당일이 다가왔고, 막상 현장에는 실행위원 목사들이 거의 참여했고, 심지어는 선봉에 섰고, 성서대전 후원회원들과 교인들도 여럿 참석했다. 꿈이있는교회 식구 중 불편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목사가 참여한 일 때문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수년간 했던 거의 모든 설교와 성경공부가 환대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수년간 환대와 포용에 대해 설교해온 것은 사실이다. 교회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고, 그것이 교회가 다른 기관과 차별되는 지점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알 것이다. 여기서 환대와 포용을 신념과 믿음이라는 단어와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은 사회적 약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며, 이러한 마음은 예수께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믿음이란 결국 공동체적, 사회적 실천과 연결되는 셈이다.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 윤리로 연결되지 않는 신학은, 마이클 고힌이 인용한 뉴비긴의 말처럼 “종교의 사유화”에 지나지 않는다(《교회의 소명》, 280쪽).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일은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294쪽). 전자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후자는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적 풍토에 대항하는 태도를 뜻한다.

성서대전에서 내년 퀴어문화축제에 또 참여할 것인지 논의했고, 참석자 전원이 참여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유는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곧 사회적 약자를 향한 응원이어야 하고, 종국에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이 사회에서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악마의 협력자가 된 교회?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가사 중 일부다.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할 때마다 이 가사가 종종 떠오른다. 높은 산이나 거친 들, 초막이나 궁궐과 상관없이 주 예수를 모신 곳이라면 그곳이 천국이라는 내용이다. 죄인, 사회적 약자의 친구가 되어주신 그분이 계신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고, 차별과 혐오가 난무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지옥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교회에서 이러한 차별과 혐오가 더 심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보다 천국을 향한 열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입에서 이런 차별과 혐오가 넘쳐나다니. 교회 입구에 차별금지법 반대 현수막을 붙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토해내고, 자유를 내세워 무한 경쟁 체제를 부추긴다. 그리고 거기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사람은 무능력자, 저항하는 사람은 불순 세력이 된다. 내 주 예수 계신 곳이어야 하고, 환대와 포용의 공간이어야 할 교회에서 말이다. 

세상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라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에 나오는 문장이다(21쪽). 믿음을 행위와 분리할 때, 성경 해석이 윤리로 연결되지 않을 때, 교회는 악마의 협력자로 전락하고 만다. 노회한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웜우드에게 조언한다. “환자의 관심을 내면생활에 집중시키거라. …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등한시한 채 가장 어렵고 영적인 의무에만 마음 쓰게 하거라. … 고도로 ‘영적’인 기도만 줄창 읊어대게 하거라.”(26-27쪽)

전남식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모토로 대전에서 목회하는 꿈이있는교회 목사이자 성서대전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