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 교도 존 울먼의 서번트 리더십
[406호 평화교회 한 걸음]
존 울먼(John Woolman)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10여 년 동안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데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주위에서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퀘이커들이 부유해져 흑인 노예들을 부리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이 있다는 퀘이커의 고백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이라고 부르짖고 다녔다. 한 번에 한 사람, 한 가정씩 방문해서 꾸준하게 설득해나갔다.
사람들이 비웃어도, 이제 그만하라 말려도, 그는 계속해서 뚜벅뚜벅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퀘이커를 방문해 자신만의 순례를 시작한 지 십수 년 만에 드디어 한 사람, 두 사람 자신이 부리던 노예들을 해방한 퀘이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750년 무렵에는 펜실베이니아의 퀘이커 중 노예를 소유한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이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이 선언된 1865년보다 100년여 앞선 일이었다.
퀘이커의 전설적인 평화 지도자
전편에서 우리는 역사적 평화교회가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의 핍박을 피해 신대륙에서 새 터전을 마련한 사실을 다루었다. 이는 어찌 보면 하나님의 구원 손길로 여겨졌고, 특히 퀘이커 교도에게는 영국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치·경제적 힘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윌리엄 펜에 의한 아메리카 선주민들과의 평화적 교류로 신앙적 고백을 실천할 수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다른 초기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광범위하게 흑인 노예들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었다. 농장과 집안일을 노예에게 전가하면서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핍박을 피해 신대륙에 정착한 신앙인들이 어느새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땅을 차지하고, 흑인 노예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를 자기들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거나 식민지의 경제적 현실을 토대로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모순에 내적으로 깊이 신음하던 한 퀘이커 청년이 있었는데, 바로 존 울먼이었다.
존 울먼은 1720년 뉴저지의 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퀘이커 교도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 문헌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성인이 되어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일을 했는데, 무역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노예무역의 폐단을 깊이 깨달은 그는, 후에 순회 목회자가 되어 여행하는 동안에도 노예제도를 직접 접하고는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1750년대에 그는 노예제 폐지론을 주장하며 필라델피아 퀘이커 교도들이 노예해방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그렇게 퀘이커 교도들은 미국의 중요한 초기 노예제 폐지 세력이 되었다. 존 울먼은 1772년 영국에 머물던 중 천연두로 사망했다.1)
이렇게 퀘이커의 전설적인 평화 지도자가 된 존 울먼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퀘이커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방식의 모범이 되었다. 퀘이커들은 조지 폭스 이후로 그들의 신앙고백을 일기(journal) 형식으로 출판하고는 했는데, 존 울먼의 일기는 시나브로 미국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어느 기록에 따르면, 그의 일기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존 울먼의 일기에는 노예제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묻어난다.
이번 여행에서 두 가지가 내 마음에 각인되었는데 첫째는 노예들의 고된 노동의 대가로 편안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의 집에서 공짜로 먹고 마실 때마다 내 마음은 요동쳤습니다. (중략) 두 번째는 본국에서 노예를 수입하는 무역이 장려되고 이에 따라 아무 노동 없이 여유 있게 사는 백인들과 그의 자녀들을 볼 때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자손들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새겨졌습니다.
― 존 울먼의 일기(제2장)
‘서번트 리더십’ 개념을 비즈니스 리더십 세계에 소개한 리더십의 대가 로버트 그린리프는 초기에 서번트 리더십 모델을 헤르만 헤세의 소설 《동방순례》 주인공 ‘레오’에서 따왔다. 이후, 퀘이커 신자가 된 그는 존 울먼이야말로 서번트 리더십의 진정한 표상이라 칭송했다.2)
그는 존 울먼의 30여 년에 걸친 노예해방에 대한 끝없는 열정, 노예 소유주를 비방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후대에 노예를 소유하는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 과연 후대를 창대하게 하는 일인지 진지하고 끈질기게 문제 제기하는 모습을 높이 샀다.
존 울먼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게?
독실한 퀘이커 교도 존 울먼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나에게는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나의 이익이 충돌하는 것에 대해 눈을 감거나 방관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그럴듯한 궤변을 통해 불의를 정당화하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만약 우리가 억압받는 위치에 있는 경우라면, 이러한 부정의와 불평등은 쉽게 인식할 수 있고, 고쳐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의 기도 또한 정의로운 세상을 하루빨리 이루어달라는 내용으로 채워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한 사회구조, 관습, 문화에 의해서 유익을 얻는 자리에 있으면, 그것을 아예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인식하더라도 변화를 시도하는 데 소극적 자세를 취하기 쉽다.
존 울먼은 백인이었고, 이제 막 핍박을 벗어나 신앙과 신대륙의 부와 권력을 누리는 퀘이커 교도였다. 그는 그 시대 부당한 시스템에 의해 혜택을 받는 사람이었다. 흑인 노예의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양심에 찔렸을 때 한두 명의 노예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행동을 끝으로 자기가 할 일을 이어나가지 않고 멈출 수도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서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나는 남녀평등을 적당하게 옹호하는 사람이지만, 문화가 변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한다. 가끔 다른 교회 공동체나 가정에 초대받았을 때, 여성들의 고된 노동으로 대접받는 음식과 섬김을 당연시할 때도 많다.
다른 한편으로 존 울먼의 이야기는 자칫 우리에게 ‘서번트 리더’답게 무엇인가 공동체 내에서 틀린 점을 발견하더라도, 큰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라는 메시지로 읽히기 쉽다. 실제로 로버트 그린리프가 인도의 인적 자원 개발 프로젝트 고문을 맡았을 때,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대해 ‘존 울먼처럼 좀 더 부드러운 방법을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글을 남긴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겪는 억압과 불평등의 무게 차이를 무시한 것이다. 존 울먼에게 노예제도는 동료 퀘이커들이 신앙의 양심을 저버린 시간이겠지만, 간디에게 영국의 식민 시대는 수많은 인도인이 영국의 지배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교회와 사회의 리더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좀 더 부드럽거나 온화하기를 요구하기 전에,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인식하고 리더로서 얼마나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교회의 청년들이나 여성들이 떠나가는 현상을 비판하기 전에, 그들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들은 적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이 우리 안에 잘 자리 잡고 있는지 살피고, 없다면 함께 구축해가는 일에 존 울먼처럼 끈질기게 매달려야 할 것이다.
1) 〈Some Consideration on Keeping Negroes〉(Vol.2, 1762) 에서 존 울먼에 대한 글 참고.
2) 로버트 K. 그린리프, 강주헌 옮김, 《서번트 리더십 원전》(참솔, 2006년)
- 신앙 공동체와 사회에서 문화·관습·제도 등으로 인해 내가 누리거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불평등한 권리나 정의롭지 못한 유익이 있나요?
- 더 정의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김홍석
평화교육을 비롯해 건강한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 ㈜조율컬렉티브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