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무기를 소산하라”
[406호 봄봄] 계엄사령관에 불복종한 전남경찰국장 안병하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전남경찰국장 안병하에게 “경찰이 무장을 하고 도청을 접수”하라고 명령했다. 안병하는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한다. “경찰은 시민군의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어떻게 시민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면서 진압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2019년 2차 경찰 시험 문제에 소개된 안병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경국장으로서, 과격한 진압을 지시했던 군과 달리 ‘분산되는 자는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 발생치 않도록 할 것’ 등과 ‘연행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하였”고, “신군부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를 당”한 “자랑스러운 경찰의 표상”이다. 계엄사령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던 안병하는 “자랑스러운 경찰의 표상”을 묻는 경찰 시험 문제의 정답이다.
군과 경찰에게 항명은 죄다. 군형법에서 항명의 죄는 최소 징역의 벌을 받는다. 그래서다. 군인은 ‘까라면 까’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대에선 불합리한 명령이라도 실행해야 하고, 불의한 명령이라도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대는 전쟁을 대비해 만든 조직이기 때문에, 평시에도 전시인 양 절대복종을 강요한다. 군인은 ‘까라면 까’라는 상투어로만 생각하도록 강요받는다. 하물며 계엄령하에서 계엄사령관이 명령했다면, 복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병하는 ‘까라면 까’라는 상투어에 갇히지 않았다.
군대의 총구는 국경 밖을 향해야 하고, 살인 허가는 적국의 무장 군인들에게로 제한되어야 한다. 군인은 국경 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전시라도 아무에게나 총질하는 건 금지된다. 전쟁 역시 그 목표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시민들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임으로 죽음을 막는 게 전쟁의 역설이요, 군대는 이렇게나마 자기모순을 극복해야 한다. 안병하는 군 출신이었지만 계엄사령관의 ‘까라면 까’라는 상투어에 갇히지 않고,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생각한 것이다.
군 출신으로서, 군대 문화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게 어떤 의미일지 누구보다 잘 알았을 안병하의 불복종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뜻을 지닌 이름이 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십브라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는 파라오의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했기에 그 이름 뜻대로 아름답다.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 …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출 1:15-21, 새번역)
파라오가 히브리 남자 아기 학살을 명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히브리라는 이유로, 남자이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 히브리는 민족이나 혈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온 떠돌이 같은 온갖 잡놈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적 존재라 파라오의 명령은 신의 명령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런 파라오가 히브리를 죽이라고 명령한다면 누구라도 복종해야 했다. 파라오가 히브리를 죽이는 게 대수겠는가. 그러나,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태업을 꾸민다. 산모의 출산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며 거짓 보고를 파라오에게 올린다. 히브리 여인들이 건강해서 산파가 도착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버린다는 것이다. 산파들은 파라오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닿는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함부로 죽일 수 없어, 파라오에게 불복종했다. 십브라와 함께 파라오에게 불복종해 히브리 아기들을 살린 ‘부아’의 이름 뜻은 ‘화려’다.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는, 전라도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냈다.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 광주에서 핏빛 ‘화려한 휴가’를 보내는 공수부대를 시민들이 온몸으로 막아서자, 5월 21일 공수부대는 ‘앉아쏴’ 자세로 시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했다. ‘양학’이란 게임 용어가 있다. ‘양학’은 ‘양민 학살’을 줄인 말이다. 고수 한 명이 여러 초보들을 제압할 때 ‘양학한다’고 표현한다. 적의 후방에 낙하산을 타고 침투해 적진 속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가 광주 시민들을 양학했다. 공수부대 총에 맞아 양학당하면서도 시민들은 저항했다. 총 맞아 죽은 이웃 시민들을 보면서 80만 광주 시민 중 약 20만 명이 계엄군에 저항해 거리로 나왔다. 제아무리 공수부대라도 20만 시민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저항하는 시민들이 계엄군들을 시외로 몰아내고 도청을 장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 왔다. 최규하는 계엄사령관, 사단장, 도지사, 경찰국장 등과 함께 전남도청을 어떻게 해야 할지 회의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군인들은 대통령 앞에서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워댔다. 신군부 치하에서 대통령 최규하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대통령 아닌 대통령 앞에서 소리 질러대며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안병하에게 경찰이 도청에 있는 시민군을 무력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안병하는 이런 상황을 예견했을까. 계엄사령관이 무력 진압을 명령하기 전에 전남경찰은 총을 군부대로 소산했기에 무력 진압 명령에 복종할 수 없었다. 경찰들의 증언이다. “군이 투입된 다음 날인 19일로 기억되는데 안병하 국장이 경찰관서에 보관 중인 모든 무기를 31사단으로 소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만약 그때 무기를 소산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참혹한 일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안병하 국장이 무기를 미리 소산시킨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요. 경찰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시민에게 발포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민과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1) 안병하 경무국장은 계엄군과 시민들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경찰이 총을 지니고 있다면, 더 큰 유혈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겠다. 안병하 경무국장의 무기 소산 지시는 신군부의 무력 진압 명령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경찰에게 발포를 해서라도 강력한 진압을 요청했지만, 안병하는 경찰의 발포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전남경찰이 관리하는 모든 총기를 소산해버린 것이다.
1980년 당시 아버지께선 시골 지서에서 근무하는 경찰 말단 간부였다. 안병하 경찰국장이 신군부에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경찰 말단 간부였던 아버지께선 시민을 향해 총을 쏴야 했을 수도 있다. 안병하 경찰국장의 아름다운 불복종 때문에 휘하 모든 경찰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안병하 그늘에서 전남경찰들은 시민들을 보호했고, 살인을 면했다.
5월 25일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가 광주에서 주재했던 회의 자리에서 “경찰이 시민에게 총부리 겨눌 수 없다”며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던 안병하는, 5월 26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압송돼 8일간 고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8년간 투병하다가,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증언을 앞두고 돌아가셨다. 안병하는 고문 후유증을 극복할 수 없었던 약한 사람이었다. 약했지만 저항했다. 계엄군들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려 했고 휘하 경찰들을 괴로움에서 구했다.
안병하가 신군부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했지만 신군부의 폭력을 저지하진 못했다. 안병하 자신도 지키지 못해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예수도 그랬다. 로마제국에 맞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에 예수는 충분히 부응하지 못했다. 예수께선 제자들의 무장을 반대했고, 자기 자신도 지킬 수 없었다. 제국의 무력(武力)에 예수는 무력(無力)했다. 예수께선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무력하고 약한 예수께선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됐다.
무력하고 약해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를 우리는 구원자라고 고백한다.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무력하고 약해 로마제국의 폭력을 제압할 순 없어 그저 저항하다가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는다. 안병하도 신군부의 위력과 폭력을 막을 수도 없었고 전남경찰 수장이면서도 광주 시민들을 완벽하게 지킬 순 없었다. 그저 저항하다가 고문당하고 앓다가 죽었다. 안병하는 자기 생명마저 위협받을 줄 예상했지만 시민들에게 차마 총을 쏠 수 없어 신군부에 불복종했다. 안병하는 ‘까라면 까’라는 상투적인 명령에 불복종하다가 자기 자신마저 지키지 못해 죽었지만, 역사 속에 부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중령이었던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은 유럽 내 유대인들을 제거하는 ‘최종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의 수송 책임을 맡았다. ‘최종해결책’이란 유럽에서 유대인들을 모조리 제거하려는 나치의 프로젝트였다. 아이히만은 효율적으로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모았고,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독가스를 마시며 죽어갔다. ‘까라면 까’라는 나치의 명령에 복종했던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존재를 해결해야 할 문제라 생각했을까? 아이히만이 전범 재판을 받을 때 방청했던 한나 아렌트는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2)다고 말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말살하는 게 독일이 안고 있는 문제를 푸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까라면 까’라는 상투적인 방식으로 그저 복종했을 뿐이다. ‘까라면 까’라는 상투적인 습성을 따라 복종했던 아이히만에 의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효율적으로 이송되었고, 경제적으로 죽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폭도들의 선전선동’에 따라 발생했다”는 글에 ‘좋아요’를 누른 이진숙을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31일 방통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방통위원장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이진숙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자, MBC 출신 정동영 의원은 문화방송 후배 이진숙에게 1980년 5월에 문화방송국이 불탄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광주에서 기자로서 현장을 취재했던 정동영은 자신이 광주에서 취재한 기사가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망자 없다”는 뉴스나 나오자, 방송국이 불에 탔다고 설명했다. 방송국들은 불탔지만,
계엄군 지휘 아래 있었던 광주경찰서는 오히려 시민들에 의해 보호받았다. “당시 광주경찰서 현관 유리창과 담벼락에는 「본 경찰서는 우리의 재산, 기물파괴는 세금의 과중, 스스로 보호합시다.-시민일동」이라는 신문지 절반 크기의 벽보가 붙어 있었다. … 「명패, 모자, 정복, 서류 등이 그대로 보존돼」있었다. 어느 경찰관은 심지어 미처 지급하지 못했던 5월 치 급여를 은행에서 찾아와 자신의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는데 현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보고도 받았다.”(《안병하 평전》, 163쪽)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했지만, 경찰은 안병하의 지시대로 무장하지 않고 치안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아버지께서 공기총으로 꿩을 사냥하신 적이 있었는데, 꿩 사냥한 날부터 사흘간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안병하 경찰국장이 무기 소산을 하지 않았다면, 경찰 말단 간부였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시민군들을 향해 총을 쏴야 했을 수도 있다. 안병하 경찰국장이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해 시민군을 총으로 진압하려 했다면, 아버지도 앉아쏴 자세로 시민들에게 발포해야 했을 수도 있다. 공기총으로 꿩을 사냥하고 사흘을 굶으셨던 아버지께서 사람을 향해 사격해야 했다면 어떤 여생을 사셨을까. 경찰국장 안병하 덕분에, 1990년 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시골 지서장이셨던 아버지의 일상은 그럭저럭 평범했다.
평범한 일상은 연민으로 불복종했던 이들이 보낸 선물이다.
1) 이재의, 《안병하 평전》(정한책방, 2020), 96-97쪽.
2) 한나 아렌트, 김성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2006), 343쪽.
김영준
1980년에 다섯 살이었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다녔다, 3개월에 한 번 양림동과 금남로를 걷는다, 김포에서 모이는 민들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