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력은 체력이요, 체력은 영성이라
[406호 커버스토리]
어렸을 때는 나이가 들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남들 사는 것처럼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반적이라 말하는 생애주기에 따라 경제적·정신적 독립을 이루고 ‘나’로서 살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의 ‘나’는 여전히 부모님 보호(내가 부모님을 돌보고 있다고 우기고 싶지만) 가운데 생을 유지하고 있다. 중년이라 이름하는 시기가 도래했건만 삶의 근간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마흔앓이를 크게 했다. 중년의 성장통이라고도 하는 마흔앓이는 신체적·심리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 시기라고 한다. 오랜 시간 교회에서 전도사로, 목사로 사역하며 의미 있게 살았다 자부하지만 ‘나’라는 한 사람으로서 사람 구실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느 날 갑자기 ‘헛살았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마흔앓이가 찾아왔을 무렵 나는 N년 차 ‘목사’로서 ‘목사의 길’을 가는 중이었지만 삶을 통해 마주하는 것들은 거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특히 여성 목회자에게 주어진 생애는 무엇 하나 녹록지 않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여러 해 전에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환갑을 맞아 동네 독거노인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인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본 나의 미래는 담임목사가 아니라, 밥 한 끼를 해결하는 일이 매우 소중한 독거노인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독거노인으로 생을 마감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로 살고 죽는 것에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사역자로서 입지가 줄면서 때마침 몸도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했다. 죽을병에 들지는 않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인 양 이곳저곳 병원 다니기에 바빠졌다. 내 안에 조금씩 쪼금씩 우울한 생각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감사가 사라졌다. 겉으로는 어땠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서서히 병들고 있었던 거다. 정작 사춘기 때는 ‘사춘기가 뭔데?’ 싶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지나갔었다. 늦어도 한참 늦게 만난 성장통이어서 일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는 무사히 할머니가 되는 날은 맞이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간암 판정을 받으셨다. 내게 아버지는 가장 좋은 친구이다. 그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힘이 되어주는 존재. 그런 아버지가 간암으로 간 이식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환자가 간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누구나 그 기회를 얻는 것도 아니다. 이식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어마어마한 병원비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병원비는 내가 책임질 수 없으니 직장 생활하는 동생에게 맡겨두고 간이식은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다행히 아버지는 다른 방법으로 치료를 받고 3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며 지금도 잘 살아가고 계신다. 처음에 ‘간이식’ 운운하며 겁부터 준 의사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아마 이때부터였던 거 같다. 언제라도 아버지에게 내가 필요한 날이 왔을 때 바로 간을 이식해드릴 수 있는 건강과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은 건. 아무리 관리를 잘하고 애를 써도 어찌 건강이 마음대로 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나는 건강한 음식을 먹고, 꾸준히 운동하며 몸을 돌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하루아침에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일단 아버지 병간호가 우선이었고, 나를 돌보는 것보다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는 게 시급했다.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 먹고, 운동을 하는 것도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하루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빠듯한 인생을 살면서 몸을 잘 돌보는 것은 사치였다.
마흔앓이를 넘어서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치하고 있다. 나를 돌보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잘 먹고, 잘 자고, 운동에 열중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외치며 스스로를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남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몸도 마음도 병들고 영혼마저 갈 길을 잃은 상황에 이르러서야,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도전한 것은 ‘만 보 걷기’였다. 운동도 운동이지만 무언가 성취할 만한 도전이 필요했다. 여성이자 마흔이 넘어버린 목사에게 사역의 기회는 좁디좁아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가치 있는 나’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고는 삶을 지속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도전한 것이 100일 동안 하루에 만 보씩 걷기였다.
갑자기 웬 만 보 걷기냐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상황이나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도 나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나는 책상과 침대에서만 씨름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늘과 바람, 꽃과 나무를 보며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롬 1:20)을 바라보았다. 하루하루의 성공을 SNS에 업로드하며 ‘내가 해냈다’라는 성취감도 맛보았다. 그리고 100일은, 나를 파고들었던 우울감을 내려놓고 다시 일어서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만 보 걷기 100일 도전에 성공하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몸을 움직이니 마음이 달라졌고, 마음이 달라지니 몸도 건강을 찾아갔다. 당장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며 완벽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이즈음 금상첨화일까, 설상가상일까. 몸 안에 생긴 혹을 떼어내고 보험금을 받았다. 병원비 외에 진단금으로 내게는 제법 큰 액수의 여유 자금이 생겼다. 나는 그 돈으로 필라테스 1년 회원권을 장만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운동을 했다. 이렇게 운동할 기회가 생긴 김에, 먹는 것에도 신경 쓰기로 했다. 주식으로 먹던 즉석식품을 멀리했고,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덧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크게 마흔앓이를 했던 내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혼이 단단하고 튼튼해서 무엇이든 거뜬히 해낼 수 있는 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금상첨화였다.
작년 연말에는 교회를 개척했다. 본래 추진력이라면 남부럽지 않던 나였지만 몸과 마음이 병들었을 때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몸과 마음이 회복되니 영혼의 튼튼함은 자연스레 따라왔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다. 정신력으로 몸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은 헛된 믿음에 가깝다. 몸은 마음보다 솔직해서 나이 듦은 육체로 먼저 느끼게 된다. 아무리 추진력이 좋아도 체력이 없으면 실행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던 힘은 건강한 몸과 마음과 영혼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안녕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요즘 나는 “나와 우리,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안녕교회”에서 스스로에 대한 돌봄 감수성을 키우는 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 가장 우선시했던 것도 운동이었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버텨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체력이 무너지면 마흔앓이를 하던 때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운동하고, 운동하고, 또 운동했다.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기도 어려워진다. 나는 몸과 마음이 아팠던 경험이 있어서 무엇보다 몸 건강에 힘썼다. 근력이 체력이고, 체력이 영성이라 여기며 운동했다. 여러 운동을 섭렵했고,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필라테스 수업 때 강사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제 경험으로는 40대 회원들이 운동을 제일 잘하세요. 20대는 젊음을 믿고 몸을 아끼지 않아서 힘이 없고요. 30대는 여기저기 병들기 시작하면서 안 좋고요. 40대는 운동해야 한다는 걸 알아서 꾸준히 운동을 해오셨거든요. 그래서 수업을 하면 40대 회원분들이 가장 잘 따라오세요.”
우리 선생님의 말씀이 정설인 걸까. 처음 강사 과정을 시작할 때는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20대 동기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막상 수업에 들어가니 그런 걱정은 전혀 필요 없었다. 나는 동기들에 비해 근력이 좋아 선생님에게 “굿 보디”라는 칭찬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필라테스 강사 자격을 얻었다. 개척을 한 뒤 주변에서 힘들지 않냐는 말을 수시로 듣는다. ‘그 어려운 길을…’이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오는 분이 많아졌다. 물론 내게도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처럼 마음에 어둠이 들어서지는 않는다. 근력이 체력이고, 체력이 영성이 된 나는 개척교회 목사로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근육질 할머니의 삶을 꿈꾸다
지난달에 설교 준비를 하며 본문 말씀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 마가복음 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유일한 사건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마태·마가·누가·요한이 다 기록한 만큼, 실제로 있었던 일이 분명하다. 내가 놀란 부분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정신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좀 쉬라며 권면하는 내용이다. ‘오병이어에 이런 말씀도 있었구나.’ 마가복음에만 있는 이 한 구절에는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분주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제자들은 충분히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어쩜, 오늘 우리들의 삶과 이리도 닮았는지…. 제때 쉬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모습이 나 같아서, 우리 성도들 모습 같아서 큰 위로를 받았다.
아무튼 현실의 삶은 쉼을 누릴 만큼 여유롭지 않다. 쉬어야 운동도 하고, 체력도 기를 수 있는데 일에 파묻혀있는 우리의 삶 때문에 운동의 우선순위는 계속 뒤로 밀린다. 그래서 더더욱 쉼과 회복을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단단히 결심하고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셨지만 우리는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젊음을 보내고 다가오는 노년을 준비하는 시기에 있다면 더더욱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는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즘 내가 그리는 미래는 여전히 독거노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별일 없이 살아있다면) 언젠가 나는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노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한 끼를 걱정하며 홀로 외롭게 사는 삶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걷고 뛰고 운동하며 어울려 사는 근육질 할머니의 삶이다. 근력은 체력이요, 체력은 영성이라.
주위에 꽤 많은 분이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운동해야 하는 것도 알고,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알지만 사는 게 바빠서 잘 챙기지 못한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몸소 체험을 통해 운동과 식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잘 알지만, 실천은 또 다른 문제다. 이래저래 정당한 핑곗거리는 넘치고 넘친다. 하루 이틀 운동 안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는다고 금세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하루 이틀 운동하고, 먹고 싶은 거 절제하며 건강한 식단을 챙기면 금방 내 몸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그렇게 만드셨다.
필라테스에서 해부학을 배울 때 인체의 신비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자고, 움직이며 세상을 살아가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 몸을 채우셨다. 때문에, 자기 몸을 아끼고 돌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건강하지 않음을 자책할 필요는 없다. 자기 돌봄과 건강은 인과관계로 묶일 수 없고,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즉석식품 섭취를 줄이고, 간단한 스트레칭부터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특별히 마흔앓이를 앓고 있는 분들께 체력이 영성이 되는 과정을 경험해 보시기를 권한다.
전수희
안녕교회 담임목사로 장신대(예장통합) 신대원과 대학원(선교신학 석사)을 졸업했다. 여성주의 예배 연구와 교회여성 연대 단체인 움트다연구소 대표이며,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위촉받은 폭력예방 통합교육 전문강사이다. 성평등한 교회와 교회성폭력 예방을 위한 다양한 사역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