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이 뭔가요?” 울퉁불퉁 굴러가며 묻는다
[406호 커버스토리]
언제부턴가 달달한 것이 들어가야 머리가 돌아간다, 아이스크림이건 초콜릿이건 어릴 적부터 간식도 단 음식도 좋아해본 적이 없지만 여하튼 요즘은 그렇다. 재유행하는 코로나를 이번에도 피하지 못해 일주일 동안 격리에 들어갔다가 집 밖에 처음 나온 날이다. 카페에 앉아 그간 멀리했던 진한 모카커피와 초콜릿 케이크로 꺼멓게 속을 채우며 이제야 뭐라도 써볼 힘을 얻었다. 풀릴 듯 풀리지 않던 글머리의 실타래를 풀어낼 만큼의 힘.
중년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대한 글을 요청받았다. 그런 영화들이야 차고 넘쳤다. 개중엔 인생 영화도 몇 편 포함되어 있으니 어려울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채워 넣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이번에도 바보같이 덜컥 수락을 하고서야 깨달았다. 나이를 더 먹고 경험이 쌓였다고 쉬워지는 일은 없다. 글쓰기는 더더욱.
모이면 아픈 이야기, 흩어지면 병원으로
대학원 선배 모친 장례식장에서 만난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 끝에 우리는 정말로 병원 정보를 공유하고 각자의 질병의 영역으로 흩어졌다. 지인들 사이에서 나는 운동 싫어하고 몸 안 움직이기로 소문난 축에 속하는데, 장례식장을 나서며 그날 종일 나를 들들 볶았던 언니들의 근심 어린 잔소리를 듣기로 했다. 운동을 할 테다.
갑자기 조깅이나 필라테스와 PT를 시작하긴 부담스럽고, 실내 자전거를 타고 식습관을 조절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종일 집 안에 있으면 걸음 수 170-265 정도에 모든 일을 해결하는 편인 데다가, 승용차 이동을 주로 하며 밤샘이 잦아 일상이 불규칙한 내가 아직 멀쩡한 걸 보면 타고난 건강 체질인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로서는 그건 정신력이라 너스레를 떨지만.
간헐적 단식을 시작한 지 5일, 첫날 30분부터 시작해서 매일 5분씩 늘려가며 실내 자전거를 탄 지 6일째, 코로나에 걸렸다. 3년 전 여름, 산에 올라보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경사로가 시작되기도 전 초입에서 졸도해 업혀 내려왔던 악몽이 떠오르면서, 안 하던 짓을 하니 면역 체계가 당황한 거라고, 사람은 역시 살던 대로 살아야 한다고 침대에 다시 널브러져 생각했다. 나에게 중년이 된다는 것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역시 사람은 안 변하는 건가…” 사이에서 무한 반복 운동을 하며 돌돌돌 굴러다니는 일이다.
“한 여자를 보았다”
로이 앤더슨의 스웨덴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About Endlessness)〉(2019)는 그림 같고 시 같은 수십 개의 장면과 짧은 내레이션으로 되어있다. 마르크 샤갈의 〈도시 위로〉(1918), 에드워드 호퍼의 〈Automat〉(1927)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 같은 그림들 또는 영화 〈패터슨〉(2016)의 모티프가 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들처럼,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에피소드들을 객석과 스크린만큼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자면 인생의 여러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자주 깜짝 놀라고 쓴웃음을 짓게 된다.
노신사가 신문을 보고 앉아있는 레스토랑 테이블 옆에 나이 든 웨이터가 지켜 서서 와인 시중을 들고 있다. 노인이 잔을 비워가자 아마도 습관적으로 잔을 채우던 웨이터는 곧 철철 넘치는 붉은 와인으로 테이블을 흥건하게 만들고 만다. 내레이션 목소리는 이렇게 서술했다. “한 남자를 보았다. 마음이 온통 딴 데 가있는 남자였다.”
지하철 계단 앞에 선 남자의 이야기도 있다. 지난 금요일 여기서 마주쳤던 동창생을 생각하던 남자는 그가 자신을 모른 척 피해가던 일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그는 오래전 그 친구에게 상처 주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다. 땀에 젖어 식료품으로 가득한 봉지를 양팔에 품은 남자는 애초에 이렇게 소개되었다. “한 남자를 보았다. 아내에게 맛있는 저녁 식사를 깜짝 선물하려는 남자였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다시 등장한 이 사내는 그사이 한 번 더 그 친구와 마주쳤다. 학창 시절에는 별로 공부도 못했던 그가 박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손에 국자를 든 채 짜증과 심통이 나있다.
버스에 앉은 점잖은 중년 남자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라며 엉엉 울고, 밤마다 십자가를 지고 채찍에 맞는 꿈을 꾸는 성직자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믿음을 잃어버리면서부터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대략 이런 사연들이다.
“한 남자를 보았다. 믿음을 잃은 남자였다.”
“한 여자를 보았다.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여자를 보았다. 샴페인을 사랑한 여자였다. 너무도 미칠 듯이.”
“한 커플을 보았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도시를 떠돈다. 아름답기로 소문났지만 이제는 폐허가 된 도시다.”
“딸과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생일 파티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비가 왔다. 너무도 많이.”
그렇게 많은 여자와 남자가 울고 웃고 짜증 내고 속상해하고 간청하고 길을 잃고 후회하고 당황한다. 나에게 고유하고 더러는 부끄러운 경험들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선명하게 기술되어있을 때의 당혹감과 매혹이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가장 소심하고 특별한 위로… 나를 움직이는 예술의 힘이란 그런 거다.
최근 몇 년 사이 세 번의 코로나와 한 번의 독감을 앓았고 그보다 혹독했던 실패와 관계의 단절을 겪었고 몇 번째인지 세기를 중단한 ‘광야’를 헤매는 것 같아 생의 고단함이 끝없음을 반추하고 있는 오늘의 나를 로이 앤더슨의 시선으로 그려보자면 대략 이렇지 않을까.
한 여자를 보았다. 운동이 싫지만 운동권이 된 여자였다.
실은, ‘운동 중’입니다만
내게 운동을 권하는 지인들도 잘 모르는 사실인데, 평생 나는 운동권 언저리에 머물러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일인가 싶다. 직선제로 바뀐 첫 선거에서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을 때, 내가 나고 자란 도시에서는 마침 교원노조 운동이 한창이었고 마침 비리가 심각하기로 소문난 재단의 사립 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본의 아니게 학생운동과 시위의 중심에 서게 됐다. 그리하여 일찍이 운동권 학생이었으나, 막상 대학에 진학해서는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가장 우선순위에 둔 청춘을 보냈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40대 중반에 시작하여 6년째 몸담고 있는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모기영)는 대중문화와 기독교 양 진영에서 ‘문화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무언가를 추구하는 곳이다. 10대엔 민주화운동, 청년기엔 기독학생운동, 중년에는 대중문화운동, 이라고 정리하고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나, 운동이 체질인가?
물론 그 운동이 그 운동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둘 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면서, 안정감이 세상 제일 중요하고 에너지평생보존의 법칙(평생 사용 가능한 신체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죽을 때까지 잘 안배하여 최소한의 안정을 유지하며 살겠다는 소신?)을 신봉하며 같은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있기 좋아하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몸이 아파오면 위축되기 쉽고 과몰입하다 보면 언젠가는 번아웃에 이를 위험이 크다는 것도.
로저 미첼의 〈위크엔드 인 파리(Le Week-End)〉(2014)에는 한때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앞장서 가슴 뛰는 비전을 나누었던 영국인 중년 부부가 나온다. 68혁명 세대인 닉(짐 브로드벤트)과 멕(린제이 던컨)은 결혼 3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지로 파리를 선택했다. 아늑하고 낭만적이었던 옛날의 그 호텔방을 일부러 예약해 찾아갔지만, 벽지가 바뀐 것 같기도 하고 방은 코딱지만 한 데다가 이렇게 좁고 높은 계단이었던가, 이 방이 맞나 의심스럽기만 하다. 호텔까지 찾아가는 길은 또 왜 그리 가파른지, 각자 폐활량과 무릎관절의 안위를 물으며 꿍얼대는 닉과 멕은 웃픈 중년의 초상 그대로다.
혁명의 기운과 추억이 서린 도시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열정의 불씨를 다시 일으켜보고 싶었지만 닉은 결국 젊은 날 동경하던 베케트의 묘지 앞에 서서 “난 뛰어난 학생이었는데…, 왜 이렇게 평범해졌을까?” 물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과거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였던 멕은 그 와중에 생물교사를 그만두고 탱고를 배우고 이탈리아어, 피아노도 시작하며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잘해보려고 떠난 주말여행에서 그들은 위기에 빠졌다. 긴 세월 신의와 의리를 지키려고 애써온 노력이 억울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다 그들은 우연히 닉의 오랜 친구 모건(제프 골드브럼)을 만난다. 닉의 케임브리지 동창으로 경계와 정치 붕괴에 관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있는 모건은 닉이 “브레히트 연극에 핑크플로이드 음악을 깔았던” 혁명가였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온실 속에서 자랐지. 뭐든지 우리에겐 너무 쉬웠어. 우린 세상에 너무 큰 빈자리를 남겼어. 페미니즘, 인종차별, 인권 문제… 우리가 시작했는데…. 다시 불을 붙여야지, 젊은 날의 열정을.” 모건이 말했다. 당황스럽게도 모건은 출판기념회 청중들 앞에서 닉을 자기 우상으로 소개했다. 닉 덕분에 부끄러움을 알고 꿈을 꿀 수 있었다며 그는 고마워했다. 그에 대한 닉의 답사는 처참했다. “웬걸요. 저는 지금 창밖으로 떨어지는 중입니다, 영원히.” (윽. 나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닉과 멕은 중년의 위기와 중력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그들이 ‘먹튀’를 하느라 파리 시내를 뛰어다니고 낡은 주크박스에 동전을 집어넣고 옛 춤을 추느라 몸을 움직이는 모습만은 확실히 목격되었다. 68혁명과 영화사의 대부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1964)을 오마주한 카페 장면에서 중절모를 쓴 멕과 두 친구는 한때 유행했던 ‘메디슨’ 춤을 함께 추며 낯선 도시에서의 남은 주말을 대책 없이 즐긴다.
지천명(知天命)이라고요? “하지만 여기서… 왜?!”
닉과 멕에게 파리가 과거로부터 찾아온 내면의 깊은 질문을 만나는 곳이었다면,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사막의 이 작은 도시는 저마다 의문투성이 세상을 재현하는 무대이며, 배우들이 각자의 배역을 연기하는 장소였다. 때는 1955년, 인구 87명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5천 년 전 떨어진 운석으로 유명한 천문 관측 지역이다. 종군사진기자인 오기 스틴벡(제이슨 슈왈츠만)과 유명 배우 밋지 캠벨(스칼렛 요한슨) 가족을 비롯한 여러 그룹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예정된 과학 행사를 위해 속속 도착한다. 하지만 행사 당일 외계 생물체가 나타나 운석을 훔쳐 달아나면서 도시는 봉쇄되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주일 동안 격리 조치된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2022)에서 감독 특유의 톤 다운된 색채로 재현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극작가 콘래드(에드워드 노튼)가 쓰고 슈버트 그린(애드리언 브로디)이 연출하는 연극 속 가상공간이다. 반면, 초반부터 등장하는 흑백 영상은 연극 무대 뒤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티브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이다. 티브이 쇼 사회자(브라이언 크랜스턴)가 전체 진행을 맡았다. 따라서 화려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의 오기와 밋지가 콘래드가 창조한 캐릭터라면, 흑백 무대 위에서 그들은 각자 역할을 맡은 배우이고, 영화와 티브이 쇼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출연자이다. 마찬가지로 콘래드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창조자이면서 티브이 다큐멘터리의 출연자(배우)인 셈이다. 인생이 그렇듯 역할과 배역은 하나로 수렴되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애스터로이드 시티’처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누군가의 글짓기나 희곡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곳이 내가 나의 몫을 연기해내야 할 무대라면, 반드시 그럴 때가 찾아온다. 무대 뒤에서 잠든 게으른 연출가를 깨우고 극을 이 모양으로 쓴 원작자를 찾아가 이유를 묻고 싶은 순간이.
새 공연의 배역이 주어지기 전, 배우(제이슨 슈왈츠만)는 작가를 만나자 이렇게 물었다. “그 대목에서 오기는 왜 뜨거운 전기스토브에 손바닥을 올려놓는 거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작가이자 조물주가 심드렁하게 답한다. “나는 그녀를 보고 가슴 뛰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나 보다, 라고 이해했어요.” “오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군 그래.” 목수였던 단역배우는 그날로 주인공이 되었다.
봉쇄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마주 보이는 모텔방에서 오기와 밋지가 대화하다가, 오기는 정말로 뜨거운 스토브에 손바닥을 갖다 댄다. 왜냐고 묻는 밋지에게,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두 사람은 아픔을 숨기고 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았다. 3주 전 오기는 아픈 아내를 잃었고 그에게는 포기해야 할지 모르는 네 아이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술 취한 배역을 맡고 싶지만 코믹한 연기를 잘해서 코미디 전담 배우가 되어버린 밋지에게도 삶이 의문투성이인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 엄마를 잃은 오기의 아이들에게도 그렇다. 엄마는 이제 멀리 별나라에 살고 있다는데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별의 이름을 지닌 세 꼬마 ‘마녀’들(안드로메다, 카시오페이아, 판도라)은 타파 용기에 담긴 3분의 1의 엄마를 땅에 묻고 물을 주며 기다린다. 엄마가 다시 길러날 때까지.
요컨대, 갑자기 엄마와 아내를 잃고, 차가 고장 나고, 난데없는 행동으로 화상을 입고, 외계인의 등장으로 돌연 사막 한가운데 격리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인물들처럼.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고 여전히 많은 것이 미스터리이지만, 모든 것을 알아내지는 못해도 인생은 살아지는 것이고 공연은, 따라서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하여 깨알 같은 기호들을 다 해독하지 못해도 이 영화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울컥하고 귀엽다.
Read less, Live more
그래서, 나는 왜 여전히 운동권에 머물러야 하는 건가요? 작가이기도 한 조물주에게 나도 따져 물었다. “글쎄다.” 그럴 줄 알았다. 여전히 심드렁한 답이 돌아오는 걸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오기처럼 나도 나의 답을 들고 가서 다시 물어야 할까.
“나는 (본성대로 살다가) 돌처럼 꼼짝 않고 주저앉아 혼자 늙어가지 않을 이유가 필요했다고 이해했어요”라고 말해본다. 그건 마치 내가 달아날 구멍 없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고, 생각하면 곧바로 움직이는 에너자이저를 남편으로 만난 것과도 비슷한 이유일 것 같다. 그렇게 등 떠밀려 나에게 편하지만은 않지만 꼭 해야 할 것 같은 선택을 하며 움직여온 일 자체가 내게는 ‘운동’이고, 고백하건대 중력을 넘어서게 하는 은총이다.
중년이 되어 나보다 젊고 총명한 동료들 등에 업혀 시작한 모기영1)은 특별히 좋은 ‘운동장’이다. 사실은 운동을 가장한 축제(Film Festival)를 지향하지만, 지속되는 축제를 가능케 하는 것은 누군가의 운동이라는 점을 우리는 모두 절실하게 깨달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쯤해서 서로 등 떠밀어주며 함께 굴러갈 동지들이 잔뜩 곁에 붙어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혹시 나 같은 사람들이 어딘가에 또 있지 않을까, 30년 만에 다시 찾아가볼 ‘파리’가 있고 작가를 찾아가 질문할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필요한 사람들이, 로이 앤더슨의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나타나주지 않을까, 하고. “운동, 나 잘 모르겠지만…” 다시 누군가와 함께 굴러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며 쓰윽 곁에 서주는 이웃이면 동력으로 충분하다. 물론 생물학적 나이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읽는 건 덜, 사는 건 더”라고, 〈위크엔드 인 파리〉에서 토니 블레어가 묵었다는 최상급 호텔 객실에 닉은 낙서를 남겼다. 평생 책에 묻혀 살았을 철학 교수 닉이야 덜 읽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똑같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역할을 맡은 배우로서 더 많이 살아내고, 더 많이 움직이는 것은 더 늦기 전에 잊지 않고 도전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1) 제6회 모기영은 2024년 11월 21일(목)-24일(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개최되며, 영화제 개최를 위한 펀딩이 진행중이다. (cfffe.org)
최은
영화평론가. 모기영에서 부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나의 쓸모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과 그래도 세상 어느 구석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자주 줄타기를 한다. 지은 책으로 《제인 오스틴 무비 클럽》, 함께 지은 책으로 《퇴근길 인문학 수업 - 멈춤》,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1》, 《영화와 사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