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끝자락에서
[406호 커버스토리]
중년이라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거의 끝자락에 다다른 듯하다. 사춘기도 시작과 끝이 있으니, 중년기도 그러지 않을까. 얼른 끝내고 축하 파티라도 열고 싶지만, 다 때가 있는 줄 안다. 일상의 매 순간들을 소중하게 마주하며 작은 평화와 작은 기쁨을 건져 올리게 되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중년기가 끝나있을 것이다. 그럼 좀 더 성숙해질까? 조금 더 여유로워질까?
내 중년은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됐다. 내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그때 나는 16년 다녔던 교회를 떠났다. 내 청년기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만난 교회였다. 교회를 통해 첫 직장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간사가 됐고, 교회를 통해 신학교에 입학해 그 교회에서 첫 목회를 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고, 교회에서 살아있는 공동체를 체험했다. 뜨거웠던 시기였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난관과 마주했다. 아버지는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후 40여 일 만에 떠나셨다. 그때 나는 교회와 목회자에게 섭섭함이 점점 쌓이던 차인지라, 내 젊은 날의 전부였던 교회를 사임했다. 그리고 병이 들었다. 열 가지 재앙이 순차적으로 내 몸을 쓰러뜨렸고, 나는 방구석과 병원을 오가는 신세가 됐다. 마지막 재앙이 끝남과 동시에 내 열정의 시기도 끝났다. 그 후 나이 마흔을 맞아 100주년기념교회라는 대형교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 삶과 사역을 활활 태웠던 청춘의 열정은 다시 오지 않았다. 처음엔 기도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홀로 앉아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30대의 열정은 두 번 다시 점화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 돌아가는 목회 일과는 정신없었고,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이었다. 그러나 내 영혼의 조종실엔 뭔가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들어와있었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날 기회들을 호시탐탐 노렸다.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 마음이 잠시 뜨거워지곤 했기 때문이다. 예배를 인도하거나 설교하고 나면, 누군지도 모르는 성도들로부터 문자가 왔다.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성도들 반응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그러다 반응이 없으면 무가치함이라는 쓸쓸한 정서와 실패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많이 받는 기술을 하마터면(?) 터득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좇으면 어떤 결과가 올지를 막연히 알았기 때문인지, 선택 앞에서 나는 매번 서성거렸다. 대한민국 40대 남성의 성공 욕구 실현을 위해 높고 넓은 길로 갈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끝없이 성찰하며 십자가의 낮은 길로 갈지 갈팡질팡했고, 상승의 유혹과 하강의 은혜가 조종간을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즈음 안셀름 그륀의 《내 나이 마흔》을 읽었다. 아내가 먼저 읽고, 내게도 권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사십 줄에 들어서 생긴 이 무기력이 중년기의 과정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중년의 위기가 단지 신체 변화가 아니라, 신앙의 여정 중에 결정적인 시점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자기실현을 위해 하나님을 계속 이용할지, 아니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지 결정하는 때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청년의 열정이 식은 것은 후퇴가 아니었다. 무기력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들어선 것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골짜기였던 셈이다. 중년앓이는 좋은 현상이다.
내 지하실의 그림자
중년을 앓는 동안, 나의 성격과 성향을 깊이 성찰하는 일이 잦아졌다. MBTI와 에니어그램 강사인 아내 덕에 나를 객관적으로 볼 기회가 많았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성찰하고 인정하는 작업은 실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기 내면의 어두운 지하실을 들여다보는 일은 제정신으로 하기 어렵다. 자칫 자기 정죄와 자기혐오에 빠져 염세적인 성향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아내가 청년들과 함께 1박 2일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진행했을 때 겪은 일이다. 나는 사람을 번호로 규정하여 분류하고 설명하는 에니어그램 방식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양한 것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너그럽게 세미나를 열어주고 옆에서 슬쩍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 감정은 처음 경험했다. 아내가 에니어그램 5번을 설명할 때, 곁에서 한쪽 귀만 열고 엿듣던 내게 갑자기 수치심이 올라왔다. 평상시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숨겨둔 나 자신이 모두에게 까발려진 것만 같았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정죄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은 수치심에 얼굴이 뜨거워진 것이다. 나는 내가 매우 합리적인 데다가 공정하고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논리적 사고를 하고 편견 없이 객관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관적 편견에 빠진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자부했었다. 내 판단은 늘 괜찮았고, 내 주장은 나름대로 수준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대 치우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내 자의식 밑에 숨어있던 짙고 음흉한 내 그림자가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순식간에 늪에 빠져버렸다. 앉아야 할지 나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허우적댔다. 내 지하실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다 드러난 자아를 외면할지, 아니면 그 실체를 나의 정체로 인정할지 씨름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아내가 추임새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지금 여기 현존해!” 듣기 싫은 말이었다. 그런데 내겐 정말 심각한 나쁜 버릇이 있었다. 오롯이 여기 머물지 못했다. 자동으로 내 사유는 미래를 배회했고, 내 앞에 있는 이들과의 마음의 교류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와 대화할 때도 대화 자체에 머물지 못하고 내 존재의 중심은 항상 미래의 일로 근심했다. 그때 시계를 보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평생 어떤 미래의 순간을 막연하게 동경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내겐 현재가 없었다. 오늘이라는 순간이 얼마나 멋진지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결코 현실이 된 적이 없는 미래로 도피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건 다른 말로, 성공한 사람들을 향한 부러움이었고, 나에 대한 못마땅한 자기부정이었다. 사람들에게서 오는 인정과 칭찬을 갈구하는 내 영혼이 반응하고 선택하던 못된 병폐였다. 교회에서 자주 쓰던 ‘비전’이라는 말은 내 성취 욕망을 거룩하게 포장한 말과 다름없었다.
그런 복잡다단한 시기로 전환되던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죽음이라는 실체가 무서운 냄새를 풍기며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죽음은 무덤덤한 관념 용어가 아니었다. 내 실존에 딱 붙은 실체였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였기에, 나는 죽음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이제 죽음은 미래의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일이다. 죽음이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는다는 것은 삶의 일상적인 서술어가 됐고, 죽음 그 이후에 대한 호기심과 소망도 커졌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읽은 스캇 펙의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 던진 흥미진진한 질문 덕이다.
중년의 위기로 쾌속 진입하던 어느 날, 한 문장이 내 가슴으로 날아와 콱 박혔다.
오늘이 선물이다(Present is present).
이 문장은 ‘지금 이 순간’의 찬란함을 숙고하게 했고, 나는 거기에 머무는 법을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 그 일이 시작됐고, 에니어그램에 비춘 성찰에서 그 일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바쁘게 일하는 것의 해악이 얼마나 큰지도 알게 됐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먹으며, 느리게 말하고자 했다. 길가에 핀 들꽃을 들여다보며 쭈그리고 앉는 일도 잦았다. 홀로 벤치에 앉고 홀로 산행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매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시작에 불과했다. 중년의 진짜 훈련은 아직 더 남아있었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네 식구가 함께 식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 아내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극도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재난이었다. 아들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고, 딸은 성년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이길 바랐고, 기도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허용적이었고, 정죄하지 않으려 했고, 지지하는 사람이길 바랐다. 그런데 내 노력이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부턴가 식사 자리에 앉으면 나는 계속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원이 됐다. 나는 보통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내 말은 가족들 마음을 때리는 방망이가 됐다. 내 성향에 충실한 ‘원인-결과식 대화’는 심문과 정죄의 구도를 만들어냈다. 허용적이고 독립적인 내 성향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귀결됐다. 말을 해도 상처를 줬고, 말을 안 해도 상처를 남겼다. 내 존재 자체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족들과 불화하는 일이 이어지는 듯했다. 하루는 아내와, 하루는 딸과, 하루는 아들과 불화했다. 억울하고 슬프고 화가 났다.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꿈이었는데, 그게 깨지니 삶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배우 故 이선균 씨가 드라마에서 한 말이었던가, “이번 생은 망했어.”
자발적 추락과 은혜로운 상승
툭하면 벽 쪽으로 몸을 돌려 일찍 잠들던 내게, 어느 날 아내가 책을 추천했다.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였다. 형용모순인 책 제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상대로 매우 어려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세 번을 읽었다. 이 책이 중년기의 구렁텅이에 빠진 나를 구출하는 밧줄이 될 수 있겠다 느꼈기 때문이다. 중년기에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 하나는 ‘방어적인 태도’를 인식하고 버리는 일이었다. 이 말이 무기력한 내 영혼에 새로운 활력과 소망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나름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습관적으로 방어적 태도로 일관해왔었다. 아내가 서운해하면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방어한다. 딸이 화를 내면 내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방어한다. 아들이 속상해하면 내가 다른 아빠에 비해 얼마나 나은 아빠인지 설명하며 나를 방어한다. 집에서 그러니 밖에서는 오죽하랴.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그러니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교우들에게 오죽하랴.
방어적인 태도와 말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해명하지 않기로 백 번 천 번 다짐했다. 속으로는 억울해서 욱할 때도 있지만, 나를 보호하기 위한 해명과 방어의 언어를 멈추고 최선을 다해 수용의 언어인 ‘알겠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 했다. 아니 지금도 의지를 다해 그렇게 말한다. 해명하는 것은 나를 방어하고 타인을 아프게 하는 일이며 공감이 없는 자의 변명이 되기 때문이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내 성격의 그림자와 지하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식하게 된다.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부족한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사고뭉치나 꼰대가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은혜를 갈망하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팽팽한 긴장이 풀리고 관계가 이어진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너그러워지고 용서하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말도 줄어들고, 귀가 활성화된다.
리처드 로어는 “인생 전반부의 임무는 자기 인생을 위하여 적절한 컨테이너를 만드는 것이고 인생 후반부의 임무는 그 컨테이너에 담아서 운반하기로 되어 있는 내용물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내용물은 추락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내게 다가온다. “먼저 추락이 있다. 그다음에 추락으로부터의 회복이 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존재로 알아들어졌다. 추락이야말로 위쪽으로 오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에 납득이 됐다. 정말 그랬다. 내가 해명하기를 그치면 나는 한없이 추락하는 것 같은 실패감을 느낀다. 내가 지금껏 자부해왔던 나라는 존재의 장점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온다. 내가 평생 빚어왔던 내 자화상이 허물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그 자발적 추락이 은혜로운 상승으로 연결된다. 형용모순 안에 진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추락하는 것을 허용했다. 적극적으로 추락하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추락이 두려워서 말과 논리와 언어와 자아를 붙들고 다시 해명하고 방어하는 순간, 나는 겉으로는 상승하고 승리한 것 같으나, 진짜 대책 없는 추락이라는 심판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십견이 왔다. 팔을 들어 축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최근 3개월간의 안식월을 맞아 제주도에서 홀로 한달살이하는 동안 오십견이 고쳐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후비루 증상은 실은 심리적인 이유였다. 아주대 이비인후과에서 받은 진단이다. 그것도 나아졌다.
설교와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인도한 후 집에 오면 수치심이 몰려왔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니 그늘도 큰 탓이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 시선을 덜 의식할 것이다. 너무 잘하려고 스스로 몰아치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진 않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나답지 않은 나로 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인 나답게 살 것이다. 그러니 잘 못해도 괜찮다. 반응이 썩 안 좋아도 괜찮다. 누군가가 한 말에 상처받아도 괜찮다. 타인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그를 축복하는 습관을 기르면 된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도 괜찮다. 솔직하게 즉각 용서를 구하고 성장하기로 마음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성도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책감이 밀려오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지나가게 둘 것이다.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 차오르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기억하며 버틸 것이다. 모든 도전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것이다. 받아들이면 괜찮아지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말을 줄일 것이다. 적게 말하고, 천천히 말하고, 부드럽게 말할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인 줄 안다. 그러나 노인네가 아니라 어른이 되려면 혀를 다스려야 한다. 물론 나는 매일 실패할 것이다. 그래도 계속 전진할 것이다.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마음 깊이 감사를 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식하게 하는 현미경과도 같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알고, 마음 중심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중년기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 같다. 그다음은 뭘까. 또 다른 새로운 열정일까. 새로운 열정 다음엔 또 다른 위기가 올까. 노년의 위기일까. 큰 질병의 위기일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오늘이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김종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육개발원, Young2080 〈큐티진〉 등에서 일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 말씀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 말씀으로 살게 하는 사람이고 싶은 목사이다. 경기도 분당에서 이우교회를 섬기고 있다. 배우자 정신실과 함께 JPSS라는 이니셜로 2000년대 중반 복상에서 장기 연재를 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