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와 SS의 사랑과 책과 중년 이야기
[406호 커버스토리]
“누나도 같이 가시는 거잖아요. 제가 마음에 담아서 갈 거니까, 지리산에 같이 있는 거예요.” 이런 말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교회 청년들과 지리산 종주를 떠나던 후배 JP가 잘 다녀오라는 내 말을 이렇게 받아쳤다. 말이 없는 친구인데, 했다 하면 이렇구나! 평생 이렇듯 달달한 세레나데를 듣고 살겠구나, 하며 결혼했다. 환상이 깨지기까지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기나긴 인생 여정 중 에로스 에너지가 폭발하는 짧은 순간이 있다. 생전 불러보지 않은 세레나데를 부르고 행복을 장담하며 결혼한다. 환상이었기에 다행이지, 음식이고 사람이고 단맛을 안 좋아하는 내가 평생 달달함 속에 살아야 했다면 고통이었으리라. 우리는 올해 결혼 25주년을 맞았다. 마리 루티(Mari Ruti)가 말한바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라면, 우리는 25년 치열한 사랑의 시간을 보냈고, 덕분에 꽤 괜찮은 중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결혼한 지 3-4년쯤 되었을 때 이 지면 〈복음과상황〉에 ‘JP와 SS의 사랑과 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둘이 함께 쓰는 신혼일기였다. 후에 《와우결혼》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했는데, ‘와우결혼’은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의 줄임말이다. ‘와서 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싸움’을 보라는 말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성격 차이, 재정, 출산과 육아, 가사 노동, 일과 소명, 부모님과의 관계 등, 부부가 마주하는 주제를 놓고 주고받는 글을 썼는데, 한 번도 화기애애한 탈고가 없었다. 어떻게든 글이 되고 만다는 ‘마감일 마법’ 덕에 매달 결국 쓰긴 했지만, 그만두자, 도저히 같이 못 쓰겠다는 말이 수시로 나왔었다. ‘그만두자’는 것이 결혼이 아니라 기고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감일 압박과 함께, 보이지 않는 독자를 세우고 싸우는 싸움이라 나름 페어플레이했다. 덕분에 각자 본격 싸움의 기술을 연마했고, 잘 싸우고 난 후에 더 가까워지는 맛도 보았다. ‘화해한 상태로 싸우기’라는 좋은 관계의 원리도 터득했다. 연재를 마친 후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싸우고 살았답니다”이다. 다시 〈복음과상황〉 덕에 사랑을 ‘성장의 문제’로 산 세월을 돌아보며 신혼일기 아닌 중년 일기를 쓰는 감회가 깊다. 감사한 마음이다.
신앙 사춘기, 무의미의 숲, 중년의 현상
나이 몇 살부터 중년일까. 호르몬 변화와 함께 완경을 하고, 이후에 오는 몸과 감정의 변화들, 흔히 갱년기 증상을 통해 여성의 중년기를 가늠한다. 중년을 연구하는 한 신부님은 ‘거꾸로 계산법’을 제안했다. 물리적 나이, 즉 살아온 시간보다는 삶을 마치는 시기로부터 헤아리라는 말이다. 태어남이 아니라 죽음의 방향에서 중년을 바라보자는 뜻이다. 일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시기일 수도 있고, ‘퇴행성’이라는 말이 붙는 건강 문제가 생기거나, 삶을 지탱하던 의미나 가치들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때일 수도 있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상실감의 바람과 함께 찾아드는 것이 중년의 위기이고, 그 바람에는 죽음의 냄새가 묻어있다. 중년 연구가들이 38세에서 60세까지 폭넓게 그 시기를 잡는 것이 이해할 만하다. 몇 살쯤, 어떤 영역의 무너짐과 상실감으로 중년을 맞이했는가는 한 사람 인생 여정의 고유함이 담긴 서사일 것이다. 내게 중년은 꽤 이른 나이에, 몸이나 정서보다 신앙의 위기와 상실감으로 먼저 왔다.
정확히 서른여덟이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그 나이 되도록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신앙의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시작은 미약하였다. 교회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예배에 앉아있는 것, 특히 설교 듣는 일이 거북해졌다. 화선지에 튄 먹물 한 방울 같았는데 그 거북함이 신앙생활 전반, 아니 삶 전체로 퍼져나갔다. 퍼져나가고 퍼져나가면서 내 마음의 화선지는 무기력과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열정 넘치는 신앙인이었는데, 그 뜨거움은 죄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삶의 생기를 주었던 이전의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힘을 내보려 해도, 아무리 힘을 내보려 해도 힘이 나지 않는 상태, 우울증 증상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전에 하던 기도로는 신앙을 이어갈 수 없었다. 교회는 가기 싫고, 설교는 더욱 듣기 싫었으며 예전 방식으로는 기도도 하기 싫으니 하나님께 가는 길을 잃은 셈이었다. 이러다 하나님께 버림받겠다는, 이미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좌절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예전 방식의 신앙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전에 했던 기도나 신앙적 열정이 차라리 부끄러웠고, 때로 혐오스러웠다. 적극적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로부터 떠나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떠나온 그곳으로 통하는 문이 등 뒤에서 스르르 닫히고 있었다. 앞은 칠흑 같은 곳이라 발을 뗄 수 없었다. 한 발 앞이 낭떠러지인지, 뱀이 득실대는 늪인지, 혹여 빛으로 가는 신작로일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한 발 내디딜 빛은 책에서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둔 밤’이라는 말에서 ‘빛’이 보였다. 16세기 스페인의 영성 신학자 십자가의 성 요한의 책 제목이다. 이 책 《어둔 밤》을 현대적 의미로 해제한 책에서 제랄드 메이(Gerald G. May)가 말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의 신호들이 놀랍도록 나의 칠흑 같은 시간을 비추어주었다. 여기저기서 이름만 보았던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원저를 읽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 책들이 마음에 어떤 길을 내주었다. 등 뒤에서 닫힌 문을 다시 열게 될 일이 없으리라는, 다시는 이전의 신앙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신앙의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은 내게 선생님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16세기 두 저자는 또 다른 중세 영성가들을 끌고 왔다. 또, 시대를 거슬러 사막 교부의 가르침으로 나를 끌고 갔다. 낯선 이 글들을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찾다 보니, 동시대 가톨릭 영성 작가들에 닿았다. 40여 년 신앙생활하는 동안 듣도 보도 못했던 보석 같은 책과 스승들이었다. 애써 찾아 만난 것이 아니다. 기도의 길을 찾던 내게 세기를 거슬러 기도의 스승들이 나타나고 찾아오시니 배우고 따를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몇 년을 그렇게 보내고, 그 어두운 나날들에 내 나름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아이의 신앙에서 어른의 신앙으로 가기 위한 변태의 시간, 신앙 사춘기였다. 신앙도 삶도 그 무엇도 의미 없는 무의미의 숲이었고, 중년의 현상이기도 했다.
위기가 기회가 되는 역설
30대 초중반에 쓴 JP와 SS의 사랑과 책 이야기는 진로와 소명에 대한 고민으로 끝이 난다. 당시 나는 신생 학과인 음악심리치료학을 새로 공부하고 기적처럼 풀타임 직장을 얻어 일하고 있었다. 자타공인 천직이었다. 평생 직업으로 기쁘게 일하며 살 일만 남은 것 같았다. 반면 남편은 시민운동을 거쳐, 다시 대학원 공부를 하고, 말씀 묵상지 편집 일을 하면서도 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으로 지냈다. 결국 운명처럼 신대원에 입학했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실은 내 중년의 위기 또는 신앙 사춘기는 이와 맞물려있다. 열심 있는 젊은 부부에서 목회자 부부로 갑자기 정체성이 바뀌었다. 교회는 같은 교회였다. 평신도에서 목회자로, 남편 위치가 바뀌자 덩달아 나의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고갱님’에서 갑자기 가판대 안쪽 판매원 자리에 서게 된 형국이랄까. 정확하게 말하면 판매원의 가족이 된 셈인데, 가판대 안쪽의 세계가 무시무시하게 불합리했다. 기도와 예배의 메마름은 그 위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남편은 이제 교회를 지키고, 교회의 제도를 지켜야 하는 전도사-목사의 길 위에 올라선 것이다. 얄궂게도 내게는 이때부터가 더욱 적극적으로 담을 넘는 시절이 되었다. 횡적인 담을 넘어 가톨릭으로, 종적인 담을 넘어 중세와 초세기 기독교로 넘나들며 배우고 기도했고, 급기야 천직이라 여겼던 음악치료보다 영성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신혼일기를 표방한 연재 제목이 JP와 SS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책’ 이야기인 이유가 있다. 남편과 나를 중매한 것도 책이고, 연애하다 헤어지게 된 사연에도 ‘책’이 있다. 청년부 시절, 후배 JP와 좋아하는 저자가 겹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손봉호 교수님과 이현주 목사님이다. 두 분을 같이 좋아하기는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고신 교단의 장로이기도 한, 시대의 도덕 선생님으로 보수 성향을 띤 손봉호 교수와 진보 신앙인의 아이콘, 면직된 목사 이현주 목사였으니까.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지! 운명적으로 사귀게 되었다. 초록에 줄이 그어진 무늬만 보고 같은 수박인 줄 알았다. 쪼개보니 빨강 수박, 노랑 수박이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달랐다. 남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이현주적이었다. 그 진보성은 내게 불안을 유발했다. 반대로 나는 더 손봉호적이어서 남편에겐 갑갑했던 것이고. 머리형에 활자 중독 커플로서 헤어짐의 위기를 책으로 타개하려 했다. 존 스토트의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함께 읽으면서 타협 지점을 찾아보려 했는데, ‘다름’의 내용만 더 또렷해졌다. 헤어짐이 답이었다. 그 시절 내 마음에 오르락내리락 울리던 노랫말이 있었다.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김창기의 노래다. 남편의 개방적·진보적 신학이 버거웠고 두려웠다. 저러다 종교다원주의로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보수적인 신앙 안에서 자란 내가 저렇듯 자유의 욕구가 높은 사람을 감당하긴 어려운 일이라 여겼던지, 헤어지는 어간 자꾸 저 가사를 되뇌었다.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그랬던 남편은 고신 신대원을 나와서 제도교회 목사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사이에 두고 설전을 벌이던 남자친구,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와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을 좋아하던 그 청년을 떠올려보면 상상할 수 없는 오늘이다. 반대로 ‘구원의 확신’ 같은 것을 따져 물으며 교리의 틀에 남자친구를 집어넣고 싶어 안달하던, 제도권 밖 신앙이 두려워 사랑하는 남자를 온전히 사랑하지도 못했던 나는 신앙 사춘기를 지나며 담을 넘은 여자가 되었다. 기도를 배우기 위해 가톨릭의 여러 기관을 전전하다 결국 가톨릭 대학교의 대학원에 들어가 아빌라의 데레사로 논문도 썼다. 가톨릭 수녀님을 인생 스승이며 친구로 얻고, 신부님을 영성 지도자로 만나는 오늘을 살고 있다. 남편이 뒤늦게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신앙의 위기로 닥친 중년을 지나며 어쩌면 나는 개신교회를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한때 그의 원심력이 버거워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라며 떠나보내야 했었는데. 그가 목사의 이름으로 내 신앙의 구심력이 되어주었다. 모교회 전도사와 부목사, 대형교회 부목사를 경유하며 안착한 남편의 사역지는 이른바 ‘교회 사태’를 겪은 교인들이 세운 교회이다. 냉소와 불신, 특히 목회자에 대한 불신의 터 위에 선 시대적 교회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목사 노릇을 하는 남편의 ‘무너짐’이 뒤늦게 내 늦바람을 잠재웠다. 그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화평하게 만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중년의 온갖 증상을 ‘영성의 바람’으로 알아들을 때, 위기는 기회가 된다.
중년의 영성: 내적 자아와의 만남
여성들의 영성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영성이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말처럼 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에, 모든 이야기와 기도는 지금 여기의 자잘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한다. 희한한 것이, 결혼한 중년 여성들의 일상 성찰과 기도는 거의 남편으로 귀결한다. 이 말이 남편을 위한 기도를 뜻하지는 않는다. 하루를 지나며 내 마음에 일어난 온갖 감정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결국 남편이 있다는 말이다. 남편이 모 셀럽 목사님의 SNS에 올라온 일상 에피소드를 킥킥대며 들려주었다. “여보, K 목사님 얘긴데. 물을 마시다 남아서 나중에 먹으려고 두었대. 사모님이 그걸 그냥 버리지 그러느냐, 꾸중(?)하시더래.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먹다 남은 물은 바로 버렸대. 그랬더니 아깝게 그걸 왜 버리냐고 또 역정을 내시더래. 어쩌라는 거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건, 그냥 남편이 뭘 해도 꼴 보기 싫다는 거야”라고 툭 진심을 말해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드러기로 병원에 갔더니 갱년기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런 갱년기 증상도 있냐 했더니, 아무 증상에나 갖다 붙여도 갱년기로 설명이 된다고 했다. 남편과의 관계로 가면, ‘이 남자의 모든 행동이 그냥 분노 버튼인 것’에도 갱년기를 갖다 붙이면 설명이 된다. 갱년기의 아내는 화내며 꾸중하시고, 남편은 쫄려서 눈치 보다가 삐지고 만다.
중년의 영성을 논하며 카를 융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 안에 남성 있고, 남성 안에 여성 있다는 조금 난해한 이론이다. 《무의식의 유혹: 우울한 남자의 아니마, 화내는 여자의 아니무스》(원제: The Invisible Partners, How The Male And Female In Each Of Us Affects Our Relationships). 이 책의 제목이면 거의 설명이 다 되는 셈인데, 어려우시려나? 무수한 임상 경험을 담아 후려쳐본다면 ‘화난 여자, 삐진 남자’이다. 여성에게는 여성 호르몬이, 남성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줄면서 상대적으로 여성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남성에게는 여성 호르몬의 작용이 더욱 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때가 갱년기이다. 전에 없던 분노와 힘을 표출하는 아내, 말로 하면 될 것을 삐져서 입 다물고 있거나 우울한 모습을 띠는 남편에 대한 증언이 허다하다. 카를 융에 의하면 중년기 이후의 중요한 과제는 내적인 자아와의 화해이다. 타고난 성별로 사느라 애썼던 여자와 남자는 억눌리고 숨겨졌던 여성 안의 남성(아니무스, Animus)을, 남성 안의 여성(아니마, Anima)을 발현하고 꽃피울 때 온전하고 성숙한 모습을 띤다는 말이다. 그것이 중년 이후의 과제이다. 한 여자, 한 남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충족한 존재가 되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각기 자기 안의 이성을 잘 마주하고 살려내면 독립적이고 통합적이며 성숙한 자아가 된다는 뜻인데, 도대체 그 이성은 누구냐고?
“누나도 같이 가시는 거잖아요. 제가 마음에 담아서 갈 거니까…” 지리산 종주를 떠나며 내게 남겨준 이 말, 나는 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고백이며 프러포즈였다. 중년의 끝자락에서 다시 새롭게 이 말을 듣는다. 남성의 내면에 있는 여성, 여성의 내면에 있는 남성은 ‘투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외적 세계의 스크린에 구체적인 사람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랑에 빠진 이성이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이성에게서 나는 내 안에 숨겨진 온전성을 향한 에너지를 마주한다. 남편과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때, 그의 무엇이 나를 사로잡았던가 생각해본다. 대체로 내게 없는 것들이었다. 멋져 보이던 그것이 어느 날 버거움과 두려움이 되었다. 멋지며 동시에 버거운 것을 끌어안고 일상을 살자니 미세한 결핍감과 분노가 조용히 쌓여간다. 중년에 들어서서 허무의 파도가 들이치며 애써 붙들었던 포장지들이 벗겨져, 남은 것은 ‘꼴 비기 싫음’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마음에 담았던 것은 당신의 멋짐이 아니라 내 안의 아름다움이었다.
신혼일기를 연재하던 시절에 농담처럼 지은 일종의 필명이 있었는데, ‘진지남’ ‘익살녀’였다. 매달 글을 쓰며 싸우던 사소한 이유 중 하나는 재미와 의미였다. 의미에 치중하여 진지해지는 것이 나는 싫었고, 재미에 집착하여 가벼운 글이 되는 것을 남편은 못 견뎠다. 식탁에 나란히 앉은 엄마 아빠의 티키타카를 관람하며 요즘 우리 아이들이 놀리며 하는 말이다. 아저씨 개그 던지고 좋아하는 아빠,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화내는 엄마에게 “익살녀 어디 갔어? 진지남 어디 갔어? 그 사람들 어디 가고… 아오, 진짜 안 어울리게 진지녀 익살남이 앉아있어. 싸우려면 우리 없을 때 싸워.” 신혼일기 후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싸우고’ 살았던 20여 년 만에 다다른 JP와 SS의 책과 사랑과 중년 이야기이다.
정신실
음악심리치료와 문화영성을 공부했다. 인간의 고통은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진정한 자기와의 연결이 끊어진 ‘소외된 자아’에서 기인한다는 믿음으로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라는 치유와 상담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