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 한국 장로교 보수 신학계의 ‘지로적(指路的) 신학자’
[407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거대한 산, 침식, 그림자
박형룡(1897-1978)은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양대 축을 이루는 한국 장로교에서 독보적이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27년부터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문을 닫은 1938년까지 그의 신학은 한국 장로교에서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1938년부터 해방 후 1947년까지는 후(後)평양신학교를 이끈 채필근, 조선신학교를 주도한 김재준과 송창근이 한국 장로교 신학계를 일시 지배했다. 그러나 박형룡이 1947년에 귀국해서 출옥 성도 중심의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이듬해에 서울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 후부터, 그는 한국 장로교 신학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195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과 통합이 분열된 후에 그의 지배력은 물리적으로는 절반으로 쇠퇴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장로교회 다수, 더 자세히 말하면 한국 장로교회 보수 진영(합동, 개혁, 고신, 합신, 대신, 백석 등)을 지배하는 신학적 목소리로 오래도록 영향력을 유지했다.
요컨대, 장로교 내에서 자기 목소리를 낸 신학적·정치적 경쟁자가 여럿 있었지만, 그만큼 절대적 지지와 추앙을 받은 이도, 반대로 그만큼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이도 없었다. 박형룡은 어떤 이들에게는 배교와 타락의 시대에 진리를 철통같이 수호하여 한국교회를 신학적 오염과 몰락으로부터 지켜낸 위대한 사령관이자 거인이고, 또한 삶과 경건에 한 점 흠 없는 성자였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에게는 한국 장로교회를 지적 무지와 옹졸한 수구적 폐쇄성의 늪에 가두어놓고,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사고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 악독한 독재자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박형룡이 수십 년간 쌓아온 견고한 아성에도 서서히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1971년에 총신에서 물러난 후 1978년에 사망했다. 바로 이듬해 1979년에, 그가 지배자로 오래 군림했던 예장합동 내 다툼에서 그의 전승을 온전히 계승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밀려났다. 1979년 합동보수(이후, 개혁) 교단의 등장, 그리고 합동 계열 비주류 교파들의 연이은 등장은 한국 보수 장로교 내에서도 그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거대한 산에 침식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망한 지 4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박형룡은 한국 장로회 보수 신학계와 교계에 그림자를 넓게 내리고 있는 전설적 존재다. 약 50년 동안 전 세계 유수의 신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여 학문적 발전을 성취한 수많은 후배 학자들이 그가 구축한 한국 장로회 보수 진영 내에서 변형과 수정, 부가와 삭제, 교정과 재진술 등의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누구도 박형룡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가 끼친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거나 변형하지도 못했다. 그와 같은 존경과 애정도, 반대로 그가 받은 수준의 증오와 반대도 직면하지 못했다. 한국 보수 장로교회는 박형룡이 최고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산군(山群)이 드리운 넓은 그림자 안에 여전히 머물러있다. 그 그림자를 벗어나려 시도한 이들도 여전히 그 경계선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벽동 서생에서 신학박사로
박형룡은 19세기를 3년 남겨둔 1897년 3월 28일(음력)에 평안북도 벽동군 운서면 운하동에서 박기수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벽동은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 중류 산골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빚을 내가며 워낙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어린 시절 집안은 빈궁했다. 이런 분위기에도, 그는 열 살까지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웠다. 그런데 서당 선생이 특별했다. 유학을 가르치는 선생인데도, 학생들을 인근 교회로 데려가서 연설을 배우게 했다. 개화기 이전 유교의 위정척사 분위기와는 달리, 20세기 초에는 유학자 사이에서도 서양 문명을 통해 개인의 발전과 국가의 자강을 이루려는 의지가 널리 수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새뮤얼 마페트(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1864-1939)가 1890년 평양 선교를 시작한 이래로, 서북 지역은 한반도에서 기독교 수용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이것이 박형룡이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이상웅, 32쪽; 장동민, 20쪽).
1907년 평양대부흥 직후 뜨거웠던 시기에 그는 부흥회에서 김익두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을 키웠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구호를 외치며 쉼 없이 전도한 최권능이 목회하던 벽동읍교회에 출석했다. 술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아버지가 초가를 팔고 신자가 하나도 없는 두메산골로 이사 가려 하자, 박형룡은 기독교 학교가 있는 선천으로 찾아갔다. 1907년에 조선 장로회 첫 일곱 목사 중 하나인 양전백이 선천남교회 교인들과 함께 세운 신성중학교로 간 그는, 북장로회 선교사 교장 조지 매큔(George S. McCune, 윤산온, 1872-1941)에게 도움을 받아 입학 후 3년 만인 1916년에 졸업했다(박아론, 27쪽; 이상웅, 32쪽). 당시 박형룡은 늘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며 허공을 응시하는 버릇 때문에 ‘올빼미’라는 별명으로, 워낙 경건하게 신앙에 몰두했기에 ‘박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박형룡이 특히 존경하며 따른 선생은 스탠리 솔터(T. Stanley Saltau, 소열도, 1890-1972)로, 그도 제자 박형룡을 거의 친구처럼 여기며 후에는 ‘성자다운 학자’라고 지칭하며 존경하게 된다(박용규, 167-178쪽).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박형룡은 솔터 선교사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평양 숭실전문에 진학했다. 4년간의 인문학 과정을 밟은 그는 당시 숭실전문 교장을 맡고 있던 평양의 개척자 마페트 선교사에게 감화를 받으며 공부하다, 1920년에 졸업했다. 숭실전문 시기에 그는 두 차례 민족운동에 연루된다. 먼저, 그가 23세로 3학년이던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운동이었다. 근래의 연구 성과로 잘 알려졌듯, 3·1운동은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에 선언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 외에도, 전국에 소재한 미션계 학교의 기독교인 교사와 학생, 지역교회의 참여가 두드려졌다. 서북 지방 3·1운동은 상해에서 입국한 선천 신성학교 교사 선우혁이 양전백 목사를 설득한 후, 정주의 이승훈 장로와 평양의 길선주·강규찬·김선두 목사, 윤원삼 장로 등 평양 기독교 지도자들을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어서 윤원삼 장로가 평양 교사들을, 숭실학교 교사 출신의 태극서원 안세환이 학생들을 포섭하기로 했는데, 이때 박형룡도 시위에 가담시켰다. 당시 박형룡을 비롯한 학생들이 맡은 역할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소속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시위 후 박형룡은 숭실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1862-1931)의 집에 숨어있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년 후 1920년 4월에는 숭실전문과 숭실중학 연합 부흥전도대에 들어가, 19명으로 구성된 남부 11개 도시 순회단에 참여했다. 당시 4학년 졸업반이던 그는 7-8일에 목포양동교회에서 음악회와 더불어 진행된 모임에서 ‘천의 검’(겔 33:6)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1천 3백여 명이 모인 집회에 참석한 기독교인 청중들은 설교에 뜨겁게 반응했는데, 열렬한 반응을 보인 이들은 신자들만이 아니었다. 목포경찰서도 하나님이 악한 일제를 하늘의 검으로 사용하여 범죄한 조선 민족을 심판했다는 설교 내용에 ‘과격한 언사’가 담겼다는 혐의로 박형룡을 체포하여, 10개월간(1920.4.9.-1921.2.11.) 감옥에 가두었다.
장동민에 의하면, 3·1운동과 목포 설화 사건에 참여한 박형룡은 온건한 극일주의자였다. 그는 1910-1920년대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실력양성론, 19세기 영미 복음주의자들의 회심과 개인윤리 향상을 통한 사회개혁 사상, 사회진화론이 결합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런 온건한 사회개혁관은 일평생 지속되었는데, 강점기에는 일제가, 해방 정국에서는 공산주의 정권이, 1960-1970년대에는 자유주의신학과 세속주의가 바로 한국 민족과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휘두르는 ‘천의 검’이었다(장동민, 52-56쪽).
출옥한 박형룡은 마페트에게 추천을 받아 숭실과 비슷한 성향의 미션계 대학인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 유학했다. 3학년에 편입한 후 2년간 공부했는데, 여기서 3·1운동 이후 남경과 상해로 망명한 한국 기독교인 애국자들과 교제했다. 금릉대학 진학은 미국으로 유학할 만한 영어 실력을 기르고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이상웅, 35쪽).
금릉대학을 졸업한 1923년에 박형룡은 체계적인 신학 공부라는 원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진학했다. 이 선택이 아마도 박형룡에게 남은 일생의 방향을 좌우한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 같다. 그는 원래 남경에서 만난 선교사를 통해 ‘미국 어떤 자유주의 신학교’ 혹은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로 진학할 계획을 품고 미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마페트와 솔터의 권유로 방향을 바꾸어 프린스턴에 입학했다.
1923년의 프린스턴 신학교는 학교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논쟁에 휩싸여있던 시기였다. 1890년대부터 미국 종교계에서 시작된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의 열기가 미국 북장로회에서 가장 과열된 시기가 바로 1920년대였다. 19세기 구학파 프린스턴 정통의 대가 벤저민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가 1921년에 사망한 후, 보수파 대표 그레셤 메이천(J. Gresham Machen, 1881-1937)과 그를 따르는 소수파 추종자들이 교단과 신학을 옛 정통의 닻에 묶어두려고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신학적 자유주의의 온상인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와는 달리, 프린스턴 신학교의 주류는 온건한 관용 노선을 선택했다. 그러나 메이천은 박형룡이 입학한 그해에 출간된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통해서,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므로, 신학교 안에서 발붙일 자리가 없다고 명확하게 선언했다. 여러 교수들에게 수업을 들었지만, 박형룡을 사로잡은 선생은 단연 메이천이었다. 그는 3년간 머물며 신학사(Th.B.)와 신학석사(Th.M.) 과정을 마무리했는데, 신학석사 과정의 전공이 변증학이었다(장동민, 61-88쪽). 자신이 믿는 바를 정통이라고 하면서, 때로 전투적일 정도로 강력하게 자기 입장을 밀어붙이는 박형룡의 성향은 이 시기 프린스턴에 깔린 전체적 분위기, 메이천에게 받은 영향, 변증학이라는 학문의 성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프린스턴에서 석사를 마무리한 박형룡은 1926년에 박사과정 학교로 켄터키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 신학교를 선택했다. 장로교 배경인 그가 침례교 학교를 선택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보인다. 하나는 프린스턴 시절 그에게 큰 도움을 베푼 미국인 친구 로렌스 길모어(Lawrence B. Gilmore, 1899-1950)가 남침례 신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1942-1943년 학기에 비로소 박사과정을 개설하게 되는 프린스턴과 신학 색채가 그나마 유사한 학교였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온건한 침례교 칼뱅주의 노선에 서있던 남침례 신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후 1927년 7월경 영구 귀국했다. 캠퍼스에 있던 이 기간에 코스워크와 구두시험을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마무리한 그는 귀국 후 5년간 학위논문을 작성하여 제출한 후, 1933년 1월에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박사논문의 제목은 〈자연과학에서 유래한 반기독교 추론들〉로, 변증학 분야였다(88-99쪽).
평양신학교 신임 교수
중국과 미국에서 만 6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여름에 귀국한 박형룡은 첫 3년간 신의주제일교회 전도사, 평양산정현교회 전도사·목사로 교회 일에 집중하며 모교 숭실전문 등에서 강의했다. 그가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한 때는 1930년 9월부터로, 처음에는 임시교수였다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31년 4월부터 전임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남궁혁·이성휘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한국인 교수가 되었다. 1930년 전후로 신학 교육이 한국인에 의해 주도되는 꿈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박형룡은 1938년에 폐교될 때까지 약 8년간 교편을 잡는다. 그러나 이 8년이 그가 명실공히 조선장로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인 신학자로 자리 잡기에 부족한 기간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1890년대부터 일어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여파가 1930년대 한국 장로교 안에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박형룡은 조직신학자로 주로 알려져있지만, 평양신학교 시기에는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 평양신학교 초기부터 조직신학자로 활약한 남장로회 선교사 윌리엄 레널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 1867-1951)가 1937년까지 가르쳤고, 같은 남장로회 소속 존 크레인(John C. Crane, 구례인, 1888-1964)이 남은 1년간 조직신학을 교수했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변증학을 전공했으므로, 변증학·현대신학·윤리학을 주로 가르쳤다. 교수로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학자로서 논문을 작성하는 책임이었다. 1918년에 평양신학교 학술지로 창간된 〈신학지남〉도 1938년 평양신학교 폐교와 함께 폐간되는데, 귀국 후 10여 년간 그는 약 60편의 기고문과 논문을 〈신학지남〉에 실었다. 대부분 변증학과 현대신학 관련 주제였다.
‘지로적(指路的) 신학자’로 부상하다
1934년은 한국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근거하여 첫 개신교 선교사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 안련, 1858-1932)이 입국한 1884년 이후 50주년, 즉 희년을 맞는 해였다. 이 해는 희년을 기념하는 축제 같은 해였지만, 동시에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신학적 입장에 따라 숨겨져있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해이기도 했다. 1934년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 저작권 부인, 김춘배 목사의 여성 안수 주장, 1935년 장로교 신학자들의 《아빙돈 단권 주석》 번역 참여, 1933-1935년 최태용·백남용의 복음교회 결성, 1932-1935년 신흥우의 적극신앙단 활동 등이 교계를 흔들었다. 장로회 총회는 이런 사건들의 이단성과 위법성을 조사하고 결론을 내려야 했는데, 이 모든 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연구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징계 청원을 주도한 인물이 박형룡이었다. 평양신학교 정교수가 된 지 3-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박형룡은 선교사 지도자들을 대신해서 한국 장로교회 목회자와 신학자 전체를 지도하는 나침반으로, 즉, 그가 자주 쓴 표현을 차용하자면, ‘지로(指路)적 신학자’로 일약 부상했다(박용규, 151-155쪽).
박형룡은 1930년대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총회 차원에서 처리하는 동시에, 선교사들이 물려준 보수 정통 신앙을 흔드는 흐름을 두 가지 작업을 통해 차단하고자 했다. 하나는 총회 차원에서 정통 신앙에 근거한 《표준성경주석》 집필 작업을 시작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장로교 정통 개혁파 신학에 근거해서 모든 ‘이단’ ‘잘못된 교리’(위교리) ‘반기독교이론’의 실체를 밝히고 비판하는 책을 출간한 일이었다. 1934년 총회에서 간행을 결의하고, 이듬해 총회에서 박형룡이 편집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인 목사와 선교사들이 집필하기로 한 《표준성경주석》 시리즈는 1937년에 첫 권이 나온 이후, 1960년대까지도 10권을 채 발행하지 못하고 중단되었으므로,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5년 11월에 출간된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 학파편》은 박형룡이 의도한 목적대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 학파편》은 전체 18장, 847쪽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으로, 선교 50주년에 한국인의 손으로 집필된 첫 본격적 신학서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책 내용과 방법론을 세밀하게 분석한 장동민에 의하면, 박형룡은 서양에서 등장한 주요한 이단적·비정통적·반기독교적 사상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각각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통 개혁파 입장에서 비평한다. 이 세 범주는 각각 합리파·경험파·실용파로, 첫 번째는 자유주의 등의 현대신학, 두 번째는 성령운동 등의 신비주의, 세 번째는 적극신앙단 등의 급진적 기독교 사회운동으로 대표된다. 그는 이 책 내용 대부분을 서양 상황을 반영하는 문서 자료를 활용하여 집필했다. 그러나 이런 운동 대부분이 한국화된 형태로 당대에 등장해서 교회와 사회를 현혹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있다. 즉, 박형룡은 정통 개혁파 신학을 기준으로, 근대과학, 자유주의신학, 사회진화론, 과격한 민족운동, 혼합주의적 신비주의 영성 등 모든 새로운 사상·해석·운동을 잘못되었다고 일괄 비판하는 한국 장로교 보수 신학계 특유의 비평 전통 모델을 이 책으로 창시한 셈이다(장동민, 145-264쪽).
휴지기: 일본, 만주 망명 시기
일제 종교정책은 1930년대 초 한국 신학계에 입문하자마자 빠르게 ‘지로적 신학자’로 자리 잡은 박형룡의 공간도 앗아갔다. 1938년 평양신학교 폐교 직후 박형룡은 일본으로, 이어서 만주로 망명했다. 동갑내기로, 평양에서 서로를 존경하며 동역한 목회자 주기철(1897-1944)과 신학자 박형룡의 행보는 겹치기도 하고 나뉘기도 한다.
일제 당국은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명령했다. 그러나 숭실의 매큔을 비롯한 세 교장은 신앙 양심상 이를 거부했다. 평안남도지사 야스타케는 1936년 1월에 신사참배 불응 시 사표를 제출하라는 최후통첩을 고지했다. 그러자 숭실학교 이사회와 선교사회는 학교 관계자 전원이 신사참배를 할 수는 없으므로, 한국인 한 사람을 대표로 세워 신사참배를 하게 해서 학교를 유지하자는 데 합의했다. 마지막으로 매큔은 학교가 내린 최종 결정을 놓고 평양의 유력한 두 한국인 지도자인 평양신학교 교수 박형룡, 그리고 박형룡이 추천하여 얼마 전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주기철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 둘이 한국인 대표 한 사람을 내세워 신사참배를 하는 것도 학교 전체의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는 의견을 매큔에게 피력하자, 매큔은 결국 숭실의 신사참배를 전면 거부하고 교장직 박탈, 폐교의 길을 선택했다.
1938년 2월에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평북노회장 김일선이 신학교 기숙사 앞에 심은 기념식수를 평양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베어버렸다. 이 사건으로 박형룡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 10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주기철도 이 일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검속되어 2-3개월간 투옥되었다. 평양신학교 한국인 교수 5인(남궁혁, 이성휘, 박형룡, 채필근, 김관식) 중 신사참배에 분명하게 반대한 인물은 박형룡뿐이었다. 여기까지는 박형룡과 주기철의 행보가 겹친다.
그러나 이후 행보는 나뉘었다. 잘 알려졌듯, 주기철은 평양에 머물러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하다 1944년 4월 21일에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것은 박형룡도 마찬가지였으나, 신사참배가 결의되는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 직전 8월에 예비검속으로 주기철이 체포되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는 일본 기독교인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문제를 진정하려던 김선두 목사 등을 만났으나, 이 일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3년간 거의 잠적 상태로 《표준성경주석》 집필에 몰두했다.
3년 후 1941년에는 만주 봉천(선양)으로 옮겨 한인들이 모인 동북신학교에서 강의를 재개했다. 초교파 신학교였지만, 평양신학교를 계승한다는 목표를 내건 교장 정상인은 박형룡과 박윤선을 교수로 초청했다. 일제가 지배하고 있던 만주에서도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있었고, 학교 관계자 대부분도 신사참배에 참여했으나, 두 사람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교수직을 수락했다. 후일담에 의하면, 박윤선은 한 차례 신사참배를 한 적이 있었고, 박형룡은 마지막까지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 정국의 한국 신학계에서 박형룡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버틴 유일한 신학자라는 평판을 얻음으로써, 자연히 더 강한 권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 때문에, 평안도와 경상도, 만주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버텼던 출옥 성도들은 해방 후 교회 재건 과정에서 박형룡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대개 신사참배한 교역자들에게 개인적 회개와 더불어 공적 치리로써 2개월 자책 휴무를 권했다.
그러나 이런 조언에 대한 수용 여부는 개인별로, 집단별로, 노회별로 제각각이었다. 특히 장로회 1938년 총회장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한 홍택기 등 교계 실세들은 외국으로 망명함으로써 압박을 피한 박형룡의 자격을 문제 삼아 그의 의견을 거부하기도 했다. 박형룡 스스로도 자신이 현장에서 순교한 주기철과 같은 권위를 가진 인물은 아니라고 자책했다는 증언도 있다. 아마도 이런 개인적 자책, 핍박 이후의 교회 재건 과정에 대한 교회사적 사례, 신학적 교회론 등에 대한 심사숙고가 나중에 그를 분리주의적인 고려파(고신) 대신 총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265-283쪽).
다시 최전방으로: 1950년대 장로교 대분열
박형룡은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계속 만주 동북신학교에 남아있었다. 아마도 한국에는 돌아가서 가르칠 신학교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형룡의 관점에서, 북한 지역에서 채필근을 중심으로 1940년 4월 재건된 평양신학교는 강점기에는 일제에, 해방 이후에는 공산당에 협력한 ‘정치적으로 오염된’ 학교였다. 1940년에 서울에 세워져 총회의 승인을 받은 조선신학교는 평양신학교 시절 대립각을 세운 김재준과 송창근이 주도하는 학교였으므로, ‘신학적으로 오염된’ 학교였다.
이때 1946년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되었으나 살아남아 출옥한 경남노회의 한상동·주남선을 중심으로 결성된 고려신학교 관계자들이 송상석을 봉천에 보내 박형룡을 부산으로 데려오게 했다. 고려신학교에는 이미 박윤선과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브루스 헌트(Bruce F. Hunt, 한부선, 1903-1992) 선교사가 참여하고 있었다. 한편, 송상석은 부산을 출발하여 만주로 이동하던 중에 서울에 들렀는데, 당시 남한의 유일한 총회 인가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에서 교수 김재준과 송창근의 소위 ‘자유주의적’ 가르침에 반대하다 퇴학당하거나 자퇴한 51인 학생 중 일부를 만났다. 이들은 그해 1947년 7월 총회에 조선신학교 문제로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총회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 실망한 터였다. 이들은 전국구 총회 신학교 재건에 힘써달라는 편지를 송상석을 통해 박형룡에게 전했다. 송상석의 설득과 51인 학생들의 편지에 고무된 박형룡은 귀국해서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가 수락한 교장직 취임은 조건부였다. 그는 고려신학교가 경남노회 출옥 성도 일부만이 운영하는 학교가 아니라, 장차 총회 인가를 받는 전국구 신학교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합의에 따라 51인 학생 중 30여 명도 박형룡을 따라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박형룡과 고려신학교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신학적 교회론, 현실적 교회 정치에 대한 이해 차이가 요인이었다. 박형룡은 고려신학교가 총회 직영의 전국적 신학교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어야 하며, 모든 선교회들(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연합교회)로부터 지지와 재정 보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그는 분리주의적 교단과 신학교가 아니라 보편적·전국적·전총회적 교회와 신학교를 이상으로 여겼다. 그는 결국 이듬해 6월에 서울로 올라가서 남산에 새로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했다. 고려신학교로 박형룡을 따라갔던 30여 학생 중 대부분과 기존 고려신학교 학생 다수도 남산으로 이동했다. 이 중 대표격인 정규오는 남산 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는데, 정규오를 비롯한 이들 ‘51인 신앙동지회’는 박형룡의 남은 일생에서 그를 가장 열렬히 따르고 수호하는 호위무사 같은 역할을 맡게 된다(소재열, 263-300쪽).
남산 장로회신학교 설립 이전에 총회는 신학적 변화를 요구하는 개혁안을 조선신학교에 제시했으나, 학교는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세워진 장로회신학교는 1949년 4월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따라서 다음 사안은 총회 직영 신학교가 둘인 상황에서 이들을 합병하는 문제였다. 총회가 제시한 합병 원칙을 두 학교가 거부하면서 사태는 장기전에 돌입했다. 1950년 36회 총회에서 특별위원회가 결성되었지만, 6월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지연되다가, 이듬해 5월에 36회 총회 계속회로 열린 대구 총회가 두 학교의 인가를 모두 취소하고, 대구에 단일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이어서 1952년 37회 총회가 조선신학교의 두 ‘자유주의’ 교수 김재준과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 서고도, 1886-1979)를 징계하기로 결의하자, 이를 거부하는 경기노회원 일부가 조선신학교와 함께 1953년에 예수교장로회(예장) 총회를 탈퇴하면서 기독교장로회(기장)가 탄생했다. 이전 해에 발생한 고려신학교 및 고려파(고신) 교단 분리에 이어, 조선신학교와 기장이 이탈했다. 박형룡은 1953년 9월에 첫 교장 아치볼드 캠벨(Archibald Campbell, 감부열, 1890-1977)에 이어 대구 총회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박형룡은 이로써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다시 장로회 총회와 신학교에서 독보적 권위자 자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좋은 교수에게 행정을 맡기면 교수하는 데 지장이 있음은 물론 행정상에도 하자가 생긴다”며 박형룡의 교장 취임에 우려를 표한 일부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의 염려는 현실이 되었다. 1959년 3차 분열의 핵심 원인 중 하나인 ‘3천만환 불법전용사건’이 1958년에 터지기 때문이다(장동민, 362-376쪽).
1959년 장로교 대분열(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표면적 원인은 ‘3천만환 불법전용사건’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에서 파생한 문제, 즉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인식과 가입 여부도 분열의 원인이었다. 박형룡은 1950년대 중반까지 예장 총회 소속 목사 대부분 및 선교회들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왔다. 특히 1951년에 대구에 세워졌다가 1953년 10월에 다시 남산으로 이전한 총회신학교는 예장 총회에서 유일한 직영 신학교이자, 4대 선교회로부터 협력과 지원을 받는 보편적 신학교였다.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WCC가 결성되자, 예장 총회는 WCC의 전신인 국제선교협의회(IMC)에 매번 대표단을 보내던 전통을 따라 김관식을 대표로 파견한 후 그의 제안을 수용해 WCC에 가입했다. 그러나 곧바로 WCC의 신학적 혼합성과 공산주의 용인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되자, 1954년 미국 에반스턴 2차 총회에는 김현정·명신홍·유호준 세 사람을 파견했다. 이 중 명신홍이 WCC의 교리적 혼합주의와 용공주의를 지적하자, 총회는 가입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날카롭게 대립했다. 실상은 박형룡을 따랐던 ‘51인 신앙동지회’가 이미 1953년에 한국NAE(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조직하여 반WCC 전선을 형성한 상태였다. 1956년 41회 총회에서 결성된 에큐메니칼연구위원회 안에서도 찬성자와 반대자가 거의 절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선교회들은 모두 찬성자 입장이었다. 모국 교회들이 모두 WCC에 가입해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해방 전과 후에 달라진 미국·호주·캐나다 교회들의 신학 지형, 그리고 2-3세대 선교사들의 입장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7년 42회 총회는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에는 참여,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는 반대를 천명한다.
박형룡은 1958년 9월 이후 WCC에 강력한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1930년대부터 이어진 행보를 볼 때, 그가 WCC에 반대하는 저항자가 되리라는 사실은 누구든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더 강경하게 반대하게 된 계기는 남산 신학교 교장이던 그가 신학교 부지 불하 과정에서 박호근에게 속아 3천만환을 사기당한 사건이었다. 에큐메니컬 진영은 이 사건을 박형룡 사임 및 총회 장악의 기회로 활용했고, NAE 측도 이를 뒤집기 위한 정치 공세에 나섰다. 결국 에큐메니컬 측이 1958년 43회 총회에서 승리하고 박형룡은 교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1년 동안 서로 성명전을 벌이다, 결국 1959년 44회 총회에서 연동측(통합)과 승동측(합동)으로 갈라섰다.
대분열 이후 박형룡의 영향력은 한국 장로교회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합동과 고신 진영 등 보수 장로교회로 축소되었다. 1959년 이후 그의 입장은 더 강경해진다. 아마도 이전에 총회 내에서 의식해야 했던 진보파와 온건파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내려서였을 수 있다. 한편, 미국 상황, 즉 1940년대 결성된 NAE(미국복음주의협회)의 신복음주의가 WCC와 NCC(전미교회협의회)의 자유주의를 따라간다며 싸잡아 비난한 근본주의 투사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yre, 1906-2002) 및 그의 ICCC(국제기독교회협의회)와의 교류도 박형룡이 극단적 보수 행보를 택한 원인 중 하나였다. 특히 1959년 분열 후 한국 내 모든 외국 선교회들이 통합 교단을 지지하자, 신학교, 미션계 중·고등학교와 대학, 병원 등을 모두 상실한 합동은 신학교 부지 자금을 지원한 매킨타이어와 ICCC를 구세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376-388쪽).
박형룡은 1970년대부터 신복음주의를 비난하는 강경한 글들을 쏟아냈다. NAE, WEF(세계복음주의연맹), OMF(중국내지선교회[CIM]의 후신), 빌리 그레이엄, 휘튼 칼리지는 말할 것도 없고, 1974년 로잔대회도 그가 보기에 ‘열렬하지 않은 이단자들’이거나, 좋게 보아도 ‘잘못 아는 형제들’이었다. 사실은 현대주의자나 신정통주의자보다도 더 위험한 이들이다. 이들은 광명의 천사인 척 위장하기 때문이다(388-395쪽).
거봉의 침식
1965년부터 합동 교단은 총회신학교를 사당동으로 이전하여 운영했다. 박형룡은 1960년부터 2년간 합동 총회신학교의 교장직을 수행했다가, 1969년 2월에 다시 교장(12월부터는 총회신학대학 학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사진의 재정 비리 문제로 학내 사태가 촉발되면서, 그는 1971년 9월에 교장직에서 물러난 후 1972년 2월에 은퇴했다. 1971년 이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거대한 산에도 침식과 산사태가 조금씩 일어났다. 그를 이어 학장이 된 김희보, 신임 교수 김의환은 박형룡보다 신학의 폭이 넓은 인물들로, 박형룡이 나눈 범주에 따르면, 신복음주의자로 불릴 만한 이들이었다. 이들이 부상하면서, 동시에 박형룡과 그의 지지자들은 서서히 교단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박형룡은 1978년 10월 25일 아침 8시경 봉천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아내를 제외하고 마지막까지 그와 대화를 나눈 이는 전날 밤 9시까지 출판 관계로 함께 시간을 보낸 정규오였다. ‘51인 신앙동지회’의 간판 정규오는 이듬해 1979년에 합동과 총회신학대학이 ‘좌경화’되었다고 주장하고, 박형룡이 지켜온 ‘정통보수신학의 회복’과 평양, 대구, 남산 신학교 전통을 ‘복구’하는 총회신학교(서울 개혁신학연구원-개신대학원대학교/광주신학교-광신대학교)를 설립한다고 선언하며, 새 교단(합동보수, 나중에 ‘개혁’으로 개명했다가, 2005년에 합동과 재통합)을 세웠다. 박형룡의 아들 박아론도 이들과 함께했다(395-404쪽).
박아론, 《나의 아버지 박형룡》(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14).
박용규 편,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총신대학교출판부, 1996).
소재열,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 박형룡 박사와 51인 신앙동지회》(말씀사역, 2015).
이상웅, 《박형룡신학과 개혁신학 탐구》(솔로몬, 2019).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