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고

[407호 사회선교 더하기]

2024-10-01     전남식

누군가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가능한가? 신화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사는 건 아니냐?

처음 받아본 질문도 아닌데, 받을 때마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달라고 매일 기도하고 있고,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것도 2천 년 동안 기도해왔는데, 여전히 응답은 요원하다. 그러니 신화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는 말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화적 세계관 속에 머물러있다는 말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고도 자랑스럽게 인정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요 1:1, 새번역)

요한복음 첫 문장이다. 이 구절은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는 근거로 사용되어왔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말씀’(로고스)을 중시해왔고, 말씀 선포(케리그마)를 강조해왔다.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오직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겔 2: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서 사람의 혼과 영을 쪼개는 능력이 있으니(히 4:12), 우리는 그저 선포하기만 하면 말씀이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복음 전도 메시지가 길거리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말씀이 공허해졌다.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되었다. 적어도 내게는 소음 공해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바울은 그 원인을 사랑이 결핍된 말씀 선포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고전 13:2). 상호성을 무시한 말씀 선포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 뿐이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떠드는 말씀은 무례할 따름이다.

태초에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다. 창조되었다는 것은 곧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죽었던 것이 살아났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 1:14)

바울은 말씀이 공허해진 이유를 사랑의 결핍으로 보았다면, 요한은 육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었는데, 결정적인 힘은 육화(incarnation), 성육신 사건이었다. 성육신이란, 비가시적 말씀이 몸을 입고 가시화된 사건이다. 육화된 말씀은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장막(텐트)을 펼치시고, 우리와 함께 사셨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의 현재화’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공허하지도, 무례하지도 않다. 그렇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 안에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사랑을 통해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그는 신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사랑을 통해 자기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로 다시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그의 사랑 안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마르틴 루터의 말이다. 정확히는 테오도르 쇼버가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의 지평 안에 있는 사회선교》(대한기독교서회) 추천 서문에 인용한 루터의 글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이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동시에, 사랑을 통해 이웃 안에 산다는 루터의 말은 요한이 말하는 말씀의 육화와, 바울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담화를 제대로 간파한 표현이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기독교 메시지가 다시 힘을 잃고 생명력을 상실한 이유가 바로 말씀의 육화에 실패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을까? 세상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나는 여전히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과 함께 역사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눅 4:18-19). 예수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설립되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육체 위에 성령을 부으심으로 그리스도의 자유가 실현되고 있다(위의 책, 21쪽). 십자가와 부활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소망이 없는 봉사도, 봉사가 없는 소망도 존재할 수 없다(49쪽).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하나의 연장선에서 파악한다.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며, 교회의 선교는 이 땅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십자가 사건은 욕망과 충족의 순환 문제가 이미 생태학적 성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고, 부활에 대한 희망은 무제한적 생산이 아니라 공정한 분배와 차별 없는 환대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아벨은 이 땅의 평범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제한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무도 범죄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완전범죄였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입을 여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두 사람의 부모 아담과 하와는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아벨이 돌에 맞아 죽었는데 아담과 하와는 몰랐을까? 문자적으로 보면, 세상에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뿐이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가인의 소행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가인은 권력을 쥔 장남이었고, 경제권을 쥔 기업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억울한 죽음을 못 본 척하지 않고 가인의 죄를 폭로하셨고, 수천 년 동안 성경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지난 8월, 고 강보경 님 추모예배에 와서 설교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다녀왔다. 아들이자 동생의 죽음 1주기를 맞아 추도예배를 드려달라는 유가족들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고인은 학비와 노모 병원비 마련을 위해 ‘DL이앤씨’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추락사한 29세 청년 노동자였고,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고 강보경 님 누님의 증언에 따르면, 안전장치 하나 없이 작업에 투입되었다. 그를 붙잡아주는 이도 없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일곱 번째 사고로 죽은 여덟 번째 사망자였다. ‘e편한세상’ 아파트 현장에서 일하다 추락사했는데, 여전히 사업주는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고, 그사이 또 다른 노동자가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고 강보경 님은 가인의 손에 희생당한 아벨이었고, ‘DL이앤씨’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가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희생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땅에서 울부짖는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고발하셨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수록된 이유는, 독자들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하나님의 입이 되어 말하고 폭로하고 힘없는 자와 연대하라고 촉구하기 위함이다.

억울한 자의 하소연이 울려 퍼지고,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리가 그리스도인이 머물 장소이며, 그 현장에 말씀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장막(텐트)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머무시는 그곳이 바로 교회다. 매 주일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공간이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픔을 어루만지고, 억울한 희생자의 하소연을 듣고, 그들의 죽음이 기억을 통해 현재화되고, 불의한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낼 때 교회는 실현된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50세가 넘어가는 형편없는 몰골의 사내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불의한 현실에 맞선다. 우스꽝스럽고, 도무지 가망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유쾌하게 해낸다. 어느덧 나는 돈키호테가 모험을 나섰던 나이, 이 책을 썼던 저자 세르반테스의 나이가 되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인데, 언제까지 이상 속에서 현실을 비판하면서 살 것이냐는 지청구만 듣는다.

나는 왜 돈키호테에 감정이입하는 걸까? 나와 같은 연령대이면서 동시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과 대립하여 절망하는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저들의 태도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노후를 대비해야 할 나이지만, 여전히 나잇값을 못 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감당할 수 없는 풍차 괴물 앞에서도 유머 감각을 유지하는 모습을 닮고 싶기 때문이리라. 《돈키호테》는 새로운 이름을 짓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돈키호테 역시 새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실패를 거듭해도 당당함과 의연함,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삶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고, 분노하면서도 평화로우며,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적이면서도 따뜻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겹눈의 지혜를 이 책은 가르쳐준다. 마치 뱀처럼 지혜로우면서 동시에 비둘기처럼 순결할 수 있는 비법을 독자들에게 누설해주는 것이다. 태초에 있었던 말씀이 단순히 이론적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로고스가 실천적  ‘프락시스’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이번 글로 6회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한다. ‘사회선교’에 대해 이론적·실천적으로 아는 것이 일천하기에 두서없이, 얕은 지식과 짧은 경험으로 지면을 채우느라 급급했다. 하지만 부족한 글을 읽어주고 응원해준 독자들과 기회를 준 복상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가능하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모르겠다. 솔직히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도 이 일을 왜 계속하는 것일까? 여전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그분이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실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찰나적이라도 보여주실 거라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신화적 세계에 머물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세계에 머물러있을 것이다. 말씀이 행동으로 가시화될 때까지!

■ ‘사회선교 더하기’는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전남식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모토로 대전에서 목회하는 꿈이있는교회 목사이자 성서대전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