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시대의 정의와 화해
[407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2024년 4월 25일 목요일에 진행되었던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창립 44주년 기념 감사예배 ‘코로나 이후 시대의 여성신학: 정의·돌봄·연대’(골 1:15-20)에서 했던 설교를 수정하여 싣습니다.
팬데믹이 주는 교훈
이제 우리는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팬데믹이 심각했을 때는 외출도 삼가야 했고,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잘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야 할 때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집을 나서야만 했습니다. 이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할 정도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소중한 일상이 회복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희생과, 그 희생이 주는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팬데믹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었나요? 우리는 팬데믹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바이러스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그 엄청난 위력에서 벗어났을 뿐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전염병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팬데믹은 예기치 못한 재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세계의 균형과 조화가 깨어진 결과입니다. 대부분 우리 인간이 내린 잘못된 선택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코로나19의 숙주로 알려진 천산갑이나 박쥐는 도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야생동물입니다. 언제부터 야생동물들이 보유한 바이러스가 사람에게까지 퍼져나가게 된 것일까요? 우리 인간이 야생동물들을 남획하거나 천연자원을 채취하기 위해 그들의 서식지를 침입하고 파괴하면서부터입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고서야 야생동물들이 인간 거주지에 난입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발생한 생태계 파괴가 바이러스 유입을 불러왔고, 팬데믹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팬데믹은 인류가 비인간 동물의 영역과 생존권을 존중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었습니다.
심화하는 생태 위기와 기독교의 역할
이제는 백신이 개발되고 바이러스의 위력이 약화되었지만, 이것으로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류가 이제까지 저질러왔던 잘못된 행동과 사고방식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제2·제3의 팬데믹은 언제고 찾아올 수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뿐 아니라 지구 평균기온 상승 또한 이러한 위험을 가중하고 있습니다. 말라리아, 뎅기열 등 인간이 걸리는 전염병의 숙주는 대부분 열대 지역에 서식하는 동물들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열대 동물들 서식지가 확장되면서 전염병의 위험도 함께 증가하고 있습니다. 올여름 서울에 말라리아 경보가 발효될 정도로 말라리아모기 개체 수가 대폭 증가했던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더 나아가, 극지방에 있는 빙하와 영구 동토층이 녹아내리면서 그 안에 수백·수천 년 동안 갇혀있던 바이러스가 전파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인간 면역 체계가 접하지 못한 낯선 바이러스들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삶은 비인간 동식물을 비롯한 지구 생태계 전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공생 관계로 얽혀있습니다. 갈수록 심화할 기후위기 곧 생태계 파괴, 생물종 멸종, 팬데믹을 떠올려볼 때, 우리 사회의 문화와 사상, 행동 양식을 하루속히 생태 중심적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러한 전환은 신앙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만의 하나님이 아닌, 온 우주 만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하늘과 땅, 바다와 강을 지으시고 그 속에서 살아갈 온갖 생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에 이러한 사실이 밝히 드러나 있는데도, 기독교 신학은 오랫동안 편협한 인간중심주의와 인류예외주의를 강화해 왔습니다. 특히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해석할 때 이러한 성격이 두드러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창 1:27)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예외적이고 우월적인 지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였고,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명령은 자연에 대한 착취와 대상화를 정당화해 왔습니다. 결국 기독교 사상은 생태 위기가 발생하는 데 사상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녕 기독교 사상은 생태 위기의 원흉이기만 할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코로나 이후 시대에 기독교는 더 이상 기여할 것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때이기에 신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날 냉혹한 시장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을 극복할 만한 가치를 제공하고, 영적 동기를 부여하며,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것은 여전히 종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이후의 정의, 만물과의 화해
유서 깊은 종교이자 사상으로서 기독교가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 땅의 창조주이시자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한국의 여성신학자로서 이 땅에 정의와 돌봄, 연대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저는 코로나 이후 시대에 요청되는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하고 패악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하나님의 정의는 특별히 연약한 자들을 향합니다. 자신을 지키거나 자기 권리를 주장할 만큼 힘을 갖지 못한 이들, 억울하게 피해를 겪고 원통해하는 이들 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단지 잘한 이에게 상을 주고 잘못한 이에게 벌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한, 누군가는 강하고 누군가는 약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부하고 누군가는 가난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가운데 서로를 배려하는 한,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무너진 관계를 재건하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건축물을 짓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화려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진 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강물은 인간이 사는 도시와 마을만이 아닌 온 땅을 가득 적시며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 곧 만물의 창조주이자 주관자이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하늘과 땅, 만물의 주인이시며 동시에 이 세상의 권세와 통치자들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주권 아래 있는 것들,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십자가 아래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이후 시대에 특별히 더 요청되는 정의는 온 천지 만물과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깨어진 자연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인류의 운명은 물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 전체를 위해 시급히 요청되는 정의 그 자체입니다. 이 화해 사역 선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고 계십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만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이 사역을 주님께서 직접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로서 우리는 그 사역에 기꺼이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회복해야 할 여성과 남성의 협력적 관계
이러한 예수의 길을 따르는 데는 여성과 남성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지으실 때 남성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짓지 않으시고 여성과 남성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때 남성에게만 주지 않으시고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남성에게만 명령하지 않으시고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구원받을 때 남성만 구원받지 않고 여성과 남성 모두가 구원받습니다. 또한 그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실 때 남성만 부르시지 않고 여성과 남성 모두를 부르셔서 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하나의 교회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하나뿐인 지구를 함께 섬기는 자들로 동일하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 안수가 정말 성경적이냐” 따위의 질문으로 수많은 여성의 앞길이 가로막힙니다. 일부 성경 구절에 대한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인 해석 때문에 여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말 성경 해석의 차이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지, 혹은 공고한 가부장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여성 안수가 통과된 교단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제도적 장치만 마련되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여성들이 목사나 장로로 교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여전히 교회 대표들의 평균적 모습은 60대 노년 남성 목사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성들에게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역할이 허용되거나 상대적으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여성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육아와 사역을 병행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실제로 많은 여성 목회자가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로 사역의 자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실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손실이자 여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와 신학교에서조차 온갖 성적 모욕과 폭력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와 신학교라면 다른 어디보다도 안전하고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하는데도, 성차별적 언사가 강대상에서 선포되고, 구성원들 사이에 성적 폭력이 행사되며, 공의롭지 못하게 사건들이 무마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처럼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 여성과 남성의 협력적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어 버리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서로 원수 되었던 것도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갈라진 것을 이어 붙어 하나로 만드시고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어 연결해 주셨습니다(엡 2:13-14). 그러니 여러분, 오늘 우리 사이에 원수 된 것, 가로막힌 것이 무엇인지 밝히 봅시다.
생태계 및 비인간 피조물들과 인류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서로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적대하는 상황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들도 이 깨어짐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며, 탄식하며 함께 고통받고 있습니다(롬 8:21-22).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돌이켜 절제와 겸손으로 세계와 인류 사이에 갈라진 틈을 메꿉시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창조 사역에 동참하여 이 땅에 계속해서 생명이 번성하게 합시다. 이것이 만물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만일 존귀한 여성과 남성 사이를 무언가 가로막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십자가 안에서 가장 먼저 허물어져야 할 것입니다.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낡은 사고방식과 관습에서 벗어납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나누지 말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것을 차별하지 맙시다. 이것이 모든 이의 화평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물의 화평! 참으로 경이로운 은혜의 경륜이요 놀라운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이들이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엡 3:1-6). 하나님께서 이 일을 태초부터 계획하셨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믿음을 반석으로 삼아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는 남성만을 위한 것도 아니요, 인류만을 위한 것도 아니요, 온 우주 만물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구원이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어린아이가 두려움 없이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세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비인간 피조물과 인간이 화목하고, 여성과 남성이 하나 되는 나라 말입니다(사 11:6-9). ‘정말 이것이 이루어질까?’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마침내 온 세상 만물이 온전히 화해하는 그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같은 꿈을 꿉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사역에 오늘 저와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나와 같은 꿈을 꾸자’라고 초청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기를 원합니다. 생태 위기와 여성혐오, 온갖 갈등과 차별로 얼룩진 이 시대, 모든 분열과 구습을 극복하고 한국교회가 이 사역에 앞장서기를 기대합니다. 온 세상을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박나래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기독교와 문화 석사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실행위원, 높은뜻광성교회 청년부 목사로 섬기며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배운 걸 남 주며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