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407호 말씀과 따름]
지난 호(2024년 9월·406호 ‘21세기 교회 위기의 근원’)에 이어지는 글이다
앞서 이스라엘과 교회가 불의의 길로 추락한 것은 듣지 않음 때문이라 했다. 성경은 한술 더 떠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죽음의 나락에 떨어진 것도 듣지 않음 때문이라 한다(창 2-3장). 우리네 일상의 갈등과 고통도 따져보면 다 듣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부부간 갈등부터 이해관계의 대립까지, 근원에는 반드시 듣지 않음이 있다.
대체 들음이 무엇이기에, 듣지 않음으로 저리 많은 불의와 배도가 벌어지는 걸까? 들음이 단지 소리 듣기라면 저런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을 텐데. 옳다. 들음은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수동적 청취가 아니다.
들음이란
들음은 상대 말뜻을 이해하는 능동적 읽기(이해하기)다. 말하는 이의 몸짓과 표정, 분위기를 통해 전달되는 말 없는 말과 감정까지 읽는 일이다. 당연히 쉽지 않다. 속단해서도 안 된다. 제대로 들으려면 속단하지 말고 물어야 한다. 말의 속뜻, 말의 배경, 말의 의도가 이해될 때까지 물어야 한다. 이때 물음은 물음이 아니다. 들음이다. 아니, 물음이야말로 들음이다. 듣는 자만 물을 수 있고, 묻는 자만 들을 수 있으니. 옳다. 들음은 곧 읽기이자 물음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들음이 완성됐다 할 수 없다. 들음은 능동적 읽기와 물음을 넘어 행위로 가야 한다. 상대의 목마름을 들었으면 물 한 컵을 갖다줘야 한다. 상대의 외로움을 들었으면 옆에 있어줘야 한다. 상대의 몸 가누기 힘듦을 들었으면 부축해줘야 한다. 들음은 그때 비로소 완성된다. 물론 들음에 다 응대할 수는 없다. 들음에 다 응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행위로까지 가야 비로소 들음이 완성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옳다. 들음은 단지 귀로 듣는 게 아니다. 귀를 넘어 마음으로 듣고, 몸으로 듣는 것까지가 들음이다. 이 들음에 뿌리내리는 게 둘 있다. 관계이고, 배움이다. 모든 관계는 들음에서 출발하고, 들음을 통해 도타워진다. 어떤 모습이든 모든 관계는 항상 들음에 뿌리내리고, 들음에 의지해 자란다. 배움도 그렇다. 사람은 일차적으로 배우는 존재이다. 그리고 모든 배움은 들음에서 출발하고, 들음을 먹고 자란다. 듣지 않고 배우는 자는 없다. 그런 면에서 들음은 곧 관계이고 관계는 곧 들음이며, 들음은 곧 배움이고 배움은 곧 들음이다.
신(神)-인(人) 관계와 들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어떨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또한 들음에서 출발하고, 들음을 통해 도타워진다. 하나님께서 쉼 없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으라” 말씀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 9:1, 20:3)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호 5:1)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수 3: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바울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요한 또한 묵시록에서 말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11·17·29, 3:6·13)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마다 습관처럼 말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1:15, 13:4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 눅 8:8, 14:35)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성경은 이처럼 시종일관 “들으라” “여호와의 말씀에 귀 기울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신 것도, 따지고 보면 제대로 된 들음을 위해서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져야만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테니.
우주 만물은 어떨까? 예외가 아니다. 현대과학(양자역학)을 통해 밝혀진 대로 동물과 식물뿐 아니라 분자나 원자까지도 다 관계로 얽혀있다. 저들은 하나같이 오묘한 들음을 통해 상호 얽히고, 상호 얽힘으로 존재하며 살아간다. 붓다가 된 싯다르타는 이 진실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세계의 실상을 말했다.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즉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서 저것 또한 생겨난다. 이것이 없어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니 저것 또한 사라진다.”
옳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적이거나 개체적이기보다 관계적(연기적)이다. 모든 것은 관계적 방식으로 존재하고, 모든 관계는 들음을 통해 작동한다. 그런 면에서 들음이란, 미시적으로는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이자 작동 방식이고, 거시적으로는 모든 관계와 배움의 토대이자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들음이 마땅하다 생각되는데
들음이란 이처럼 근원적이며 오묘하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이토록 중한 들음에 실패했다. 나는 저들의 행적을 볼 때마다 심히 의아했다. 내가 출애굽 일원이었다면, 이집트에 임한 10가지 재앙,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넌 일, 바위에서 생수가 솟구친 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하신 일을 경험했다면, 내가 유대 땅에서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말씀·삶·인격을 직접 목도하고 경험했다면, 저토록 쉬 돌아서진 않았을 것 같은데. 사람이 아무리 조석변개해도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능력을 저 정도 보고 듣고 체험했으면 끝까지 신뢰할 것 같은데. 왜 저리도 빨리 우상에게 달려가고 다른 복음을 좇는 건지. 정말 의아했다.
저들뿐 아니다. 예수님 사후의 초대교회도 그랬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갈 1:6)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대체 왜 저럴까? 온 세상을 조성한 말씀 중의 말씀이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 중의 왕이신 분의 말씀을 들었는데 왜 저리도 속히 돌아설까? 말씀대로 행하겠다며 뜨겁게 맹세까지 하고서도 상황만 바뀌면 쉬 떠나 우상에게 절하는 걸까?
듣지 않음의 내막
이 의문은 오랜 세월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의도치 않게 풀렸다. 왜 그런 것인지가 선명하게 이해됐다.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분이라서 그런 것. 하나님 말씀이 우리 귀에 거슬려서 그런 거라는 것. 시시한 듯 보이나 중요한 깨우침이었다.
이사야는 하나님과 우리의 다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과 다르며,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다.”(사 55:8-9)
바울도 같은 사실을 말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1,600년 전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했다. 우리에게 이해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옳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이며 ‘역사 내 존재’인 반면, 하나님은 세계와 역사 위에서 세계와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 즉 세계와 역사를 포월(包越)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 말씀을 어찌 다 듣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른 종교의 경전은 좀 어렵고 낯설어도, 이해되지 않거나 귀에 거슬리는 대목이 별로 없다. ‘종교’의 말뜻이 ‘최고의 가르침’[宗敎]이듯 금강경·법구경·반야심경·도덕경·중용·대학·바가바드기타 등 여러 종교 경전을 읽으면 보석 같은 가르침이 많이 발견된다.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구절,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구절, 마음 깊이 공감되는 구절, 귀에 쏙쏙 들어오는 구절, 깊은 깨우침을 주는 구절들이 정말 많다.
성경은 다르다. 성경은 다짜고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한다.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하와를 만들고, 뱀이 하나님 말씀을 비틀어 하와를 유혹하고, 장소성을 확인할 길 없는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고, 선악과를 먹은 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럼에도 사람들이 900살까지 살고,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아이를 낳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죽어 무덤에 묻힌 예수가 부활하고, 부활한 예수가 승천하고, 그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또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줬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심지어 죽은 지 사흘 된 자를 살렸다 한다.
황당무계한 말들투성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납득이 안 되고 귀에 거슬린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어렵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오묘한 물음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의 존재부터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 나라, 믿음, 우주의 미래, 죽음 이후, 성육신, 부활, 영생, 선악, 각종 이적과 기사, 자유 등 어느 하나 속 시원하게 이해되거나 포착되는 게 없다.
사실 오랜 시간 하나님 말씀이 믿어져서 믿었고, 믿음의 눈으로 읽었기에 말씀의 황당무계함을 깊이 자각하지 못했다. 맨정신으로 읽어서는 믿기 힘든 책이라는 걸 또렷이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성경과 씨름하는 세월이 쌓이면서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이성에 어긋나고 귀에 거슬리는 것들투성이라는 것.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면서 인간의 책이요, 인간의 책이면서 하나님의 책이라는 것. 그런 만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 역사 이전부터 역사의 완성까지를 말하고 있기에 역사의 완성 시점(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시점)이 차야 비로소 우리 앞에 활짝 열린다는 것.
나는 참 오랜 세월을 씨름하고서야 이 단순한 사실을 인지했다. 성경은 우리 이성과 짝 맞는 책이 아님을. 성경은 우리 생각·경험·감정·인식의 범주를 포월하는 독특한 책임을. 이 사실이 선명하게 인지되자 절로 오랜 의문이 풀렸다. 이스라엘과 교회가 왜 들음에 실패했는지, 어쩜 그리 빨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났는지. 선명하게 이해되고 이해됐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 말씀이 우리 귀에 거슬려서 그런 거라는 것. 하나님의 생각이나 길은 우리 생각·경험·인식·감정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데 우리는 자기 생각·경험·인식·감정의 범주 안에서 듣고 해석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잘못 듣는 경우가 많다는 것.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 말씀을 쭈그러뜨리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 노자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것. 그런 만큼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기독교 역사가 성경 오독(誤讀)의 역사였던 것도 다 그 때문이고, 교회가 하나님 말씀으로 온갖 죄악을 범한 것도(마녀사냥, 인종차별, 아메리카 원주민 살해, 노예무역, 십자군 전쟁, 30년 전쟁 등) 결국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거나 들었어도 잘못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
들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그렇다면 묻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건 영영 불가능할까? 이스라엘도 실패했고, 교회도 지금껏 실패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걸까? 아주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다. 2천 년 전 바울도 말했다. 하나님 말씀(뜻)은 역사의 완성 시점이 차야 비로소 활짝 열리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고,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고전 13:9-10). 옳다. 아무리 영성이 깊고 성령의 특별 조명을 받아도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구속 역사의 과정에 있는 한, 온전한 들음은 불가능하다. 힘써야 겨우 희미하게 보고 부분적으로 알 뿐.
오해는 마시라. 들음이 아예 불가능하다 말하는 건 아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희미하게 보고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도 아니다.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열려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들으라고 탄원하신 것도 성령과 믿음이라는 오묘의 방식, 우리 맘대로 어찌하지 못하는 신비의 방식으로 들을 수 있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 일차적 증거가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묘의 방식, 우리가 포착하지 못하는 신비의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들은 자들의 전승이요 편집이요 모음이니까.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개역한글) 한 것도 말씀 들음과 관련된 저간의 사정을 깊이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고.
하나님 말씀 듣는 일은 단지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열려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들음의 현실이다. 희미. 부분. 불가능한 가능성. 이 들음의 현실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믿는다 해서 사라지지 않고, 성령 충만하다 해서 극복되지 않는다. 오직 냉정하게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뿐.
들음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들음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하나님 말씀을 쭈그러뜨리고 왜곡하는 폭력을 행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을 배반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말씀 앞에 가난할 수 있다. 날마다 새롭게 들을 수 있고, 지금의 이해 지평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교회는 지금까지 정반대로 했다. ‘들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면 권위가 무너질까 두려워 교회의 들음(교회의 해석)이 옳다고 강변하기에 바빴고, 교회의 해석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면 정죄하고 심판하기에 바빴다. 들음의 현실이 희미, 부분, 불가능한 가능성임을 망각한 채 하나님 말씀을 손에 쥐었다고 확신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생각·경험·인식·감정의 범주 안에서 듣고선, 들었다고 착각했다.
인간은 뭐든 자기 손에 쥐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못 견딘다. 그래서 교회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람들 손에 쥐어주기에 열심이었다. 쥐어주지 않으면 성도들이 불안해하니까. 쥐어줘야 교회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니까. 하여, 목사들은 대체로 목회 성공을 위해 하나님 말씀을 성도들 손에 열심히 쥐어줬고, 그 결과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옹졸하고, 편협하고, 열린 대화나 토론이 어렵고, 진부할 뿐 아니라 오만하고, 성경 오독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됐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혐오의 대상으로 추락하게 된 이유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현실을 기억하고, 세 가지 오류를 내려놓아야 한다. 들음의 현실이 희미, 부분,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는 걸 기억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안다)는 착각, 자기 들음이 옳다는 확신, 하나님 말씀을 손에 쥐었다는 망상은 내려놓아야 한다. 들음의 근원 진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망상에 가까운 착각과 확신을 내려놓지 못했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 들음에 실패한 것이고, 교회가 하나님 말씀으로 온갖 망나니짓을 한 것이다. 교회가 그동안 교회 회복을 위해 온갖 비책을 쏟아냈음에도 땜질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계속)
정병선
스무 살에 하나님을 만난 후 길을 찾고 길을 가는 길 위의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다. 지금은 생의 마지막 작업으로 양자역학 이후, 진화 이후의 신학과 성경 읽기에 천착하며 지평너머교회(ON-OFF LINE 동시 예배)를 개척해 설교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