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

[408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4-10-31     이한주

안온 작가는 20여 년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그가 쓴 에세이집 《일인칭 가난》(마티)은 이렇게 시작한다.

방학식 끝나고 17번, 28번은 집에 가지 말고 교무실로 와서 우유 받아가세요. 17번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아이 A였고 28번은 나였다. 우리 둘은 친구들이 다 떠날 때까지 교실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교무실에 갔다. (11쪽)

열한 살 초등학생은 빈곤 가정 자녀에게 나눠주는 멸균우유로 가난을 깨닫는다. 그런데 멸균우유를 받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다. 같은 주공 아파트에 사는 A도 우유를 받는다. 두 사람은 교실에 남아있다가 우유를 받아 함께 집에 간다. 짜증 난다고 투덜거리고, 그러면 그 우유 달라고 하고, 우유가 있으면 할머니가 빈속에 약을 드시지 않아 좋다는 사정도 얘기하며 아파트 언덕을 오른다. 이 광경을 본 친구들이 둘이 사귀냐고 키득대지만 상관없다. 성인이 된 안온 작가는 함께 멸균우유를 받았던 17번 A를 ‘멸균우유 동지’로 기억한다. 작가가 1인칭으로 가난을 기록하면서도 그 가난을 1인분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함께 가난을 통과했던 멸균우유 동지가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멸균우유 동지가 어른이 되어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김기태 소설가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에 실린 표제작이 바로 그런 이야기다.

중학교 같은 반에 다니는 김니콜라이와 권진주는 ‘흰 봉투 동지’다. 김니콜라이는 러시아 국적 고려인 자녀이고, 권진주는 한부모 가족인데 이 두 사람은 1년에 한두 번 담임선생님께 불려 가 함께 흰 봉투를 받는다. 학교 행정실에서 보낸 봉투에는 내야 할 어떤 돈을 내지 않았다는 안내문이 들어있다. 담임은 두 사람에게 흰 봉투를 주며 “둘이 친하게 지내” 놀리듯 말하지만 둘은 전혀 친해지지 않고 중학교를 졸업한다. 두 사람이 친해진 건 5년 뒤 공장노동자와 마트 아르바이트생으로 다시 만났을 때다.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으며 친해진다. 친해지면서 진주는 고려인 자녀 니콜라이에게는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외국인 거소증이 발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니콜라이는 진주의 어깨에서 어린 시절 부모가 던진 물건으로 생긴 흉터를 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며 소박하게 사랑하지만 가끔 불안하다.

자아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 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133쪽)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닌데 세상은 야박하다. 결석하지 않고 학교 잘 다녔고, 법을 어긴 적 없고, 하루의 절반을 성실하게 일하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내는데도 자꾸만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되어서도 함께 흰 봉투를 받게 될 것 같아 불안하지만 중학생 담임선생님 말은 예언이 되어 두 사람은 친해졌고, 친한 사이로 계속 살아보기로 한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143쪽)

확실한 행복은 미미하고 원대한 행복은 상상에서나 가능하지만 두 사람은 예전처럼 흰 봉투를 받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이가 아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에 온기가 되어주고, 같이 밥을 먹고 식탁을 정리하고, 서로의 등에 애틋함을 갖는 친한 사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닫힌 흰 봉투 안에 있는 불안한 미래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두 사람의 연대로 바꿔볼 희망을 품는다. 혼자였으면 감히 꿈꾸지 못했을 사랑의 혁명이다.

최진영 소설가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한겨레출판)의 주인공 목화는 열여섯 살 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꿈을 꾼다. 생생한 꿈에서 목화는 어떤 신비한 존재가 지정하는 한 사람을 살려내는데, 이 꿈이 현실이 된다. 이때부터 목화에게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단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재난과 참사가 반복되는 세상에서 한 번에 단 한 사람만을 살려내는 능력은 다른 많은 죽음을 그냥 지켜보는 무능력이기도 하다. 게다가 살려낼 사람을 고르는 것은 목화가 아니라 나무로 상징되는 어떤 신비한 존재다. 이 존재는 목화에게 소방관과 아이 대신 방화범을 살리게 하고, 폭행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정 폭력범을 살리게 한다. 목화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 그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72쪽) 괴로워하며 생사를 나누는 분명한 기준과 이유가 없는 신을 원망한다. 그런데 단 한 명을 살리는 일을 계속하고, 이 능력으로 자살하려던 조카를 구하고, 이렇게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목화는 생명을 주는 존재와 오직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관계를 깨닫는다.

나무가 주는 생명은 은총이 아닐 수도 있다. 삶이라는 고통을 주려는 것인지도. 그러나 삶은 고통이자 환희. 인류가 폭우라면 한 사람은 빗방울, 폭설의 눈송이, 해변의 모래알. 아무도 눈이나 비라고 부르지 않는 단 하나의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은 금세 마르거나 녹아버린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고. 생명체라는 전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이 아니라 오직 너라는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233쪽)

성경이 전하는 인류의 역사는 한 사람이 자기에게 오는 또 한 사람을 바라보며 시작한다.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오는 하와를 보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이라며 기뻐했던 때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겪은 뒤였다.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걸 알려주려고 하나님은 두 번의 창조를 하고 아담을 혼자 있게 하셨나 보다. 혼자였던 아담은 하와가 곁에 온 후로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가난의 징표를 받아 들고 학교를 나섰던 부끄러운 날도 멸균우유 동지가 있어 삶의 한 시절로 기억할 수 있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미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내 옆에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깨닫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봐야 한 사람, 겨우 한 사람이지만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 하신 일도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도,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있던 삭개오도, 38년 된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도, 아침부터 간음죄로 끌려 온 여인도, 무덤 사이에서 자해하던 거라사 광인도, 고단한 삶을 살던 사마리아 여인도 그들 곁으로 왔던 한 사람 덕분에 다시, 살 수 있었다.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시작하고 세상을 구하는 방식이다.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이 있어 동지와 친구와 사랑이란 말이 생기고, 한 사람을 구한 일이 그 사람과 연관된 또 한 사람을 구하는 씨앗이 되고, 단 한 사람을 구하면서 세상에 대한 희망을 이어간다. 어쩌면 세상을 구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고 거창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내가 구하는 것은 한 사람, 나를 구하는 것도 한 사람. 이미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그 한 사람인 걸 알아보고 조금 더 가까이 가는 일이 남았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