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과 리쾨르를 연결하며 신앙과 사회를 진단한다 ― 올리비에 아벨 몽펠리에 개신교 신학대학교 명예교수
[408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시즌2]
올리비에 아벨(Olivier Abel, 1953-)은 1953년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태어났고, 몽펠리에 대학교 철학과와 파리 낭테르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984년부터 파리 개신교 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해서 약 30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4년부터는 몽펠리에 개신교 신학대학교 교수로 일했고, 현재는 같은 학교 명예교수이다. 폴 리쾨르의 가장 가까운 제자이며, 그로부터 현상학과 해석학을 배웠다. 또한 개신교 신자로서 적극적으로 사회·정치 문제에 참여하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튀르키예 등지를 오가며 용서와 평화 연대의 가치를 확산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일찍이 1950-1960년대에 폴 리쾨르가 회장으로 있었던 그리스도교 시민단체인 사회 그리스도교 운동(Mouvement du Christianisme Social) 회장직을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맡았고, 프랑스-튀르키예 위원회 위원으로 유네스코에서 여러 심포지엄을 조직하여 이슬람 화합과 이주민 문제를 다루었다. 국가윤리자문위원회 위원으로도 오랫동안 활동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이 인터뷰에서 독자들은 칼뱅과 리쾨르에 정통한 한 사람의 학자이자 신자로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반응하는 철학자의 통찰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는 3월 4일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되었으며, 파리 소르본 누벨 대학교에서 ‘알베르 카뮈의 글쓰기 속 예수 형상’을 연구하는 장수민 선생이 프랑스어 통역과 보충 질문 등으로 도움을 주었다.
- 프랑스에는 세속적인 차원과 가톨릭적인 차원이 혼재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런 맥락에서 선생님의 개신교 신앙은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요?
프랑스에서 개신교는 가톨릭처럼 그리스도교의 영적 가족이면서도 세속주의에 매우 애착을 보이는 집단입니다. 심지어 세속주의가 생기고 나서 그것이 프랑스 법률과 헌법에 자리 잡게 한 세력 중 일부였습니다. 100년도 더 전인 1905년에 개신교도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주의적 법률 제정에 매우 적극적이었지만, 이제 상황이 많이 바뀌었죠. 저는 오늘날의 세속주의가 당시의 세속주의와 정확하게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세속주의를 반종교적 체계로 만들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안고 있습니다. 처음의 세속주의가 가진 의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프랑스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더 쉽게 세속주의와 갈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매우 간단하게 말해서 그렇고요. 자세히 들어가면, 저에게 세속주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4년 동안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가르쳤는데, 튀르키예는 스스로 세속 국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이 세속 국가가 매우 이슬람화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는 특정한 세속주의 개념이 의도치 않게 진정으로 세속주의적이지 않은 체계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프랑스 개신교 전통에서 세속주의 이념은 단순히 양심의 자유만이 아니라 집회의 자유, 의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세속주의 핵심 이념은 다원주의, 사회의 다양성입니다. 모든 공동체를 제거한다는 명목하에 하나의 진정한 문화 개념만을 품는 세속주의, 그것이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프랑스이든 이슬람화된 튀르키예든, 제겐 세속주의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었고, 저도 꽤 많은 글을 썼죠. 우리는 계속 학회를 열어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중요하게 지켜야 할 이 경계를 논의합니다.
저는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서 자랐습니다. 제가 철학 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 누군가 철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제한적인 비판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어요. 철학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생각하거나 성찰하는 일을 막는 절대적인 것들을 거부하죠. 여기에 세속적 철학의 접근이 있습니다. 다원적이고, 금기가 없습니다. 제가 완전히 의식하지 못한 채로, 제 어린 시절의 개신교 문화와 전통과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더 영향을 받은 제 철학적 훈련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제 안에서 매우 생산적이고 우호적인 긴장으로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에서 찢겨나간 적은 없죠. 이는 깊은 대화처럼 일종의 왕복운동으로 남아있습니다.
폴 리쾨르는 이런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또한 같은 긴장감을 내면에 지니고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제 안의 그 긴장감을 길들이고, 그런 긴장이 저 자신이 되는 것에, 제가 지금의 제가 되도록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문장은 다른 문화, 다른 철학, 다른 관점 등 타자와의 만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특정한 어떤 전통·문화·언어에 뿌리내린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전통, 심지어 다른 종교에 압도될 수 있지만,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호의를 베풀 수 있습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태어났고 그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일종의 동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동의였죠. 리쾨르에 따르면, “우연한 탄생이 지속적인 선택을 따라 운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거듭하면서 저는 제가 태어나고 어떤 공동체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이를 또다시 해석해나갔고, 이것이 곧 저의 신실함·기쁨·삶이 되었습니다.
- 선생님은 몽펠리에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신 후 파리 낭테르 대학교에서 현상학을 심도 있게 탐구하며 철학사 전반에 관한 연구도 병행하신 것으로 압니다. 이 분야를 깊이 파고들기로 결심하신 특별한 계기나 순간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지도교수였던 리쾨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신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와 함께 공부했던 경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철학은 몽펠리에로 떠나기 전부터 중요했습니다. 파리 남부 교외의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폴 리쾨르는 제 아버지의 교회 신도 중 한 명이었어요. 그의 아들이 반 친구였고요.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여러 주제를 주시고, 발표 수업을 하게 하셨어요. 저는 ‘악’이라는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학교 자료실에 가보니 리쾨르가 《악의 상징》을 썼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책으로 발표하게 되었고, 그를 찾아가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그때 저는 열다섯 살이었고, 1968년 가을 무렵이었을 겁니다.
리쾨르는 〈정치적 역설〉을 썼는데, 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을 다룹니다. 비판적이면서도 흥미로웠어요. 꽤 지적인 비판이었죠. 우리는 이 글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연구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열다섯, 열여섯 정도부터 리쾨르의 위대한 철학 텍스트들, 원초적 긍정에 대한 글, 불안에 대한 글 등을 읽었지요.
그 시절 신학자 폴 틸리히의 용기에 관한 글, 《존재의 용기》 같은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제가 탐구해야 할 학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지질학을 하고 싶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국 철학을 택했습니다.
학업을 마치니 주변 모든 이들이 저에게 “파리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하지 마. 파리의 대학들은 너무 크니까 작은 대학에서 시작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렇게 몽펠리에대에 가서 매우 훌륭한 교수님들을 만났고, 석사과정부터는 리쾨르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또 석사과정 공부를 하며 저는 레비나스, 장 그레쉬를 알게 되었지요. 리쾨르와는 점점 더 많은 일을 같이하게 되었고요.
- 선생님은 《용기와 용서 사이의 윤리적 시간의 간격》이라는 교수 자격 논문을 작성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용서’가 연구의 중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용기와 용서 사이의 연관성에 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용기와 용서에 대해 100페이지 정도로 짧은 성찰만 했습니다. 이 둘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 즉 이들이 윤리의 두 경계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였지요. 저는 도덕철학에서 서로 매우 대립하는 두 가지 전통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전통으로, 용기의 차원을 매우 강조하는 것이 고대 윤리의 핵심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겸손과 용서를 강조합니다.
이 두 윤리관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제 핵심 생각이었습니다. 이 갈등은 파괴적일 수 있으며, 용기와 용서를 모두 파괴할 수 있습니다. 용서가 용기를 방해하고 용기가 용서와 겸손을 방해하는 식으로요. 어떻게 하면 이 윤리의 두 측면이 서로 파괴하는 대신 서로를 지지하도록 함께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이 그 논문을 쓴 동기였습니다.
사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용서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991년 책을 썼고, 이후 계속 연구해왔죠. 용기에 대해 그다지 많은 글을 출판하지 않았지만, 많은 강의를 했어요. 용기가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말하는 강의였어요. 우리는 용기를 통해 윤리에 들어가고, 어떤 식으로든 용서를 통해 나옵니다. 이때 용기는 인간의 교류와 교환에 내가 들어가는 용기를 말합니다. 또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환의 정점에는 정의가 있습니다. 용서는 매우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런 교환을 떠나거나 교환을 중단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환하려는 욕구를 멈추는 길입니다.
- 선생님은 칼뱅과 칼뱅주의 전문가이기도 하십니다. 오랫동안 칼뱅주의에 대한 해석이 종종 너무 단순화되어 왔다는 점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교회, 신자들, 사회 등에 관해 칼뱅이 우리에게 준 가장 귀중한 유산은 무엇일까요?
제게 좀 광범위한 질문이긴 합니다. 사실 저는 칼뱅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한 동료가 말했죠. “당신은 개신교 학부에서 가르치잖아요. 칼뱅에 대해 조금 공부해야 해요.” 그때부터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칼뱅에 관한 책을 썼지요. 칼뱅이 칼뱅주의자가 아니라는 관점에서요. 칼뱅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열이나 분리가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분리 이전의 시대에 살았고, 그의 사상은 그 시대의 산물입니다. 그는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같은 종류의 매우 예리하고 강렬한 영성을 발명했지요. 칼뱅이 영적인 삶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시편 읽기였습니다. 당대의 위대한 프랑스 시인 클레망 마로와 함께 시편을 번역했고, 이 시편으로 찬양했습니다. 시편은 찬양과 애도를 동시에 표현했기에, 인간의 모든 것, 곧 인간의 정념, 기쁨의 열정, 즐거움, 그리고 고통, 파괴적인 정념, 증오, 불행 모두가 하느님의 손에 있고, 모든 것이 하느님과 성서의 거울에 비추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이후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저는 선생님이 칼뱅주의적 주체가 감사와 책임에 중점을 둔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합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감사라는 주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칼뱅을 특징짓는 것은 그가 소위 서구적이라 불리는 근대성을 만들어낸 거의 모든 주요 단절점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칼뱅이 없었다면 데카르트도 없었을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말이죠. 칼뱅이 없었다면 정치철학에서 홉스도, 라이프니츠도 없었을 것입니다. 철학적 차원에서 저는 칼뱅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점차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막스 베버와 함께 자본주의 등과 관련해서 이후 특히 주목받은 것은 해방의 개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야 하며, 인간은 성인이 됩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 벌과 보상이 필요 없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해방은 결국 그리스도교 전통, 믿음 등과 단절하게 되는 해방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해방이 매우 멀리 나아가버렸기 때문이죠. 여성의 해방 등, 해방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주요한 주제입니다. 제가 칼뱅에게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우리가 진정으로 해방되었다는 증거가 우리가 돌아서서 감사할 수 있다는 것, 감사 속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데서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인이고 책임 있는 자로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또한 먼저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뜻이지요. 칼뱅에게 감사는 성인인 주체의 책임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다소간 망각된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인정, 감사, 우리를 앞서간 것들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를 앞서간 모든 전통에 대한 빚진 감정을 잊어버린 해방의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선생님이 칼뱅주의와 리쾨르의 관계, 개신교와 리쾨르의 관계를 연구하신 것에도 관심이 있는데요. 초창기와 중기, 후기 리쾨르를 비교해볼 때, 후반으로 갈수록 리쾨르에게서 개신교적 분위기가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반면에, 선생님은 더 단호하게 리쾨르가 칼뱅주의 철학자라고 주장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실제로 리쾨르 스스로 그리스도교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저 철학자였고, 철학을 전달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철학자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대화했던 것이지요.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아니었지만, 그의 철학 양식과 그리스도교의 양식이 만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이는 특히 신앙에 관한 인간적 표현에 부여한 중요성에서 발견됩니다. 리쾨르의 언어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요. 왜 리쾨르에게 언어가 중요할까요? 언어가 세계와의 관계, 삶과의 관계, 생명력 넘치는 존재와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경험들, 삶의 한계 경험들은 신앙의 표현, 시편의 표현, 애도의 표현, 성경 텍스트에 있는 다양한 장르의 표현으로 번역됩니다. 성경 텍스트에 있는 문학 장르의 다양성은 일반적인 인간 경험의 언어적 표현 형태의 범위 전체를 나타냅니다. 어떤 면에서 칼뱅이 글에 부여한 중요성은 리쾨르가 텍스트에 부여한 중요성, 텍스트에서 삶으로, 텍스트에서 행동으로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에 대한 사유와 잘 부합합니다.
실제로 리쾨르는 칼뱅 자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칼뱅주의적 관점을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폭넓은 정신의 소유자였고, 다른 모든 형태의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에도 매우 우호적이었죠. 리쾨르는 개신교의 개인주의를 많이 비판했고, 개신교 신자들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이레네우스,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그리스 교부들이 말하는 이야기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동체의 이야기 감각, 공동체로서의 전통에 관한 감각 같은 것 말입니다. 신앙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복수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차원이 신앙의 주체에게 있다는 말인데, 이 점에서 매우 개인주의적인 개신교인들에게 비판적이었습니다.
- 선생님은 학술 논문과 정치적 관점을 밝힌 칼럼에서 도덕과 정치의 주제를 풍부하게 다루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대립과 갈등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정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항상 윤리 문제를 어두운 면에서 접근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용기에 대해 다루면서 또 낙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오히려 탈정치화, 사실상 공동의 책임을 포기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죠. 불의, 굴욕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고, 최근에 굴욕에 관한 책도 썼습니다. 전쟁에도 관심을 두고 많은 강의를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어려움을 통해, 곤란함을 통해 윤리에 접근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용서하기가 어려운지, 왜 때로는 용서가 불가능한지, 왜 우리가 용서하는 데 그토록 곤란해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희망을 선포하는 것도 좋겠지만, 왜 절망이 있는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항상 이런 물음들에 있어 윤리의 어두운 면을 거쳐 접근해 왔습니다. 또한 동시에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매우 고전적이고, 매우 흔한, 매우 바울적인 개신교의 설교를 경계합니다. 그런 설교는 ‘인간은 어쨌든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책임들에 직면하는, 우리가 발휘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능력들을 보는 모든 능력을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한쪽에는 바울을, 다른 한쪽에는 예수를 두고 작은 연극을 만든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고, 예수는 “너희는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용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너희는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 어렵다. 너희가 용서할 수 있으려면 하느님이 너희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마법 같은 것을 받아들이듯 말이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아니, 너희가 용서할 수 있고, 약속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땅에서 매이고 풀 것은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양자 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어두운 면, 어려운 면, 곤란한 면을 측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능력에 대해 절대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제가 자크 데리다와 토론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데리다는 “용서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용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리쾨르는 “용서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니다, 용서에는 조건이 있지만, 용서는 가능하다”고 말하고자 했죠. 강조하자면,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과 조금 비슷해요. 어떤 의미에서 데리다는 너무 그리스도교적입니다. 그는 용서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용서가 신성하고, 숭고하며,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나 아렌트처럼, 예수님처럼, 용서가 위에서 수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수평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가진 능력입니다. 항상 이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론·복수·불행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곳이에요. 따라서 이는 하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약속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이 능력의 차원, 특히 용서의 능력 차원을 매우 강조하고자 합니다.
- 한국인들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상황을 상상하기 어려워합니다. 프랑스는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국가이지만, 깊은 가톨릭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개신교는 소수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헌신된 개신교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질문은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도 고려해볼 만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 문화 내에서 개신교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요.
제가 속한 전통인 프랑스 칼뱅주의는 프랑스 내륙 전역, 특히 제가 태어난 프랑스 남부에서 지배적인데, 이는 라틴 문화입니다. 이 개신교 문화는, 라틴 문화이기도 합니다. 북유럽 국가들의 개신교, 즉 루터교나 영국 성공회 등과는 다르죠. 어떤 면에서, 우리는 문화적으로 북부의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는 일반적인 개신교에 대해 첫 번째로 구별해야 할 미묘한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루터의 찬송가, 칸타타, 합창곡을 알고 부릅니다. 위대한 미국의 영가나 복음성가도 알고 부릅니다. 따라서 찬양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다른 개신교와 공유하는 예배의 차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프랑스 개신교의 깊은 문화, 즉 루터교적이거나 독일적인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이 아니라 프랑스 남부의 문화에 대해 말하자면, 가톨릭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칼뱅조차도 위대한 가톨릭 사상가입니다. 그는 가톨릭에서 배제되었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었지요. 저는 그가 라틴계이며, 위대한 라틴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칼뱅은 성 베르나르의 열렬한 독자였습니다. 칼뱅은 중세 전통과 전혀 단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이 중세 전통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를 쓸 때 제도의 중요성을 고려합니다. 그는 모든 제도를 깨뜨리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칼뱅주의는 점차 칼뱅이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매우 칼뱅주의적인 국가들에서 비롯한 변모된 칼뱅주의보다는 실제 역사적 칼뱅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살았다면 칼뱅주의 공동체보다 가톨릭 공동체에 더 가깝다고 느낄 수도 있겠네요.
아마도 진정으로 차이가 나는 사항은 다음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 칼뱅은 이혼의 가능성, 이혼의 원칙을 넓게 수용했습니다. 결혼은 그에게 매우 중요했지만, 이혼도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재혼도 가능했습니다. 이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이 요구하는 이혼도 포함합니다. 그는 신명기에 기대어,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칼뱅주의에서 다소간 망각된 것이지만, 어딘가에 깊이 남아있는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결혼, 진정한 계약을 맺을 수 있지만, 그것을 깨뜨릴 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죠. 계약을 깨뜨릴 수 있기에 계약을 맺을 수 있고, 동맹을 깨뜨릴 수 있기에 자유로운 동맹을 맺을 수 있습니다. 만약 동맹이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동맹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매우 칼뱅주의적인 주제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제 생각에 프랑스 개신교 인간학의 일부인데, 장례식, 죽음을 둘러싼 의식이 극도로 간소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매장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시신 자체는 화환 없이, 십자가 없이, 노래 없이, 의식 없이 매장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신은 즉시 하느님께 속하게 되지요. 이것은 프랑스 가톨릭과의 중요한 인간학적 차이점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죽음의 과정에 여전히 장례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마도 여기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 앞서도 언급하셨지만, 선생님은 튀르키예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유럽인들보다 이슬람 문화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이 어떻게 평화로운 공존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말씀하신 것은 분명 제 삶에서 중요했던 큰 질문입니다. 튀르키예에 가기 전에도 저는 차드에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차드의 한 고등학교 철학 교사였는데, 이미 거기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이었죠. 학생 중 일부가 무슬림이었고, 저는 그 고등학교에서 작은 무슬림 철학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후 프랑스로 돌아왔다가 1년 후 튀르키예로 떠났어요. 4년 동안 가르쳤는데, 역사학자인 튀르키예 여성과 결혼했고, 그 후 여름마다 튀르키예를 방문했습니다. 테러 이후, 제가 유네스코에서 조직한 회의를 통해 이 경험과 만남을 제 사유에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만남은 튀르키예가 관광국이기 때문에 관광과 연관된 질문들을 다루기도 했었고, 종교 간 대화 등도 다루었습니다. 세속주의 문제도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프랑스에는 이슬람에 대해 매우 상상적인 개념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을 잘 모릅니다. 오늘날 유럽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상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프랑스 인구 중 4분의 3 이상이 상상으로 이를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과거를 상상하며, 단지 폭력의 과거, 즉 종교재판, 십자군 전쟁, 가부장제 등이라고만 상상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현실에 무지합니다. 사람들이 현재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실제로 살고 있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과거로의 여정을 조직할 수 있어야겠죠.
이런 변화는 이슬람이 있는 곳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이데올로기화된 이슬람이나 겉으로만 이슬람인 척하는, 실제로는 이슬람도 아닌 허세가 있지 않은 곳, 생동하면서 실제로 경험되는 이슬람이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그곳에는 환대가 있고,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튀르키예와 차드에서 만난 것입니다. 저는 아프리카에 많이 갑니다. 요즘도 매년 아프리카에서 만남을 조직하는데, 특히 폴 리쾨르의 사상을 중심으로 일합니다. 아프리카는 중요해요. 엄청난 인구 증가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친절한 관용을 넘어 완전히 함께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결국 제게 이것은 어원학적 의미에서의 에큐메니즘 그 자체입니다. 오이쿠메네(oikoumène) 곧 공동의 집인 이 행성에서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공존이 생물다양성과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전 지구상에 단 한 종류의 식물, 예를 들어 옥수수만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지옥일 것입니다. 다행히도 다양한 식물이 있습니다. 다양한 동물이 있습니다. 다양한 언어, 다양한 전통, 그리고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건이 있습니다. 이 여러 전통이 다른 이들에 대해 헤게모니를 가지려는 욕심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권력을 독점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환점이 될 것이며,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동반할 수 있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나누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독점을 통해 강요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독점이 매우 위험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독점은 곧 생물다양성을 제거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하려고 주장하는 전통마저 제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 전통에 매우 위험한 일이 될 것이며 치명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 참여형 지식인으로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해 일하셨고, 윤리와 정치에 관련된 다양한 일에 관여하셨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이끄는 동기나 원천은 무엇입니까?
제가 학문적 대학 교육과 공적 참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칼뱅주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학부에서 윤리학 교수의 임무, 기능, 사명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리쾨르도 칼뱅주의자라고 할 만하고요. 바로 그렇게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칼뱅주의 전통입니다. 칼뱅주의는 비정치적인 전통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말하고 사회의 모든 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전통입니다. 저는 이런 환경에서 자랐고, 이는 제 문화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정치를 신학이나 철학, 또는 사상과 분리하지 않습니다. 함께 갑니다. 책임 있는 사상은 항상 정치적 차원, 참여적 차원을 갖는 사상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핵심 어젠다의 변화를 보는 것에 있습니다. 생명윤리 문제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 있었는데, 최근에 이런 쟁점은 좀 사그라들었습니다. 오늘날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은 생태학적 주제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현안, 또는 전쟁 등에 대해 반응하고 참여합니다.
제가 항상 꽤 균형 잡힌 방식으로 시도한 것이 있는데요. 저는 말하자면 대학교수와 참여적 지식인이라는 이중 직업을 가진 셈인데요. 두 가지 다른 직업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교회에서 하는 일과 교회 밖의 시민사회에서 하는 일을 번갈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교회 안팎에서 똑같이 많은 강연, 콜로키움,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 등에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오직 교회 내부에만 전달되는 말은 결국 고립될 것 같고, 또한 오직 외부에만 전달되는 말은 이 공동체적 차원을 놓칠 것 같습니다. 오늘날을 위한 공동체의 언어, 전통의 언어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 선생님은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파리 개신교 신학부와 다른 기관에서 많은 신학자 후보생 및 목회자 후보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미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목회자라는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멋진 직업이며, 말씀의 직업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말씀과 경청만이 있습니다. 물론 듣지 않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듣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좋은 신학이란 ‘함께 있는’ 신학입니다. 프랑스어 ‘있음’(être)과 관련해서 ‘함께 있음’(être avec)이란 말이 있죠. 이는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있음으로, 듣는 것으로 시작하세요. 말하기 전에 들으세요. 리쾨르는 이런 멋진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대화의 한가운데에 당도합니다. 우리 차례가 되면 이 대화에 참여하고, 또 우리 차례가 되면 물러나 말하는 법을 배우고 개입할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내줍시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할 수 있는 힘, 여러분의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혀는 아주 작은 기관이지만, 큰 배의 키입니다.” 말하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우리의 공동체를 지배하며, 결국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니 말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말이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서, 실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하는 방식, 말씀을 존중하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이런 것들은 매우 평범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할 수 있고, 여러분의 상황에서 좋은 말하기 방식을 찾는 것이 여러분의 몫입니다.”
김동규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