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이원 일체의 세계
[408호 말씀과 따름]
지난 두 차례 기고(9월호 ‘21세기 교회 위기의 근원’, 10월호 ‘들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이어지는 글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과 교회의 독특함은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데 있다. 하늘과 땅이 맨 처음 열리는 이야기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이야기까지 듣고, 그 말씀에 근거해 살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저들을 향해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왕하 17:14, 40, 느 9:16, 사 48:18, 렘 3:13, 29:19, 겔 12:2, 단 9:6, 호 9:17) 이스라엘과 교회는 한 톨의 의문도 없이 ‘들었다’라고 확신했으나 성경은 한 톨의 의문도 없이 ‘너희가 듣지 않았다’고 탄식한다. ‘너희가 들었어도 잘못 들었고, 잘못 들은 것은 듣지 않은 것’이라고 고발한다.
실로 어마어마한 간극이다. 그런데 누구도 이 간극을 주목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성경이 초지일관 말한다. 지금까지 온 생명이 겪은 온갖 어그러짐, 온갖 어리석음, 온갖 파열, 온갖 고통이 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이 간극, 성경과 교회 사이의 이 간극에서 비롯됐다고. 옳다. 온 생명은 오늘도 이 간극에서 비롯되는 만사의 뒤틀림을 경험하고 있다. 하여, 나는 이 생태사적 간극에 주목한다. 이스라엘과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잘못 들음-듣지 않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묻는다. 왜 잘못 들었는지, 어찌해야 잘못 들음-듣지 않음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지.
하나님 말씀을 담은 문자
왜 잘못 들은 것일까? 왜 잘못 듣고도 잘못 들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것일까? 근원을 찾아보니 두 가지가 돋보인다. 하나는 문자, 또 하나는 성경 읽기 방식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 지금도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자취가 묘연하다.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들었다는 흔적으로 문자가 남아있을 뿐. 그것도 원본 없는 사본들만…. 참 수수께끼 같다. 생각할수록 기이하다.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 하나님 말씀이 문자 속에 보관되어 있다니. 하나님 말씀은 문자보다 크고 깊고 오묘한데 그런 말씀이 고작 문자로 기록되었다니! 사도 요한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라고 말했다. 옳다. 문자는 하나님 말씀을 담기에 너무너무 부족한 그릇이다. 부족할 뿐 아니라 오독의 위험이 아주 많은 그릇이다. 하지만 문자보다 더 유용한 그릇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문자라는 그릇에 담았다.
문자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을 66권의 책에 담았다(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외경도 많음). 가히 신비다. 쉬 이해되지 않는 수수께끼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 같은 신비를 믿는 자들이 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저들은 오늘도 이 수수께끼 같은 신비를 믿기에 문자에 담긴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 이 길밖에는 길이 없으니까-문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으니까, 문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얄궂게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최상의 그릇인 문자가 하나님 말씀을 잘못 듣게 하는 최고의 걸림돌이다. 사실 문자는, 흔한 비유로 말하자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달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문자)을 보고 달을 봤다(하나님 말씀을 들었다)고 확신하는 오류를 범한다. 심지어 문자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만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전한 길이라고, 하나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집어넣지 않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문자대로 읽기를 강화해왔다.
어찌 됐겠는가. 달을 볼 수 있었겠는가. 문자에 막혀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할밖에. 일찍이 불교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크게 외쳤다. 노자 또한 도(道)를 말하면서 최일성으로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를 외쳤다. 인류는 이처럼 일찍이 문자가 진리를 담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릇이라는 걸 알았다. 문자가 도(道)를 어그러뜨릴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는 걸 알고 경계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교회, 특히 교회는 문자의 한계와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았다. 하나님 말씀이 문자에 담겨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지, 문자가 하나님 말씀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릇이라는 사실엔 주의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문자에 갇히고, 문자에 갇혀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잘못 듣게 되는 일, 문자에 충실할수록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는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다. 지금도 6일 창조론, 젊은 지구론, 아담 원죄론, 믿음-구원 공식(예수를 그리스도라 입으로 말하면 구원받는다) 등 문자에 갇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 고립되어있다. 이런 행위가 신앙의 이름, 성경의 이름으로 천연덕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성경을 내 속으로 집어넣는 읽기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거나 잘못 듣게 하는 두 번째 큰 걸림돌은 성경 읽기 방식이다. 성경 읽기 방식에는 크게 두 유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내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읽기, 또 하나는 성경을 내 속으로 집어넣는 읽기이다.
우리는 대체로 후자에 익숙하다. ‘성경을 내 속으로 집어넣는 읽기’란 나의 지식, 감정, 경험, 필요, 상황, 인식의 창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다. 이런 읽기는 외부 지식을 자기 뇌 속에 집어넣는 암기식 공부를 오래 해온 탓, 좀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자기중심성 탓일 텐데, 교과서를 암기하듯 성경의 내용(정보)을 자기 뇌에 욱여넣는 읽기 방식이다. 성경 내용을 최대한 많이 알고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지름길이요 하나님 뜻을 아는 지름길이라 믿고, 영어 단어를 암기하듯 성경을 씹어 먹는다. 그 결과 성경을 백 독했네, 이백 독했네, 천 독했네,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전설처럼 나타났다.
관건은 횟수가 아니라 열매다. 예수께서 ‘그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마 12:33)라고 했듯 성경 읽기 역시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 ‘성경을 자기 속으로 집어넣는 읽기’의 열매는 아주 흉측하다. 우선 읽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읽는 사람의 신념을 강화하고 확신의 벽을 더 높이 쌓게 할 뿐. 기존의 믿음, 기존의 확신, 기존의 이해를 더 강화할 뿐이기에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 믿음과 자기 이해에 대한 확신의 벽만 높아져 신앙의 외골수가 되게 한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과 다른 신앙을 갖게 하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믿게 하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다른 구원을 받게 한다. 한마디로 자기식대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믿게 한다. 우주보다 높고 깊고 넓고 오묘한 하나님 말씀을 자기만큼이나 옹졸한 말씀으로 오염시키고, 쥐방울만 하게 쭈그러뜨린다.
내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읽기
‘내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읽기’는 나의 지식, 감정, 경험, 필요, 상황, 인식을 내려놓고 제로 포인트에 서서 성경의 세계(우주보다 광대하고 오묘함)를 탐험하는 읽기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성경을 통해 나를 읽고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일이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복잡한 만큼 오랜 숙련이 요청된다. 믿음만 요청되는 게 아니라 간학문적 통섭의 눈도 함께 요청된다. 그런 만큼 낯설고 어렵다.
물론 여기서도 관건은 열매다. ‘내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읽기’의 열매는 매우 아름답고 풍성하다. 우선 자기 믿음을 강화하고 확신의 벽을 높이 쌓기보다 지금까지의 나를 내려놓게 한다. 즉 나의 경험과 이해 지평을 내려놓게 하고, 나의 세계가 성서의 세계로 점차 변혁되고 확장되게 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실재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눈을 열어준다. 세계의 다양성을 기뻐하는 하나님 마음,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는 하나님 마음, 죄인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하나님 마음을 조금씩 배우며 닮게 한다. 지금 여기가 비록 맘에 차지 않지만, 남루한 세계의 현실 앞에서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희미하게 바라보며 세계의 어둠을 가로질러 가게 한다.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죽음의 자리에서 겨우 숨만 헐떡일 때도 있지만, ‘내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읽기’를 하는 사람은 끝내 일어나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 나라, 오묘하고 광대한 세계의 실재를 향유하고 기뻐하게 된다. 한마디로 성경이 보여주고 약속하는 독특하고 놀랍고 심원한 세계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정말 들었는가?
살펴본 대로 성경 읽기에는 정반대인 두 방식이 있다. 그런데 교회는 불행하게도 ‘내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읽기’를 하기보다 ‘성경을 내 속으로 집어넣는 읽기’를 해왔다. 그것이 최선인 줄 알고 마음을 다해 그리했다. 잘못 들었다는 면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일란성쌍둥이다. 오늘의 한국교회 또한 자기 들음에 갇혀 잘못 듣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특히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며 확신에 차 있는 자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하나 같이 하나님 뜻에 무지하고, 하나님 뜻과 정반대되는 길을 씩씩하게 내달리니까. 지난 4월의 22대 총선만 해도 전광훈 일파가 대한민국을 구하겠다며 ‘자유통일당’ 이름으로 나와 국민적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그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확신에 차 말했다. “대한민국이 지금 정신적으로 굉장히 좌파 주사파 사상에 의해 많이 물들어 있고 좌경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공산주의를 멸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를 멸해야 이 나라가 삽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왜곡이 하늘을 찌른다. 평균적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말을 내뱉는 자들이 한국교회 지도자입네 행세하고 있다.
주일마다 선포되는 수많은 강단의 설교도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을 능멸하고 배신하는 설교가 부지기수다. 정말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모두가 ‘하나님’을 부르나 하나님 이해는 저마다 다르고, 모두가 ‘구원’을 말하나 구원의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 모두가 부르는 하나님을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이라는 우상이 득실거린다. 하나님 이해부터 구원까지 온갖 오물을 뒤집어쓴 오물 덩어리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왜 이리됐을까? 수만 가지 요인이 있지만 주요인은 둘이다. 문자에 갇혀서 그런 것이고, ‘성경을 내 속으로 집어넣는 읽기’를 해서 그런 것이다. 성경의 눈으로 나와 세계를 읽지 않고, 내 눈으로 성경을 읽어서 그런 것이다. 문자에 갇혀 성경을 잘못 읽었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잘못 들은 것이고, 교회가 근원적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숨 쉴 공간을 찾지 못하는 것이고, 교회가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추락한 것이고,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떠나는 것이다.
성경의 세계에 눈뜨는 길
옳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마 5:13)인 교회가 세상의 걸림돌,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구린 곳이 된 것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문자에 갇혀 성경을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다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한다. ‘성경을 내 속으로 집어넣는 읽기’를 버리고 ‘내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읽기’를 해야 한다. 내 눈으로 성경을 읽는 고질병에서 빠져나와 성경의 눈으로 나와 세계를 읽는 능력을 체득해야 한다. 절대 쉽지 않지만, 어쨌든 성경 읽기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 그럴 때 성경 읽기란 자기 믿음을 강화하는 일이 아니라 성경으로 나를 깨부수는 일이 된다. 나를 깨부숨으로써 나를 세우고, 나를 깨부숨으로써 나를 세우는 일, 이 일이 바로 회개요 중생이요 구원이다.
어찌해야 ‘내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읽기’를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작업이 필요할 테지만 가장 중한 것 하나만 꼽으면 성경의 세계에 눈뜨는 일이다. 성경의 세계에 눈뜨는 일, 이보다 중한 일은 없다. 성경의 세계에 눈떠야 비로소 성경의 눈으로 나와 세계를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웅숭깊이 헤아릴 수 있고, 결정적으로는 세계에 눈떠야 성경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니까.
이스라엘과 교회가 성경을 소유했음에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거나 들었어도 잘못 들은 것은 결국 성경의 세계에 눈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의 세계에 눈뜨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욕망을 따라 읽고, 도덕의 눈으로 읽고, 세상의 눈으로 읽고, 자기 눈으로 읽고, 자기 눈조차 없이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읽은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성경의 눈
성경의 세계에 눈뜨고, 그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만이 참된 교회 개혁의 길, 교회 회복의 길이다. 예수가 모세율법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르게 읽었듯, 바울이 예수를 유대적인 유일신 이해와 다르게 읽었듯, 그리스-로마화 된 기독교 ‘1,700년 체제’가 읽어온 것과 다르게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묻자. 성경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성경은 세계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이것이 성경의 세계다, 라고 할 만한 것이 과연 있을까? 있다. 성경은 이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요 하늘과 땅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 세계라고 말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새번역)는 선언으로 시작함으로써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창세기 1:1뿐 아니다. 하나님께서 열방의 민족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물으신 후 답하신다.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다.”(사 66:1-2)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마 6:10).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비밀을 말하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라고 했다. 요한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와 섭리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했다(계 21:1). 이처럼 성경의 이야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는 벅찬 희망(약속)으로 끝난다. 중간중간 결정적인 대목에서도 ‘하늘’과 ‘땅’이 언급되곤 하는데 언급될 때마다 항상 쌍으로 붙어 다닌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세계관을 유추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하늘만 있는 세계도 아니고, 땅만 있는 세계도 아니다. 이 세계는 하늘과 땅이라는 이원의 요소로 구성된 세계이고, 이원의 요소로 구성된 세계는 둘이 병존하는 세계가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통합된 세계, 즉 하늘과 땅이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세계다.
옳다. 이 세계는 ‘이원론’의 세계도 아니고, ‘일원론’의 세계도 아니다. 하늘과 땅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인 ‘이원 일체’의 세계다.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막 1:15),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오겠다고 말한 것(마 24:44, 계 22:20),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하늘과 땅이 이원 일체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자는 반드시 창세기 1:1에 눈떠야 한다. 이원 일체인 세계의 오묘함에 눈떠야 한다. 여기에 눈떠야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원론으로 분열된 지금의 신앙을 넘어설 수 있다. 사실 성경 읽기(하나님 말씀 들음)는 창 1:1을 어떻게 읽느냐, 하늘과 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껏 3회에 걸쳐 주저리 한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마쳐야겠다. 지금의 교회는 땜질로는 회복 불가능한 근원 위기에 직면해있고, 근원 위기를 돌파하려면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성경의 세계관에 눈떠야 하고, 성경의 세계관에 눈뜨려면 하늘과 땅이 이원 일체라는 근원 진실에 눈떠야 한다.
정병선
스무 살에 하나님을 만난 후 길을 찾고 길을 가는 길 위의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다. 지금은 생의 마지막 작업으로 양자역학 이후, 진화 이후의 신학과 성경 읽기에 천착하는 작업을 지평너머교회(온/오프라인 동시 예배)를 통해 하고 있다. 저서로는 《어느 목회자의 고백》 《신앙의 마스터클래스》 《행복을 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