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냄 받은 이유: 불의와 정의의 뚜렷한 증거들

[408호 커버스토리]

2024-10-31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

제4차 로잔대회 둘째 날(9월 23일) 저녁 집회에서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Ruth Padilla DeBorst) 박사가 발표한 강연의 원문을 당시 동시통역과 대조하여 번역 및 정리해서 전한다. 이날 저녁 집회는 ‘회개’를 큰 주제로 다뤘으며, 그는 두 번째 순서를 맡아 ‘정의’(Justice)를 주제로 15분 동안 발표했다. 본 강연 원제는 ‘Sent as Jesus was: to seek justice!’였다.

이 발표가 끝난 후, 로잔 본부 측과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 박사는 ‘균형 잡히지 못한’ 메시지를 전했다는 항의를 받았다. 강연의 한 대목에서 전쟁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들을 언급할 때 이스라엘이 가해자이고 팔레스타인이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했다는 주장이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에 관한 비판적 논조에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에 데이비드 베넷 로잔대회 운영위원장은 발표문에 등장하는 문구를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는 사과문을 일방적으로 모든 참석자의 이메일로 보냈다. 그러자, 사과문에 상처를 입은 레바논 리더들과 북아프리카 및 아랍 그리스도인들의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이들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 결국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 박사의 입장을 담은 편지까지 모든 참석자에게 공유하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본 강연문 아래에,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 박사가 이스라엘과 세대주의 종말론과 관련한 항의에 대한 응답으로 쓴 편지를 첨부한다. 일련의 사건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번 호 커버스토리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 박사 인터뷰’(24-35쪽)를 참고하라.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그날 저녁 제자들을 찾아오셨죠. 또한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자신이 부활한 모습을 보면 제자들이 충격을 받으리라는 사실을요. 불과 며칠 전에 그분이 로마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을 제자들이 보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하, 새번역)이라고 말씀하시며 상처 난 손을 보이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죠. 요한복음 20장 20-2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 중 하나는 파송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보내심을 받았지만, 금으로 장식한 로마의 왕좌에 앉은 왕자가 아닌 가난한 여인과 육체노동자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심지어 오시자마자, 목숨을 걸고 낯선 땅으로 도망가셔야 했죠. 그분은 보내심을 받았지만, 명예로운 자리에 앉은 대제사장이 아닌 머리 둘 곳이 없는 떠돌이 선생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보내심을 받았지만, 분주한 종교 예식을 집례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말씀하셨죠.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이 말씀은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토지를 쉬게 하려고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예를 해방하며 모든 잘못을 바로잡는 해였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면서 지속하게 하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기 위해, 이것을 실천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획하신 일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의 예언적 전통에 들어오셨고, 기원부터 함께한 그 예언을 활용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와 말씀과 행동을 보면, 미가 선지자와 같은 예언자들의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옵니다. 이 예언자들의 경고와 책망은 미가 시대와 예수님 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돼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미가 시대에 유다 농민들은 고통 가운데 살았습니다. 적군이 침략해오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특히 부패한 통치엘리트가 자행한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무거운 세금 납부를 강요당했고요,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동원되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고요, 소수 부유층을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땅은 탐욕을 채우려는 부자들 때문에 빼앗기고 말았고, 이들은 강제로 쫓겨나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남성은 군대로, 젊은 여성은 왕실의 성노예로 끌려갔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모든 불의가 종교적 행위로 위장되었다는 사실이죠. 종교적 관습과 의식, 희생 제사가 사회적 부패를 가려주고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울부짖는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닫았고, 제사장들은 부자들과 어울리면서 백성들을 억압하는 부자들의 방식에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어떤가요?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늘날 살아가는 이 세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면 여전히 유사한 불의와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정의를 말할 때 하나님의 뜻과 가장 어긋나있는 지점은 부의 불평등입니다. 하나님은 풍요로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생명이 번성하고 모든 창조질서가 평화로운 그런 세상을 만드셨죠.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어떻습니까?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1% 사람들이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1) 2020년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다섯 명이 가진 재산은 두 배 이상 늘어났고요, 50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더 가난해졌습니다. 빈곤은 불의와 불평등의 가장 뚜렷한 증거입니다.

한편, 너무도 많은 사람이 불평등 때문에 소외를 겪고 고통받으며,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과 민족차별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미국 상황을 예로 든다면, 오늘날 백인 가족은 흑인 가족보다는 8배 많은, 히스패닉 가족보다는 5배 많은 부를 갖고 있습니다.2)

인종차별은 기후 불평등에도 영향을 줍니다.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감소는 전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요. 유색인종 커뮤니티가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공기와 토지와 물의 오염 등, 크나큰 피해는 회복할 여지가 없습니다. 쓰레기 폐기물은 주로 남반구에 버려지고 있고요, 기후변화로 수백만 명이 쫓겨나고 있습니다. 화재와 홍수, 갈수록 강력해지고 심각해지는 허리케인과 사막화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이주하여 난민으로 전락한 이들은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키는 부유한 북반구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큰 불의로는 성별 불평등 문제가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같은 일을 해도 남성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습니다. 여성 일자리는 비숙련 ‘저가치’ 직종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고요. 여성들은 성희롱과 학대로 피해자가 될 가능성도 훨씬 높습니다. 여성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만,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입니다. 여성들은 성령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데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말이지요.

차별은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급여와 기회를 비롯해 삶의 여러 영역에서 제한받고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 격차 문제가 있습니다. 인터넷, 컴퓨터, 스마트폰처럼 디지털 도구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불평등 말입니다. 세계 인구 중 3분의 1 이상이 가상 세계와 단절된 채로 살아가면서 저와 여러분이 당연시하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AI 산업도 마찬가지죠. AI 산업과 알고리즘에 얽힌 정보는 제가 앞서 언급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다섯 명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산업전쟁에 이용되는 기계가 사람들과 지역들을 갈아내고 있는데요. 이런 행태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상대화하려는 신학, 종교적 이념에 강화되고 뒷받침됩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불의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종교적 가면을 쓴 채로 불의를 행하던 시대의 권력자들을 향해 미가 선지자가 전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봅시다. 미가는 먼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켰습니다. 유다 역사 가운데 은혜롭게 개입하시고 함께해오신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경청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행동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기대를 요약했습니다. 유명한 미가서 6장 8절 말씀입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실천은 비밀스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분명했죠.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 때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창 18:19) 이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후, 해방된 노예들로 혼합된 집단으로서 율법을 통해 새로워진 백성들에게 모세가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지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모든 길을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신 10:12-13)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이 말씀을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 14:15) 이 말씀들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의식이나 축제, 심지어 선교 활동을 통해서 경배받지 않습니다. 단순히 피상적인 행위로 이어질 수 있는 관행이 아니라, 우리의 윤리적인 순종을 통해 경배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되게 만드는 것은, 피상적인 경건의 표현이나 ‘기독교적인’ 전문 용어와 찬송, 또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빙자하여 억압을 정당화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식민주의 신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되게 만드는 명확한 표지는 무엇일까요? 미가 선지자가 정리한 말씀에는 세 가지 상호 연관된 부르심이 얽혀있습니다. 첫 번째 표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바는 하나님과 함께 겸손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향해 깊은 경외심을 품고,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고백에 도전할 수 있는 다른 권력을 향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도록 만들지요. 이 그림은 어떤 국가나 민족의 주장이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성령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열어주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이런 겸손은 불의의 뿌리인 자족하는 교만과 우상숭배를 버리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고안한 전략들, 메시아 콤플렉스와 관리적 사명감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고난받은 종으로 보내심을 받도록 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경청하고, 회개하며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표지는 인자와 긍휼과 자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행동의 주요 동기여야 합니다. 즉, 모든 행동은 깊은 연대와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이기심과 자기 보호를 추구하려는 본능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서 예언자적 평화의 사도로 움직이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사방을 향해 외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내도 괜찮을 만큼 옳은 이념도, 거룩한 종교도, 우월한 인종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폭력의 참상 가운데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무관심은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궁지에 몰려 터전을 잃어버리고 만 가자지구 사람들, 이스라엘과 하마스에 억류된 인질들과 그 가족들, 자국 영토에서 위협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향한 무관심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은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보내심을 받았다면, 이웃의 고통이나 세상의 울부짖음에 무감각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경청하고, 회개하며 긍휼과 자비로운 사랑을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세 번째 표지는 오직 정의롭게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곧 공동선을 위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실천을 뜻합니다. 공동체의 선을 위해 자신의 안락과 이익을 내려놓는 헌신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실천을 위한 최고의 모델은 그 누구도 아닌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10장 17-19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이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당신들의 주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크신 권능의 하나님이시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차별하여 판단하시거나,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며,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 곧 이웃들이 집이나 땅, 생계나 생명 자체가 빼앗기는 상황에서 침묵할 여지는 없습니다. 마가 선지자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침묵은 용납될 수 없죠. 그 대신, 우리가 우리 정체성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며 행동으로 나서야 합니다. 압제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가식을 벗고, 이웃과 함께 슬퍼하며,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통해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레미야서 말씀을 읽어봅시다.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렘 9:23-24) 정의는 단순한 정치적 경향의 이념적 구성물이 아닙니다. 정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고 행동하는 데 중심이 돼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경청하고, 회개하며 정의를 추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 중 일부 사람들은 은사가 있어서 정의로운 사업과 변호, 정책 및 설계와 시행을 위해 특별히 보냄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분들 사역 위에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모세와 하나님의 율법, 미가를 비롯한 선지자들,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는 정의를 추구하는 일이 일부 전문가에게만 맡겨진 부가적이고 선택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와 모든 신자에게 도전하셨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마 6:33) 하나님 나라의 사전에서 정의는 모든 잘못된 것을 구속적으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정의는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피해자를 옹호합니다. 이러한 정의(definition)는 일반적으로 ‘정의’(justice)가 다양한 형태의 처벌, 억압, 죽음을 통해 ‘나쁜’ 사람들을 막는 시스템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는 사실과 완전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생명을 주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표현입니다. 사랑의 가시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정의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정하셨던 것처럼,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다른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바로 세워서 온전한 삶을 가져다줍니다. 정의를 통해 맺어지는 열매는 샬롬과 평화가 이루어지고, 생명이 번성하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정의가 없으면 참되고 지속가능한 평화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경청하고, 회개하며 정의를 추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정의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하고, 찾고, 일하도록 기도하게 하시길. 우리가 함께 이 문제를 위해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로서 살아가도록,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정의와 평화가 마침내 완성되는 그날까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아멘.

 

제4차 로잔대회에 보내는 공개서신

(번역: 김재완)

저는 로잔대회 프로그램팀으로부터 하나님의 성품, 복음, 그리고 세상 속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소명의 핵심에 대해 강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정의를 이야기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15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애초에 이 제안을 승낙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불의가 존재합니다. 어느 누가 단 15분 안에 정의와 관련한 심오하고도 넓은 범위의 주제들과 거기에 얽힌 복잡한 상황들을 성경적·신학적 관점에서 철저하고도 책임 있게 다룰 수 있겠습니까? 또한, 번역을 위해 대회 두 달 전쯤에 원고를 제출해야 했기에 그 내용은 상황과 다소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강연에 제기된 우려가 있으니, 이 공개서신을 통해 몇 가지 논점을 재확인하고 두 가지를 명료하게 밝히고자 합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일은 하나님 백성의 표지입니다. 이는 아픔에 애통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 죄악을 회개하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합하게 행동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불의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신음을 들으십니다. 우리 역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화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애통합니다. 우리는 인종차별 및 모든 종류의 차별과 학대의 피해자들과 함께 애통합니다. 우리는 기후변화가 만들어낸 수백만 난민들과 함께 애통합니다. 우리는 지구 및 멸종된 종들과 함께 애통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과 함께 애통합니다. 그들의 고통이 곧 우리의 고통입니다.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는 이 추잡한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복잡함에도 우리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본 그대로 말합니다. 다만 우리의 관점은 경험과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사람마다 각자 관점이 다를 수 있고, 또한 오직 타인에게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때만 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인식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정의에 관한 강연을 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종교적 경건에 대한 피상적인 표현이나, 기독교적 용어 사용, 예배 음악, 혹은 일부 세대주의 종말론을 빙자하여 억압을 정당화하고 자금을 대는 식민주의적 신학들이 아닙니다.”

이는 결코 세대주의 신학 자체를 전면 부정하거나 그 관점을 지지하는 자매 및 형제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제 발언으로 상처받으셨을 분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지적하는 바는 일부 사람들이 특정 집단에 저지르는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지하는 신학적 논리의 문제점입니다.

두 번째로 명확하게 하고 싶은 부분은 다음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폭력의 참상에 고통당하는 이들, 궁지에 몰리고 터전을 잃은 가자지구 사람들, 이스라엘과 하마스에게 잡힌 인질들과 그 가족들, 자국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눈물 흘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무관심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입니다.”

우선, 이 부분에서 제가 이스라엘에 붙잡힌 인질을 언급할 때 염두에 둔 것은, 가자지구의 모든 주민이 통째로 오랜 세월 야외 감옥에 인질로 잡혀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600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억류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모든 고통받는 이” 그리고 “모든 애통하는 이”를 언급하고는 왜 가자지구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특별히 지목했을까요? 왜 그들만 따로 구체적으로 언급했을까요? 제게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특별한 책임을 져야 할 현재의 정의 이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명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약 1년 전 있었던 하마스의 공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으며,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사람들, 유대인, 팔레스타인 사람들 및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위협에 처해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입니다. 이와 동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랜 기간 겪어 온 고통은 작년 10월 7일 가자지구 공습으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후로 4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그중 많은 희생자가 어린아이들입니다. 이에 더하여, 거주민을 향한 폭력은 오직 가자지구 서안에서만 증가했습니다. 그들의 고통 역시 우리의 고통이며,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계에 있는 너무도 많은 복음주의자가 무비판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외면합니다. 이 불의는 반드시 지적되어야만 합니다.

앤 자키 박사가 매우 선명하게 우리에게 도전한 것처럼, 우리가 모두 용기 있게 목소리를 높이고 침묵하지 않기를, 또한 우리가 서로의 차이에도 겸손과 존중의 자세로 대화에 참여할 수 있기를, 이를 통해 이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길 기도합니다.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Ruth Padilla DeBorst)
코스타리카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인 ‘카사 아도베’(Casa Adobe)에서 일곱 가정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변혁적 선교를 위한 국제 협회 ‘인페미트’(INFEMIT)에서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 소재 웨스턴 신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통전적 선교’(Integral Mission)를 가르치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언어학 전공으로 학사학위(BEd)를, 휘튼 칼리지에서 학제 간 연구로 석사학위(MA)를 받았으며, 보스턴 대학교에서 선교학 및 사회윤리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