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기사로 일하던 아들의 죽음, 처음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 과로사로 숨진 쿠팡 택배노동자 고(故) 정슬기 씨 아버지, 정금석 선교사

[408호 사람과 상황]

2024-10-31     정금석
ⓒ복음과상황 정민호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방글라데시에서 10년째 선교 중인 정금석 선교사에게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2024년 5월 28일, 쿠팡 퀵플렉서로 심야 로켓배송을 하던 아들 고(故) 정슬기(41) 씨가 자택에서 사망한 것입니다.

“이런 큰일을 겪게 되면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을 주셨나요?’라고요.” 처음에는 장례를 치르고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명백한 과로사임을 알게 되고, 대리점으로부터 산재 처리를 하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정금석 선교사는 아들이 처했던 택배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저는 슬기의 아버지이자 손주들의 할아버지입니다. 상처도 있지만 짐도 남아있습니다. 그 짐을 당장 어찌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라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알아서 해결해주겠지’라고 생각했죠.”

고 정슬기 씨가 사망한 지 넉 달이 지난 지금, 정금석 선교사와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8월 22일 홍용준·김정현 쿠팡CLS 대표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고소·고발했습니다. 9월 24일에는 ‘택배노동자 고 정슬기님과 함께하는 기독교와 시민사회 대책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정금석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9월 19일 쿠팡 본사 건물 앞에서 시위를 앞둔 오전, 근처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선교부 비정규노동선교센터 송기훈 목사가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 명절 연휴에도 마음이 복잡하셨을 것 같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에 대해 여쭙는 게 조심스럽긴 한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명절에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있는 건데요. 명절 기간이 더 힘들었어요. 장남으로서 동생과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명절을 보내곤 했는데, 이번 사고 이후로 동생들과의 만남이 거의 없었어요.

- 연락하기도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다니니까 동생들이 저한테 쉽게 다가오지 못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는 아흔이 넘으셨는데, 아직 손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셨어요. 이런저런 것들을 고려하니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도 사람들을 만나는 걸 힘들어하고 있어요.

명절엔 손주들이라도 돌봐주고 싶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민속촌에 다녀왔어요. 막상 가니까 애들이 민속촌보다는 놀이기구를 타고 싶어 해서 놀이공원 개장 시간에 맞춰서 들어갔죠. 결국 놀이기구만 타고 돌아왔어요. 그래도 손주들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가족들이 슬픈 건 언젠가는 회복이 되겠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 며느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가족분들은 계신가요? 얼마 전 있었던 간담회 때 보니까 며느님과 대화를 많이 하시던데요.

지금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며느리입니다. 며느리를 보면 다독일 수밖에 없죠. 그런데 며느리도 처음에는 시부모 앞에서 꾸지람을 받을지 두려워한 것 같았어요. 저희가 오니까 “죄송합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정색하고 앞으로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어요. 너의 잘못이 아니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살자고 다독였죠.

사실 제가 방글라데시에 나가서 선교하기 전에, 직장 생활을 할 때 자녀들이 결혼했어요. 아들이 결혼할 때, 저는 아들이 그렇게 빨리 결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어느 날 여자친구라고 데려왔고, 그때부터 저는 며느리에게 “너는 우리 집의 보배다”라고 했죠.

- 저번에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셨을 때, 손주들을 볼 시간이 많아졌다고 하셨습니다.

맞아요. 우리 아들네는 아이들이 넷이고, 딸네는 둘이라 모두 여섯입니다. 이 녀석들이 제가 숙소에 머무는 동안 저희 집에 오는 걸 좋아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집에 오면 자기들은 평소보다 자유롭거든요.

손주들은 다 귀엽죠. 사실 제가 방글라데시로 갈 때, 큰손주와 둘째 손주까지 보고 갔어요. 첫째는 제가 업어 키웠죠. 주말마다 며느리가 오면 아이들을 맡기고 가기도 했고요. 애들이 밤중에 깨면 저는 다시 재우려고 손주들에게 민수기 6:24-26로 노래를 불러줬어요.

- 어떤 노래인가요?

제가 만들어서 불러준 노래입니다. 우리 큰손주 이름이 성훈이니까요. “여호와는 성훈이에게 복을 주시고 성훈이를 지키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성훈이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그 축복 노래를 많이 불러줬거든요. 이 노래를 어릴 때 불러줬던 걸 기억하냐고 물어봤더니, 알더라고요. 선교지에 있을 때도 아이들을 옆에서 못 보니까, 이 말씀으로 많이 축복했습니다.

고 정슬기 씨는 2023년 3월 5일부터 2024년 5월 27일까지 1년 이상 쿠팡에서 근무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주 6일 출근을 하며 일주일에 하루만 쉬는 강도 높은 업무를 이어갔습니다. 그의 일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매일 저녁 8시에 집을 나서 8시 30분에는 쿠팡 남양주2캠프에 도착합니다. 이후 택배 트럭에 1차 물량을 싣고 20km를 달려 11시 30분에 담당 구역인 서울 중랑구에 도착합니다. 각 배송지에 물품을 배송한 후 새벽 1시에는 캠프로 돌아와 2차 물량을 싣고 다시 배송을 시작합니다. 새벽 2시 30분경, 그는 캠프로 돌아와 3차 물량 배송에 나섭니다. 이렇게 쉼 없이 쿠팡 캠프와 배송지를 세 차례 왕복해야 아침 7시에 모든 물량을 배송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주행거리는 112km. 그는 가끔 무릎이 닳아 없어질 것 같다는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중간에 화장실에 가면 배송 업무에 지장을 줄까 하여, 저녁이 되면 물도 마시지 않고 일했습니다. 대책위에 따르면 고 정슬기 씨는 하루 약 250개의 물건을 배송했으며, 사망 50일 전에는 배송 물량이 340여 개로 증가했습니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도 출근해 업무를 마치고 귀가했던 고 정슬기 씨는 고인이 되었습니다. 사망진단서에는 직접사인으로 심실세동, 중간 선행 사인으로 심근경색 의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업무상 과로사에 해당하는 사망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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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노동이 중대 재해로 이어지기에, 심야 노동은 없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를 강행하는 기업 책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요.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시간 보장을 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왔고요.

예전에 국회에서 야간 심야 노동과 관련한 토론회를 했었는데, 그걸 준비하면서 기아자동차에서 근무하는 어느 교인 한 분의 이야기를 들어봤어요. 그분은 17년간 주·야간 근무를 번갈아가며 2교대로 일해왔는데 “그때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처럼 살았다”고 하더군요. 쿠팡은 24시간 운영되니까, 우리 아들은 맨날 야근을 했으니까 어쩌면 그보다 더 강도 높은 야간 근무였던 거죠. 이를 빨리 규제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겁니다. 뉴스타파에서도 지난 4년간 쿠팡에서 모두 20명의 노동자가 일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는데요.1) 언론에 드러나지 않고 감춘 것까지 하면 더 많을 겁니다. 지금 택배노동자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 쿠팡은 이런 구조를 바꾸고 변화할 생각이 없는 걸까요?

쿠팡은 우리 아들의 죽음과 상관이 없다고 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쿠팡이 업무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관리했죠. 쿠팡 관리자와 계속 카톡을 주고받으며 일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뻔뻔하게 대응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요. 저는 재발 방지 약속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고요.

- 여러 기관과 국회의원들을 만나면서 변화를 끌어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달라지신 것, 느낀 점이 있으신가요?

정부 관료들을 보거나 국회를 가보면, 마지막 보루는 시민사회의 연대, 즉 시민단체라는 게 느껴집니다. 종교, 특히 개신교 정신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돕는 것이죠. 그러니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세월호 사건 때도 안타까운 일이라고만 생각했지, 나서서 행동하지 않았거든요. 그때 연대하는 노력을 좀 더 하지 못한 걸 반성하고 있어요.

저는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기업이 어떻게 이익을 거두는지를 살펴보면서 그만큼 사회에 공헌도 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기업 이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 쿠팡은 전 국민들이 이용하는 대기업이 되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네, 그런데 쿠팡에서 일하는 사람 중 다수는 직접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 그렇죠. CLS를 통해 고용되거나, 대리점과 계약을 하고 일하거나.

맞아요. 특수 형태 근로자라고 해서 휴식 시간이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게 되는 거죠.

- 많은 산재 사고를 보면 유가족분들이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요. 특별히 선생님께서 이렇게 쿠팡과의 싸움을 하게 된 계기나 깨달음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쿠팡이 노동자들, 사람을 무시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 아들이 5월 28일에 죽었고, 저는 30일 아침에 한국에 도착했거든요.

- 바로 장례를 치르셨죠?

네. 장례를 치르고 나중에 들으니, 첫날 대리점 직원들이 와서 “이건 산재 처리를 해야 한다”고 했대요. 대리점주가 와서 산재 처리 절차를 설명해주고 도와주겠다고 했대요. 며느리는 정신없는 중에도 메모를 해놨죠. 그런 상황에서도 산재 처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와서 산재 처리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 산재 처리가 어려울 거라고 한 건가요?

주일 오후에 며느리가 제게 “아버님, 산재 처리를 하면 대리점 사장이 굉장히 어려워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대리점에는 같이 일하는 식구들도 있고, 배송하는 직원도 여러 명 있으니, 그가 어려움을 겪으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요구하는 대로 합의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 합의는 대리점과 하는 거죠?

네. 대리점과 합의하자는 말을 듣고 저는 “네 마음이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이었던 6월 3일, 대리점 사무실로 찾아갔는데, 대리점 대표가 인사 한마디 없이 산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아버지로서 처음 만난 자리인데도 인사도 없이 그런 얘기를 하니, 그 말을 들으면서 산재 처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산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택배 노동조합을 찾게 되었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쿠팡이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니, 일하다 고인이 된 노동자들과 유족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고, 제 아들이 얼마나 힘든 환경에서 일했는지 깨달았어요. 그리고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 유족이 없으면 활동이 어렵습니다. 유족이 없으면 단순히 노조 활동이라고만 할 뿐이죠. 유족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고, 제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쿠팡 노동자들이 과로사로 사망하는 사건은 매년 발생하고 있습니다. 2020년 10월 12일, 쿠팡 대구칠곡센터에서 야간 분류 작업을 하던 고 장덕준 씨는 야간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욕조에 웅크린 채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고인은 사망 전 12주 동안 매주 58시간 이상 일했으며, 마지막 일주일에는 62시간 10분의 야간 고정 근무를 수행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고인의 산재 사망을 인정했지만, 쿠팡은 고인이 ‘다이어트’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올해 8월 18일, 고 김명규 씨는 시흥2캠프에서 쿠팡의 신선 식품을 담는 프레시백을 정리하고 운반하는 업무 중 사망했습니다. 결근한 동료의 업무까지 맡은 고인은 사망 당일 두 개의 라인을 담당하며 폭염 속에서 제대로 된 냉방장치 없이 일했습니다. 쿠팡은 열악한 노동환경을 방치하고 관리직 없이 신입 노동자에게 과중한 업무를 부여한 것에 대해 적절한 해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쿠팡은 유족에게 합의금을 제시하며 “언론과 접촉했냐”는 위협적인 연락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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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특별히 연락되거나 이어졌던 다른 유족분들은 없으셨나요?

2020년 10월 12일, 쿠팡 대구칠곡센터에서 야간 분류 작업을 하다가 숨진 고 장덕준 씨 모친 박미숙 씨는 민사 재판을 하고 있어요. 제가 재판장을 찾아갔었고, 박미숙 씨를 만났습니다. 장덕준 씨 어머니는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재판 과정을 하고 계세요.

- 긴 시간 동안 많은 일과 죽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기업이, 우리 사회가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있어요. 일반인들은 산재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올해 7월, 화성 동탄에서 야간 노동 후 사망자가 나왔을 때 노조에서 큰일 났다고 소식을 듣고 바로 갔더니, 이미 사측과 합의가 돼버린 상황도 있었어요.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죠. 우리가 활동하는 동안에도 이후로 몇 차례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산에서는 노동자가 폭우에 휩쓸려 사망한 일도 있었고요.

- 저는 현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분들을 만날 기회가 자주 있는데요. 많은 분이 “예전에는 몰랐는데,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막상 겪어보니 회사에서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걸 보면서 하나씩 알아가고 배운다고 하더라고요. 노동조합에 대한 편견도 있지만, 실제로는 본인이 겪은 일로 싸워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해 이야기하시면서 “사람들이 밟으면 꿈틀거리는 지렁이 같다”고 표현하시더라고요. 오래 투쟁하는 분들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같습니다.

김용균 어머니 김미숙 씨도 전에는 서울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지하철을 어떻게 타는지도 몰랐다고 하셨어요.

우리 사회는 본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탈하고, 가난한 자들이 당하는 구조입니다. 최소한의 인권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국가의 책임인데, 그런 것들이 무너지고 있어요. 참사가 일어나도 국가 기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요.

고 정슬기 씨 유족과 기독교, 시민단체가 한데 모였습니다. 쿠팡에 고 정슬기 씨 죽음에 대해 공식적이고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고, 더 이상 노동자들이 쿠팡에서 일하다 사망하지 않도록 실질적인 재발 방지를 촉구하기 위해 힘을 모은 것입니다. 8월 14일, 정금석 선교사는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방문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고, 9월 4일에는 기독교와 시민사회 대책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어 9월 9일에는 대책위 발족 2차 회의를 진행하고, 9월 24일 마침내 쿠팡 본사 앞에서 대책위 출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송기훈 목사. ⓒ복음과상황 정민호

- 이번에 탄생한 대책위는 ‘택배노동자 고 정슬기 님과 함께하는 기독교와 시민사회 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책위 이름에 ‘기독교’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기독교’라는 이름이 붙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가실지 궁금하고, 소망이 생깁니다. 결국 노동자들이 인간으로 대우받고 불합리한 법들이 개선되는 일이 중요하죠. 파견 근로, 하청, 특수 고용 등 구조적 문제로 노동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제 아들도 그런 환경에서 목숨을 잃은 거죠. 이러한 모든 착취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살리는 일이 시민사회와 기독교의 공동 목표 같아요. 대책위의 최종 목표가 되겠죠.

우리는 쿠팡에 책임을 묻고 상대하는 것, 쿠팡만을 변화시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왜 노동자들이 죽는지 따져보고, 그걸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죠. 구체적으로 심야 노동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 노동자들 인권을 무시하는 하청 제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요. 근로기준법 2조, 3조 개정안에 그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을까요?

- 맞습니다. 개정안은 사용자 범위에 관해 본사가 근로계약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단체교섭 등 노동조합법상 의무를 회피하는 행위를 방지하도록 되어있죠.

법안을 바꿔서 문제가 해결되도록 모든 방법을 다하고 싶어요. 각 정당과 사회단체를 통해 홍보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대책위가 그런 신호를 낼 수 있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너무 앞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요.

- 가족분들 삶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씀이니까요. 그런 진솔한 이야기가 힘을 더해줄 것 같습니다.

제가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박석운 공동대표에게 쿠팡으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뒤로 하는 합의는 원치 않는다. 쿠팡의 이름으로 사과하고, 쿠팡의 이름으로 합의하자. 다른 방식으로 하는 합의는 하지 않겠다.”

며느리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떳떳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합의하더라도 쿠팡의 이름으로 사과를 받고 합의하자고 얘기했죠. 그러지 않으면 결국 민사재판을 통해 몇 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 반드시 길이 열릴 겁니다. 1인 시위도 그런 행동의 하나로 하신 거죠?

맞아요. 사실 진즉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에요. 처음 쿠팡 대책위 활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가진 건 내 몸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죠. 자식을 잃은 사람이 뭘 못 하겠냐는 생각이었어요. 오늘도 11시부터 시위하기로 했어요. 사실, 뭐라도 하고 싶었어요. 청문회와 연계해 시기를 조절하다 보니 지금까지 왔습니다. 제가 농성이라도 하겠다, 때가 되면 뭐라도 하겠다고 했고, 지금도 그런 마음입니다. 쿠팡에서 뭔가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나 짓밟을 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대책위가 있어서 시위를 할 때 많은 분이 함께해 주십니다. 든든하고 좋습니다. 진즉 해야 했는데, 이제라도 시작하니 기쁩니다.

- 이제 정비하고 1인 시위를 하러 나가야 할 시간입니다. 마무리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씀이나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우리가 활동하는 목적은 쿠팡을 무너뜨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쿠팡이 좋은 기업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죠. 무엇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쿠팡의 무리한 노동, 사람을 기계로 대하는 일들을 빨리 막아야 합니다. 지속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죠. 노조는 한 건, 한 건에 대응하고 움직이는 경향이 있는데요. 지속 가능성을 바라봐야 합니다. 결국 이 사태의 원인은 맘몬 사상, 즉 돈에 관한 문제죠. 돈을 좇다 보면 이런 비극을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교회와 시민사회단체가 깨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1인 시위나 피케팅은 처음 해보시는 건가요?

처음입니다. 사실 10년 전에는 그런 활동을 할 만한 일도 없었고요. 제가 2014년 7월에 파송을 받았으니, 그때까지 피켓 시위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생애 처음 하는 일이에요.(웃음) 기자회견이나 국회에 가는 것도 처음이고요.

- 누군가와 싸워보신 적은…?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쿠팡에 대해 분노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요.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그 분노는 사라지고 평안한 마음을 얻었어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으며 순종하기로 했어요. 이 과정에서 저를 치유하는 게 큰 목적이라고 느끼게 되었죠.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결과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신 제가 쓰이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성서의 예언자들이나 수많은 인물을 보면, 그들이 계획한 대로 살기보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게 될 때가 나오는데요. 선생님도 그러실 것 같아요.

맞아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죠. 그래서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 사울이 준 갑옷을 입고 걷는 것처럼(웃음) 선생님이 느끼시는 자유로움이 있으신 것 같아요.

제가 10년 동안 선교를 하면서도 그런 걸 느꼈어요.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잘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내 힘으로 하면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고 한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죠. 방글라데시에 돌아가더라도 그렇게 현지인들과 함께 살며 사역하고 싶습니다.

- 다시 선교지로 가시면 한국에 돌아오시는 거죠?

네, 때가 되면 돌아오겠죠. 앞으로는 매년 한국에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손주들도 보고, 할아버지가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전해주고 싶어요. 한두 달이라도 와서 함께 시간 보내며 돌봐주고 싶어요.

송기훈 목사는 이날 인터뷰를 마친 후, 정금석 씨와 함께 쿠팡 본사에서 진행된 1인 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시위는 최고 기온 33도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진행되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인터뷰 후, 10월 10일 고 정슬기 씨의 산업재해가 인정되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고 정슬기 씨 배우자가 신청한 유족 급여에 대한 승인 통지를 전달했습니다. 고 정슬기 씨 유족은 7월 근로복지공단 남양주지사에 산업재해 신청을 한 바 있습니다. 정금석 선교사는 고인의 산업재해 인정은 근로복지공단이 쿠팡의 로켓배송 시스템이 아들의 과로사를 유발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의미라고 밝혔습니다. 쿠팡이 이제 진정한 사과와 함께 제대로 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했습니다.


진행 송기훈 목사
정리 정민호 기자